〈 80화 〉수확제
그 흡혈귀가 혈검을 완전히 뽑아낸 모습을 보고 내가 가장 먼저 뱉을 말은 뭐였을까?
정답은 이거다.
"변태같아."
각자 다른 두가지 의미에서, 완벽히 드러맞는 변태였다.
몸의 형태가 변했다는 부분과, 그냥 변태같이 생겼다는 부분이.
여러모로 굉장한 모습이었다.
투구와 건틀렛은 터져나가지 못해 몸에 걸쳐있을 뿐이고, 녀석의 작은 몸집에 맞춰져있던 플레이트메일이 터져나가면서 빵빵한 가슴근육이 드러났다.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경련하면서 부풀어오르는 모습은 조금 징그러움마저 느껴진다.
저걸 보고 세찬이 몸을 떠올리면 그정도의 근육은 그냥 건강관리차원에서 조금 운동한거라고 말할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변태같은 모습과는 별개로, 그 터져나올듯한 근육에서 뿜어져나오는 운동에너지는 진짜여서 문제다.
"큭! 빨라!"
녀석이 쳐내듯이 휘두른 혈검이 구렁이처럼 휘둘려져 내게 쏘아진다.
왜 나는 저런 특수능력같은게 없을까!
대단한 흡혈귀라면서도 순수하게 몸으로 때워야한다니.
저런 고유능력이 내게도 있었다면 뭔가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기도 했을텐데!
그런 푸념을 하며 목으로 날아든 혈검을 급하게 앉아 피해냈지만, 머리카락이 서걱하고 베어지고만다. 베어진 머리카락은 또 머리에 쏠린 혈류때문에 제멋대로 회복하며 피를 소모하고 만다.
아악! 왜 난 머리가 긴건데!
내게 비록 릴리스의 능력이 주어졌다지만, 사실상 쓸줄아는 능력이 전무한 상태.
끽해봐야 패밀리어 계약인데, 그것은 흡혈귀한테 제대로 통할리가 없고, 뭣보다 나는 저녀석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저 변태 근육맨이 휘두르는 혈검.
벌크업을 하더니 속도도 늘어나고, 연검보다 훨씬 괴랄한 패턴을 보여주며 물리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공격을 연속적으로 해댄다는 점이었다.
그걸 맞상대하기 위해서 한세찬이 또 뭔가 생소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지금 세찬이가 들고있는 무기도 흡혈귀의 혈검 못지않게 상당히 신기하다면 신기한 무기였다.
못? 창? 그보단 길다랗고 뾰족한 봉에 크로스가드와 손잡이가 달린 모양새인데, 굳이 따지자면 레이피어와 닮았다. 날이 아주 두꺼워진 레이피어.
두놈의 근육돼지들이 칼싸움을 하는걸 보니까 뛰어들 엄두가 안난다.
압도적인 광경, 나는 흡혈귀에게서 빼앗은 연검을 든채로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한세찬이 놓치는 검격을 달려가 연검을 손에 감아서 혈검을 막아낸다.
연검이란걸 도대체 어떻게 휘둘러야 되는지 감도 안오니까 이렇게 방패처럼 사용하는게 맞겠지.
그러나 막아냈는데도 묵직하다.
왼손 전체가 울리는것 같아서 혈류를 미세하게 돌려 손떨림을 잡는다.
공방에는 속도감이 있다.
지금은 한세찬과 내가 키차이가 꽤 나는게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단은 세찬이가 막아내고, 하단이나 흘려내진 공격은 내가 쳐낸다.
혈류를 돌리며 신체능력을 올렸는데도 이게 한계라니.
반격은 생각조차 못하겠다.
"크윽, 좀 빡세네."
"네놈이 도발한거잖냐."
세찬이가 불만섞인 목소리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러게, 나도 저놈이 저런 변신을 할 수 있는지 몰랐다고.
흡혈귀란거 다들 두번째 모습같은게 있는걸까?
에이샤도 그렇고, 이 놈도 그렇고.
나도 나름 흡혈귀인데 막 갑자기 각성한다거나 그럴 수 있는거아냐?
릴리스라도 깨워서 물어봐야해?
그러나 현재 릴리스는 꼼꼼히 봉인된 상태고, 내게 있어서 각성이라는게 릴리스의 봉인해제라면 안하는게 맞다.
릴리스가 깨어난다면 내 인격이든 내 여동생의 인격이든 어째든 사라져버리고 말테니까.
릴리스가 무슨 동충하초도 아니고, 개화하면 본체가 죽어버리는 식이라니.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혈검이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꿔가며 휘어져 사각을 감아드는 맹격이 쏘아진다.
하지만 세찬이가 막아낸 검로에 내가 붙어 보조하여 연검을 감싼 왼손으로 다시 막아내는 방법은 꽤나 유효하게 통하는 것만도 같았다.
의외로 호흡이 맞는것 같달까, 사실 녀석의 움직임을 내가 집중력을 발휘해 따라가는것에 가깝다만 어찌되었든 통하고 있다.
"세찬아,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생각중…!"
그때, 투구 속에서 흡혈귀의 안광이 번뜩였다.
붉은 빛이 마치 나를 꿰뚫어보는 듯해서 소름이 돋아버린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곧장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틀어내 검격을 회피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회피하진 못하고 가슴께가 얕게 베어지고 만다.
윽, 쓰라리네.
"큿…!"
"좋아, 빈틈…!"
내가 질러진 혈검을 몸을 비틀어가면서 가까스로 회피해내자, 세찬이가 그 틈을 찔러 녀석의 복부에 그 두꺼운 검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곧장 나를 뒤로 던지듯이 밀면서 앞의 흡혈귀에게 박아넣은 검을 발로 찬다.
"크읏!"
나는 중심을 잃은채 밀쳐져 흙바닥을 성대하게 굴렀다.
여전히 섬세함이라고는 없는 손길이군.
뭐, 한세찬 답긴 하다만.
몸을 비틀다가 잘못된 것 같은 허리에 혈류를 감아 치유하면서 강화한다.
그렇게 강화된 허리힘으로 바닥에서 온전히 한바퀴를 더 구르기전에 몸을 일으키는데 성공하고 일어났다.
"터져!"
딱!
한세찬이 앞으로 손을 내밀고 뭔가를 외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콰앙!!
은색의 폭발.
폭발한것은 녀석의 몸 속에 박힌 은제 송곳검이다.
신체 내부에서부터 터져버리는 공격이니 위력은 절륜할것이 분명.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안가서 조금 식은땀이 흐른다.
특히나 은가루가 휘날리는 이 폭연은 흡혈귀에겐 더욱 치명적이겠지.
나를 그렇게 거칠게 밀쳐버린것은 녀석 나름대로의 배려일까?
조금더 섬세하게 밀쳐줬으면 좋았을텐데.
"쿼어어!!"
그러나 배에 거대한 구멍이 났음에도 녀석은 제 배에 흐르는 피를 응고시켜 출혈을 막은채 소리를 내질렀다.
에이샤같은 회복능력은 없는건가, 아니면 저 은가루가 회복을 방해하는걸까.
그리고 아까부터 변하고 난 뒤에 제대로된 말을 못하는것같은데, 아마 녀석의 2페이즈에서는 지능이 감소하는 디버프가 걸리는게 아닌지 싶다.
"하아, 제법이야. 꽤나 훌륭한 연계였다."
변태 흡혈귀가 말했다.
뭐야, 말 할줄 아는데 그냥 괴성만 지른거야?
그리고 연계는 무슨, 따지고보면 그냥 자기가 뇌 비우고 칼질하다가 나한테 눈돌아가서 혼자 빈틈을 내준거였다.
음, 그것도 연계라고 보면 연계인가?
어그로탱커와 데미지딜러의 연계?
그렇게 생각해보니 연계가 맞다. 당하는 입장에선 열받는거니까, 꽤나 훌륭했다고 볼 수 있겠다.
"얕잡아봐서 미안하군, 네놈은 훌륭한 전사다."
"흡혈귀따위에게 칭찬받아봤자 전혀 기쁘지 않군."
흡혈귀의 칭찬에 한세찬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또 새로운 송곳검을 쥐어들었다.
흡혈귀에게 칭찬받아도 기쁘지 않다라, 사실 넌 내가 인간이었을 때도 칭찬해주는 보람이 없는 녀석이었다.
워낙에 리액션이 밋밋한 녀석이다. 그래서 내가 세찬이는 놀리는것에 열을 올리는 거고.
타인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는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그게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녀석일수록 그렇다.
"그러니 더이상의 힘겨루기는 그만두도록하지, 사냥꾼. 나는 이제 너를 진심으로 죽이겠다."
뭐, 그럼 여태껏 진심이 아니었다는 얘기인가?
그런 의문이 들자, 곧바로 녀석의 기세가 바뀌었다.
쿵!
흡혈귀가 발로 바닥을 찍자, 바닥이 뒤집히며 순간적으로 지진이 일어나며, 자신의 몸을 붉은 기운으로 감싼다. 그러자 더욱 더 진동이 거대해지는 것이었다.
지진때문에 두발로 서있던 세찬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이, 순간적으로 저릿한 감각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이 거대한 감각의 흐름, 도대체 난 이게 뭣 때문에 느껴지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나, 이 감각이 뜻하는게 무엇인지는 알고있다.
"한세찬! 위험해!"
"제길, 나도 알아!"
대체 뭘 할건진 몰라도, 온몸에서 이렇게 경고음을 보내는건 분명히 무언가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땅울림이란것은 두발을 땅에 붙인 인간으로써는 쉽사리 극복해낼수 없는 것이었다.
발을 대고있는 지면이 사정없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발을 뗄 수가 있겠어?
그래서 나는 이제는 좀 익숙한가 싶을 보법, 4족보행을 시도해 한세찬에게 마치 늑대처럼 질주해갔다.
신고있던 슬리퍼조차 벗겨질 정도로 급박한 달리기였으나, 4발로 뛰어가니 지진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가 있었다.
강화된 신체능력과, 균형감각 때문에 가능한 짓거리.
"흐아악!"
붉은 기운은 어느새 흡혈귀의 전신을 감싸 붉은색 고치처럼 변화했다.
멀리서 봤다면 커다란 루비와도 같이 보일지 모르겠다.
몸 자체를 쏘아낸 내가 고치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혈류까지 감싸며 온힘을 다해 주먹을 갈겼다.
아마도 내가 이정도까지 혈류를 몸에 돌린적은 없었다.
주먹은 공기를 가르다못해 찢어버리며, 내 왼손에 감기고 있다.
"붕권!"
내게 있어서 이것은 최강의 기술이므로, 그에 맞춰서 최강의 기술명을 사용하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른손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한세찬 저놈아가 구멍을 뚫어놨는걸.
녀석이 자주쓰는 손은 왼손이니까 마주 손을 잡으면 오른손이 잡혀 고대로 뚫어버린게 분명하다.
아무튼 붕권이 공기를 찢어버리며 압도적인 권풍을 일으켜 고치를 가격해보지만, 왼손에 감아둔 연검이 박살나고 고막을 찢어버릴듯한 굉음이 있었을 뿐, 전혀 타격이 없어 보인다.
"존나게 튼튼하네…."
여태껏 혈류까지 감아서 주먹질을 하는데 파괴시키지 못했던게 없었기에 나는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이 강도는 대체 뭐란 말이냐.
하지만 다행인건, 고치에게 이동능력이나 공격능력같은것은 없어 보인다는 사실.
게다가 딱히 녀석을 쓰러트려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도망치는것도 승리조건이지.
단지 아빠가 우리를 찾아낼 시간만 버티면 되었다. 대체 저 녀석이 뭐하는 놈인지는 알 바가 아니고.
그러나 고치가 점점 커지며 지진도 함께 커지고 있어서 이제와서는 두발로 서있는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다.
세찬이를 돌아보자, 녀석도 4발로 버티는게 고작인것같다.
저런 상태라면 도망치는건 무리겠지.
나는 세찬이의 앞에 4발로 엎드린채 등을 내밀고 외쳤다.
"타!"
"……진심이냐."
세찬이가 당황한 듯 했지만, 방법이 없다.
두 발로 녀석을 업은채 이 엄청난 지진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벗어나는건 나라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녀석을 집어서 던져버릴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던졌다간 힘조절이 안될게 분명하니까. 밀쳐내기가 벽력장으로 적용되는 지금의 힘은 아직 나도 적응하지 못했다.
"빨리!"
녀석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도, 지진은 강해져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이 지진은 일종의 초광역 cc기라는 감이 계속해서 들었다.
뜬금없이 광역 cc기를 쓰는 이유?
알수 없지만 옛부터 게임에서도 cc기를 걸면 궁극기를 박는게 국룰이었다.
결국 녀석이 조금의 자존심을 굽히고 내 등에 올라탔다.
묵직하구만.
"뭐 이건 또 신선한 지랄이네."
"꽉 잡어! 떨어질수도 있다!"
"뭐, 어디를?"
그러게, 어디를 잡아야해? 잡으라고 말은 했는데 어디 잡아야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 몸집은 녀석에 비하면 조그만 수준이라서, 단지 등에 태웠을 뿐인데도 등이 꽉 찬 느낌이다.
녀석이 나를 껴안는다는것도 이 자세에선 불가능에 가까웠고.
"에잇, 몰라! 시간이 없어!"
감각은 계속해서 더욱 강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건지 알수가 없다.
붉은 고치는 점점 커져가고있고, 지진은 더더욱 커지고 있으니, 일이 터지려거든 당장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파앙!
그리고 갑작스럽게, 고치에서 뭔가가 쏘아졌다.
"학!"
가까스로 튀어올라 회피해 공중에 뜬채로 나를 공격했던 것의 형체를 확인한 나는 경악했다.
그것은 거대한 손.
흘러내릴것 같이 붉은, 마치 도깨비나 악귀의 팔과도 같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거인의 손이 고치에서부터 삐져나와 나를 공격한것이다.
그리고 고치 내부에서 무언가 안광이 비쳤다.
내가 그 시선에 또 한번의 오싹함을 느끼자, 한계까지 부풀어오른 고치가 터져나가며 찢어진다.
두번째 손이 공중에 뜬 나를 향했다.
공중에선 어떻게 회피하지? 생각이 짧았다!
나는 허공에서 손발을 허우적대며 외쳤다.
"우와아악! 회피! 회피!"
"가만히 있어봐!"
내 등에 올라탄 세찬이가 내 허리를 다리로 감싸는게 느껴지며, 머리카락을 붙잡는게 느껴진다.
"악!"
뭐 아무리 내 몸에 잡을데가 없다지만, 머리카락은 아니지 않아?
불쾌하다고.
뭐라고 욕이라도 뱉을까 고민한 사이, 세찬이가 바닥에 뭔가를 쏘아내듯 던졌다.
녀석이 쏘아낸것은 와이어를 묶은 대못, 이전에 에이샤의 저택에서도 한번 사용한 물건이다.
세찬이가 공중에서 와이어를 한껏 당겨내자, 공중에 떠있던 몸이 급속히 가라앉으며 거대한 팔을 회피해냈다.
"대단한데!"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묘기였다.
얼마나 대단해보였냐면 감탄하느라 녀석이 내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있다는걸 순간 잊을 정도로.
세찬이가 나의 허리를 감싼 다리를 강하게 죄면서 말했다.
"다음엔 위로 뛰지 마, 토할것 같다."
"앗."
돌이켜보니 녀석은 자이로드롭이나 바이킹같은 위 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놀이기구를 그다지 잘 타지 못했었다.
조심해야겠는걸.
하여튼 바닥에 다시 4발…아니, 두손과 두발을 여전히 진동중인 땅바닥에 붙이자, 고치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려고 하는 거대한 거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어미…."
붉게 흘러내릴듯한 광택의 피부, 이번엔 결코 몸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조금 깡말라보이는 신체가 오히려 운동부족인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투구쓴 거인이었다.
눈대중으로 살피니 대략 5~6미터는 되어보인다.
그럼에도 머리통 크기는 전혀 바뀌지 않아 언밸런스한 괴랄함을 부추긴다.
"진짜 변태네."
이번엔 진짜로 고치에서 튀어나왔으니까 말그대로 변태가 맞다.
"쿠어어어어!!"
저런 능력을 쓰려면 대체 VP를 얼마나 소모해야하는거냐, 가히 총력전이라고 할만하다.
거인이 마침내 고치에서 그 몸을 전부 꺼냈을때.
"어머니가 느껴진다. 그분께서 날 온전하게 하시리라. 거짓뿐인 육체에서 벗어나,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리라. 그리하여 밤을 더욱 어둡게 할 것이다!"
"뭔……."
날 죽이겠단 말을 참 장황하게도 한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