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수확제
"어머니를 돌려내라."
"뭐?"
당혹감. 그것이 내가 지금 온전히 느끼고있는 감정이었다.
녀석은 내가 온전한 릴리스가 아닌것을 알고 있는듯 한데.
릴리스와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애시당초에, 왜 녀석이 날 죽이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는 상당히 충성심 있어 보이던 모양새였는데.
"너는 누구냐?"
세찬이가 한껏 경계하는 자세로 녀석을 노려본다.
"사냥꾼인가? 죽고싶지 않다면 빠져라. 나는 너에겐 볼일이 없다."
"그럴수는 없지."
"흠, 그녀의 기사인가. 잘 알겠다. 물러설 수 없는 거로군."
야상의 흡혈귀가 제멋대로 상상하며 말한다.
기사라, 세찬이가?
확실히 어떻게보면 기사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위험할때 구해주던것도 세찬이였고, 내가 아플때 싫어하면서도 시중을 들어준것도 그렇다.
말만 안탔지, 기사라고보면 기사네. 아니, 오토바이도 현대식 말이라고 치면 3필이나 있다.
그럼 그건 기사(knight)가 아니라 기사(Driver) 아니냐?
"그렇다면 더이상 모욕하지 않겠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라."
그러자 녀석은 검의 손잡이를 머리 옆으로 끌어올려 칼날을 내민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무슨."
어찌나 빨랐으면 내 시야에서조차 벗어날 정도라는 말인가?
분명히 집중 중이었는데?
곧 서늘한 감각이 다시 느껴진다.
황급히 몸을 돌려서 피해냈지만, 나를 스쳐간 검기인지, 바람의 칼날인지 모를 것은 나무를 통채로 베어내고, 내가 올라탄 나뭇가지조차 조각조각 내버린다.
그러니 나는 떨어질 수밖에.
"으, 으왁!"
콰당!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힌 내가 자세를 잡기도 전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몸을 굴려 피해내려했지만…. 느껴진다. 이건 늦었다.
퍽!
"큭!"
뭔가 둔탁한 충격이 내 복부에 박히며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방금까지 내가 엎드려있던 바닥엔 칼날이 난자된 흔적만 남아버리고 만다.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표현이 이런걸 두고 하는거구나.
2미터정도 떠올랐던 몸이 공중에서 뭔가의 손에 잡혀 끌어내려졌다.
"괜찮냐?"
"어? 어…."
나를 발로차고, 공중에서 잡아채 안아든것은 당연하게도 한세찬이었다.
짐짝 취급을 받는 기분이라서 오묘하달까.
녀석이 바닥을 박차 보이지 않게 된 적과 거리를 벌리고,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의 자국이 추격하듯 자꾸만 주변에 새겨지고, 그것을 감에 의존하여 회피하는 한세찬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의 회피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노련해짐에따라서 여유가 생겼으니, 나는 내 자세를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공주님안기잖아.
문득, 드라마나 만화 같은곳에서 어째서 여주인공들이 그렇게 공주님 안기를 부끄러워 하는지, 또는 로망으로 생각하는지 알 것도 같다.
남자의 얼굴을 시선 밑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남자의 몸 그 자체에 느껴지는 탄탄함이라던가 체취, 그리고 꼭 침상에 들어가 있는듯이 몸에 꼭 맞는 기묘한 안정감이라고 할까, 그런게 느껴지는 자세였다.
실제로 녀석의 몸으로 시야 대부분이 가려지는 바람에 저 살벌한 검기로 죄 다져지는 숲의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으니 더욱 그렇기도 하고.
게다가 뭔가 이녀석이라면 어떻게든 할 것 같다는 근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해.
사냥꾼으로썬 유명한 애니까, 아마 이런 상황에서의 대처나 그런것도 나보단 훨씬 능숙하겠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정확도가 낮아지고 있다."
"그, 그래?"
잠깐 딴 생각을 해서 순간 말이 더듬어지고 만다.
뭐, 주변에 전혀 신경쓰지않고 있어서 몰랐네.
내게서 느껴지는 거라곤 그저 이 녀석의 몸 뿐이었으니까….
"시, 시발…."
나는 낮게 읊조렸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섞어낸 한숨같은 욕지기였다.
뭐지, 가슴이 이상해.
목숨의 위협때문에 심장이 맛이 간건가?
정신차려, 김석주. 상황이 이상하다고 너까지 이상해지지 말라고, 제기랄.
그냥 안는 자세중에 하나일 뿐이다!
남자끼리도 쪽팔리면 가슴정도는 뛰니까, 내가 이상한게 아냐.
"어, 언제까지 도망쳐야해?"
"적어도 결계가 파괴될때까지는 도망쳐야지."
"그게 언제인데?"
"결계를 친 술사에 따라, 상황에따라, 그리고 운에 따라 달라서…."
말을 멈춘 세찬이가 몸을 낮춰 검격을 회피해낸다.
검격은 녀석의 머리위를 스쳐지나가 정면의 나무를 크게 베어냈다.
우리를 향해 쓰러지는 나무를 스텝으로 가볍게회 피하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 세찬이가 말을 이었다.
"…다르지. 정확한 시간을 알수 없다. 확실한건 금방 올것 같지는 않아."
"뭐?"
"시벌, 호흡 흐트러지니까 더이상 말 걸지마."
"아, 알았어."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내가 가벼워도 40Kg대의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걸 계속해서 들고 뛸수도 없는 노릇이고, 녀석의 검기는 거의 마구잡이로 쏘아지는지라,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해야만이 반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첫 검격을 회피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그것 역시 여자의 감이란 말인가?
아니, 이건 그냥 감이겠지. '여자의'같은거 붙지 않은.
따진다고 치면 흡혈귀의 감인가.
녀석의 품에 안겨있다보니, 녀석의 호흡이 거칠어지는것이 점차 느껴진다.
이러다가는 정말 쓰러질것 같기도 하고, 검격도 조금 잦아드는 감이 있어서 녀석의 가슴을 노크하듯 두드리고 말한다.
"내려줘, 물리저해는 해제했어."
"후욱, 후욱…. 후우…. 그래."
안고 달려도 내가 더 잘 뛰겠지, 인간인 녀석 보다야.
속도를 조금 줄인 녀석이 내 몸을 바닥으로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인간치고는 상당히 빠르구나. 기척을 흐트리는것도 수준급이었어."
"뭣."
어느새 우리 앞에 도달한 그 흡혈귀가 대검을 늘어트린채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하단자세에서 곧바로 올려치는 대검, 그동안 보여준 검격이 단순히 쏘아낼 뿐인 검격이었다는듯.
비교도 안될 저릿함이 느껴지고만다.
이전까지의 검기가 단순히 해변가에 치는 파도였다면, 이것은 거대한 쓰나미.
어느쪽이든 해변가의 모래성에겐 위협적이겠지.
"제가 어머니를 그 감옥에서 해방시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해변가의 모래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튼튼한 돌로 지어진 성이었지.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보니 알것도 같고.
나는 내 몸에서 한세찬을 가볍게 밀어내며 검격을 '잡아냈다.'
"뭐야?"
내가 검격을 잡아낸것을 보고 놀란듯 눈을 부릅뜨는 한세찬.
자세를 잡고 똑바로 선 나는 내가 보고 있는것을 설명했다.
"저건 그냥 스킨이야. 이녀석이 들고있는 검은 대검이 아니라 연검이고."
검기나, 바람의 칼날따위의 마법같은게 아니라. 단지 대검처럼 보이도록 처리한 연검을 휘둘러댔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협적이기는 했지. 눈치채지 못했다면 굉장히 힘들었을거고.
보이지 않게 된것도 비슷한 원리겠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 따위가 아니라.
눈을 현혹하는 기만술이었다.
혈류를 눈에다 돌리며 녀석의 '진짜 모습'을 확인한다.
야전상의처럼 보이던 옷은 사실은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고, 후드는 투구였다.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그림자로 가려져 후드 내부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던 녀석의 후드가 사실은 얼굴을 가리는 투구였기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대검으로 보이던 것은 사실 채찍처럼 길다란 연검이었으며, 녀석의 몸집조차 목소리에 걸맞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였다. 이라보다는 조금 크지만, 그정도?
겉보기보다 앳된 목소리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이런 것이었나.
"크윽, 내 모습을 보지 마! 이 더러운 잡종아!"
"말버릇이 나쁜꼬마네…."
잡종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뭐, 이것저것 섞인것은 맞지만….
약한 분노를 삼키며 손에 쥔 연검을 줄을 매듯 손에 감싸 당겨버리자 압도적인 물리력에 의해 녀석이 내게 날듯이 끌려오고 만다.
캉!
"큭!"
망치로 철을 두드리는 소리, 이 경우 망치는 내 주먹이었고 철은 녀석의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감각에 의지해 회피하던 아까랑은 다르게, 공격범위를 보고 회피한다.
감각과 시각이 동시에 작동하며 보내는 경고는 단지 감각으로 느끼고 회피할때와는 차원이 다른 정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릴리스 네 능력말야. 성능 너무 좋잖아!
모든것이 느껴진다.
모든 공격이 보인다.
보이는데 반응하지 못하는 일도 없다.
어느새 내 몸은 내가 인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공격을 흘려내고 회피하고, 때로 반격하며 수를 섞었다.
캉, 캉, 카앙!
녀석의 플레이트 메일이 점차 우그러지고, 삐걱대며 움직임을 방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세를 점하는것 같지가않다. 어째서?
"잡종. 넌 어머니의 능력을 전혀 모르고 있군."
"잡종이라고 부르지 마, 땅꼬마."
"이…."
땅꼬마라고 도발한것이 효과가 있는것일까?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빨갛다고 느껴진다.
분노때문인가? 공격에 의외성이 생긴다.
아니, 뭔가 달라졌다.
녀석의 플레이트 메일이 도로 펴지고 있었다. 안쪽에서 뭔가가 팽창하는 것만 같았다.
"윽!"
그러자 녀석의 속도가 달라졌다.
마치 순간이동하는것마냥 쏘아진 손아귀를 황급히 회피하지만, 긴 머리카락이 방해다.
머리카락이 한움큼 잡혀 끊어진다.
"아얏! 이, 이게!"
머리를 잡다니, 이 비겁한 녀석! 계집애마냥 머리끄댕이를 잡을줄이야, 내가 이래서 긴 머리가 싫다니까!
머리에 피가 몰려서 자동으로 회복되고 만다. 아, 피가 낭비되잖아!
"우오오오!!"
녀석의 목소리가 투구 속에서 울린다.
완전히 2페이즈.
압도하지는 못해도 반응은 했던 1페이즈랑 다르게 정말 엄청난 속도다.
나는 황급히 뒷걸음을 치며 거리를 벌렸다.
"쿠오오오오!!!"
녀석이 갑자기 포효했다.
목소리가 점차 두꺼워지며, 키가 커지고, 플레이트 메일이 떨어져나가며 맨살이 드러났다.
플레이트메일이 갑자기 부풀어오른 이유. 그것은 갑작스런 벌크업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녀석과 세찬이를 번갈아보았다.
"야, 너보다 몸 좋다…."
"……뭐 십새야."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던 세찬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다시 흡혈귀로 눈을 돌리니 보이는 광경은 건틀렛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나와 검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었다.
맙소사, 저건 뭐지?
설마, 혈검?
그 모습을 보자, 20살을 넘기며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중2의 소울이 불타오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아아, 언제나 너는 내 곁에 있었구나.
"와! 저건 솔직히 멋있는것 같은데? 나도 쓰고싶다!"
"……."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혈검이라니, 그거 쓸 수 있으면 되게 편할것 같잖아.
식칼 대신으로 쓰면 설거지도 안남을거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