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수확제
세찬이가 내밀어준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도 여전히 상황파악이 좀 늦었다.
이게 연기라고…?
세찬이한테 졸렸던 목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화가나서 녀석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진짜 콜록, 뒤져. 그냥 뒤져버려."
"그런 뻔한 대사에 속다니, 순수하다고 해야할지 멍청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군."
"개같은 새끼,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아?"
"어쩔 수 없잖아. 아이기스 말고는 연락을 보낼 방법이 없었어."
마음같아선 어디 한군데 부러트려놓고 싶다.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려고 손을 꽉 쥐자, 갑자기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아야!'
"일단 지혈 부터 하지."
"아."
아까 세찬이가 구멍낸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지름 1센티는 되는 대못으로 관통했는데 주먹을 쥐었으니 아플수밖에.
녀석이 품속에서 혈액 응고제를 꺼내 손바닥에 주사한뒤에 붕대를 댄다.
"아, 아윽. 드럽게 아프네…."
"미안했다."
"당연히 미안해야지."
나는 따끔한 고통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세찬이가 내손에 붕대를 감아주는걸 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해명을 해봐. 뭐 때문에 그딴 짓을 한건데? 내가 널 때리면 안될 이유를 대보라고."
"……여기는 이면차원결계야."
"뭐?"
이면차원결계, 이전에 실버와 유디라하고 수련을 할때도 그런 결계 내부에서 진행했었다.
그런데 이 숲도 그런 결계 내부라고?
언제부터?
"증거는 있었지. 일단 스승님과 사제에게 연락이 닿지 않던것, 휴대전화의 통신이 무력화된것. 결정적으로 네가 그린 북두칠성."
"북두칠성이 왜."
세찬이가 내손의 붕대를 세게 묶는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나는 여전히 녀석한테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직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까 그거 연기라고 해도 진짜 무서웠거든.
"모양이 반전되어 있었잖아. 전혀 눈치채지 못했냐?"
"뭐?"
"현실과 다른 형태의 별자리. 여기가 이세계가 아니라면 이면차원결계지."
꽤나 날카로운 추리였다.
"그래서 아이기스를 발동시켜야만 했어. 이면차원 결계 너머로 연락할 수 있는 도구는 아이기스 뿐이었으니까. 충분한 설명이 되었냐?"
"이게 그렇게 대단해?"
"극도로 정교하고 강력한 도구야. 이면차원결계는 사실상 이차원, 그 너머로 정신파를 보낼 수 있다는건 엄청난거지."
"허어."
어린이용 방범부저가 어쩌구 하더니, 방범부저 치고는 좀 성능이 좋네.
"그래서 그 되도않는 연극을 한거냐?"
"되도 않다니, 충분히 되던데."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짜증나.
"… 아무튼! 미리 말해줬어도 됐잖아!"
"미리 말해줬으면 네가 무서워 했겠냐? 어쩔 수 없는 거였어."
"그럼 이 손바닥은! 굳이 이렇게까진 안해도 됐잖아! 충분히 무서웠는데!!"
"그건, 네 움직임을 구속하기 위해서. 나도 나름 생각해서 찔렀어. 다른데 찌를데가 있어야 말이지."
"……한마디도 안지려고."
진짜 밉상이라니까.
이러니 여친이 없지, 뭐 죄다 따박따박 이유를 대고 있다.
아마 고등학생때 내가 방해하지 않았더래도 그때 그 여자랑 이어지진 않았을것 같다. 이어졌어도 금방 헤어졌을듯.
"씁, 울어서 배고파졌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대고서 붕대로 묶인 팔에 흘러내린 피를 핥는다.
피를 좀 흘려서 그런지 흡혈 충동도 느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흡혈충동이 좋게 작용할리가 없고, 이딴 일로 VP가 손실되는것도 그다지 좋을리도 없으니까.
마치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듯이, 내게 튄 핏물을 핥았다.
아까워.
전투중에 쏟은 피도아니고 그냥 세찬이 새끼가 연기하다가 찌른걸로 흐르는 피라니.
말 그대로 피 낭비다.
"아주 흡혈귀 다 됐군."
녀석이 고개를 흔들며 손에 흥건히 묻어있는 나의 피를 닦아내려는 세찬.
나는 그 손을 붙잡아 저지했다.
"잠깐, 닦지마."
"응?"
그게 다 내 피잖아. 안그래?
감히 흡혈귀에게 피를 흘리게 해놓고 그대로 닦아서 버린다?
저렇게 낭비한 피 몇방울에 유디라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의 피 한방울로, 굶주린 유디라를 도우세요.
전국 공익흡혈귀재단에서 나올법한 멘트를 생각하며 다른 손으로 녀석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이건 내피야. 어딜 닦아내?"
"야, 잠깐만…!"
녀석이 당황하든 말든, 내 손의 붕대를 감으며 시뻘겋게 물들어버린 녀석의 손에 혓바닥을 갖다댄다.
역시 내 피는 맛있었다.
그래도 내 피라서 그런지 갈증이 아주 많이 해소되는건 아니었다.
동일한 패턴의 혈액을 마시는 거다.
그런건 침 모아서 삼키는 수준의 해소밖에 안돼.
하지만 어째든 갈증은 나아진다.
"시, 시발. 잠깐. 야, 간지러워!"
자꾸 녀석이 손을 빼려고 해서 바닥에 눕혀버리고 배 위에 올라타서 손을 잡아뺐다.
여전히 물리저해를 달고 있지만 이제는 그럼에도 내가 더 강했다.
손이 커서 그런가, 핥아야하는 면적도 넓어서 좀 귀찮네.
녀석이 자꾸 주먹을 쥐면서 안 핥아지려고 발악을 하려 해서 시간이 더 걸린다.
발버둥만 안 쳤어도 진작에 다 핥았다.
"야, 한세찬. 손가락 펴라."
"미쳤어? 이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어쩌려고 그래?"
"누가 와, 니가 이면차원 결계라며. 너랑 나밖에 없는데?"
"둘밖에 없으면 끝이냐, 이 징그러운 새끼야!"
"징그럽다니, 흡혈귀로써 당연한 권리 행사다. 싫었으면 내 몸에서 피 흘리게 하지 말았어야지."
녀석의 기겁하는 표정이 솔직히 재밌었다.
새빨개진 얼굴이랑 저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며 방황하는 다른 손도 그렇고, 왜지. 이거 왠지 좀 가슴이 웅장해지는데….
뭔가 내가 잡아먹는 느낌이 들어서 요상한 기분이다.
남이 보면 양이 늑대를 잡아먹는 꼴이겠지.
그래도 이건 녀석이 자초한 일이라서 봐줄수가 없다.
내 VP. 안그래도 여기저기 다 뿌리고 다녔다. 나중에 때 되면 와인트리 피라도 마셔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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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녀석이 침범벅이 된 제 왼손을 보고 헛구역질을 하며 옷에 문질러댄다.
나는 바닥에 눕기는 싫어서 적당한 나무 위에 올라가 편한 자세로 누워 팔을 늘어트린채 중얼거렸다.
"좋았으면서."
솔직히 너 조금 기뻐보였는데.
부끄러운것 같기도 하고, 뭐 상당히 소녀틱한 반응이었다.
조금 귀여웠다고 할까.
큭, 내가 미쳤나. 저걸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좋기는 시발이. 징그럽기만 했다."
나는 멀쩡한 왼손을 V자로 만들어 턱에 가져다 대며 말한다.
"징그럽다니? 이거봐, 솔직히 귀엽잖아. 너도 처음 봤을때 많이 당황 하고 그랬잖아."
"개같은 소리 마."
"지금 개같은 소리랬냐? 사과해라. 이거 사실 내 여동생 몸인데."
"또 지랄을 하는군."
녀석이 한숨을 쉬면서 나무에 기대 앉았다.
그러고보니 그걸 딱히 얘기해주지 않았었나?
나는 할 이야기도 없고, 그래서 내 꿈과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내 머릿속에 갇힌 여동생의 존재까지 말이다.
어째서 내가 릴리스가 되어야 했는지도.
그런 이야기를 마쳤을때 세찬이는 굉장히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최소한 내가 왜 이 꼴이 된 것인지는 설명이 되니까.
"그러니까, 원래는 릴리스가 너의 여동생한테 전생했어야 했는데, 쌍둥이 여동생은 이미 뱃속에서 너에게 융합된 상태였고. 너는 그걸 잊어버린채로 살다가 이제와서 우리가 죽인 릴리스가 불완전하게 전생해버렸다는 이야기냐?"
"좋은 요약이야."
나는 박수를 쳐주려다가 오른손의 붕대를 바라보고 관뒀다.
"너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는건 신기한 일이군."
"그렇지. 배니싱 트윈이라니 말이야."
음, 그러고보니 나 여동생의 몸으로 뭐한거지.
그래도 뭐 엄한 짓 한것도 아니고. 그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응.
보통의 배니싱트윈은 나처럼 자아가 남을수가 없었다.
이건 정상적인 배니싱 트윈이 아니라 마력식을 통한 융합으로 이뤄진 현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죽인건 역시 너의 어머니란 말인가?"
"아마 그렇겠지? 릴리스에게 인격이 먹힌 상태였대."
"그런거냐? 넌 어떻게 인격이 먹히지 않았는데?"
"여동생 덕이겠지."
나는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제길, 빌어먹을 스승. 여기서 나가면 나도 따져봐야겠는데."
"나도 복잡한 심경이다. 어찌 되련지."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내려 세찬이랑 눈을 맞댔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녀석의 얼굴에 들러붙는다.
입에 들어간건지 녀석은 눈쌀을 찌푸리며 바람을 뱉어냈다.
"퉷, 뭐야?"
"야. 내 머리에 침 묻잖아. 더럽게."
"그게 더러우면 이건 뭐냐."
녀석이 왼손을 들었다.
몇십분전만해도 내 침으로 범벅이 되어있던 손이다.
"뭐. 그건 이거랑 다르지. 넌 미소녀가 아니잖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녀석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며 자리를 옮기자 나는 큭큭 웃으며 하려던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귀신이란게 빙의도 하고 그래…?"
"그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
"그럼 진짜로 네가 빙의같은거에 당할 수도 있는거야?"
"당할리가 없잖아. 그 릴리스의 정신간섭에도 버틸만한 정신방호라고. 잡귀따위가 어떻게 들어오겠냐?"
녀석이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한다.
"…… 그건 그러네."
내 판단력이 상당히 흐려진 모양이다.
그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다신 그딴 연기 하지마."
"뭐, 두번은 안해. 이제 통하지도 않을거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 끝나면 한대정도는 때리게 해주겠지?"
"그건 좀 봐주면 안되겠냐?"
우리는 서로 킥킥댔다.
그렇게 아빠가 우리를 찾아내시기를 제자리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응?"
날카로운 느낌.
나는 곧바로 몸을 들어 뒤집는다.
스산한 바람이 내 눈앞을 스친다.
"뭐야? 이건?"
말끔하게 절단된 나뭇가지. 내가 올라가도 멀쩡하던 두꺼운 가지가 무슨 면도칼로 자른듯 매끈한 단면을 뽐내며 툭 떨어진다.
오싹해진다. 내가 반응이 늦었으면 잘린건 나뭇가지 뿐이 아니었겠지.
"습격이다. 결계를 친 녀석과 한패인가?"
세찬이가 어느새 손에 못을 든 채로 자세를 잡았다.
너무 늦었어!
처음 노린게 내가 아니라 세찬이였다면?
상상하기 쉽지 않다.
녀석 역시 상당히 당황한 듯 보였다.
"대체 이게 뭐야?"
"모르겠다. 이런 능력사용이라면 가주급이 분명한데…."
나는 그 바람의 칼날이 쏘아진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숨을 삼켰다.
야상의 커다란 후드를 눌러쓰고 대검을 한손에 질질대며 끌고오는 모습.
꿈에서 본 녀석이다.
그 녀석이 내게 대검을 겨누며 꿈에서 들었던 그 앳된 목소리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어머니를…. 돌려내라."
"뭐?"
이 새끼는 또 뭐야.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녀석은 또 참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