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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수확제 (77/101)



〈 77화 〉수확제

내가 팔을 조물거리는걸 본 세찬이가 물었다.


"왜 그래? 팔에 문제있어?"
"아, 아니. 괜찮아."


난 그냥 근육이라도 붙었나 해서 만져본거니까.
문제라고 할만한건 지나치게 말랑하다는 것이겠지.
살쪘나?
아니, 몸무게는 여전히 40대였는데.
그리고 흡혈귀는  안찐다고 했잖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잡념을 그즈음으로 끊어내고, 자세를 다잡는다.
흡혈귀 하나를 밀어냈지만, 아직 더 많은 수가 남아있었다.
몸을 낮추고 사족보행을 하듯이 달려오는 흡혈귀, 하지만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그녀석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느꼈다.

교회에서 봤던 그 도마뱀마냥 변이한 타락귀를 상대할때도 조금 느껴지긴 했는데, 이거 어쩌면 그때 녀석이 묘하게 속도가 느렸던게 아니라 내가 너무 빨랐던거 아닐까?

어쩌면 지원요청조차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첫 사냥이 에이샤같은 괴물딱지였던  때문인지, 그리고 첫 외출에서 그렇게 엄한 일을 겪은 탓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새에 내 능력과 한계를 과하게 낮게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 있다.

내 발치까지 다가온 흡혈귀의 턱을 그대로 차올린다.
유연한 몸으로 행한 발차기는 거의 다리가 1자로 올라갈정도다.
전부터 유연한줄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정도의 유연함은 상정외다.
순간 당황스러운 수준.
어릴적에 태권도장에선 다리찢기 하다가 혼절할뻔 했는데.
내 생에 이렇게 고관절이  돌아갔던적이 있었나…?

녀석의 턱이 기형적으로 꺾여 올라가며 몸이 수직으로 뜨자, 내 정면에 위치하게된  녀석을 다리를 내리며 한걸음을 다가감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밀쳐버린다.

파각!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녀석의 몸뚱이가 물가에 돌을 던진것과 같은 파형이 퍼져나가며 총알과도 같이 날아가버린다.
날아간 녀석의 몸뚱이가 뒤따르던 흡혈귀에게 부딫혀 터져버린다.

나는 이 기술을 벽력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냥 손바닥으로 밀치는 기술이지만, 그래도 손바닥밀치기라고 부르기에는 멋이 안살잖아.


"벽력장!"


주먹질을 해도 되겠지만 일부러 손바닥으로 가격한다.
주먹질을 하면 피가 묻을 것 같으니까.
일부러 혈류도 돌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리력은 충분했다.
흡혈귀의 내부를 헤집고 밀쳐내 직선상의 적과 부딫혀 접근을 저지한다.


그리고 내 뒤로 달려드는 흡혈귀는 세찬이가 상대한다.
녀석이 한 흡혈귀의 머리통을 바닥에 말뚝과 함께 박아버린 뒤에 물었다.

"벽력장은 또 뭐야?"
"철권 기술인데."


나랑 철권도 했을텐데.
기억이 안나나?

"그, 폴이라는 애가 쓰던거."
"그딴게 궁금한게 아니라."


내 앞에서 휘둘러지는 손톱을 고개를 살짝 뒤로해 피해내고 옆구리에 벽력장을 꽂는다.
그걸 맞은 흡혈귀는 허수아비처럼 몸이 꺾여서 또 날아간다.
진짜로 무슨 게임하는것 같네 이거.


"그딴 적당한 공격에 이름같은거 붙이지 말라고."
"내 마음이지, 뭐."

다시 흡혈귀에게 벽력장을 꽂는다.
달려든다, 보고 피한다, 벽력장으로 밀어낸다. 이것의 반복.
우리를 포위한 흡혈귀들은 추풍낙엽처럼 터져나가고 있고, 세찬이는 피따위 묻는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사방 팔방에다가 핏물을 뿌려대며 학살을 한다.

팔을 뻗으며 날아드는 흡혈귀의 품으로 걸음을 내딛어 얼굴을 붙잡고 조금 멀리 던져버린다.
아까까지 내가 앉았던 바위와 녀석의 머리가 만나자, 퍼석하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가 으깨졌다.

공세를 막아내는것이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긴장감이 없는 수준이랄까, 이쪽은 상당한 힘을 아직 드러내지도 않은 상태. 그것도 옷에 피 튈까봐 손속에 사정을 둔 상태다.
귀신이 아닌걸 알고나니 순식간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긴장감따위도 없다.


회피, 공격. 그것만으로 무슨 즉사치트라도 쓴것마냥 전부 터져나가는데 어떻게 긴장감을 느끼겠나?
마치 재미없는 게임을 하듯이 무성의하게 휙 휙 날려 보낸다.
그렇게 한동안 뇌를 비우고 잡히는대로 부수고 때리면서 공세를 막아내니 숲은 다시 고요에 휩싸였다.


"이상한데, 지성이 있는 것들 치고는 공격패턴이 너무 뻔하고 직선적이야."
"그래?"


세찬이가 우리들이 쓰러트린 흡혈귀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게다가 숫자도 이상하고. 이건 마치…."

확실히 숫자가 이상하긴 하군.
처음엔 열넷, 열다섯 정도였는데. 대체 이 많은 놈들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세기도 귀찮아질 정도다.
그때 세찬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길, 이제 몇분이 지났지?"
"잘 모르겠는데…?"

시간관념 없이 계속 적을 쓰러트리기만 했으니까.
대체 몇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휴대폰같은걸 챙겨오지도 않았고.
세찬이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스승님이나 사제에게서 답신도 오지 않는군."
"그러네? 무슨 일이지?"


뭔가 바쁜 일이 있는걸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지원요청을 씹는데?
뭐, 결과적으론 지원이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불렀으면 얼굴은 비춰줘야하는거 아니야.

미간을 찌푸린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해보며 추리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최악이래봐야 흡혈귀가 병원을 습격한 정도 아닐까?
오히려 그건 아빠가 있다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같은데.
그래보여도 아빠는  능력의 주인인 릴리스를 처치한 인물이잖아.


이런 생각을 끊게 만든 것은 한세찬이었다.


"야, 김석주."
"응?왜?"

둘만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주는군.
이녀석한테 이름으로 불려진게 얼마만이지?
뭔가 오랜만인듯 한데,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도 구태여 이름을 부른적은 없고. 아. 단 둘이 다니며 이름을 부를 일도 없기는 하네.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텐션이 높아지는것 같았다.


"너 별자리 볼줄 아냐?"
"별자리? 북두칠성 정도는 알아. 근데 보이는 별이 너무 많아서 북극성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세찬이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바라보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 뒤에 앉은채 나의 턱을 붙잡아 시선을 조정한다.
그리고 하늘의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북극성이야."
"흐익, 크흠. 그렇군."

뒤통수에서 뿜어지는 숨결은 내 생각보다 간지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으윽, 왜 세찬이가 과민반응 했는지 알겠네, 느낌이 굉장히 요상해.
이러면 화낼만도 하겠다.

잠깐 귓가를 비벼서 간지러움을 털어내고선 세찬이가 잠시 가리켰던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시선에 닿는 별들중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북극성.
확실히, 정말로 크게 반짝거리고 제일 예쁘다.
그리고 비슷한 정도로 반짝이는 별이  주변에 있다.
내가 비록 천문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으나 북두칠성 생긴것 정도는 상식이지않나.
가장 밝게 빛나는 7개의 별을 잇기만하면 국자모양의 별자리가 완성된다.
하늘을 도화지삼아 손가락으로 7개의 별을 이어보고는 내 뒤의 세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이걸 왜 하는거야? 우리  잃었어?"
"비슷해."


녀석이 머리를 긁다가 바닥에 꽤 두꺼운 대못을 내려놓고는 점을 하나 찍는다.

"하늘의 북두칠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봐. 이게 북극성 이라고 하면?"
"아니, 볼 줄 안다니깐 그러네. 그렇게 못믿냐?"
"뭐, 확실한 편이 좋으니까."

그건 그렇네.
뭐, 점 몇개  찍는건 어렵지도 않으니까. 나는 세찬이 쭈그려 앉아서 녀석이 내려놓은 대못을 분필처럼 쥐었다.
특수 처리된 은이라서 그런지 조금 따끔거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고, 하늘을 보면서 북두칠성을 베껴 그렸다.

"흐음."
"맞지?"
"그래, 그런것도 같네."
"그치?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라니까."
"흠. 과연."

녀석이  미덥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어이없네.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그린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못을 내려놓았다.
세찬이가 말없이 못을 가져가 손에서 감춘다.

뭐, 북두칠성 하나밖에 볼  모르는게 자랑이 아니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일단은, 저쪽이다."

세찬이가 대충 손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좀 적당히 방향을 정하는 감이 있는것 같은데.
뭐, 얘가 저기라면 저긴거겠지.
나는 앞서가는 세찬이를 뒤따라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인간인 얘보단 흡혈귀인 내가 더 감각이 좋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밤의 숲길을 걷던 때였다.
어느순간 세찬이가 멈춰선다.

"도착한거야? 여긴 오히려  깊은 곳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 병원은 보이지도 않는다. 절대로 도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왠지 세찬이가 대답이없다.
조금 불안해지는데….

"세찬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세찬이가 돌연 웃음을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
"한세찬, 갑자기 왜그래?"
"너는 아직 내가 한세찬으로 보이나?"
"……."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미묘하게 억양이 달랐다.
머리에 몰렸던 핏기가 가시고 식은땀이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게 느껴졌다.
지금  앞에 있는게 세찬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설마, 모습은 한세찬이지만 다른 존재…?

 


"귀, 귀신…!"


나는 까무러칠  했다.
한세찬 이새끼, 기어코 믿지 않더니 빙의당해버린거야!
이렇게 숲속 깊은곳으로 끌고온것은 날 유인하려고…?
어쩌지?


죽…일수 있을리가 없다.
 몸은 여전히 한세찬의 것이니까.
여기서 내가 녀석을 공격한다면, 한세찬은 무조건 죽을거다.

한세찬이 내게 도약해 목을 쥐고 근처 나무에 받아올린다.
 가벼운 몸은 그대로 녀석의 완력에 의해 들어올려져 나무에 등을 처박고 말았다.


"크윽, 왜, 왜이래! 정신차려!"

나는 녀석의 팔을 내리쳐서 몸을 놓게 하려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걸 내리쳐버리면 녀석의 팔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한 일.
만약 그렇게되면?
흡혈귀가 그렇게 많이 있는 숲속에서 팔 병신이 된채로 돌아다니게 되는것이다.
내가 습격을 전부 막아낸다고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 혼자서 모든 습격을 방어하고, 병원까지 가는길을 찾을 수 있을까?
팔다리를 부수고 녀석을 업고 뛰어다녀야 하나?

게다가 그런다고 귀신들린 녀석이 귀신이 뿅 하고 튀어나온다면 좋은 일이겠지, 최악의 경우, 팔다리를 다 부숴놔도 녀석의 정신이 되돌아 오리란 보장이 없잖아.
기절을 시켜야 하나?
그치만 어떻게?
나는 사람을 기절시키는 방법따위는 모른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이녀석은 이제 내 거니까."


그런 고민을 하던순간, 세찬이의 은못이 손에 박혀버린다.


"끄으윽…!"


아파!
아픔때문에 머리가 갑자기 멍해져버린다. 어쩐지 몸도 움직일수가 없다. 마치 팔이 어딘가에 묶여있는 듯 한 기분이다.
이게 대체?


나는 눈물이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돼. 귀신은 그런 틈새를 파고든다는 얘기를 어디서 본것 같다.

"내게 더이상 다가오지 마!"

나는 사납게 외치며 녀석을 발로 찼다.
최대한 약하게 밀어냈건만, 녀석은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구른다.
일단은 도망쳐야해.

"도망칠 생각 마. 네가 도망치면…."


세찬이가 자신의 목에 못을 가져다대며 협박했다.

"이녀석은 죽는다."
"뭐!"

나는 도망치려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다.
저벅 저벅 걸어온 세찬이가 다시 내 목을 잡아올렸다.
살짝 숨이 막혀오는데, 저항같은걸 하면서 잘못하면 세찬이가 죽어버릴 것 같아서 저항을 할  없었다.


그치만 신체가 반사적으로 녀석의 손을 계속해서 붙잡으려고 하는 턱에 큰일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악력조절이라도 잘못하면 저 망할 귀신놈한테 세찬이가 죽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죽일지도 모른다.


"윽, 끄윽, 신의, 사슬로써…끅, 저를, 구속하여….주소서…!"

힘겹게 주문을 이었다.
다행히 제대로 된 영창으로 받아들인것인지 목의 초커로부터 탈력감이 퍼져나갔다.
물리저해가 잘 작동되는걸 느끼면서 녀석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제 최소한 실수로 내가 녀석을 죽이지는 않을거야.
어쩌면 녀석이 날 죽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손으로 세찬이를 죽이는것보단 낫겠지.

"왜 그래, 정신차려, 제발…."
"흐하하하하하하!!"
"크윽!"

녀석이 나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웃었다.
 몸에 올라타 두손으로 내 목을 조르며 웃어제끼는 녀석의 얼굴은 솔직히 무서웠다.
이런 구도의 세찬이를 본적이 있던가?

아니,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무서웠다. 녀석이  몸위에서 목을 조르고 있다는 상황이, 너무 강해진 내가 조금만 저항하더라도 녀석이 죽어버릴거라는 사실이.

내가 어쩔 줄 모른채 눈물만 흘리고 있을때, 갑자기 목에  손의 힘이 풀렸다.

"카학, 컥, 커흑!"
"충분히 무서웠냐?"

녀석이 내  위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녀석이 내미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운채로 기침만 해대고 있었고.

"흐윽, 케훅, 뭐?"

내민 손에서 시선을 치우고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자, 어느새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날 놀리는 듯한 미소다.

"그렇게 귀신이 무서웠느냐고 물었어."
"켈록, 무슨 소리야? 너 아까 그건?"
"물론 연기였지. 너에게 목숨의 위협이 필요했으니까."
"모, 목숨의 위협…?"
"아이기스를 발동시켰어. 이젠 스승님한테 연락이 갔을거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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