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수확제
내가 귀신을 외치며 와인트리가 들어간 캡슐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머리를 부여잡고 엎드리자, 세찬이가 다가와서 옆구리를 발로 콕 찔렀다.
간지러움에 자동으로 옆구리가 꺾인다.
제엔장.
"흐익."
"갑자기 뭐하냐."
"귀, 귀신이…. 넌 못들었어?"
"뭘 못들어?"
"아니 방금 '나는 여기 있어요….'하고….!"
나는 횡설수설 튀어나가는 설명을 다잡으며 열심히 말을 뱉었다.
내가 들었던 이상한 소리, 약간 메아리같기도하고, 희미한 환청 같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건, 결코 내 망상은 아닌것 같았다는 거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드, 들었다니까아! 진짜 들었다고오! 막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그랬다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만약 데려갔다간 귀신에 씌이고 말거다!
나는 용수철처럼 뛰어다니면서 세찬이한테 달라붙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놔."
"알겠지! 너도 들었구나!"
"못 들었어. 내려와."
나는 어느새 녀석의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매미, 그러고보니 세찬이가 존나 싫어하는 벌레중에 하나였지.
"엎어버리기전에 내려와. 하나."
"으,으으…."
"둘."
나는 세찬이 입에서 셋이 나오기 전에 등에서 내려왔다.
아마 셋셀때까지 매달려있었으면 진짜로 엎어치기 한판을 당했겠지.
제 입으로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녀석의 재킷 끄트머리를 쥔 손은 놓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랄한번 했더니 공포감이 좀 가셨….
'제발…..혼자두지…….'
"악!아악!악!"
"이 미친놈이, 왜 이래 진짜!"
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세찬이를 끌어안자, 세찬이가 나를 떼어놓으려 발악을 했다.
"또! 또들렸어! 혼자두지 말래!!! 꺄아아아악!!!"
"귀 아파, 미친놈아!"
세찬이가 내가 매달린 팔을 휙 휙휘두르면서 외쳤다.
나는 녀석이 흔드는대로 붙어서 난리를 피웠고, 그 난리는 결국 세찬이가 나를 집어서 던져버리는것으로 끝났다.
"으,으윽…."
바닥을 좀 굴렀지만, 별로 아픈건 아니었다.
그치만 귀신들린병원이라니, 귀신이 말도 건다니.
이런데에서 나는 더이상 있을수가 없었다.
형체 없는건 어떻게 공격하지? 마법같은걸 끼얹나? 근데 난 마법 쓸 줄 모르잖아.
"하아, 지랄좀 그만하고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자."
"응,응응응."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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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나온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나무가 많은 숲속에서는 무슨 피톤치드인가 치톤피드인가 하는게 나와서 심신안정에 좋다고 들었다.
아무튼 이름에 피가 들어가니까 흡혈귀한테도 좋겠지.
그렇게치면 피자도 이름에 피가 들어가니까 몸에 좋을것이 분명하겠다만. 피자 먹고싶다.
"후웁, 하아."
사실 숲인데도 그리 공기가 좋지는 않다.
아무리 마음대로 끌 수 있는 불이라고해도 불은 불이었고, 그러니 병원 역시 속은 멀쩡하대도 겉은 꽤나 시커멓게 그을린데다 주변의 풀이나 바닥에는 여전히 잿가루가 흩날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밤에는 나무에서 이산화탄소가 나온다고 했던가?
마지막 잡생각은 별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긴 하다.
"후웁, 켈록. 크흠."
잿가루가 목에 걸려서 기침을 좀 하니까 정신이 드는것 같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때문인지 자꾸 헛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병원 근처가 잿가루로 복잡하니 우리는 조금 더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한밤중의 등산은 본래 위험한 행위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중에 빛 하나 없는 야산을 좀 걷는다고 문제가 생길만한 사람은 없었다.
"보통은 한밤중의 산이 더 무서워야하는것 아니냐."
"산에선 귀신나오면 도망치면 되잖아."
"병원에선 못 도망치고?"
"병원에서는 벽이나 문같은걸로 막히면 어떡해."
그런 공포영화가 있었다.
어느새 보면 복도에 앞뒤가 막혀버린다던지, 문이 때려부셔도 안열린다던지, 문을 열어보니 저승이랑 연결된다든지….
아무튼 뭔가 공포심을 자극하는 매개체 뿐이다.
반면에 숲은?
그냥 나무뿐.
귀신이 나무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끽해봐야 나무뿌리좀 조종하고 말겠지.
그리고 숲속에서는 내 신체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도망을 칠 수도 있다.
"별 억지가 다 있네."
"억지가 아니야. 고증이야."
그게 다 귀신이 하는거 아닐까. 애초에 자판기라던가 시설같은걸 관리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는건 그만큼 기계나 병원 자체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거잖아.
거기다 귀신을 본적이 없으니까 괜히 더 무섭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
나는 근처에 앉을만한 바위를 대충 털어내고는 앉는다. 좀 차갑네.
한세찬은 딱히 앉거나 하지는 않고, 팔짱을 낀채 나무에 기댔다.
"흐음, 실버한테 옷이나 좀 가져다 달라고 할까."
"스팅레이가 니 심부름꾼이냐."
"그런건 아니지만. 너무 급하게 나온것 같아서."
은근히 신경쓰인다는 말이지, 이거.
여기는 눈도 많아서 시선도 조금 느껴진달까. 그렇겠지, 무장한 남자들 사이에서 잠옷입고 돌아다니는 비무장 여자애인데, 눈에 안띌수가 없잖아.
나는 은근히 가디건을 여몄다.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던 세찬이가 말했다.
"사제가 있으니까 부르지 않는게 낫겠지. 사제는 유디라랑 사이가 별로 안좋으니까."
"그런가?"
하긴, 유디라는 비록 공식적으로 등록된 흡혈귀라지만 어째든 흡혈귀.
사제랑 사이가 좋을리가 없었다.
실버는 유디라의 감시자이자 처형자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오래 떨어져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겨우 옷 심부름 하나 시키자고 불러낼 만한 인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색이라는게 참 오묘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던 밤하늘은 그저 까만색이라고 생각하던 하늘이고, 별도 보이지 않는 이 빌딩숲에서는 그저 외롭고 쓸쓸해보이는 것이었는데.
흡혈귀의 시선으로 보는 밤하늘은 달랐다.
더욱 크게 느껴지고 밝게 보이는 예쁜 달, 그리고 새카만 어둠이 아니라 짙은 푸른색으로 깔려있는 도화지에 모래알을 뿌린것처럼 반짝이는 별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모두 우주 어딘가에서 불타오르는 태양이다.
저 별빛들은 너무나 멀리 있어서 지구에선 흡혈귀의 피부를 태우지는 못하지만, 흡혈귀의 시선을 끌어 마음을 태우기에는 충분했다.
어째서 그동안 밤하늘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삶에 여유가 없었으니까.
뭐 매일매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무력감, 앞으로의 막막함, 막연한 피로감등에 의해서 휴식시간 때에는 언제나 의미없이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 외의 시간엔 정말 눈코뜰새없이 정신차리기에도 벅찼으니까.
"이야, 밤하늘 예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상이었다.
나를 따라 하늘을 바라본 세찬이가 말했다.
"그냥 까만데."
"아쉽네. 이거는 너한테도 보여주고싶은 정도인데. 너도 흡혈귀 할래?"
"좀 예쁜 밤하늘 보자고 흡혈귀가 되라는건 주객전도 아니냐?"
"좀 예쁜게 아닌데. 진짜 개이쁜데."
사진으로 찍어줄수도 없고, 아쉽다.
그림을 배워볼까? 이렇게 손재주를 길러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머리도 잘 묶을 수 있게 될지도?
근데 북두칠성이 뭘까.
별이 너무 많이 보여서 오히려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바스락.
"응?"
어딘가에서 들리는 부자연스러운 풀소리.
바람이 스쳐가며 낸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뭔데?"
"소리가 저쪽에서…."
이거 또 나한테만 들린건가?
시발, 귀신이 틀림없다!
"흐이이이익! 귀, 귀신!"
"제발, 지랄 그만하고."
내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치니까 세찬이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보통 그런 소리가 나면 산짐승을 의심해야지, 귀신부터 의심하는건 좀 멍청한것 같지 않냐?"
"으, 으음…. 그러네. 맞는말이야."
그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조금 진정한듯 보이자, 세찬이가 손을 놓았다.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굴에 피가 좀 몰리는것이 느껴진다.
살짝 흘러내려간 가디건을 올려입으니 어깨를 붙잡았던 손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세찬이 원래도 손은 나보다 컸지만 이젠 진짜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네.
아니면 내 어깨가 좁아져서 그런가.
내가 어좁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뭔가 다가오고있어, 사방에서….!"
"제기랄, 이번엔 나도 들었다."
세찬이가 전투자세를 취함에따라, 나역시 일어서서 영창을 시작했다.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가해진 제약을 해제하노니…."
-콰직!
나무를 부숴버리며 달려드는 형체는 마치 대포알 같았다.
불안함을 삼키고, 애써 침착함을 끌어올린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는 자라!"
물리저해가 해제되며 몸에 활기가 돈다.
평소 그 효과로 인해 언제나 나른한 감각을 맛보다가 이렇게 가끔 전투중에 해제하는 물리저해는 일종의 희열감마저 들게한다.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느낌, 일상에서는 그저 불편하고 방해만되는 힘이지만, 지금과 같은 비일상에서는 완벽하리만치 훌륭한 힘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귀신이면 불가능이지.
그래서 강화된 신체능력으로 공격하는 대신, 회피를 선택했다.
말그대로 영창이 끝난 즉시.
바닥을 강하게 박차 거의 잔상이 생길 정도의 속도로 회피한다.
내가 회피하자, 한세찬이 송곳 형태의 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말뚝을 역수로 쥐어 찔러올린다.
형체의 주둥이가 꿰어 올려지고, 말뚝이 박힌 부분을 몸을 뒤로 돌리며 회전력을 얻은 발차기로 완전히 관통시킨다.
뒷발차기, 태권도에서도 가르쳐주는 최강의 발차기 기술이다.
진짜 최강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역시 귀신잡는 해병대!"
내가 외치자, 세찬이가 그 형체의 머리를 짓밟으며 소리쳤다.
"이게 아직도 귀신으로 보이냐? 그놈의 귀신 타령좀 그만하고 나무에서 내려와!"
"귀신이 아니었어?"
나는 어느새 회피와 동시에 나무에 올라간 상태였다.
솔직히 내 주먹보다야 녀석의 은제 무기가 귀신을 잡는데는 더 효과가 있을테니까. 뭔가 마법적인 처리도 되어있을거고.
아닌가?
세찬이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까, 이거는 귀신같은게 아니었다.
"흡혈귀…?"
"그래. 이건 흡혈귀다. 보아하니 타락한것 같아 보이는데."
흡혈귀.
녀석은 이곳 저곳이 울퉁불퉁한 모습의 인간형태였다.
일반적인 상태는 아니고, 타락한 것 같아 보인다.
정상적인 흡혈귀라면 흡혈귀인 내가 봤을때 바로 느낌이 온다.
반면에 타락한 흡혈귀는 아무리봐도 그게 흡혈귀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그래서 그때 거대한 저택 모습의 촉수괴물 같은걸 눈치채지 못했던거겠지.
애초에 인간같이 생기지 않은 흡혈귀는 누가봐도 흡혈귀일 테니까 의미 없지만.
흡혈귀든 뭐든, 일단 녀석은 형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건 내가 공격 할 수 있고, 때리면 죽는다는 이야기 아니냐?
안심이 된다.
"아, 다행이다."
나는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착지했다.
그렇다면 주변에 느껴지는 이 기척들이 전부 귀신이 아니라 형체가 있는 흡혈귀들이란 얘기겠지?
어쩐지 다른 흡혈귀들은 더이상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어째서지?
"왜 달려들지 않지?"
"경계를 시작했어."
경계, 녀석들은 뭔가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뭔가를 두려워 하는 것 처럼도 보였다.
저기서 거리를 벌린채 노려보고있는게 무슨 좀비나 다름없다.
실제 좀비는 저런 모습이려나? 광견병같은걸로 만들어낸 짝퉁 좀비 말고 말이다.
빠르게 기척을 확인해보니 총 일곱인것 같다.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르고.
"최소 7 마리의 기척이 느껴져."
"생각보다 많은데."
"어때? 할만해?"
"모르겠다. 이쪽을 경계하는걸 보면 타락귀중에서도 어느정도 지성이 있는 녀석들이야."
"그럼?"
"넌 스승님께 연락보내. 나는 사제에게 연락할테니까."
"알겠어."
나와 세찬이는 동시에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증표를 쥔 나와 세찬이 동시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것을 이해한 것일까, 흡혈귀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움직인 기척의 수는 상정보다 두배는 많아 보인다.
"생각보다 더 많아! 어떡해?"
"지원요청을 했으니 금방 나오실거야. 몇분만 버티면 돼."
몇분? 할만하네.
흡혈귀가 내게 달려들어 팔을 내뻗는다.
그 모습은 분명 인간의 형상이기는 했으나, 하는 행동은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마구잡이로 본능처럼 쏘아지는 주먹질과 할퀴기.
그러나 그것이 내게 닿을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싸움에선 초보자라고해도, 이런 격 떨어지는 흡혈귀따위의 공격따위에는 보고 피하기만해도 되는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합."
밀치듯이 내뻗은 손바닥이 녀석의 갈비뼈를 부수고 내부장기에 강한 충격을 불어넣는다.
등이 터져나갈듯 부풀어올라, 숲 안쪽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흡혈귀 하나.
"……어?"
밀치듯이라고 표현은 했는데, 사실 진짜로 밀친다고 밀어버린거다.
그런데 발휘된 이 효과는 무슨 무협지에서 나올법한 '장'.
혈청이 무슨 스테로이드라도 되는건가…?
"얘 왜이래?"
나는 당황해 팔을 주물거려보았다.
여전히 말랑말랑.
이상하다, 근육은 전혀 안 붙은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