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수확제
데이터가 터지는 병원.
바라마지않던 상황이기는 했다만, 별로 행복한 기분은 아니었다. 왜냐면 한정가챠를 말아먹으며 의욕이 반토막난 게임이 떠올랐으니까.
하필이면 내가 못 얻은 캐릭터가 희대의 사기캐로 나와서, 없찐소리나 듣고 있는 내 입장으로썬 행복할수가 없었다고할까.
게다가 지금은 그 휴대폰조차 없고 말이다.
"릴리야."
"…응?"
아빠가 나를 릴리라고 부른건 처음이라서 반응이 조금 늦었다.
아마도 보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거겠지, 저기도 사제가 날 쳐다보고 있고.
"연구자한테 잠깐 가있을래? 가서 결계 꺼진 이유같은것도 알아오면 좋을것 같네."
사제말로는 결계는 건드린적이 없다고 하니까, 라며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채 말하는 아빠였다.
"응, 알겠어…. 요."
평소처럼 반말을 하려다가, 나역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존대로 틀었다.
의사는 결계같은 시스템을 담당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이런 문제가 있으면 보통 연구자가 일으킨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야밤의 병원은 이전보다 더욱 꺼려졌다.
그래서 세찬이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일부러 녀석의 약점을 노리지 않았다. 괜히 약점을 찔렀다가 너무 자극해서 내게 반격을 행한다면, 방어구차이때문에 내가 질게 뻔하니까.
녀석은 딱딱한 재질의 라이더재킷, 나는 보들보들하고 얇은 잠옷과 가디건인것이다.
간지럼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왜."
"음, 같이좀 가자."
그도 그럴게, 귀신들린 병원이라잖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진 공포영화만 보더래도 알 수가 있다.
아무리 지금 내가 그런 귀신들보다 더한 존재라고해도, 내 담력이 커지는것은 아니다.
"뭐, 어딜 가는데. 화장실?"
"음…. 거기도 들리자."
의식하니까 조금 마렵네….
참을 순 있겠지만, 굳이 화장실 가는걸 참아야 하나 싶고.
"참나, 애냐?"
"자꾸 애라고 할래? 짜증나게."
"점점 애같은 짓을 하잖아."
"흥, 이건 조심하는거지. 애같은 짓이 아니거든?"
조심해서 나쁠건 없잖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살았는데.
그러고보면 나와 동갑일 여동생의 모습인데, 어째설까, 23살로는 전혀 보이지가 않는군.
12살이후 성장이 더뎌졌나?
20살도 좀 과하게 쳐줘서 20살인거지, 외모만 봤을땐 중, 고등학생 정도다.
음, 생각해보니까 처음에 이런 여동생이 나한테 왜 있느냐는 소리를 했던것 같은데, 지금보니까 아예 헛소리는 아니었네.
속눈썹 염색하고 검은색 렌즈 끼면 원래 모습과 눈매 정도는 닮았다고 할수 있을까.
그래도 엄마를 훨씬 많이 닮은것 같지만.
음, 아빠의 유전자가 너무 나한테 몰빵된거아닌가? 혹시 이것도 릴리스의 영향?
뭐, 귀여운 여동생 있으면 안좋을 것은 없을것 같았다.
옛날부터 동생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라한테도 꽤나 잘 해주었고.
혹시 그 생각은 옛날에 정신세계속에서 같이 놀았던 여동생의 영향이었던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자꾸 으스스한 기분이 들고 뭔가 이상한게 들리거나 보일것 같다.
만약에 변기에 앉아있는데 귀신같은게 막 튀어나오고 그러면 어떡하지? 앉은채로 대응할 수가 있나?
"야, 세찬아… 있는거 맞지?"
"귀찮게 하네. 왜?"
"아, 아니야. 있나 해서."
"어디 안가. 갈데도 없고."
"으응. 그렇지?"
나는 안심하고 변기에 앉아 괄약근의 힘을 풀었다.
조르륵, 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린다. 밤이라서 그런가, 조금 그렇다.
그 소리가 혹시나 세찬이한테까지 들릴까 싶어서 급하게 힘을 줘 물줄기를 막고 외친다.
"야. 세찬아."
"또 왜, 시발. 빨랑 싸고 나와."
"아니, 노래불러주면 안돼?"
"뭔 또 노래야, 시이발."
"아, 아니이! 애국가라도 좋으니까…."
"어디 안간다고. 나참, 그렇게 무섭냐, 귀신이?"
"귀신이 없다고 생각할때나 안 무서웠지!"
그래, 귀신이 안무서웠던 이유.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실이 바뀌었잖아. 사람은 미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봐왔던 공포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그게 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것이다.
…추가로 결코 내 오줌소리 들릴까봐 그렇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예전에 잘 작동하던 그 이상한 폭포소리 내는 버튼도 전혀 작동을 안했다.
왜 필요할땐 또 안돼. 미치겠네.
이거 혹시 귀신의 소행인가?
아니, 그냥 배터리가 다된거겠지.
제발 배터리문제여라.
"하아…. 동해.물과. 백. 두산.이."
세찬이가 부르는 애국가에 음정은 없었다.
단지 딱딱하게 시를 읊는듯이 또박또박 말을 이을뿐.
하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어째든 내 오줌소리는 묻힐것 아닌가.
쪼르르르륵, 하고 물떨어지는 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소변은 내 생각보다 좀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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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를 찾는건 어렵지 않았다.
와인트리의 위치를 찾으면 되니까.
지하실에 박혀있던 와인트리의 위치가 조금 옮겨져 있었다.
조금 더 깊은 지하실로 옮겨진 모양.
연구자는 품에 와인트리로 느껴지는것이 담겨져있는 캡슐을 끌어안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나와 세찬이의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아, 너희구나. 위에 사제들은 갔니?"
"아니요? 아빠랑 이야기중이셔요."
"그래?"
나는 그가 끌어안은 캡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또 뭔가요? 제 감각은 그게 와인트리라고 알려주는것 같은데."
"아. 이건 그거야. 그 흡혈귀의 필수 장기를 추출해서 살려놓은거. 일종의 통속의 뇌라고 할까."
"으엑."
나는 조금 기겁했다.
사람 몸통 절반정도 되어보이는 캡슐에 와인트리의 본질이 담겨져있다는 얘기다.
징그럽다고 할까.
저기서 만약 미친 연구자가 전기신호를 준다면 완벽한 통속의 뇌 역설이 완성된다.
"임시적인 형태야. 원래 가주급 흡혈귀의 생포는 금지되어있거든."
"그래요?"
와인트리는 불법이었던건가.
그런데 사냥꾼들 사이에도 불법이란게 있는건가?
물론 그렇기는 하겠다만.
깡패에게도, 흡혈귀에게도 규칙이 있는데 사냥꾼이라고 없겠어.
"뭐, 사냥꾼들은 그걸 별로 신경쓰지는 않지만, 정교회의 사제는 신경 쓰겠지."
세찬이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잠깐 옮겨둔거야. 들키면 죽인다고 난리피울게 뻔하고. 이런 캡슐에 담겨진 흡혈귀까진 체크하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가주급 흡혈귀는 생포금지야?"
"그야 위험하니까. 가주급 하나의 격리 실패는 보통 엄청난 참사가 되거든."
격리실패라, 생각해보면 와인트리에 한해선 그런걸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녀석은 이미 내게 종속되어있어서, 내가 명령을 내린다면 따를수밖에 없으니까.
도망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결계는 왜 망가져버린거죠?"
"으음… 그게 말이야, 이녀석 때문인것 같아."
"에?"
연구자는 캡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제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녀석을 분리했거든. 그런데 시설이 이녀석의 VP를 감당하지 못했나봐. 그래서 지금 결계가 파괴되어버렸네."
"그렇게 강해졌나요, 와인트리가?"
"그동안 녀석이 먹어치운 기사급 흡혈귀도 많았던 모양이라, 오염되었다지만 VP자체는 일반적인 흡혈귀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었어. 그 피가 정화되고, 너의 피까지 흡수하면서 격도 올라가면서 꽤나 강해진 것 같아."
연구자는 눈빛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이런 샘플은 정말로 흔치않아. 너도 그랬지만, 이녀석도 훌륭해. 돈만 된다면 내가 사고싶은 정도인걸."
"흐흐,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내가 농담하듯이 말하자, 연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연구자한테 돈이 어디있어? 다 후원자 등골 빼먹는거지."
"후원자요?"
"그래. 후원자. 내 경우엔 네 아버지구나. 하하하!"
그럼 대체 누가 돈을 줘야하는거지?
아빠가 나한테 돈을 주면 되는건가…?
"그럼 그냥 다른 연구자한테 팔래요."
"그건…. 참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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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든 결계가 터진 이유를 알았다.
결국 따지고보면 사제가 교회로 온게 문제였다.
사제가 오는 바람에 급하게 와인트리(적어도 녀석의 신체중에 와인트리리고 부를 수 있는 것들)를 캡슐에 담아서 통속의 뇌로 만들던 과정에서 막대한 VP가 노출되었고, 그 영향으로 병원의 결계에 금이 갔다는 모양.
일종의 EMP같은게 터진 거라고 보면 될까.
아빠는 그런 설명을 연구자에게 들으며 정리했다.
"하아, 결계가 파괴된 이유는 알겠네. '이거' 때문이란 얘기지."
아빠는 이전에 나랑 세찬이가 해결…이라기엔 조금 지저분 했지만 어째든 처리했던 놀이공원 사태의 보고서를 보며 이야기했다.
"네, 면목이 없네요. 결계가 파괴될 정도로 강한 파장이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그만큼 강해졌단 말인가?"
"아마도 그럴겁니다."
"뭐, 다른 결계는 상관 없는데…. 인과보호결계의 상태는?"
"그것도 조금 영향이 갔어요. 바로 복구는 시도 했는데…."
연구자는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보니 수염은 언제 한번 깎은건지, 로빈슨 크루소같던 수염은 사라지고 첫인상같이 조금 지저분하다고 생각되던 듬성한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불안하다?"
"예. 인과보호라는게 사실 제일 중요한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흐음…. 어쩔 수 없다. 이 시설은 버리자. 다른곳으로 옮길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지하실에서 짐 정리하고 있을게요."
연구자는 안경을 고쳐쓰고는 머리를 긁으며 지하실로 향했다.
나랑 세찬이는 정리를 돕기 위해 그 뒤를 따랐고.
뒤를 따르면서 궁금했던 사실을 묻는다.
"그런데 인과보호란게 뭔가요?"
"아, 인과보호? 간단해. 인과관계를 무시한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받는게 인과보호야."
"인과관계를 무시한다구요?"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위해선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그런 인과관계를 무시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것들로부터 보호? 대체 무슨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데?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연구자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설명했다.
역시 연구자는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구나 싶다.
"어떻게 설명할까.... 그래, 만약에 어떤 예지능력을 가진 흡혈귀가 이 시설을 미래에서 발견했다고 치자, 그럼 이 시설의 위치는 들키는거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그런 미래를 보기 위해선 일단 이 시설을 그 흡혈귀가 찾는다는 과정이 이어졌어야 했을거야. 하지만 인과 보호는 그 중간과정을 흩어놓아, 예지를 방어하는거지."
"중간을 흩어놓는다…?"
"인과율, 그 중간을 무시한 예지는 결국 이 시설의 미래에 닿지 못해. 그럼 이 시설이 예지같은걸로 발각될 일은 없어진다는 이야기야."
"….음, 뭔소린지는 대충 알겠어요. 예지를 막는단 얘긴가요? 그게 그렇게 흔한 능력인가?"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수단이 있으니까 방어해야지. 게다가 추가적으로 시간관련 능력대부분에 면역이 되는것, 기타 필연성 없는 파괴행각으로부터 완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기도 해. 운석충돌이라던가, 벼락, 지진같은 천재지변에는 나와 관련된 인과율이 희박하잖아? 그런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해지는거지니까."
뭐, 언제나 천재지변같은건 뜬금없이 일어나기는 하지.
그런걸로부터까지 보호받는다고보면 좀 훌륭하네? 왠만한 보험보다 좋다.
"뭐 지금 상황에선 예지방어능력이 가장 중요한거기는해. 네 아버지의 시설위치는 거의 모든 흡혈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알고자 하는 정보니까."
"그렇군요."
연구자가 서류로 된 자료를 정리하고, USB나 외장하드 같은걸 왕창 가져와서 데이터를 옮기며 중요한 기계설비 같은걸 분리하면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린다.
이건 저기로, 저건 이리로. 그건 아직 코드를 뽑지 말고.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캡슐을 슬쩍 들어 옮겼다.
연구자가 생각보다 무거우니까 세찬이를 시키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캡슐을 들었다.
세찬이도 힘은 세긴 하지만 나도 물리저해에 적응도 할 겸 해서 힘을 좀 써보려고.
어쩐지 물리저해를 꼈는데도 상당한 물리력을 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거 힘이 강해져서 그런것 같은데.
캡슐에서 자그마한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진짜 살아는 있는 모양이다.
"이런 모습으로도 살아있다는게 되게 기분이 이상하네요."
나도 이렇게 되더라도 살아있을수 있다는 얘길까. 으으, 생각해보니 조금 끔찍하군.
내가 이렇게되면 생각하는걸 그만두게 되려나.
아니면 아예 정신세계에 틀어박히게 될까.
"아마 상상하는것보다 끔찍하지는 않을걸, 그냥 잠을 자는거랑 마찬가지야."
"으음, 그래요?"
"뭐, 최소한 뇌파는 그래."
그게 뭐람, 나는 캡슐을 들어서 이마에 대봤다.
심장박동이 더욱 강렬하게, 나와 이어진 느낌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지는게, 이게 패밀리어인가 싶다.
이게 20억의 평온함이겠지.
'--님….'
"어매 씨벌."
텅--!
나는 놀라서 캡슐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저를… ……..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저를…...데려가……..'
"귀신, 귀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