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3화 〉전야제 (73/101)



〈 73화 〉전야제

여러가지 정리를하고, 이런저런일이 있은 후.


이튿날 밤이 되었다.
난 일어나서 물이라도 마실까 하는 생각에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간다.
잘 자고있는 이라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문을 열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냉장고로 향하던중,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아빠, 언제 왔어…?"
"어. 일어났니?"

아빠는 베란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시던 중이었다.
날 보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신후 손짓으로 연기를 몇번 흐트리시고는 거실로 돌아왔다.
담배냄새에 조금 미간을 찌푸리자, 거실에 들어온 아빠는 자신의 옷에 냄새를 맡으며 내게 묻는다.


"아직 냄새 나나?"
"응, 나 이제 코가 좋아져 버렸거든."
"하하, 이런."

아빠는 뒤통수를 멋쩍게 긁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도 뒷머리를 긁다가 냉장고로 향하며 말했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뭐, 그럴 필요가 있냐. 급한 일도 없는데."
"그래도. 인사도 못했잖아."
"됐다. 뭐, 인사 못 받는다고 죽는것도 아니잖냐?"

나는 냉장고에서 찬물이 담긴 통을 꺼내 두잔 따라서 아빠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물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아빠는 몸을 굽혀 한모금 짧게 삼키시고 잔을 든채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무슨 술이라도 마시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 잠옷은 산거냐?"
"아. 이거, 응. 이제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입고 있는 것은 하늘색 잠옷이었다.
하늘색이라, 요즘 내가 보는 하늘색은 주로 짙푸른색이긴 하지만, 지금 입은 잠옷의 색은 연한 파란색이었다.


그동안은 집에선 속옷만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가 우리집도 아니고, 남인 사람도 많은데다, 지금은 여동생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내 몸인지 여동생의 몸인지 아직도 좀 헷갈리는 기분이기는 한데, 어째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빠의 옆에 앉아 양 손으로 어깨단을 살짝 꼬집어 올려 옷을 강조하며 묻는다.

"어울리나?"
"어울리기는 하는구나."
"그럼 됐지."

내가 소파에 몸을 푹 기대자, 아빠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왠지 어린애 다루는 느낌이라 이상한데.
23살먹고 아빠한테 머리나 쓰다듬어지고 있다니.
난 어쩐지 속이 간질거려서 머리를 치워서 손을 떼어내고 급하게 말을 뱉었다.

"아, 아빠는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바쁘다고는 들었는데."

내가 머리를 움직여 손을 치워내자, 흠칫 놀란듯 자신의 손을 살피는것이, 어쩐지 자신도 놀란 모양새다.
갈곳을 잃은 손길이 그대로 자신의 뒷목을 쓰다듬는다.

"미안하다. 내가 좀 징그러웠냐?"
"아, 아니. 괜찮아."


징그럽다기보다는 어색했다고할까.
원래 아빠가 그렇게 살갑게 스킨쉽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빠도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거겠지?

"무슨 얘기를 했었지? 그동안  했느냐고?"
"으,응."
"조금 바빴지. 시설을 팔고, 장비들 정리하고. 그래서 이제 빚도 거의 갚았다고 할까."
"대단해. 그걸 거의 다 갚았다고?"
"물론이지. 이 아빠가 못할 일은 세상에 없다고."

과장되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그 모습은 별거아닌 일을 해냈다는 뉘앙스가 섞인듯 했다.
난 그저 엄지손가락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20억 달러라니.
그걸 어떻게 갚았대.
아직 다 갚은건 아니라지만 정말로 내가 신경쓰지 않더라도 다 갚을 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4주동안 자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냐?"
"응. 끄떡없지. 나도 상당히 튼튼하거든."


나도 짐짓 과장된 행동으로 주먹을 턱에 붙이고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가, 하긴. 흡혈귀 몸 걱정만큼 쓸데 없는것도 없겠지."
"너무하네."

그렇게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찬물을 한모금씩 마셨다.
 한모금이 끝나면 물어볼것이 참 많았다.
아빠역시 그걸 느낀것인지,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고, 나 역시 그 옆에 잔을 내려놓았다.


할말을 고른다.
유리잔에 물이 조금 흔들리는걸 바라보다가, 흔들림이 진정될때즈음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 알게 된거냐?"
"뭘?"
"글쎄."

이게 무슨 대화인가싶은데, 내가 그것에 대답할 수 있듯이, 아빠 역시 내가 뭘 알게 되었는지 아는  하다.
악마사냥꾼이 이야기한걸까?


가장먼저 여동생의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았다.
그것을 가장 먼저 설명해야만 엄마에 대해 물을 수 있으니까.
대체 엄마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릴리스란게 어째서 나한테 환생해버린건지.

"아빠, 나한테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는거 알았어?"
"그래. 쌍둥이였지. 딸쪽은… 유산이었지만."


침울하지만, 어쩐지 다행스럽다고도 느껴지는 억양이다.


"내 마력식때문에 합쳐진거였어. 배니싱트윈이라고 하던데."


아빠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날 바라보다가, 이내 납득한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런건가. 역시 그런 거라고 생각은 들더라."
"그렇게 안 놀라네?"

오히려 담담한 아빠의 반응이 신기하다.
나는 엄청나게 놀랐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야 상황이 좋잖아. 일단 네가 내 아들인건 확실하니까."
"처음에 뭐라고 생각했는데?"
"그야, 이미 내 아들 김석주는 죽었고, 그저 자기를 김석주라고 착각하는 미친 릴리스가 남은  알았었다."
"뭐라고?"


어, 정말로? 처음부터  믿어준 거야?

"네가 만약 실제로  아들의 연기를 하는 릴리스였어도 상관 없었어. 나는 더이상 릴리스와 싸울 여력이 없으니까."

"날 믿어준게 아니었어?"

아빠는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잇는다.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려나."
"......."


아빠는 화제를 돌리고 싶은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동생은 어떻게 안거냐?"
"혈청을 맞고 잠들었을때 만났어. 다른 인격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나한테 다른 인격이 있는줄은 몰랐는데, 지금  모습이랑 똑같이 생겼더라."

그럴수밖에 없었다.
12년동안 머릿속에서 갑자기 다른 말이 들린다던가 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내가 완전히 정신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통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2년 전에 그 일 이후에 한번도 안 와줬다고 뭐라고 한마디 들었어."
"그건 아마도 기억을 단절하는 과정에서 떨어지게  모양이구나."
"그랬던거야? 그런데, 내가 여동생의 얘기는 안했나?"
"그래. 안했어."


왜 그랬지? 꿈 이야기라서 그랬으려나?
그러고보면 그렇긴 하다. 기억을 떠올려봐도, 깨어난 상태의 나는 여동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꿈을 꿀때만 만날 수 있고, 그마저도 꿈에서 깨어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근데 왜 걔는 태어나는걸 거부한거지? 라고 묻는다.
곧바로 대답이 들린다.

"딸은 태어나선 안되는 거였으니까."


아빠는 말을 바로 잇지 않는다.
최대한 늘어트리듯이, 뭔가를 고민하면서 이야기를 골랐다.


"딸은 릴리스의 씨앗일테니…. 오히려 나는 딸이 유산되었다고 했을때 슬프기도 했지만 조금은 기뻤어. 내 손으로 죽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엄마도 그랬었지. 차라리 다행이라고."

혹시 내 여동생이 사라지려했던것은 이런 이유였을까?
 누구도 원치 않았던 탄생이라니.
생각해보면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닌가.
릴리스가 되면 대체 어떻게 되길래 그렇게까지 경계하고 거부한걸까.


"……대체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그래. 다 말해줄게. 더이상 숨길 이유가 없으니."


그렇게 말한 아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물잔을 들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싱크대에 내가 따라준 물을 전부 버려버리고는, 찬장에서 뭔가 보기만해도 강해보이는 술을 한병 꺼냈다.
뭔지는 모르겠네. 내가 평소 소주나 맥주 말고 마셔본게 있어야 말이지.
 화려한 술병을 흔들며 아빠가 내게 묻는다.

"너도 마실테냐?"
"아니."

당연히 거절했다.


"그래? 흐음, 교회에서 추태를 부렸단건 잘 알다만, 여기는 신성력같은거 안 들어있어. 흡혈귀라면 그리 쉽게 취하진 않을텐데?"
"아니, 이참에 그냥  끊으려고."

취하는것을 멀리하기로 했다.
교회의 일 이후로 마음먹었으니까.
앞으론 알코올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기로….


"뭐, 그래라."


방금 물을 버린 유리잔 가득히 술을 부은 아빠는 그걸 어떻게 하지도 않고 바로 삼킨다.
내가 양주를 모르긴 하지만, 보통 저렇게 바로 삼키는건가?
어쩌면 그 이야기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급하게 취해야만 했던 걸까.

"후우, 어디부터 얘기할까…. 그래,  엄마는 연구자였다. 나도 연구자였고. 우리는 처음엔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를 했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흡혈귀라는것 자체에 대한 연구가 되었고 기어이 근원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지."

"근원?"
"그래, 세상에 흡혈귀가 나타난 이유를 밝혀내고자 했던거야.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니까."
"그래서, 밝혀낸거야?"
"그래. 어느정도는."

흡혈귀에 대한것, 흡혈귀의 왕에대한 것, 그리고 릴리스에 대한 것.
그런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연구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흡혈귀에 대한 과거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지금 처음부터 이루어지는 연구였지만, 많은걸 알아낼 수 있었지. 그러나 왕은 이미 2000년 전에 죽었고, 릴리스에 관한건 같은 흡혈귀조차 제대로 모를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었어."


그랬었나, 어쩐지 유디라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어쩌면 릴리스라는 존재가 수면위로 떠오른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린 릴리스라는 존재까지 알아냈어. 그땐 나도 연구자였으니까,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것이 마냥 기뻤다."

빈 잔을 다시 채운  한모금 삼킨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2000년 전에 그들이 왕을 죽였던 것처럼, 릴리스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뭐랄까, 대단한 이야기이긴한데 동기가 부족한것 같았다.
흡혈귀를 모두 지우느니, 죽이느니 말은 했는데 굳이 찾아내서 죽일 필요가 있느냐는거지. 세상에는 흡혈귀만큼 사냥꾼도 많고, 어째든 흡혈귀를 사냥하는 시스템은 점점 발전하고 있으니까.
사냥꾼이 한두명 빠진다고해도 별로 문제는 생기지 않을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거야? 모든 흡혈귀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게 뭐였길래?"
"그러지 않으면 릴리스는 네 엄마에게 환생했을 테니까…. 결국 실패했지마는."


아빠는 그대로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빈잔에 술을 다시 채우지만, 이번엔 잔의 절반도 채워지질 않는다.


"어째서 엄마한테 환생을…? 엄마는 흡혈귀가 아니었잖아?"
"그랬지. 하지만 인간도 아니었던거야."
"인간이 아니라니?"
"릴리스에 관한걸 연구하면서…. 알게 된거다. 근원, 개념, 본질같은건 아직 인간에겐 너무 높은 차원의 지식이라는걸. 단지 사실을 알고있는 것 만으로 조금씩 인간성이 변해갈 정도로 말이야."
"대체 뭔 소리인지."
"하하하.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편이 오히려 좋다. 어째든 그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어."

난 볼을 긁었다.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그걸 가르는 기준은 뭘까.
어쩌면 인간이라는 것에도 뭔가 본질적인 개념같은게 있나.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아라."
"으응."

무슨 크툴루 신화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처음 듣고자 했던것보다  과도한 이야기들에 약간 정신이 아찔해졌을 정도다.
이런게 아빠 입에서 나올거라고는 평생 상상을 해본적도 없었고.
기껏해야 뭐 흡혈귀 죽인 얘기나  줄 알았는데.

"어째든 릴리스는 환생을 하고 말았다. 누군가 릴리스를 한번 죽인거야."
"누군지 알것도 같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만큼 릴리스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으니.

"그래. 악마사냥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 더 놔뒀으면 녀석의 힘이 결국 왕에 필적했을 테니까…."
"왕에 필적하면 뭐가 나빠?"
"릴리스가 완전히 왕을 대체했을거다. 인간은 모두 노예나 식량이 되겠지. 지금은 흡혈귀가 약해졌기에 인간도 사냥을 할 수 있게 됐지만 말이야."
"나쁜일이긴 하네."

사실 생각보다  나쁜 일이긴하다.
사람이 가축이 된다니, 마치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하는 것처럼.
그건 확실히 나쁜일이 아닌가?
잘 모르겠지만 나쁜 일이겠지.
아무라 내가 흡혈귀가 되면서 조금 감각이 이상해지긴 했다지만, 그건 나쁜게 맞는것 같다.

"그래서 릴리스를 사냥한 거야?"
"그렇지. 뭐, 사실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뭐가 더 나빠?"
"릴리스가 감히  얼굴이라는게 나쁘지. 뭐가 더 있겠냐?"


씨익 웃으며 마지막 한잔을 목에 때려붓는 그 모습은 조금 터프해 보였다.
사실은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같은 위태한 느낌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은 터프해 보였다는 얘기다.

"몇년간 그녀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결국 그것도 실패했고. 차라리 죽이는건 성공했나 했더니 그것도 실패했네."

실패, 실패, 실패.
들어보면 다 실패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그만큼 어려운 일생을 살아오셨구나, 그런데 그걸 나한테는 쭉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는 얘기야.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해 물잔을 들어서 조용히 물이 담겨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아빠의 이야기속에는 엄마의 이름이 없었다.

"맞다, 엄마의 이름이 뭐였어?"


"그런건 이제 사라졌다. 릴리스라는 존재는 너무도 거대해서 인간이 덮어씌워진다면 이름따위는 세상에서 지워져버리고 말지. 난 더이상 기억할수가 없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거야. 내가 그녀의 기억의 편린이라도 붙잡고 있는게 기적이다."
"…그런거야?"


릴리스에게 환생당한다는건,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 이름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걸 보니 확실히 나는 완전히 릴리스인 존재는 아닌모양이야.
난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우물대다가, 문득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입을 연다.

"저, 이거."
"이건…?"


나는 엄마의 그림을 건넸다.
아빠는 그것을 받아들고 나를 바라본다.


"하하, 참. 이렇게보니까, 정말로 많이 닮기는 했구나."


슬프게 웃는 아빠의 표정에,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보였다.

"봐봐.  아빠 아들이고, 그 딸도 내 속에 잘 살아있는걸. 그럼 자식들  다 살아있는거 아냐?  실패한건 아니라고."


괴상하게 융합되어 뭐라고 딱 떼어놓기 힘든데, 이게 다 내 마력식 때문인가 싶다.
마치 이것저것 넣은 술이 섞여서 새로운 것이 되는 칵테일처럼,  지금도 온전한 나라고 부를 수 있는걸까?

"그렇겠지. 그녀가 딸을 낳았다면 지금즈음 이런 모습이려나, 참."
"크흠."

나는 어쩐지 쑥쓰러운 감정이 들어서 물을 가득 머금어 삼켰다.
그런 표정의 아빠는 본적이 없었으니까.
곧 아빠는 표정을 지우고 의도적으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렇게 말하니 더 헷갈리는데. 넌  아들이냐, 딸이냐?"
"장난하지마. 지금은 아들이야."


내 정신은 아직 남자라고.
그런데  정신세계에선 몸을 바꿀 수 없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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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술기운에 어지러워져서 바람좀 쐰다며 밖으로 나가는걸 따라서 나왔다.

"그러게 좀 천천히 마시지."
"하하하, 어디 그걸 제정신으로 말할 얘기들이냐? 좀 봐줘라."

아빠랑 둘이 같이 어딜 걸어본게 얼마만일까?
낯설은 상황이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째든 가족 아닌가.
이 험난한 세상, 어쩌면 유일하게 이해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다.
만일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글쎄. 내가 버틸수가 있었을까?
바로 어디 돌아다니는 사냥꾼한테 사냥당해서 박제로 팔려나가고 있었겠지.


흡혈귀의 하얀색 머리카락팝니다. 빨간 눈동자도 팔아요. 손님,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끔찍한 상상.
인간을 가축에 비교했을때는 사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내가 저런 상황에 놓여질 것을 생각하니 싸늘하다.
어우, 이게 흡혈귀의 사고방식인가.

잡생각을 지우며 어깨에 대충 잠옷 위에 걸친 가디건의 주머니속에 손을 집어넣고 걷는다.
쌀쌀하기는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걸 알지만, 그렇다고 추운건 싫잖아.
더운것보단 추운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한가을에 얇은 잠옷 하나 걸치고 돌아다닐 정도로 시원함을 즐기는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나란히, 그렇게 골목을 걷고 있었다.


숨을 쉴때마다 풍겨오는 담배냄새랑 술냄새. 완전히 회식 갔다온 아빠냄새가 다 나네.
아빠가 회식같은걸 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아빠도 막 이상한거 피우는거 아니지?"
"하하. 이제 잔소리냐? 세찬이가 그러던데, 걔한테 담배 끊으라고 하도 닥달을 한다면서."
"걔는 좀 심해."
"미안하다. 걔한테 담배 가르친게 나야."
"뭐? 걔는 남의  자식이라고 막 대하는구만!"


팔꿈치로 아빠를 툭툭 민다.
아빠 역시 장난스럽게 몸을 흔들려준다.

잡담, 장난. 솔직히 이런것이 즐거웠다.
이런게 계속되면 좋으련만.

도착한곳은 가까운 공원.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과자도 살까 싶었는데 딱히 먹고싶은 과자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와 같은 밀크쉐이크맛 아이스크림에, 초콜릿을 하나 샀다.
오늘은 어쩐지 초콜렛이 땡기는 날이랄까.
그동안 초콜렛을 먹어보지 않기는 했어.
아빠는 그냥 메론맛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

초콜렛도 먹어보니 맛있네. 밀크초콜렛이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우유 들어가면  맛있나.

"아빠도 먹을래?"
"됐다, 단건 별로 안좋아해."

아빠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이스크림을 씹는다.
나도 그에 맞춰 아이스크림을 입에 한가득 머금는다.
머리가 조금 아프려다가 말다가. 간지러운 기분이다.
흐음, 기묘한 감각.

그때 착신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내 휴대폰은 아닌데.  들고 나왔으니까.

"누구야?"
"……여기서 전화가 오면 안되는데."
"어딘데?"
"병원."

전화가 오면 안좋기는 하지…?
거기서 걸려오는 전화는 보통 누가 입원했으니 보호자분은 빨리 와주십쇼. 하는거니까.
뭐, 세찬이가 실려가기라도 했단 건가.


"그게 아냐. 병원에선 전화를  하게 되어있잖냐. 왜 그럴까?"
"음…, 결계인가?"
"그래, 그런데 거기서 전화가 왔군."


그렇다는건….?


"결계가 깨졌고, 누군가 은신을 알아챘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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