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전야제 (71/101)



〈 71화 〉전야제

눌러붙은 공책은 그 그림외엔 모든 페이지가 눌러붙어버려서 확인 할 수있는 정보가 없었다.
대체 이 그림이 어떤 맥락에서, 어째서 이 공책에 끼워져있던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공책을 확인하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돌린 세찬이가 의문을 표시했다.

"릴리스의 머리가 왜 단발로 그려져있지? 게다가 흡혈귀라면 시력도 좋을텐데 안경은 왜 쓰고있는거고?"
"네가 본 릴리스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어?"
"그래, 당연하지."
"그런가…."


아마 이것은 틀림없이 엄마의 그림일것이다.
하지만 릴리스와는 달라.
그렇다는건 릴리스가 되기 전의 모습인가?


거기다 이상한점은 하나가 아니다.
한야가 모르는 그림이라면 최근 10년 안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이며, 그걸 그리기위해선 그녀가 엄마의 얼굴을 봤어야한다.
대체 어디서 봤다는 말인가?

우리 엄마는 23년전에, 그러니까 나를 낳으며 돌아가셨고, 나 역시 엄마에 대해선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다.
아마 꿈에서 여동생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 그림의 여성을 릴리스라고 생각했겠지.


"저기, 이 그림은 가져가도 될까?"
"응, 괜찮아."
"고마워."

나는 그림을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한세찬이 물어왔다.

"뭔가 알겠나?"
"확실한건 아니고…. 일단 아빠한테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그건 그렇겠지."


그래. 아빠가 답을 해줄 수 있겠지, 아마도.
한야가 침대위에 양반다리로 앉은채 말했다.


"그럼 이제 할건 다 끝났지?"
"그런데?"
"그럼 밥먹으러 가자! 나 아직 밥 안 먹었거든!"

그녀가 외침과 동시에, 위에서부터 울려오는 배식알람소리가 절묘하게 터져나왔다.


-꼬르르륵.

"……과자밖에 안먹었더니."

한야가 헤실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푸흡, 그래. 밥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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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양념돼지갈비를 조지기위해 고깃집에 들어왔다.
이 머리핀을 얻게된 이후, 바로 간장마늘치킨을 4마리정도 순살하기는 했지만,  이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바로 유디라와 함께 지내며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그다지 맘놓고 먹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먹거리 위시리스트의 거의 1~2위권에 들어가있던 음식을 이제서야 맛보기 되었던 것이다.
양념돼지갈비는 고깃집에서 숯불로 구워야 진짜 맛이 나서, 시켜먹을 수도 없으니까.


"양념갈비 12인분, 공기밥 6개 맞으세요?"
"네."
"다른 분들이 더 오시나요? 그럼 자리가 좁으실 텐데요."
"더 안와요, 저희끼리 다 먹을 거에요."
"예? 아, 그런가요?"


3명이 와서 12인분에 공기밥 6개를 주문했으니 당황할만도 하지. 그런데 오히려  추가할지도 모른다.
내가 씨익 웃고있자, 어리둥절한 여자알바생이 나와 한야를 보다가, 한세찬을 보고는 '음….'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아마도 저새끼 관상을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그런데 아무리 세찬이래도 12인분은 오바야. 6인분이라면 몰라도.


곧  붙인 숯이 테이블 중앙의 홈에 끼워진다.


-타닥, 탁.


약간은 쌀쌀한 외부의 날씨에 대비되는 따땃한 실내, 우리의 테이블 중앙에 놓여진 숯이 타오르는 것을 보니, 가슴이 실로 웅장해지는 것이었다.

"야.  흐른다."
"씁, 아. 고깃집 오랜만이라 그래. 이해좀."


내게 양념돼지갈비는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냄새가 진짜 너무 깡패야.
침이 안 흐를래야 안 흐를수가 없다.

"이거 화력 더 쎄게 안되나?"


이미 불은 제일 강하게 뒀다.
하지만 나는 조바심이 났다.
자연스럽게 노래가사가 떠오른다.
더 빨리, 더 많이, 오  평범한 소년걸.

아, 시벌 이젠 진짜 소녀네.

"흐응흥, 흥흥흥, 흐흥흥~"
"존나 신났네."
"흐흐, 야. 너도 내 입장 되어봐. 자동으로 나올거다."


즐겁게 그 오래된 노래의 구절을 콧노래로 부르던 중,
나는 탁월한 감각과 동체시력으로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을 포착했고, 불판위의 고기들을 일순간에 육즙의 소실없이 섬세하고도 신속하게 뒤집어냈다.
가히 신들린 집게놀림이라고 볼  있었다.

"야, 머리카락."
"아차."

그런데 머리카락이 자꾸 상 위로 올라가는걸 생각하질 못했다.


"집게 내놔, 내가 할테니까."
"음, 그래."

나는 마지못해 녀석에게 집게를 넘겼다.
하지만 미덥지 못한건은 어쩔수가 없군, 라면밖에  끓이는 멍청이에게 집게를 맡긴다니, 이건 어불성설인데.


초조하게 녀석의 집게질을 보고 있다보니, 답답해서 어쩔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 해?"


한야가 반찬을 주워먹으며 내게 묻는다.

"저놈이 고기 굽는걸 본적이 없으니 불안해서."
"음, 그런가? 오빠, 그동안 고기 한번도 안 구워봤어?"

세찬이가 집게를 들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듣는대로지. 그동안 저녀석이 다 구웠으니까. 그런데 고기 굽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불안할것까지 있냐?"
"흐음, 그래. 한번 해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역시 불안하다.
저놈 저, 집게 쥐고있는 모습부터 맘에 들지가 않는다.
왠지 뒤집는것도 얼타는것 같고, 육즙이 괜히 낭비되는 모양새다.
게다가 클라이맥스는 가위질이었다.
느릿느릿, 어떻게 잘라야하는지도 모르는지 하나 자르는데 한세월이다.

"어우, 답답해! 한세찬 가위질 존나 답답해!"
"다,닥쳐임마, 이거 가위가 안들어서 그래."
"헛소리! 니가 얼타는거지! 이리내! 한야.  머리좀 잡아줘."
"푸핫, 알겠어."


한야가 내 머리가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잡아주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세찬이 옆으로 가서 집게를 받아들고는 고기를 뒤집는다.

아, 편안해.
역시 내가 굽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다.


순식간에 고기들을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내고, 타지않고, 육즙이 낭비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굽는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고깃집 알바도 해본적이 있으니, 어찌보면 정말로 프로의 솜씨라고  수 있었다.

거기다 흡혈귀의 오감까지 동원한 것이다.
완벽할 수밖에 없지.
이 순간 나는 이미 미슐랭 셰프와 어깨를 나란히히는 위치인 것이다.
한동안 집중해서 고기를 굽다가, 내가 만족할만한 굽기가 되어서 말했다.


"자, 이제 먹어도 돼."
"오와. 직원인줄 알았어."
"훗, 다 경험이지."

집게로 고기를 집어서 빠르게 배분한뒤에,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느순간 보니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손을 뒤로 가져가서 만져보니까, 어느새 포니테일로 묶여있었다.


"뭐야? 한야, 고무줄 갖고있었어?"
"아니, 머리카락으로 묶은거야. 괜찮지?"
"오오. 고마워."


이러면 먹는데 더욱 집중할 수 있겠다.


나는  익은 고기 한점, 아니 두점을 넣고 밥 조금에 마늘과 된장, 김치까지 그동안 먹고싶은거 싹다 넣어서 쌈을 쌌다.
무한히 생성되는 침을 목으로 넘기고, 입을 벌렸으나,


"아악."

생각보다 쌈이 너무 커서 입에 안들어갔다.
씨이, 난 왜이렇게 입이 작을까.
이미 싸놓은 쌈을 풀기도 그렇고, 괜히 내 앞접시를 어지럽히기도 싫어서 난 울분을 머금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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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아, 아-해."
"뭐?"
"이거. 쌈을 너무 크게 쌌어. 내 입에 안들어가니까 입벌려."
"……."

입을  벌려서 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걸 보여주자, 뭐 그딴 병신같은 이유가 다 있냐는 듯한 녀석의 표정.
그런 눈빛을 무시하고서 몸을 일으켜 녀석의 입에 쑤셔넣는다.
녀석한테도 조금  모양인지 힘겹게 씹어삼키는걸 보니, 난 저거보다 한 두배는 작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흐응."
"……."

한야가 역시나 묘한 표정을 짓고있다.
알만해, 무슨 생각인지.
근데 어쩔수 없었어.
녀석의 손에 옮겨줄수도 없었거든.
역시나 조금 과하게 싼 쌈이라, 손을 떼면 바로 터져나올것 같았단 말이야.
나는 빠르게 쌈을 하나 더 싸서 한야에게 말했다.

"한야, 너도 아- 해."
"……아."


입에 뭐가 있으면 말을 안하겠지.
이것은 한야에게 채우는 일종의 재갈이었다.
나도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상추를 반으로 찢어서 작게 쌈을 만들었다.

정말로 맛있는 재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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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세요!"

우리는 고깃집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최종적으로, 고기는 16인분을 먹었고, 공기밥을 18개, 냉면까지 비냉, 물냉을 먹었다.
우리의 자리엔 잔반조차 남기지 않았다.
깔끔한 올킬.


"흐흐, 배부르다."

얼마가 나왔는지는 구태여 말하지 읺겠다.
다만 고깃집 사장님이 상당히 좋아할정도의 금액이 나오기는 했다.
저렇게 배웅나올 정도니까 말이다.
알바생도 의외로 내가 제일 많이 먹어서 놀란 눈치였다.
먹방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라고.


확실히 나중에 먹방이라도 하면 엄청 떡상하기는 하겠는데.
지금 내 모습이 유명해져서 좋을것 없으니 그런짓은  할테지만 말야.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끝나고, 흡혈귀라는 개념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사냥꾼도 필요 없어질때면 또 모르지.

"진짜 많이 먹는구나."
"흐으, 내가 좀."

흡혈귀로 변하고나서 좋은점은, 일단 맛있는걸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원래 이렇게 많이 먹는건 즐기지도 않았고, 필요도 없었으며, 애초에 할 수도 없었다.
변하고나서 몇달간은 맛있는걸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이 더 컸지만 말이다.


우리는 한야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정리해둔 일기장은 내일이나 모레쯤 아빠가 돌아오시면 회수하는걸로 했다.
그동안 한야가 읽을것도 있어야 하니까.

느긋하게 밤길을 걸으며, 우리는 평소같은 대화를 나눴다.


"근데 너,  없다고 집에서 하루종일 딸만 치는거 아니지?"
"뭔 개같은 소리냐."
"아니, 그동안 계속 집에 같이 있었으니까. 혼자 있을 시간 부족했을것 아니야? 나는 이제 학교도 안다니고 있고."
"내 성생활은 내가 알아서 해."
"그래, 뭐. 청소만 제때 하면 괜찮아. 언제 한번 갔는데 휴지통에 휴지가  많이 차있으면 끔찍할것 같아서. 계속 실버한테 신세질 수도 없을거고."
"청소는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마. 시발, 걱정도 팔자야."
"내 집이니까 걱정하지 새꺄."
"니 집은 아니지, 월세니까."


…같은 이야기다.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으니 꽤나 높은 수위의 대화가 오고간다.
이것저것 집담을 떨다보니, 지혜에 관한 주제로도 대화가 튀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그 패밀리어. 지혜한테 네 정체를 숨길거지? 이제는 암시도  통할텐데."
"글쎄, 나도 밝히고는 싶은데. 타이밍이 좀."
"타이밍은 얼어죽을, 그냥 밝히기가 무서운거 아니냐?"
"흐음."

좀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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