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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화 〉전야제 (70/101)



〈 70화 〉전야제

지혜의 집은 생각해보니 처음인것 같은데, 애초에 남자였던 내가 아는 여자애 집에 갈일이  있었겠는가.


"고마워, 바래다줘서."
"여기가 집이야?"
"응."


지혜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확실히 건물이 존재했다.
건물이 있음을 인지하니, 그제서야 '아, 저기에 건물이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것이 인식저해로구나 싶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그래, 잘가."


지혜에게 손을 흔들어준뒤에 몸을 돌렸다.
그녀의 집에도 이제 우리집에서 쓰는거랑 비슷한 강도의 결계술이 펼쳐져 있어서 안심했다.

대 흡혈귀용 인식저해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고.
계속 드는 생각인데, 인식저해는 거의 만능이다.
그래선지 사냥꾼의 세계에선 가장 대중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흡혈귀용 인식저해는 극비사항이기때문에, 원래는 흡혈귀가 존재를 아는것조차 허용되지는 않는댄다.
하긴, 인식저해의 존재는 아예 존재 자체가 들키지 않는편이 좋다.
애초에 존재하는지 모를 기술에는 경각심을 품지 못하니까, 인식저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효과가 더욱 좋다는 이야기다.

"아, 그러고보니 근처에 한야네 집이 있지않아?"
"그럴거다. 한 10분 거리에 판자촌이 있으니."


게다가 다행인건, 지혜가 사는곳이 하루살이랑 가깝다는 점이었다.
여차할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갈 수 있겠지.
뭐, 지혜를 건드릴만한 흡혈귀도 근처에 없을테고 말이다.
하루살이는 그래보여도 꽤나 억지력이 되어주는 모양이다.
힘들여 죽여도 하루 지나면 되살아나는, 까다로운 실력의 사냥꾼이니까.
애써 잡더라도 한야라면 피를 빠는것도 의미없고말야.


"온김에 만나고 갈까?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고 말야."
"흐음, 그러지. 슬슬 방정리도 해줘야할거고. "
"방정리…."


하긴, 방을 정리할 필요가 느껴지기는 했지.
여기저기 잡동사니랑 표지없는 책, 종이들, 그런게 너무 많았으니까.

"한야는 그런거 잘 안하는 편이야?"
"안 한다기보단, 못 하는거지."
"허어."

방 정리를 못하는 사람은 있다.
마치 한세찬처럼 누군가 닥달을 해야만 방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하고싶어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게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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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야의 집은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위치도 알고 있었으므로 찾는것은 어렵지않다.
슬레이트 지붕의 한층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사람 지나다니기에도 조금 좁다고 느껴지는 골목, 여기저기 이어진 빨랫줄에 널려진 빨랫감들.
그 모습이 어쩐지 이 동네만 50년 전의 시간에 멈춰있는 듯했다.

"야, 거긴 다른 사람 사는  아냐?"
"빈집이야. 여기 넘어가면 빨라."

지름길이란 말인가.
역시 한두번 와본 솜씨가 아니군.
그렇게 골목을 걷고, 좁은 계단을 오르고, 가끔은 벽을 타넘기도 하면서 한야의 집에 도착했다.

"여기는 길만 돌아다녀도 미로네."
"그만큼 인식저해도 강력하지."

그래, 그럴것 같다.
따로 인식저해를 걸지 않더라도 아마 처음 오는 사람은 그냥 길을 잃을걸.


똑,똑.

"누구세요오-"
"나다."
"오, 사형! 오랜만이네. 열려있으니까 들어와!"
"하아, 열어놓지 말라고 했잖아."
"괜찮아, 나갔다온지 얼마안됐어."

세찬이가 한숨을 쉬면서 문을 열자, 한야가  전에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벽에 다리를 올리고 거꾸로 누워서 무슨 만화책을 보듯이 일기장을 읽고 있었다.
거기다 감자칩과 콜라까지 옆에 끼고 있는게 너무나 익숙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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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야의 사적인 모습을  나는 왠지 그녀라면 이럴것 같더라 하는 상상이 거의 정확히 부합하자 살짝 웃음이 나온다.

"한야, 반가워."
"어?"


그녀가 나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뜨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곤 일기장을 보았다가 날 보기를 번갈아 몇번 하더니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릴리?"
"…. 응, 그래."


다들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됐군, 뭐.
이제 너무 익숙한게 문제야.


그러자 한야가 신기하다는 듯 다시한번 일기로 시선을 내렸다가 내 얼굴을 확인한다.


"푸흡, 재밌네."
"무슨 소리야?"
"하하하! 그게 말이야."

그녀는 일기장을 들고서 조금 흔들며 말했다.


"지금 네가 나오는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어서."
"일기에 날 썼어?"
"응! 그 부분이 제일 재밌던데?"
"흐음, 그건 다행이네. 뭐라고 썼길래?"

어쩐지 궁금증이 생겼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썼을까?
내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한야가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시를 낭독하듯이 일기를 읽었다.

"릴리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나비를 잡겠다며 꽃밭을 뛰어다녔다. 당황스러웠다. 나비를 잡지는 못했다."
"……."
"크큭, 아. 그때로군."

한세찬이 듣자마자 웃음을 흘렸고, 나는 당황했다.

아, 그부분이야?
그걸 써놨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기에 쓰다니, 대체 뭐라고 썼는지 나도 봐야겠어.


"나도 좀 봐도 될까?"
"그래, 같이보자!"

옆에서 본 일기장 사이엔 그림이 몇장 끼워져 있었다.
가장 위에 있던것은 내가 와인병을 붙잡고 해맑게 웃고있는 모습이었다.
구석엔 '얘가 나보고 언니래!!'하고 외치는 동그란 캐릭터까지 그러져 있었다.


그건 내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모습.

그후의 일을 기억하는 내게 그 모습은 내 얼굴로 순식간에 막대한 양의 혈류를 돌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이거는 네가 그린거야?"
"응.  그림그리는 것도 좋아하거든."
"생각보다 재주가 많네, 한야는…."

게임도 잘하고, 머리도 잘 만지고, 그림도 잘그린다고?
심지어 전투능력도 꽤나 수준급이다. 중요한데서 덜렁대서 그렇지.
와우, 이거 완전 괴물이네.

게다가 내가 나와서 진상부린 부분만 넘기면 꽤나 세세하게 어떤 적과 어떻게 싸웠으며, 어떤식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해 쓰여있었다.
일기보다는 보고서나 분석서 같달까.


"으음, 이게 일기야? 꽤나 자세한데."
"얘 일기는 보고서의 역할도 겸해."
"그렇구나."
"헤헤헤,  쑥쓰러운데."

확실히 이런거라면 보고서로 쓰일수도 있겠다 싶다.
필요한 경우엔 그림까지 따로 그려서 이런 형태의 적은 이런 부분이 약했고, 이런 식으로 공격했다.  그런 정보도  쓰여져 있다.
뭔가 설정집같은걸 보는 기분이라 신기하고 재밌네.


"그런데 사형은 왠일이야?"
"아, 정리좀 해주러 왔다."
"아하? 그런거였구나? 고마워!"


한야가 침대에서 일어나 일기를 책장에  꽂아둔다.

"그런데 뭘 정리해야 하는거야?"

기묘하다. 분명히 정신이 사나운 공간인데, 막상 치우려고 보면 뭘 건드려야   모르겠다.
정리가 되어있음에도 정리가 안된것처럼 보이는 상태.
이것도 일종의 인식저해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야 제출할 자료 정리지."
"자료정리? 어디다 제출하길래?"
"당연히, 이녀석의 스승님이지."

그건 우리 아빠라는 말인데.

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침과 동시에, 번개와 비견할 속도로 쏘아진  오른손이 방금까지 한야가 읽었던 일기장을 낚아챘다.

"이건 압수."
"오히려 그건 무조건 제출해야해."
"싫어! 나 취해서 지랄한걸  아빠한테 보고하는거야!"
"성찬식 포도주가 흡혈귀에게 끼치는 영향력의 보고서니까."
"이, 이익!"

그건 그렇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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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보여줄 자료를 정리하느라 수많은 한야의 일기를 읽게 됐다.
하루에도 10장씩 쓴 일기가 있는가하면, 아예 일기를 쓰지 않은 날도 있었다.
개중에는 이걸 하루만에 했다고? 싶은 대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버려진 수감시설을 인테리어해서 요새겸 '목장'으로 운용하는 시설을 단독으로 파괴한 업적이 매우 자세하게 쓰여있어서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회귀능력을 이용, 흡혈귀들의 전력을 끝없이 갉아먹으며 괴롭혔고, 결국 경계 취약점을 드러내 다수의 사냥꾼들과 함께 토벌전을 실시했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판타지소설이 따로 없네.

"그런데 이 목장이란게 뭐야?"


내 과거 기억속에서도 목장이 어쩌구 했던것 같은데 말이다.

"이름대로지. 사람들 데려다가 가둬놓고, 피빼고, 번식시키고. 목장에서 하는짓 사람으로 똑같이 하는거."
"어…. 그럴것 같기는 했어. 음."


이름부터 조금 노골적인 그런게 있었다.
그럼 12년전 그때 아빠가  찾지 못했다면….

어우, 끔찍하군.


나는 몸서리를 치며 일기를 내려놓고 다시 다른 일기를 찾으려 눈길을 돌리다, 낡아 보이는 일기를 발견했다.
책상 밑에 처박혀있어서 그런지 먼지도  붙어있고, 누르스름하게 종이가 변질되어 있었다.

"이거는 뭐야?"
"오래된 일기는 별로 안 봐도 괜찮아. 필요 없으니까 안 가져갔겠지."
"대충대충하네. 중요한거면 어쩌려고."


나는 일기를 펼쳐보려했으나, 젖어서 눌러붙은건지 잘 펴지지도 않았다.

"야, 이거 눌러붙었다."
"그럼 버려야지. 가져와."
"그래."

난 그 일기장을 세찬이에게 휙, 던진다.
그러자 일기장이 펼쳐지며 페이지 사이에서 뭔가 펄럭이며 떨어졌다.


"어?"


떨어진것은 낡은 종이.
눌러붙은 일기 사이에서 운좋게 눌러붙지 않은 부분에 들어있던 것인듯 싶다.


"이게 뭐야?"

세찬이가 그것을 쥐어들며 눈쌀을 찌푸린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뭔데?"


난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종이의 내용을 확인했다.
한야도 궁금했는지 세찬의 뒤로 붙었다.

그것은 사람의 그림이었다.




성숙한 느낌을 주는 살짝 올려진 눈매, 미끄러지듯이 이어진 코, 조금 작은듯 하면서 예쁜 입술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있는 여인의 초상.


"오, 릴리다. 이건 검은머리네."
"……."


그래,  자세히 볼것도 없이 나와 닮았다.
조금 더 성숙한 느낌에, 머리도 장발이 아닌 단발이었고,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느낌이 상당히 다르긴하지만, 이목구비의 특징은 분명히 나나 여동생을 닮았다.
그림솜씨가 상당하네. 한야.
거의 사진이야.

"검은 머리의 릴리스.... 너는 대체 이런걸  그린거지?"
"어? 나도 모르지, 사형.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린건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는 알수 있었다.

이건 엄마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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