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꿈?
엄마가 모든 흡혈귀의 어머니라니.
그리고 아빠랑 친구는 흡혈귀 사냥꾼이래.
그래서 그 흡혈귀를 죽였대.
그리고 내 여동생은 원래 그런 흡혈귀가 되어야했는데, 나랑 합쳐져서 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여동생 대신 흡혈귀가 되어버렸어.
덤으로 여자아이까지 되어버렸고.
그럼 이제 나는 엄마이자 여동생이자 김석주이다.
와, 이게 무슨 삼위일체도 아니고.
"이게 무슨 개족보냐."
아니, 개들도 이런 족보는 안나오겠다.
난 분필로 바닥에 슥 슥 관계도를 그려보다가 포기했다.
"잠깐, 그럼 엄마는 대체 어떻게 된거고, 아빠는 또 뭘 숨기고 있는거지?"
아빠가 그랬다.
엄마는 날 낳고 '죽었다.'라고.
그런데 사실 엄마가 릴리스였고, 15년후 세찬이네 부모님을 죽였다?
말이 안된다. 순서도 엉망진창이야.
어딘가 빠진 조각이 있을텐데.
그리고 릴리스의 기억, 단편적이지만 내게는 두개의 퍼즐조각이 있었다.
하나,
이상하고 화려한 저택에서 한 흡혈귀와 나눈 대화.
릴리스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충성을 맹세하던 한 흡혈귀는 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릴리스가 그 흡혈귀에게 한 말은?
둘,
시체더미 위에서 릴리스가 찾던것.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시체를 뒤졌던거지?
제기랄, 본인한테 물어볼 수는 없나.
"혹시 릴리스의 인격도 내 정신속에 있어?"
"릴리스의 인격은 내가 오빠의 정신세계속에서도 상당히 깊숙한곳에 처박았어."
"그래…?"
그런가, 내가 인격을 먹히지 않은건 그녀 덕분인거구나.
"맞다, 목소리. 목소리가 들렸는데, 나한테 릴리스를 봉인하는법을 알려줬었어."
"목소리라고?"
"그동안 정말 힘들었거든, 내가 억지로 그걸 억누르느라. 그래서 이 공간도 많이 좁아져 버렸어. 아마 봉인하는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둘중 하나는 릴리스가 되었겠지.
아니 몸은 이미 릴리스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다 정신마저 릴리스가 된다면 나는 완전히 죽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인가? 공간이란게 딱히 의미가 없을 이 세계가 어쩐지 좁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목소리라는게 대체.
"그 목소리라는게 뭐야?"
"그냥 갑자기 들려왔는걸. 나도 잘 몰라."
"악마사냥꾼인가?"
내가 알기론 아마 악마사냥꾼 말고는 이런걸 알려줄만한 사람이 없다.
아마 그녀였겠지.
의식으로 직접 메세지를 때린다는 것도 그렇고.
나 대신 누군가 받았다는 언급도 했었다.
얘구나.
아무튼 릴리스가 이곳 어딘가에 있기는 한 모양이다.
나는 팔짱을 낀채로 눈을 감고 미간을 좁히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생각해봤자, 지금은 기억나는것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아야하는걸까?
이 모든 일의 끝을 위해서는, 왠지 그래야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도, 내 정신세계임에도 내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영향력을 키울 필요성도 있겠어.
어느새 검은 세계로 변해버린 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줘."
"좋아."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내손을 잡아끌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같은 느낌이라고할까?
실제로 내게 사촌동생같은 건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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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그래? 재미없어?"
"……."
우리는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고있었다.
그래, 기억이 난다. 이 놀이터도 자주 놀러갔었지.
비록 이곳은 여동생이 구현해낸 공간이었지만, 나 역시도 이 공간을 기억하니 만들어내는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생각해보니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런데 나와 여동생은 서로 너무 정확하게 똑같은 무게였기 때문에 솔직히 시소가 너무 균형잡혀있어서 조금 지루할 정도다.
그리고 날 더욱 지루하게 하는 것은,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뭔가를 쏟아내려는지, 계속 어릴땐 어떻게 놀았느니, 어떤장소를 보여줬느니, 무슨 말을 했느니, 하며 떠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시계가 있었다면, 또는 이 세계에 낮과 밤이 있었다면 3일 밤낮은 지났을것 같다.
나는 결국 시소에서 내리며, 조금 짜증섞어 말했다.
"우리는 놀기만했냐?"
자신에게 기울어버린 시소에서 일어난 그녀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린 어렸어. 당연히 자주 놀았지."
"씁, 그건 그렇네."
그녀가 또 장소를 바꾸었다.
이번엔 학교 근처의 작은 문방구.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냉장고의 문을 열어 아무거나 꺼내들며 내게 건네는데, 그 아이스크림은 이미 아이스크림시장에서 종적을 감춘, 정말 흘러간 세월을 깨닫게하는 그런 아이스크림이었다.
초콜렛에, 사탕에, 애들 좋아하는건 다있었지.
이거 참 좋아했는데.
다먹고나서 피리까지 불수 있었던 갓ㅡ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거 좋아했었지?"
"어릴땐 그랬지."
난 추억에 잠겨 그걸 받아들었다.
꿈속이라 진짜 뭐든 가능한건가.
어릴때야 좋아했지만, 23살 먹고나선 그렇게 좋아할 정도는 아닌데.
그런데 냉장고 속엔 다른 아이스크림은 없었다.
다 그 별난 아이스크림뿐이라니.
나는 변했지만, 얘는 하나도 변하지 못했구나.
"다른건 없어?"
"오빠는 이거밖에 안먹어봤잖아."
"그랬던가."
듣고보니 그랬던것 같기도 하군.
어릴땐 아이스크림 자체를 많이 먹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자주 먹지 못하니까, 저런거만 골랐었겠지. 한개 안에 다 들어있는 맥가이버 칼 같은 아이스크림.
나는 극도의 상상력을 발휘해, 카페에서 처음 먹었던 맛의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냈다.
내게 가장 맛있었던 음료수. 아마 너도 좋아하지 않을까.
이건 네 몸이니까.
"이건 어때?"
"이건 뭐야?"
"밀크쉐이크."
"흐음…."
내가 건넨 밀크쉐이크를 한모금 빨아낸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외쳤다.
"와, 진짜 맛있다 이거!"
그 모습이 어쩐지 내가 처음 먹었을때랑 비슷해서, 영상으로 남아버린 흑역사를 재생한줄 알았다.
싱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이 내게 참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저 얼굴은 이제 내 얼굴이기도하고, 릴리스의 얼굴이기도하며, 엄마의 얼굴이기도 하겠지.
"오빠, 이런건 더 없어?"
11년동안 그녀는 어떻게 버텼을까.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이 아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나쁜건 릴리스지.
"뭐, 당장 생각나는건 없네."
"아쉽네, 그래도 좋았어. 고마워. 오빠."
"그래."
나는 그녀의 머리를 무심코 쓰다듬었다.
머릿결이 부드럽다.
기분 좋다는 듯이 머리를 대고 있는것이 정말로 여동생 하나 생긴 기분이다.
"에휴. 쉬운게 없다."
"푸흡, 그럼 여기서 계속 있을래? 나랑 같이."
"흐음…. 글쎄."
누군가에겐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뭐, 여자애랑 단둘이 남는 그런 시츄에이션 아닌가.
하지만 이런 닫힌 세계에서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답답할걸.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에 오래 있을수가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면 너한테 새로운걸 보여줄 수 없잖아."
"하핫, 핑계는!"
"안속네."
잠깐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그럼 한가지만 기억해줘."
"한가지?"
"날 꺼내주겠다는 약속, 꼭 지켜. 석주오빠."
"뭐…?"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그녀가 내 볼에 짧은 키스를 하며 어깨를 툭 밀쳤다.
등이 밝아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좀 예쁜것도 입고!"
"뭐, 뭔소리야!"
야, 지금은 상상력이 후달려서 검은 티셔츠 한장이지만, 밖에선 정말 다양하게 입고 다니고있거든!
별로 자의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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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땐 병원이었다.
여동생은….
아, 맞다. 이름도 안 물어봤는데.
그동안 내가 일부러 이름을 묻지 않던 경우가 많아서 까먹고 있었다.
흡혈귀가 되어서 이런 부작용이 생기다니.
나는 이제 뭐라고 불러야될지 헷갈리는 그 입술의 감촉이 아직 볼에 느껴지는 듯해서 손을 올렸다.
뭐야, 뭔가 축축한데.
얼굴을 만져보니, 내가 울고있었던것같다.
나는 눈물을 황급히 닦아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의 무늬, 역시 내 병실이다.
꿈속에서도 보고, 현실에서도 보니까 이게 현실이 맞는지 조금 헷갈린다.
하지만 나를 지켜보는 한 여자의 시선에 나는 이건 현실이구나, 하고 깨닫고만다.
"하아…."
나는 오른손을 들어 팔뚝으로 눈을 가린채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 기계음이 내 고막을 울렸다.
"일어났느냐?"
"당신."
그녀를 볼때마다 느껴지던 압박감은 이제 별로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무슨 카리스마 같은것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머릿속에 직접 메세지를 때려박는 방식이었다란걸 이제야 실감했다.
그 메세지는 내 여동생이 들었던거고.
"이게 뭐죠. 대체. 머리가 이상해질것같아요."
"진실이지."
"이걸 왜 제가 알아야하는건데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감당하기 힘든 기분이다.
뭐, '릴리스가 세찬이네 부모님을 죽였다'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 얽힌 사정까지는 나도 잘 알지 못했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내가 알게된건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가족관계도와, 내게 릴리스가 어느정도 들어있다는 확신만 갖게 되었다.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결국 기억에 남는건 실컷 여동생이랑 놀다가 왔단 거였다.
"그나저나, 네 다른 인격이 너를 보내달라고 너무나 보채더구나."
"하아, 그랬던건가요. 그런데 전 기억상실때문에 상당히 어색했는데."
"기억은 변형될지언정 상실되지 않는다. 기억분리라는 표현이 올바른 표현이겠지."
"아아, 그래요. 기억분리."
대체 내가 흡혈귀랑 엮인게 언제부터였을까.
내 삶이 통채로 부정당한 느낌이다.
이걸 대체 아빠는 내게 얼마나 오랫동안 숨겨온걸까.
"진실은 네 힘을 끌어낼 것이다."
"제 힘을 끌어내서 뭘할 생각이죠."
내힘.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내힘도 아니다. 릴리스의 힘이지.
그걸로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일까.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먼저 사냥감의 모습을 드러내야하는 법이지."
"그래서군요."
이미 세상의 개념이 되어버린 릴리스를 제거하기위해서는 릴리스를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사실, 이미 그 개념은 상당히 희석되어있다. 본래 릴리스란, 여성. 그리고 흡혈귀에게만 환생한다는 개념."
"허."
웃기는 일이다. 나는 여성도 아니고 흡혈귀도 아니었으니까.
악마사냥꾼은 내 왼손을 붙잡으며 호소했다.
"그래서 지금,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것이다. 지금이라면 이 세계에서 릴리스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럼 제 안의 여동생은 어떻게 되는건데요?"
"글쎄, 나도 모든걸 알지는 못한다."
릴리스가 세계에서 지워진다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내 몸은 릴리스의 것이니까.
아니면 내 안의 여동생이 죽을수도 있겠지, 그녀는 릴리스의 환생체가 되어야 했으니까.
아니면 정말 깔끔하게 릴리스라는 개념만 싹 도려질수도 있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단건가요?"
"그렇지."
하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까짓거, 한번 해보죠."
나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께를 쳤다.
원래 심장부근을 치는 동작이었으나 이렇게 변하고나서 바뀌어버린, 그래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감각이다.
기분좋은 울림이 나를 진정시킨다.
"여동생한테 제가 구해준다고 그랬던거 같거든요."
가끔 남자는, 기억나지않는 약속조차 지키려고 하는거다.
그건 남자가 아니라 호구라고?
몰라 시발.
그냥 하고싶어서 그래.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다.
지금 울리는 내 가슴이 엄밀히 말하면 내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성정체성 이전에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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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사냥꾼은 흡족해하며, 곧 연락하겠다며 사라졌다.
홀로 병실에 남은 나는 오랜만에 혼자 남은 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 언제나 사람들과 다녀서 그런지, 이런 고독함은 또 각별한 맛이 있었다.
목욕할때 말고는 언제나 누군가와 있었으니까.
이라, 실버, 유디라, 지혜, 그리고 한세찬.
언제나 어딜가든 이들이 함께했다.
떠들썩하고 들뜨는 분위기도 좋지만, 아주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한 법인가봐.
평소라면 TV라도 틀었을지 모르지만, 안틀었다.
휴대폰도 찾지 않았다.
그냥 생각만해도 너무나 할게 많아서.
지금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딱히 어두운건 아니긴 하지만, 그냥 밤이었다는 얘기다.
밤이라는걸 깨달았으니, 난 창문을 가린 커튼을 열어젖혔다.
달빛이 참 밝다.
정신세계에서 본 푸른 하늘이 떠올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올려다 본 진짜 하늘은 언제였더라.
평소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푸른 하늘이 보고싶은 밤이다.
오늘 아침정도는 아픔을 무릅쓰고 한번쯤 하늘을 올려다 볼까?
"후우…."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잊지 않기위해 중얼거렸다.
일부러 낮은 음을 내며 꾸미지 않고, 온전한 그녀의 목소리로.
"약속, 꼭 지켜. 석주오빠…."
내 목에서 들리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내 몸을 타고 귓가로 들려온다.
그래, 하나뿐인 여동생 부탁인데 함 들어주지 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뭘 지켜줘…?"
어,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닌데.
"릴리야, 혹시 석주가 무슨 약속을 했어?"
"엇."
지혜였다.
"ㄴ,네가 왜 여깄어?"
"응? 빨간머리 사냥꾼이 네가 드디어 깨어났대서."
아니, 왜 집에 안가고?
병원에서 잤어?
"그나저나, 방금 뭔데. 석주가? 빨리 말해봐. 언니 화내기전에."
"ㅇ,왜그래."
"대체 무슨 약속을 했길래, 몇주만에 깨어난 여자애가 그렇게 아련하게 석주를 불렀을까."
"아, 아련…?"
그래, 여동생이 좀 아련한 말투기는 했었지.
생각해보니 '아차'스러운게, 창문열어놓고 하늘보면서 그딴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구나 싶다.
이 시발, 왜 나는 평범하게 혼잣말도 못하는거냐.
애초에 혼잣말 하는게 평범한건 아닌가.
"근데 잠깐만, 몇주라고?"
"그래, 너 지금 4주만에 깨어난거거든."
"뭐라고?"
난 그제서야 옆에서 충전중인 휴대폰의 액정화면을 켰다.
10월 20일.
시발.
"한정가챠 망했다."
"너는 지금 그게 제일 먼저 생각나?"
그럼 뭐가 생각나야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