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꿈?
여긴, 안식처따위의 말랑한 말이 통할 곳이 아니게 되었다.
어느 문을 열어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비명을 지르면서 길을 뛰어다녔다.
왜지? 이런 시체따위야, 아무렇지 않은거 아니었나?
역시 흡혈귀가 되어서 면역이었던것인가?
나는 주변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채 도망치려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세찬이는?"
"글쎄, 여긴 오빠의 기억이야. 나한테 물어봤자 알수가 없어."
세찬이가 죽지는 않았을것이다.
지금도 잘 살아있는걸.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되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11년전의 나도 되돌아갔을까?
"세찬아! 한세찬!"
세찬이의 집 대문은 잠겨있었다.
그때도 잠겨있었나? 아마 그랬겠지.
난 철문을 붙잡고 한동안 흔들어대다가, 담벼락 옆에 놓여진 화분을 발견했다.
가끔, 열쇠를 잊고 나왔을때 이용하곤 하던 화분이다.
나는 곧바로 화분에 발을 올리고 담을 넘으려했다.
"보고있지만 말고 도와줘!"
"못해. 이건 기억이라니까."
"씨발!!"
내가 언제부터 욕을 시작했더라. 기억이 희미하다.
태어날때부터 욕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저 잊혀진건가?
아니면,
누가 잊게 한걸까?
담을 혼자 넘으면서 팔 다리가 쓸려서 피가 나왔다.
따가웠지만 참는다.
그보다, 난 세찬이를 확인해야했다.
"세찬아! 있어?"
녀석의 집은 2층이 있는 복층형 구조였다.
난 예의가 아니란걸 알지만서도 신발도 벗지 않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집을 뒤졌다.
거실, 안방, 화장실, 주방, 침실, 침대밑까지도.
전부 문을 열어가며 확인했지만 1층엔 아무도 없었다.
난 바로 몸을 돌려 2층으로 가기위해 달렸다.
평소 2층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는 했었기에 나와 세찬이는 한번도 들어가본적 없는 그런 장소였다.
문을열자 보이는것은 뭔가 연구하던 흔적이 물씬 풍기는 그런 서재였다.
"세찬아!"
녀석은 책상 밑에서 떨고 있었다.
"서, 석주야…. 이게, 다,다 무슨 이,일….?"
"몰라. 너희 부모님은?"
"ㄷ,다,다른 어른들한테 도,도와달라고…. 여,여기서 저,절대 나오지 말라고…."
불쌍한녀석, 제대로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있잖아.
나는 문을 닫고 세찬이가 덜덜 떨고있는 책상 아래로 같이 들어가서 옆에 앉았다.
"괜찮아, 근처에서 너희 부모님 시체는 못 찾았어. 분명히 도움을 구했을거야."
"그, 그래? 그렇겠지? 여기 있으면 금방 다 끝나는거겠지?"
"그래."
녀석이 진정한 듯 하자, 나는 책상에서 떨어진 책들에 눈길이 갔다.
극한의 상황에서 책따위에 시선이 간다니, 평범한 감성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책에 손을 뻗었었다.
"이건…."
마력식에 대한 연구.
책을 펼치자 난해한 도형과 빼곡한 주석, 각주, 설명등이 난잡하게 이어져있고 전문용어로 보이는 괴상한 단어들로 가득 차있다.
세찬이 부모님들은 연구자였어.
대체 무슨 연구를 했던거야?
그런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랫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런 고민을 방해했으니까.
"여긴 다 해치웠잖아. 왜?"
"이 냄새 안나냐? 신선한 피 냄새야. …. 정말이지 미치게 만드는군, 이런 향이라니!"
"킁, 확실히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네. 그런데 이미 다 뒤져봤잖아. 누가 먹다가 흘린 피겠지."
"아냐, 아냐. 그때도 이런 향은 없었어. 누군가 이쪽으로 온거야."
피냄새라고?
아.
나는 그제서야 내 무릎과 팔꿈치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제기랄, 내가 실수했구나.
나는 책상밑에서 빠져나왔다.
여기있으면 세찬이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으니까.
뭐, 세찬이 부모님은 연구자니까 뭐 이곳에는 흡혈귀를 피하는 결계같은게 쳐져있지 않을까?
그때 이런 생각까지 했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런게 분명했다.
"어, 어디가."
세찬이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 피 냄새때문에 왔나봐. 내가 여기 있으면 들킬거야."
"하, 하지만! 그럼 나, 나는…."
"걱정마. 나도 쉽게 잡히진 않아. 나 몰라? 학교에서 내가 제일 빠르다고."
아아, 그랬지. 어릴적엔 내가 세찬이보다 빨랐어.
결과적으로는 지금도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세찬이는 책상에서 나오지 못한 채 손만을 내밀었다.
그 문을 열지 말라는듯이.
"가지 마."
"쉿."
나는 문을 열었다.
어디로 도망치지?
1층엔 흡혈귀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내가 바닥을 기어다니며 묻힌 피를 핥으며 음미하는것 같다.
1층은 갈 수 없어. 그러면?
나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화분이 놓여진 창문에서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화분을 발판삼아 올라가 창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는다.
좋아, 나갈 수 있겠어.
생각보다 높은데.
아마 더 높은 나무에서 떨어졌을때도 괜찮았으니 괜찮을거야.
하고 최면을 건다.
나무가 정말로 더 높았냐고?
아니.
물론 2층 창문이 더 높았다.
어째든 나는 창문에 몸을 전부 구겨넣고, 가스파이프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착지를….
-탁.
"무슨 소리지?"
"너도 들었구나."
씨발.
흡혈귀가 현관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검은눈의 검은 머리. 둘다 제대로 정리조차 되어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대문으로 달렸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진짜 존나 빨랐다.
이 속도라면 어쩌면 흡혈귀를 따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으악!"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전까진.
"인간 어린아이치고는 제법 빠른데."
"싱싱해서 그런가? 정말 맛있을것 같은 향이야."
내 목덜미를 붙잡은 흡혈귀가 내 팔을 들어 상처를 핥으며 말했다.
"이놈이 특별한 것 같은데."
"그런가?"
그 말을 들은 다른 흡혈귀도, 내 무릎을 핥으며 말했다.
"그런것같네."
"으아악!!"
이렇게 빨리 잡힌다고?
이런 제기랄!
흡혈귀들이 나의 목을 물기위해 얼굴을 가져다댄다.
으윽, 이런 경험을 기억속에서 또 당해야한다니, 절대 사양이야!
태권도 사범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만약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일단 할 수 있는걸 해라. 하면서 생각해.'
'가만히 있는건 아무것도 아니야.'
난 흡혈귀에게 목을 멀리기 전에 먼저 흡혈귀의 목을 물었다.
"으극!"
-콰득.
"크아악, 제기랄, 뭐야?"
"푸하핫! 멍청한놈. 네가 물려서 어쩌잔거냐? 그럼 내가 먼저 먹어도 되는 거겠지?"
"이, 시발. 기다려, 내가 잡았으니까 내가 먼저야. 그게 규칙이잖아."
"그래, 그랬지. 얼른 회복해. 멍청한 녀석아. 크하하핫!"
흡혈귀는 목을 붙잡고 회복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것 같았다.
"제기랄, 왜 회복이 안되는거지."
"네가 멍청이라서?"
"닥쳐."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알것같았다.
어릴적 내 어금니엔 충치치료를 위해 은으로 덧씌운 부분이 있었다.
아마 그것때문이었겠지.
은이빨도 정말로 효과가 있어. 세찬아.
너의 은이빨도 언젠가 써먹어보라구.
"놔, 놔라!"
난 녀석의 손을 때리며 발버둥쳤다.
"아, 이녀석 발버둥이 심한데. 어쩔까?"
"이런 맛을 죽이긴 아까워. 팔다리는 부러트리고 목장에 가져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흡혈귀들은 생각한걸 즉시 해내는 행동력이 있었다.
-뚜둑.
"아아아아악!!"
"입좀 막아. 너무 시끄러워."
"난 지금 손이 없잖아."
"멍청하긴, 아직도 회복 못했냐? 그럼 눕혀."
"시발."
목을 뜯긴 흡혈귀가 나를 난폭하게 바닥에 눕혔다.
충격이 그대로 내장을 때리는 것 같다.
젠장, 너무 아프잖아!
"도, 도와줘!"
난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있는 여동생을 불렀다.
"……."
그러나 그녀는 그저 팔이 부러지는 나를 보고있을 뿐이었다.
-뚜둑.
"으으윽,으으읍!!"
"어린놈이 목청도 좋아. 그래서 피도 맛있나?"
"킥킥, 그럴지도 모르지."
두팔, 두 다리가 전부 부러진 나는 그저 바닥에서 꿈틀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응으으읍!!"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는 날 지켜보던 여동생이, 마침내 나를 외면했다.
개같은 년, 역시 릴리스였어. 저게 내 여동생이라고?
그때였나,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제보니 폭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런 느낌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뭔가가 사라졌다.
뭐가? 뭐가 사라진거야?
-……!
"읍,아아아아악!!"
내 입을 막던 것도 사라져서, 내 성대가 울린 진동이 드디어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멀리 퍼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석주야, 괜찮냐?"
"아빠!"
여동생은 내 시선을 피했던게 아니었다.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구나.
11년전 나를 구해준 아빠의 모습은,
체크남방 안에 목 늘어난 하얀 런닝을 입고 주머니 많은 반바지와 샌들을 신은채,
밀짚모자를 쓴 농부의 모습이었다.
아아, 이것이 정녕 영웅의 복식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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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을 잃기전에, 세찬이의 위치를 말했었다.
아마 아빠가 구출해낼 수 있었으리라.
그 이후, 나는 그 시골에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 기억따위는 제거되었겠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게 매우 익숙한 병실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또 여자아이가 되어있었고.
이걸 이제 뭐라고 불러야해. 여동생의 몸? 릴리스의 몸? 내몸?
고개를 돌려보니, 내 침대 옆에 앉은 여동생의 침울한 표정이 눈에 보인다.
"미안해. 난 오빠의 기억속에선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해."
"……."
"이제 알겠어, 오빠. 기억이 단절되었구나."
"그런가보네."
난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확인했다.
익숙한 천장.
여긴 내가 알고있는 그 병실이군.
"이건 내 상상으로 만들어진건가?"
"맞아. 나는 처음보는 풍경이네."
"그런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날 이후, 오빠는 나에게 다신 오지 않았어."
"모르겠어. 난 기억이 안나."
"후우…. 그렇겠지. 사냥꾼들은 꼼꼼하니까."
"……."
나는 침대끝에 앉은채 내 몸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본다.
발을 움직여본다.
방금전까지 부러졌던 팔다리는 역시 기억에서 돌아오며 전부 나은듯하다.
하하, 잊고있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가? 약간 우울해지는데.
"괜찮아. 그건 단지 기억일 뿐이야."
"그게 문제잖아."
"그래도, 세찬이 오빠랑 오빠는 이렇게 멀쩡하잖아?"
"야, 내가 멀쩡해보이냐?"
난 내 몸을 엄지로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렇지않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댔다.
시선이 왠지 부끄러워져서 눈을 돌린다.
"응, 좋아보이는데? 난 내 모습 맘에 들거든. 오빠는 좋겠네, 그 색깔도 예쁘잖아?"
"공주병."
"오빠도 좋아했잖아, 바보."
"윽."
그건 그래. 사실 좀 내 취향이었거든.
근데 이 모습이 여동생이라면 이제 좀 취향을 바꿔야겠는걸. 23살먹고 여동생같은 여자가 취향이라그러면 사회적인 시선이….
"그런데 세찬이네 부모님은 결국 어떻게 된거야? 네가 죽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찬이네 부모님은 릴리스에게 죽었다.
그때문에 내 허벅지엔 쌍으로 바람구멍이 생겼었고, 한동안 걷지도 못했지.
"아니야, 난 릴리스가 되어야 하는 존재였지만, 릴리스가 된 적은 없어. 그리고 오빠, 내몸은 오빠거잖아. 내가 현실에서 뭘 할수 있겠어?"
그녀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근데 말이 이상하지않나? '내 몸은 오빠거'라니.
맞는 말이긴 한데,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야.
"말 조심해…."
"뭘, 어차피 여긴 나랑 오빠뿐인걸. 여기 올 수 있는것도 오빠 뿐이고."
"내 정신세계니까?"
"그렇지. 이제 알겠어? 여기선 밖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해. 말그대로, 몸에 갇힌거지."
내 몸이 릴리스의 감옥이 된거구나.
게다가 릴리스가 되면 인격이 먹혀야하는데, 난 그런것 같지도 않고.
왜지?
"그럼 대체 우리 아빠랑 세찬이가 죽인 릴리스는 누구야?"
"어휴, 누구겠어."
"누군데."
"오빠, 생각을 해보라고."
"아니 누군데에."
난 여동생의 허리를 콕 찔렀다.
내 약점. 그녀의 약점이기도하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나는 계속 찔렀다.
콕.콕.콕.
"아윽, 그만햇!"
그녀의 반격, 역시 당해주고만 있지는 않는군.
자기몸이라 그런지, 확실하게 약점을 파고들어오는 솜씨가 훌륭하다.
"흣, 아학, 대답하라고!"
"아, 아알았어억! 셋 하면 그만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나 똑같아서 마치 메아리같았다.
바닥에서 뒹굴던 우리는 동시에 옆구리에서 손을 놨다.
"크흠. 릴리스가 나랑 닮았다며? 그럼 누구겠냐구."
"야, 설마…."
에이, 말도 안되잖아.
"우리 엄마겠지."
"미쳐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