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꿈?
나는 여동생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앉혀졌다.
그러자 지연스럽게 그녀가 내 아랫배에 머리를 댔다.
이자세,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내가 한야에게 해준 그 자세다.
여동생의 거꾸로된 얼굴을 보면서 눈을 맞춘다.
익숙해. 어디선가 본것같은 느낌.
이 장소가 된 뒤부터 기시감이 끊이질 않고있다.
그녀의 얼굴로 흘러내린 은발을 그녀가 손가락으로 흔들며 묻는다.
"그런데, 내가 네 오빠란걸 용케도 알아차렸네."
"오빠의 절반은 나니까. 당연한거야."
"그런가."
지금의 내모습을 보면 남자따위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내 절반.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말그대로다.
진짜일까?싶을만도 한데, 이건 진짜라는 느낌이 온다.
"그런데 이러니까 이제 진짜 쌍둥이같지않아?"
그녀가 히히, 웃었다.
으음, 거울을 보는 기분이라 이상한데.
그런데 언제부터 이 얼굴을 '내 얼굴'이라고 인식하게 된거지.
나는 내 얼굴과 내 여동생이라하는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릴리스의 모습이 아니었나?"
"맞아. 그랬지."
그녀가 씨익 웃었다.
"어째서 내가 릴리스가 된거야? 넌 알고있어?"
"설마 그것부터 모르는거야? 뭐, 설명해줄게."
그녀가 내 이마를 가볍게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릴리스는 개념이야."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면서 말을 이었다.
"흡혈귀의 '어머니'라는 개념. 흡혈귀들의 시조. 흡혈귀의 왕이 직접 빚어낸 완벽한 개념이자."
그녀는 어느새 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눈높이가 한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맞는다.
"죽어버린 왕의 빈자리를 대신해야만하는 꺼져가는 불꽃이지."
나는 그 눈빛에 마치 홀린듯이 입을 열었다.
"왕이 대체 뭔데?"
"신이 가장 사랑하는 생물은 인간. 그런 생물의 피를 바라는 존재는 뭘까?"
신이랑 반대되는 개념?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뱉었다.
"글쎄, 악마인가?"
"맞았어."
그녀가 박수를 치며 웃는다.
"흡혈귀의 왕은 악마야. 어쩌면, 악신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고."
"악신이라고…?"
"릴리스는 그들의 근원이니까, 불사성을 가지고있지. 완전한 불사는 아니지만 말이야. 개념을 죽일수는 없잖아? 이미 일종의 세계의 섭리로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릴리스야."
악신이니, 왕이니, 갑자기 뭔가 스케일이 커졌는걸.
원래 이런 스케일인데 내가 몰랐던건가?
그래도 어쩐지 믿음이 간다.
그건 꿈속이라서?
"왕이 죽은 후에, 릴리스의 개념은 오히려 강화됐어. 왕에게 적용되던 법칙이 그의 파편인 릴리스에게 옮겨졌으니까."
"그래서 릴리스는 죽지 못해. 죽어도 환생하거든."
릴리스는 죽지않는다, 죽어도 환생한다.
그리고, 아빠랑 세찬이는 릴리스를 죽였다.
"그럼 나한테 릴리스가 환생했다는 말인가?"
"맞았어! 역시 이해력이 빨라."
"대체 뭔일이야!"
나는 뒷통수를 세차게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걔는 왜 나한테 환생하고 지랄이래? 멀쩡히 잘 사는 남자 몸을 여자로 바꿔가면서?"
"릴리스는 여성체한테만 환생해."
"아니, 그때 난 남자였잖아!"
"그리고 절반은 나였지."
"……."
난 미간을 잔뜩 모으며 여동생에게 물었다.
"너 때문이라는 얘기구나."
"날 데리고 나온건 오빠야."
젠장, 뱃속에 있을때를 어떻게 기억하냐고.
당장 12살때 기억도 안나는데.
"넌 어떻게 이런걸 알고있는건데?"
이어진 말은 나를 경악케하기에 충분했다.
"오빠, 아직도 모르겠어?"
그녀는 슬프게 웃었다.
"내가 릴리스야."
"뭐?"
"정확히는 내가 릴리스가 됐어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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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몸을 공처럼 말은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동생이 내 등을 콕 콕 찌르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오빠, 화났어?"
"냅둬."
이 깜찍한 꼴이 되어버린게 저 깜찍이때문이라니.
어이가 없다.
"화내지마."
"화난거 아냐."
"어휴, 11살이나 더 먹었으면서, 마음은 더 여려졌네."
나는 조금 발끈했다.
내 마음이 여린게 아니라 상황이 너무 개같은거라고.
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만들어낸 담요를 덮고 계속 눈을 감았다.
어떻게해야 깰 수 있는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에잇."
"으힉."
등줄기를 강타하는 이 찌릿한 감각.
대체 어떻게 얼마전까진 나도 모르던 나의 약점을….?
"와하하! 진짜 나랑 똑같아. 이제 간지럼 타는구나?"
"하, 하지마."
"그럴 순 없지. 11년만에 복수야."
"으학! 그, 그만둬!!"
제기랄, 나는 여동생한테도 간지럼으로 업보를 만들었던건가.
하지만 옆구리만 찔러도 남들은 웃어버리는게 얼마나 재미있어?
그때의 나는 웃음전도사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간지럼을 걸고 다녔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땐 간지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줄 몰랐단 말이야!
"우학, 아! 그만해!"
담요를 만든건 잘못이었다.
담요는 오히려 지금 날 구속하는 밧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날 담요위로 껴안고 마구 간지럽힐때마다, 나는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발작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날 놓아준것은 그녀도 나도 숨이 거칠어져 학학대고 있을때였다.
"후우. 이래서 그렇게 날 괴롭혔던거구나. 흐흐…."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간지럼 안탄다고 나한테 얼마나 약을 올렸는데?"
"기억, 안나…."
"그래, 그렇겠지. 다- 잊으셨겠지요, 나랑 약속했던것도. 나한테 했던말도, 나랑 같이 했던것도."
"……."
할말이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약속을 했다고.
12살이면 철없을 적이다.
그때라면 여자아이가 나중에 커서 아빠랑 결혼할래! 같은 헛소리를 할… 수도 있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아니, 12살이면 그건 아니려나.
아무튼 어릴적의 약속이란 그만큼 덧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빠."
가슴이 간지럽다. 대체 뭘까?
뭔가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째서 저 호칭을 들을때마다 가슴한켠이 아려오는거지?
단지 내게 그동안 여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오빠라는 호칭에 목 매달 정도로 내가 여동생한테 긂주려 있었단 말은 아니겠지.
그런거면 나 자신한테 실망할 것 같은데.
"나말야, 원래 죽으려고 했었어. 원래라면 내 인격은 릴리스에게 먹혀 사라질테니까. 그건 죽음이랑 다를게 없으니까."
"뭐?"
"그런데, 오빠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지. 그때 오빠는 마력식을 각성했어."
"내가 마력식을?"
"그 마력식으로 날 '태어나지 않으면서 태어나게' 했어. 놀랍지않아?"
내 마력식이라면, 융합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제대로 패턴 분석도 안되는 마력식을 어떻게 다루겠어?
"그땐 좀 감동이었지."
여운에 잠긴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불신감에 그녀에게 물었다.
"그거, 엄마 뱃속에 있을때 얘기 맞아?"
"물론이지."
"말도 안돼."
내가 자꾸 부정하자, 그녀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빠, 이리와봐."
"ㅇ,왜?"
"오라면 올것이지! 말이 많아!"
"익!"
아무래도 지금 이 꿈의 주인은 그녀였다.
지금의 나는 힘도없고, 상상력도 없고, 기억도 없고, 거시기도 없다.
시벌 뭐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여긴 오빠의 정신인데 왜 이렇게 빈약한건지 알아야겠어."
"으악, 타임!"
그녀는 나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도 그녀랑 보폭이 똑같았기 때문에 따라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여동생이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문 앞에 나를 데려왔다.
어느새 숲처럼 꾸며져있던 공간도 사방이 검은 초기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열어봐. 나는 열쇠가 없으니까."
"열쇠라고?"
열쇠구멍이 보이길래, 열쇠가 있어야겠구나 생각하자마자 손에 열쇠가 쥐어져있었다.
뭐지?
나는 의문을 느끼며 열쇠로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날 감싸고, 세계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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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시골집.
그렇다는건 12살이전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시골에서 떠났기 때문에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어?"
목소리가 낯설다.
변성기 안온 꼬맹이의 목소리.
나는 목울대를 손으로 만져보다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말랑한것이, 마치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것 같다.
"뭐야 이거….."
"이건 오빠의 12살때 기억."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릴리스와 닮은 그녀가 마루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은채 싱긋 웃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려진 모양새였지만.
나는 황급히 바지춤을 늘렸다.
"오! 있어!"
몇개월만이니 내 거시기.
눈물이 다 난다.
초등학생때라 아직 작지만 말이야.
"으, 11년 전으로 와서 처음 확인하는게 그거야?"
"아니. 반가워서그래, 반가워서."
어우, 오랜만에 내걸 보니까 좋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당으로 나왔다.
"이 마당도 되게 오랜만이야."
"그러게. 오랜만이네."
"너도 이걸 봤어?"
"물론이야. 오빠가 보여줬었지."
마당 한구석에는 기다란 나뭇가지에 철사와 고장난 모기장으로 엉성하게 이어만든 잠자리채가 있었다.
보기엔 구려도, 벌레 잡는데는 저만한게 없었지.
"저 잠자리채도 기억난다. 내가 만들었던거잖아."
"처음 만들었을때 나한테 하루종일 자랑했어. 같이 벌레도 잡았고."
"꿈속에서?"
"그래, 오빠한텐 꿈속이었지만."
추억에 잠긴듯한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잠자리채를 집었다.
"기억이 나. 딱 이런 감촉이었어. 여긴 정말 내 기억이 맞나보네."
나는 잠자리채를 휙휙 휘둘렀다.
손에 감기는 감촉이 정확했다.
잠자리채를 쥐고 철문을 나서자, 익숙한 풍경이었다.
논밭, 비닐하우스, 그리고 듬성듬성 사람 사는 집.
이 길따라 40분정도 걷다보면 학교가 나올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20분정도 걸어가면 어릴적 다니던 태권도학원이 있었다.
"추억 돋네 진짜루."
"이 풍경은 기억하는구나?"
"그래. 기억해."
"지금 일어난 사건은?"
"응?"
그녀가 내게 다가와 앞에 섰다.
이번엔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
내가 몇센티 더 컸으니까.
그녀가 내게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오빠, 무슨 냄새 안나?"
"냄새?"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간다.
의식적으로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쉰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향기다.
"피… 냄새?"
그동안 내게 피의 냄새는 자주 맡아볼 기회가 있는 냄새였다.
그러나 여기는 내 기억속. 인간의 감각이다.
흡혈귀가 느끼는 달콤한 향기랑은 다른, 비릿하고 불쾌한 향기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안감이 느껴지며 털이 곤두선다.
그녀가 가장 가까운 집의 대문으로 다가간다.
안돼, 열지마.
"여긴 말이야, 단순한 시골이 아냐."
대문을 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여긴 흡혈귀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의 마을, 유배지, 성역, 사냥꾼의 안식처."
-끼익
대문이 열린다.
끔찍하게 창백한 토막시체가 마당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다.
"였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