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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화 〉패밀리어 (59/101)



〈 59화 〉패밀리어

아르키메데스가 된 기분이다.
목욕하다말고 깨달음을 얻었다는게  비슷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그래. 난 너밖에 모르겠어."

급하게 병원으로 호출한 지혜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와인트리와 정신이 이어진것 같냐고 물었다.
지혜는 핼쑥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 말이 이상하게 나왔네. 이거 다른 의미가 있는건 아냐."
"응?"


뭐가 이상하단 말이지?
내 표정을 보던 지혜가 인상을 구긴다.
하긴, 지혜는 이런 광경엔 별로 익숙하지 않았지.
지하실로 내려온 지혜는 와인트리를 보자마자 바로 바닥에 토했다.
너무 급해서 이런 광경에 대한 그녀의 정신적 면역력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토사물을 치우고 돌아온 유디라를 흘겨보았다.
유디라는 한숨을 한번 쉬고 우리 둘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제길.

"그럼 저 흡혈귀랑 지혜는 완전히 떨어진건가요?"
"그런것같네. 눈앞에 두고도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다면 패밀리어가 아니지."
"흐음."

이상하네. 뭐때문에 와인트리가 나랑 이어졌다는 말인가?
애초에, 쟤 이름이 정말 '와인트리'였을리도 없잖아.
게다가 흡혈귀 끼리 패밀리어라니, 그것도 말이 안되고.
그랬다면 흡혈귀들끼리 죄다 패밀리어 계약을 맺고 절대적인 계급사회를 구축해서 가문을 이루었을거다.

패밀리어 패밀리라니.
와.


나랑 이어진 패밀리어가 3명이니 대충 4인가족이라고 해야하나?
이거 참.

"고개 돌리지 마."
"흐으음…."

와인트리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지혜가 고개를 다시 저에게로 돌렸다.
사실 아까부터 지혜가 계속  얼굴을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유디라가 웃었던것도 이거때문이고.

"왜…."
"저거 본 눈을 씻어야해."
"그걸 왜  얼굴로 해…."
"그야 니가 예쁘잖아. 나쁜거 본 눈은 예쁜걸로 정화해야지."
"……."

그거 진짜 부끄러운 대사인걸….
그런데 정말 절박한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니까 할말이 없다.
그래, 봐라. 봐. 그런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꿈에 나올것같아. 우욱."
"이제  놔줘. 이러다가 나도 네 꿈에 나오겠는데."
"그러라고 보는중이잖아."
"미치겠네…."


지혜의 필사적인 눈빛에 자꾸 시선이 다른길로 샌다….
 얼굴 말고도 예쁘고 귀여운거 많잖아. 뭐, 강아지사진이라든가, 고양이사진 같은거….
난 결국 눈을 바닥에 깔았다.


"니 전화 이제 안받을거야…. 왜 김석주 휴대폰을 네가 가지고 있는데?"
"흐음."


그야 내가 그 김석주니까.
안되겠다.
슬슬 말해야하나.

"그건 말이지…."

그때, 와인트리가 눈을 떴다.


"어, 어머니이……."


마약공급을 끊었더니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역시 흡혈귀.
그정도 마취, 수면제로 범벅이되어서도 금방회복하는건가?
아니면 내 피때문에 그렇게 된걸까.


"정신이 드나?"
"어머니, 어머니이십니까?"

와인트리는 어머니를 외쳤다.
팔다리가 잘라서 신경을 늘어트린채 단면에 은판을 꽂아넣어 회복을 저지해둔채로 복부를 활짝 펼쳐놓은 모습.


한마디로 기형적인 토막 시체처럼 보이는 와인트리가 말을 하는 모습은 꽤나 소름돋는 장면이었다.

"어어어머어어어니이이이???"
"아, 아냐!"


지혜가 경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너 쟤 낳았어?"
"미, 미쳤어? 그럴리가 없잖아!"
"맞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흡혈귀의 어머니이시니까요."


지혜가 더욱 경악한 얼굴로 내 얼굴을 뭉갰다.

"뭐어어어라아아아고오오오?!"
"우아! 아냐! 아니라고! 아니야아아!!!"


시발, 와인트리 이새끼, 도움이 안되잖아!


"너 닥쳐! 묻는말에만 대답해!"
"예, 어머니."


으아악! 시발, 내가 왜  엄마야!
미치고 팔짝 뛰어버리겠다.
지혜가 계속 얼굴을 붙잡고 내 볼을 주물럭대며 '어,어머니?'를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팔짝 뛰지는 못했다.


지혜는 갑자기 조심스럽게 내게 묻는다.


"대체 너 몇살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진짜 나이를 말했다.

"23살이야."
"에,에이. 거짓말 치지 말구요."
"진짜."

엄마라도 걸수 있다. 아, 엄마가 없지.
그럼 아빠라도 걸어야되냐?
물론 완전히 패륜이라는걸 알고 있지만, 그정도로 절박하게 진실이라는것을 보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저런 애가 있을리가 없잖아! 그, 그걸 해본적도 없어!"
"그, 그래…요…?"
"에휴…."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네….
 지혜의 손을 내 볼에서 떼어놓고 와인트리를 바라보았다.
시발, 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하는거냐.


"너, 어째서 내 패밀리어가 된거야?"
"그야 어머니께서 절 권속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난 그런적이 없는데."
"제 몸에 흐르는 피는 어머니의 것. 그러므로 저는 저의 본질이 지워지고 어머니의 것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죠. 그때 어머니께서 제게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기쁜 마음으로 이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머니께 종속된 겁니다."
"그게 말이 되나…."
"그야, 당신은 모든 흡혈귀의 어머니이시니까요."


난 이번엔 펄쩍 뛰었다.
지혜의 손이 떨어져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라고 하지마!  널 낳은적 없어! 다른 흡혈귀도!!"
"그렇다면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

젠장.
내 호칭을 왜 내가 정해야 하는거지.

"리,릴리…."
"알겠습니다. 릴리님."


결국 김석주라는 말을 꺼내진 못했다….
지혜가 안그래도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얼어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김석주라고 말하면 지혜는 정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시발, 괜히 불러냈군.

"그럼 대체 어머니란게 뭔지 설명해봐."
"어머니는 어머니죠.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모든 흡혈귀의 근원같은 존재이십니다."
"돌겠네."


하긴, 어머니가 되는덴 이유가 없다.
그냥 애가 있으면 어머니라고 불린다.
쟤가  뱃속에서 나왔을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럼 넌 대체 누구야? 어째서  알지?"


진짜 내 자식은 아닐것 아닌가.
난 동정인데, 쾌락없는 책임이라니. 절대 인정 못한다.
아니지, 지금은 동정이 아니라 처녀인가? 시발. 모르겠다.
처녀 수태라니, 내가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그리고 유디라도 내 정체를 바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사실은 지금도 유디라는 릴리스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눈치다.
그런데 가문에도 들지못한 흡혈귀라던 와인트리가 어째서 날 이렇게 잘 아는건가?

"릴리님께서 가문들을 배신하던날, 저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배신? 그게 대체 무슨 일이었는데 그래?"


에이샤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자꾸 배신 배신 거리니 내가 배신자가된것같아서 기분 좀 더럽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냐 대체.


"당신은 좌석에 수많은 가주들을 죽이고, 종적을 감췄죠. 모든 흡혈귀들이 당신의 배신에 통탄했고, 다가올 멸망에 절망했습니다."
"릴리스가 그랬다고?"

와인트리의 옆에서 녀석의 심장에 대형 말뚝을 댄 세찬이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예. 미처 도망치지 못한 가주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겁니다."

조금 살벌하다.
근데 왜 흡혈귀의 어머니라면서 릴리스는 자기 자식들을 죽인걸까.


"왜 그랬대."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릴리님께서 종족의 멸망과 죽음, 쇠락을 원했다는 것만은 전달이 되었죠."
"허, 참."

대체 동족들을 죽이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을까.
릴리스도 오래 살아서 미쳐버렸던걸까?


"그럼 너는? 뭘했길래 추방당했지?"
"비술을 훔치려고 했습니다."
"왜?"
"저 역시 흡혈귀들의 멸망을 바랬기 때문이죠."

와인트리는 내가 좀  이야기라하라는 듯한 제스쳐를 보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상당한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몸을 맡길 가문조차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가주들을 배신한 그때부터, 흡혈귀들은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단지, 천천히 멸망하기보다는 확실하게 불타오르며…. 인간들에게 깊은 손톱자국을 남겨서, 죽더라도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새기면서 죽기를 원했죠. 어머니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떨어지는걸 기다리는것과 같습니다."

관심병 말기로군.
대체 그게 무슨 이익이 있길래 그랬대.
녀석은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실패했지만요. 역시 좀비화의 비술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 진짜 좀비였으면 바이러스같은 실체가 없으니 감염되면 막을 방법이 없다. 순식간에 전부가 좀비로 변했겠지.
광견병의 변종이었으니 내 몸뚱이를 사용해서라도 백신을 만들어낸 것이지, 만약 정신적 감염이 일어나는 진짜 좀비화의 비술이었다면, 아주 골치아팠겠지. 모든 사람에게 정신방호를 걸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없었으면 꽤 상황이 복잡해지기도 했을걸.
감염자들이 그대로 사회에 노출되었을 테니까.
신종 바이러스 발견! 이런 이슈는 흔한게 아니잖아? 상당히 많은 기사가 나왔겠지.
아마 덮는것도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감염자를 전부 죽여버릴수도 없다.
사망자 처리 비용이 더 쎄니까.

"어째든 흡혈귀들은 다들 죽는다는 얘기야?"
"그렇습니다. 흡혈귀들에게 당신이 없다면요."

오!
그럼 흡혈귀 사냥꾼들은  실업자가 된다는 얘기군.
흡혈귀들은 다 죽을거니까.

"그건 흥미로운 얘긴데. 다 말해."


한세찬이 눈을 빛냈다.
녀석은 흡혈귀를 말그대로 뒤지게 싫어하니까 그럴만도 하다.
딱히 돈 벌려고 사냥하는게 아닌 놈이니까 말이다.
돈 벌려고 사냥하는거였으면 이미 부자였겠지.
흡혈귀 잡아서 번 돈을 그대로 흡혈귀 사냥하는데 쓰는 녀석이다, 한세찬은.

"더는 잘 모릅니다. 어째서 우리가 멸망하는지…. 그저…. 그렇게 모두가 알고 있을 뿐이죠."
"정말 모르나?"
"모릅니다. 릴리님."


흠, 정말 모르는 것 같다.
정작 중요할때 도움이 안되는구만.

나는 흡혈귀가 왜 그렇게 나한테, 내 피한테 집착하는지 대충 알게 된것같았다.
확실히 릴리스는 그냥 가주급 흡혈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 그냥 흡혈귀들이랑은 다른존재….
악마사냥꾼의 말대로라면, '격'이 다른 존재라고 해야할까.


"그런거였나."

나는 다시한번 내 몸땡이에 감탄했다.
그리고 지혜가 내게 묻는다.
여전히 와인트리쪽을 보고 있지는 않다.
계속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쟨 어떻게 할거야….요."
"그냥 반말해. 동갑이라니까. 그런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아,알겠어. 저거 네 패밀리어라며. 이제 네 맘대로 할 수있는거 아니야?"
"뭐, 어째든 팔아치울 생각이었는데."

자그마치 최소10억인데, 내가 그걸 포기할성싶냐.
일단 튼튼한 문짝과, 욕조가 있는 드림하우스를 위해서라도 돈은 벌어야한다.
그런데 지혜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너, 그래도 쟨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윽."

대체 무슨 논리지.
저런 아들 있고싶지도 않고, 난 감당도 못해.


"아, 혹시 아버지는 누구야?"
"너 전혀 안들었지."


내가 낳은게 아니라니까, 미치겠네.
지혜는 땀을 닦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아니, 흡혈귀들의 어머니가 있으면 아버지도 있을것 아니야?"
"흡혈귀의 아버지는 없어."

내가 그거 그럴듯한 논리이긴 한데. 하고 생각할때,
대답은 의외로 유디라에게서 나왔다.

"이천년전에 살해당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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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흡혈귀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모든 흡혈귀들의 왕.
흡혈귀들의 근원, 그자체라고 불리우는 존재.
그런 자에게 불사성이 있는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까?
그는 죽여도 죽지않고, 죽어도 되살아나며, 결코 늙지 않고, 결코 굶주리지 않는 자였다.


"그런 녀석이 왜 죽은거래요."
"강제로 격을 끌어내려진거야."

어떤 모종의 방법으로, 왕은 사냥당했다.
그후 흡혈귀들은 모두 사회의 이면으로 추방당했으며,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켰다.

"이것도 전설이긴 하지만. 어머니라고 불리던 릴리스도 있었으니 사실 진실이 아니었을까 싶긴 하네."
"흐음…."

흡혈귀의 왕이란, 흡혈귀들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거였을까?
어쩌면 비슷한것 같기도하다.
그러니 꿈속에서 릴리스는 왕따위 의미없단 식으로 얘기한거 아닐까?
이미 진짜 왕은 죽었기 때문에?

흠, 잘 모르겠다.
릴리스한테 물어볼수도 없고. 갑갑하네.
어쩌자고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흐윽, 괜히, 괜히 나왔어. 석주 얼굴이라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안."


지혜는 병원 밖으로 나오자 울음을 터트렸다.
안에서는 꽤나 참은 모양이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주려 했는데, 손을 낚아채였다.


"멍청이, 누가 눈물을 그렇게 닦아."
"으응…?"

내가 또 뭔가 잘못한건가…?
손수건을 받아간 지혜가 눈가를 찍어내듯이 눈물을 닦는다.
눈물을 닦아낸 지혜가 손수건을 쥐고는 조금 웃었다.


"화장 번지잖아…. 진짜로 화장같은거 하안번도 안해봤나보구나."
"으, 으음…그래."

몰랐지, 여자애들은 저렇게 눈물을 닦는구나.
불편하겠어.
지혜가 눈물을 닦아내는 걸 보고 있으니 그녀가 머쓱한 표정으로 손수건과 함께 말을 건넨다.

"하아…. 릴리,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어, 어어? 물론. 말만해."
"너희 집에서 하루만 재워주면 안돼? 오늘 악몽 꿀것 같은데."
"……그래."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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