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패밀리어 (57/101)



〈 57화 〉패밀리어

"몇달전, 친구분들과 이 카페에 오셨을때 영상이 찍힌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영상에 찍혔다구요?"


내가 여기 온게 딱 두번이다. 아마 지혜랑 다빈, 그리고 세찬이까지 모여서 마셨을때나, 나 혼자 밀크쉐이크 마시러 나왔다가 사냥꾼에게 호되게 당해서 팔한짝 날아가고 입원했을때 정도.

음, 그땐 한모금밖에 못 마신 밀크쉐이크가 너무 아까웠지.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일부러 인식저해 봉인구인 목걸이를 끼지 않은채였으니, 찍혔을리가 없다. 그땐의식적으로 인식저해를 켜고끄지 못했으니까 말이지.
뭐, 지금도 끄는건 겨우 카메라에 잡힐 정도로만 조절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 자동문을  마음대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지.
수련의 성과가 있다.

그럼 당연히 애들이랑 같이 있을때겠군.


"보시죠."
-네, 이거 진짜 맛있네요! 여기 되게 잘 만드나봐요!

…..
어, 내 목소리가 이렇게 컸어?
많이 쪽팔린데.


근데 목소리 뭐야….
내 목소리 원래 저래?
내가 듣는 내 목소리랑은 또 느낌이 다르잖아?
안그래도 성대 울릴때마다 좀 닭살인데 미치겠다.
완전히 타인의 목소리야.

"아아, 음. 크흠. 좀 부끄럽네요."

댓글도 좀 가관이다. 여신은 니미, 닭살이  돋는다 새끼들아.
나도 이 몸이 예쁜건 알지, 아는데, 어휴….
날가져요는 무슨, 줘도 안가져. 새끼들아!
뭣 모르는 애들이 보면 천상 여자니까 뭐. 내가 이해한다.
이해해야지.


그나저나 나 연기  되네.
이쯤되면 릴리 그 자체다.
세상에 없던 인격을 창조했으니까, 거의 이중인격으로 봐도 되는거 아닐까?
영상에 나온 나는 완벽히 타인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러 힘들게 낮은 음으로 내는데도 저런 느낌이란 말이냐…?


내 생각을 끊은것은 박광식기자의 말이었다.

"저기,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거였습니다."

기자는 영상을 조금 앞으로 땡겨서 내가 목걸이를 차기 직전으로 가져갔다.


"영상이 시작되는 부분. 당신이 목걸이를 차기전에 조금 흐릿해지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비슷한 현상이 여러번 당신에게 관측됐어요."
"모르겠네요.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일단  정보는 최대한 숨기며 의도를 파악한다.
지금 아쉬운건 내가 아니니까.
뭐, 겨우 밀크쉐이크 먹는거 도촬  당한걸 가지고 무슨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날 찍은 사진이랍시고 보여준 것은 이상한 배경사진뿐.
내가 연상될 건덕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이런 현상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것 없습니까? 아니면 비슷한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던가…."
"그런게 궁금하신거군요. 그런데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요."


계속된 시치미.
결국 기자가 참지못하고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흐음, 그럼 이 영상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Cctv영상이었다.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한세찬이었다.
녀석은 급하게 카페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근데 그게 영상의 끝이었다.


뭐 어쩌라는거냐는 듯이 기자를 쳐다보니까, 말없이 다음영상을 재생하는 그.


"…….."

아, 솔직히 이건 좀 그렇네.
빼박이다.

세찬이가 결계를 여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

"이분은 잘 아시는것 같던데요."

기자는 내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자, '역시'하며 반응한다.
허, 내가 당황한 포인트는 그게 아닌데.
한세찬씩이나되는 사냥꾼이란 녀석이 인식저해조차 생각하지 못했다는게 놀라워서 당황했을뿐.

사냥꾼 8년 했다면서.
그 짬 다 어디로 먹었냐?
평소엔 나한테 그렇게 갖은 꼽이란 꼽은  주더니 말이다.
흐흐, 세찬이 꼽줄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좋아져서 표정이 풀렸다.
나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말해줄게요. 근데 여긴 좀 그러니까 따라와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 회심의 영상으로 주도권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기자도 긴장이  풀렸는지 옅은 미소까지 흘리고 있었다.
음, 어떻게할까. 일단 이건 내일이 아니니까 세찬이나 불러야겠다.
나는 그를 데리고 걷다가, 어디 둘이 뭔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장소를 찾았다.
그러니까, 대충 최면을 걸든가, 기절시키고 기억을 만지든가, 여하튼 이것저것 하는데 주변의 방해따위 없는곳.
게다가 밤에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고, 얼마나 있어도 문제가 없는곳.
그리고 귀찮게 녀석이 도망칠 시도를 하지 않을만한 곳.

우리집은 일단 안된다. 지혜때문에. 으윽, 이놈의 가시나.
계약좀 풀지, 대체 뭐 그렇게 집착하는거람.
어차피 때 되면 다 말해주려고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날 감시하면 오히려 더욱 타이밍 잡기가 힘들잖아.

보통 패밀리어계약은 피계약자입장에서 풀어달라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강제로 풀어낼수도 있지만, 정신에 데미지를 준다.
그야말로 흡혈귀한테 좋은 조항은  들어있는 불공정계약이다.

그런데 지혜는 그 위험한 계약에 자신의 정신을 볼모로 잡히고는 겨우  위치따위 알아내는데 써먹는중이다.

정말 대단한 집착임이 틀림없다.



"여기는…."
"들어가시죠."


그래서 나는 근처 모텔을 들어왔다.
음, 모텔은 처음인데, 뭐, 호텔이랑 다를게 있나 싶다.
호텔은 옛날에 민석이랑 놀러가서 잡아본 적 있었으니까.

"어, 여기는…."
"둘이서만 얘기하기엔 이만한데도 없지 않나요?"

아무래도 없는것 같은데.

"아,아아,아닙니다. 그렇죠. 예. 별로 이상한 생각은…."
"뭐가요?"

기자가 뭔가 꺼리는  했기에 나는 기자의 등을 떠밀었다.
머리가  시원해보이는 스타일의 숙박업소 주인이 뭔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아가씨, 몇살이지?아니, 영어로 해야하나. 하우 올드 아유?"
"20살인데요?"

사실 23살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 씨알도 안 먹힐것 같아서 적당히 불렀다.
뭐, 예전에 애들한테도 그렇게 둘러댔고.

"한국어 잘하네. 아가씨, 신분증이나 여권같은거 없어?"
"없는데요."

아, 신분증. 그걸 까먹었다.
난 신분이 없구나. 제길, 어쩌지.
그러고보니까 지금 꼴이 남자랑 여자라는것도 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것같다.

"그, 그럼 다음에 한번  만나시죠. 그땐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음."


지금 보내면 또 뭔가 더 철저히 준비해서 올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뭔가 있는듯한 분위기를 냈으니 말이다.
일부러 도망치려고 할까봐 세찬이나 실버한테도 얼굴을 비추지는 말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조금 성급했나, 생각은 든다.
이대로 돌려보낼수는 없었다.
하아, 이 방법밖에 없나?

"후우, 이사람 제 오…빠에요."
"예에…?"
"오빠라고? 흐음. 형씨, 아가씨 말이 맞아?"
"네, 사촌 오빠에요."
"아, 네, 네?"

말을 더듬는 기자가 신경쓰여서 나는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꾸 그러면 의심받을것 아니야.
뒤지고싶나, 마음만 먹으면 그냥 으슥한 골목길에서 처리해버릴수도 있어.
하고싶진 않다.
아직 살인은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뭐어, 아가씨가 그런다면야… 104호실이니 들어가."

조금 미덥지못한 표정이었지만, 대실요금을 받고는 대충 방 열쇠를 넘긴다.
그리고 여관주인이 센스가 있다.
104호실로 '들어가'라며 초대까지 친절하게 해주다니.
기자부터 들여보내고 초대 받아야하나 그런생각 하고있었는데.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을 썼을테고.
 열쇠를 받아들고 모텔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죠."


나는 기자를 방에 밀어넣고 문을 잠근다.
하지만 이곳엔 단 둘만 있지는 않을거다.

"여."
"어?"


한세찬.


그녀석이 내가 문을 닫자 쓰윽 나타났기 때문이다.
뭐, 당연하지. 사실 아까부터 인식저해를 두른채 우릴 미행하고 있었거든.
이 기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마 저사람 눈에는  뒤에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것처럼 보였으리라.

얘가 아까 내가 생각한 '다른 방법'이었다.
얘가 날 초대해도 되는데, 그러면 도망치려는 기자가 복도 cctv에 찍혀서 조금 소란스러워 질 수도 있었겠지.

녀석이 팔짱낀채 한손을 들며 인사를 보내자, 기자는 사색이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연쇄살인범같이 생긴 녀석이 험악한 표정으로 인사를 보내는데 표정관리가 되는 사람이 신기할거다.
난 기자가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 않은걸 속으로 칭찬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보이던데."
"어, 저기, 그게…."
"왜 그렇게 당황하나?"

세찬이가 말그대로 살인적인 미소를 보내며 뒷통수를 내려치자, 깔끔하게 기절해버리는 기자였다.
기절은 깔끔한데, 과정이 조금 과격해.
난 좀더 양방향적으로 과정도 깔끔한 방법을 원했건만.
조금 질린표정으로 세찬이를 바라보자 이게 별 대수냐는듯이 말을 이었다.

"얘 대체 뭐야?"
"몰라. 나도 오늘 처음봤어."

대체 왜 나한테 기자따위가 꼬인걸까?
의아하군.

"니가 만만해보였나보지?"
"씁."


나는 이를 악물고 팔짱을 꼈다.


"만만해 보이는건 아마 아닐걸?"


뭐, 눈에 띄는 외모긴 하니까.
이게 좀 평범하게 생겼으면 그냥 사람들도 별 신경 안썼을텐데, 꽤나 특징적으로 예쁘다보니 여기저기서 관심이 가나보다.
괜히 그딴 영상도 돌아다니고. 시벌.
누가 찍었냐. 걸리기만해봐.

평소 인식저해를 달고 사는데도 이런사람이 꼬이는데, 진짜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진짜 히키코모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능력과 정체때문에 거의 히키코모리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지만.


"그런데 바로 기절부터 시킬 필요가 있었나?"

최면을 걸어도 되고, 그냥 협박을 해봐도 됐을텐데.
나라면 몰라도 네 얼굴이면 협박만 해도 거의 컷될걸.


"그냥 뭐. 기억부터 확인하지."


세찬이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은색의 작은 사슬을 꺼냈다.

세찬이는 기자를 침대위로 던져놓고 도구를 머리에 꽂는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도 연결한  침대 옆에 앉는다.
언제봐도 좀 웃긴 모습이긴하다.


째깍, 째깍.


조용해진 방안에 시계소리에 집중한다.
안그러면 좀 엄한 소리도 같이 들리거든….
음,  쎄게하나? 아주 죽으려고 하네.
새끼야, 살살해달라잖냐. 살살좀 해줘라. 좀. 너무 시끄럽다.

제기랄, 청력 너무 좋은거 아니냐고 젠장.

그렇게 눈을 감고 나한테만 들리는 야동소리를 애써 무시하는데, 눈을 감으니까 오히려 상상이 돼서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서 그냥 한세찬이나 쳐다본다.
음, 이새끼 얼굴을 보니 좀 평온을 되찾고있다.
얘 얼굴 보면 최소한 행위는 상상이 되지 않으니까.
어휴  이렇게 생겼대. 퀭한 눈두덩이, 푸석해진 피부. 쏙 들어간 볼살, 그래서 더욱 강조되는 얼굴선. 완벽한 쾌락살인마의 관상이다.
이게 다 마약때문이겠지. 모오지리 새애끼.
학생땐 그래도 데리고다니면 쪽팔리진 않았는데 말이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길래 뭐가 잘못된거 아닐까, 땀이라도 닦아줘야하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금방 눈을 떴다.


"어ㄸ.… 크흠, 흠. 어때?"

자꾸 들려오던 옆방 소리때문인지 고음으로 튀어 나가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평소같이 낮은 음으로 묻는다.
눈치 못챘겠지?
다행히 눈치는  챈것 같네.


녀석은 조금 낭패라는듯 이야기를 했다.


"이 기자, 그거 알게된지는 거의 2~3달 된것같다. 꽤나 깊숙히 박혀있는데. 한동안  취재하려고  짓거릴 다했네"
"대체 왜 그랬대."
"최근 특종에 미쳐있었고, 이슈가 될거라 생각했고, 특히 니가 만만해 보였다는군."
"씨발."


기억을 뒤져본결과 내가 만만해보였단게 맞았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내가 확인한건 아니니까 믿지 않을래.

"기억제거보다 살인멸구가 싸게 먹히겠는데. 3개월짜리 기억을 손보는 도구는 거의 교황청에서나 쓸 수 있어. 부작용도 장난 아니고."
"엇."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좀 그렇지않나?
지금 안그래도 살인에  거부감이 안들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한번이라도 하게되면 뭔가 돌이킬  없을 듯해서.
마치  눈밭에 한발자국을 내미는걸 주저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다.


 눈밭을 어지럽히기 싫다는 감정과, 뭐 어때? 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랄까.

딱히 주저할 이유도 없고, 그냥 해버려도 될 일이지만 한발자국이라도 내딛는다면 그 다음 발자국, 다음 발자국들이 연쇄적으로 끝없이 나의 도덕성을 마모시킬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걸까?
최소한 인간이라는 증거를 없애고 싶지가 않다.

"이런걸로 살인은 좀 그렇네. 그럼 발언제한인가 그거는?"
"그것도 꽤나 비싼 시술인데. 뇌에 도구를 박는거거든."

도구값이 거의 6~8000만원이라고한다.
아직 그런돈은 없어. 아직 와인트리도 숙성중이란말이야.
대체 도구하나가 왜 그따구로 비싼거냐.
아빠한테 빌려달라기에도 뭣할정도로  돈이고, 이런 잡스런 녀석한테 쓰기엔 더욱 아까운 돈이기도 하다.


"다른방법은 없어?"
"후우, 떼쓰냐? 계집애야?"
"뭐라고?"

조금 빡치려다가 참는다.
난 이것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를 알고있다.

"실제론 지도 계집애가 떼쓰는거 들어본적도 없으면서."
"…."


세찬이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소한 나는 지혜가 과제를 보여달라고 떼쓰는걸 들어보긴 했거든.
보여주고 나중에보니까 나보다 학점을 높게 받았길래 좀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놓고 이젠 내가 과제 보여줄까? 라느니 말하기도 했었지.
그땐 좀 빡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애정표현이었던건가.


"아,  패밀리어. 이사람이랑 맺으면 어떨까. 나름 기자인맥 있으면 쓸만할수도 있을것 같은데."
"흠, 나쁘진 않아. 그런데  녀석을 써먹을 순 있겠냐?"
"걍 한번 써보는거지 뭐."


그래도 내 패밀리어 되는게 죽는거보단 낫지 않겠어? 박광식씨.

"근데 패밀리어는 어케하는거야?"
"나야 모르지. 내가 흡혈귀도 아니고."
"음."


일단 유디라를 호출했다.


-------------

5분정도면 오겠지.
5분이면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또 어떻게 느끼기엔  시간이기도하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중이냐면, 옆방의 커플이 다시 그 행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발, 이번엔  소리가  커진것 같은데.
이거  새끼한테도 들리는거냐?


"야, 한세찬."
"왜."

별로 당황하는 티는 없는걸 보니 나만 들리는가보다.
제길, 근 몇달간 야한걸  봤다보니 자극이 더 심한것 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보기는 했지. 내 몸 말이야.
하지만 행위는 상상해본적이 없으니까…. 제기랄 뭔 머릿속에서도 변명을 하고있네.
난 뭐라도 말을 지어내서 이 야릇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어낸 말은 조금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넌 뭐하느라 인식저해도 깜빡해서 CCTV에 찍히고 그래?"
"허."

한세찬은 조금 화가 난 듯이 휴대폰을 집어넣고 천천히 다가왔다.
어, 왜 화가났지…?
 쪼금 쫄았다. 저런 얼굴로 다가오는 세찬이를 보고 안쪼는건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내가 누구때문에 그랬는데. 따지고보면  처지 생각 안하고 밤에 혼자 튀어나간  잘못 아닌가?"
"어?"

그렇네. 내 잘못이 맞았다.

아니, 그런데 이건 나도 억울한게, 그렇게 빨리 사냥꾼한테 노려질줄 몰랐지.
아무리 내가 흡혈귀가 됐다지만 어떻게 바로 '아,  이제 흡혈귀니깐 밖에 나갈때도 조심하고, 사냥꾼 눈에 안띄게 행동해야겠다~' 이러겠냐?

게다가 평생을 살면서 밖에 나갈때 내가 바지 제대로 입었는지 말고는  고민도 안하던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내, 그걸.

"아니, 그게  내잘못은 아니지 않아?"
"아주  머리가 울릴정도로 호출을 해대던데. 내가 아이기스때문에 자다말고 너 찾느라 갖은 고생은 다했거든."

녀석이 나한테 다가와 멱살을 쥐어올린다.
그러게,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그런데 그렇게 빡칠 이유는 없지 않나?

"시발, 그때 니가 좀만 더 조심했더라면, 내가 그런  할 필요도 없었고."
"아니, 그래.  잘못은 있어, 근데 그럴 줄 알고 그랬냐? 나도 피해자인데? 그리고 사냥꾼은 네가 죽였다며. 내가 죽이진 않았거든? 따지고보면 사람 죽인 네가  나쁜짓 한거 아니냐?"
"뭐?"

간밤에 자다가 깬게 어지간히 빡쳤었나보다.
겨우 환각  보는상태인 사냥꾼을 죽인건 내가 아니었어. 한세찬 너였지.
그정도로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난 그렇게 녀석을 마주 노려보았다.

"살인마 새끼."
"다시 말해봐, 뭐라고?"

아차, 뭔가 잘못 말한  같다.
홧김에 떠들긴 했는데 이건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봐.
하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철회하지는 못하겠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살인도 저지르는 녀석이고.
전혀 무섭진 않지만.

"허. 역시 넌 네가 뭘 한건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


녀석이 틀어올린 멱살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런데 잠깐, 이거 밑단이 조금 올라가고 있는것 같은데.
어? 이새끼 지금 나 원피스인데 멱살을 잡아 올리고 있어?
진짜 내가 뭘 입든지 하나도 신경 안쓰는구나, 미친….!
난 세찬의 손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야, 잠깐 이거 놓고 말해."
"네가 한짓은 그 사냥꾼을 영원한 악몽속에 처박은 거였어. 그건 겨우 환각이 아니었다고. 릴리스의 환각이 뭔지 너는 전혀 모르지?"
"모, 모르니까, 이거 놓고 설명해봐. 갑자기  듣고싶어지네."

 대답이 장난치는 것 같았는지 녀석은 오히려 좀 더 힘을 준다.
아니, 진짜다올라갈것같은데요.제발놔주면안될까.

"그건 영원히 가장 끔찍했던 기억속에 사람을 처박아버리는 환각이다. 죽거나, 악몽속의 기억을 전부 다 날려버리지 않는한 절대 해방될 수 없어. 넌 그걸 멋모르고 쓴거고, 그래서 내가 사냥꾼을 죽여서 피를 그딴 방식으로 먹이게됐지. 이게 겨우?"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놔보라고!"


난 밑단을 붙잡고 녀석의 다리를 발로 차면서 외쳤다.
씨, 씨발! 다리 사이가 으슬으슬하잖아! 내려놔!

"아니, 너 전혀 이해 못하고 있잖아, 지금도 이렇게 장난이나 치고…."
"잠깐…!"


시선이 내려간 한세찬의 시간이,
순간 멈췄다.





아마 봤겠지.



유디라가 빌려준 속옷을.

시발.




끝났다.





아마 이걸로 또 존나게 놀리겠지.



아아, 죽고싶어졌다.

-타닷!

나는 녀석의 팔의 힘이 빠지자, 바로 혈류를 돌리며 제자리에서 점프해 녀석의 가슴팍에  발을 꽂아넣었다.
제자리 드롭킥.


"개애- 새꺄! 그만 하라고 했잖아!"
"크허억!"

-콰당!


에상치 못한 충격에 날아가 바닥에 쓰러지는 한세찬.
이럴땐 물리치료다.
머리 몇대 치면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까?
난 녀석의 가슴 위에 올라타서 마운트자세를 취했다.


"죽어! 죽어서 잊어버려!!"
"너…!"

어디를 내려치면 깔끔히 기억이 제거될지 생각하며 팔을 뒤로 빼자, 한세찬은 내 가슴을 밀쳐내며 마운트를 방어했다.
이 씹새, 그냥 좀 맞으라고!


쾅!

문 부숴지는 소리에 놀라 한세찬의 얼굴을 향한 주먹은 옆으로 스쳤다.


"릴리야, 무슨일이야!"

유디라가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유디라, 이라, 실버.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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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나의 몸을 훑은 유디라가 조용히 뒤로 빠졌고, 실버가 문을 조용히 닫는다.


"…….."
"……. 미안. 하던거 해, 화이팅."

문이 닫히기 직전, 유디라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먹까지 쥐어보이며 응원했고, 그렇게 잠금장치가 부서진 문은 조심스럽게 닫혔다.


뭐가 화이팅이지?하고, 내꼴을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허리를 고정하던 벨트가  풀리고 셔츠 단추도 뜯어져나가서 거의 벗겨진채 한세찬의 몸통 위에 올라탄 날, 한세찬이 내 가슴을 밀어내는 모양새라니.


오해하기 딱 좋구나.

이놈의 오해. 오해. 오해. 시발. 오해.




"죽자 그냥. 너도 죽고, 나도 죽는거야. 어때?"
"……."



한세찬은 반응이 없다.

"하하……하…."


그냥 눈물이 흘렀다.

이 개같은….

타이밍은 씨발 언제나 내 편은 아니었다.





난 결심했다.

내가 미래에 살 집엔 욕조 말고도 존나 튼튼한 문도 달려있어야해. 절대 부술 수 없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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