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패밀리어
나는 실버씨의 차를 타고 집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세찬이한테 실버씨네 집까지 옷을 가져다 달라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데다, 이새끼는 차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조금 어둑해질법한 밤.
왜냐면 그냥 내가 늦게 일어나버렸기 때문이다.
관에서 자니까 시간관념이 사라져버린 기분. 완전히 흡혈귀가 다 됐네. 다음엔 휴대폰 알림이라도 설정해놓고 갖고 들어가서 자야겠어.
여기는 차댈곳이 따로 마땅치 않기 때문에, 실버와 유디라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뭐, 어디다 주차해놓기에도 애매하긴 하지, 세찬이도 금방 나올거고.
근데 이 카페 원래 이런거 매달아놓는 그런데였나?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 맛집…? 저런걸 써붙여놓다니.
뭐, 맛이 있기는했었다.
조금 사람들이 줄을 서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앉을 자리정도는 있었다.
개강한지 얼마 안되어서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걸까.
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언제나처럼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를 시킨다.
심지어 맛집이라잖아.
곧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그걸 받아든 나는 기대하며 한입을 크게 빨아들였다.
아 뭔가 진짜 오랜만이네.
흐음… 그런데, 아무리 먹어봐도….
조금 맛이 다른것같다?
카운터의 남자는 바뀌지 않았는데? 바뀐건 내 입맛인가?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이 조금 놀란듯 몸을 떨었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조금 미안하네.
근데 이새끼 왜 안와. 대체 어디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 한세찬에게 연락했다.
"야, 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늦어?"
"네 옷이 어디 한두개냐? 그리고 난 여성복같은거 모른다고. 미리 연락을 주던가."
나도 관에 눕자마자 잘줄은 몰랐었지….
"대,대충 아무거나 막 담으면 되잖아."
"정말 아무거나 담냐?"
"…미안. 잘 골라주라."
좀 입을만한걸로 주면 좋겠네. 죄다 하늘하늘한거나 고딕풍 원피스만 넣어주면 그것도 곤란하다.
지혜때문에 내가 직접 가서 고를수도 없고. 아, 그럼 지혜는 절대 우리집을 들어가선 안되겠다.
옷장에 여자옷밖에 없는데,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할지….
"꼬맹이가 의외로 잘 골라주고 있으니까 다행이지."
"이라가 도움이 좀 돼?"
"얘는 네가 자주 입는 옷같은거 기억하고 있더라."
그건 다행인 부분이었다.
역시 김이라, 내 동생으로 아주 훌륭하게 자라주었구나.
그런데 나랑 같이 있던 시간으로 따지면 세찬이도 이라 못지않을텐데, 왜 모르지?
"근데 그럼 넌 내가 뭘 입든 신경도 안썼다는 얘기냐?"
"당연한거 아냐? 니 옷을 내가 뭐하러 신경쓰는데?"
"아."
조금 화나네, 내가 누구때문에 옷 고르는걸 신경쓰는데.
이새끼가 놀릴까봐 내가 얼마나 고민하면서 코디를 하는지 모른다니.
내 옷장에 있는 여성복으로 캐주얼하면서도 너무 여성스럽지않도록, 그러면서 적당히 시원한 복장으로 입는게 얼마나 힘든줄 알아?
"됐다."
"뭐, 어쩌라고."
"됐다고 새꺄. 후딱 오기나 해."
이놈이 뭐 그렇지.
그래도 뭐, 내 의상에 별로 신경쓰지 않으면 상관없겠네.
아무래도 지금 입고있는 옷이 유디라가 갖고있는 옷중에 내가 입을만한걸로 걸친거라 좀 많이 여성스러웠으니 말이다.
검은색 긴팔 플레어 셔츠 원피스.
위아래로 늘려놓은 셔츠처럼 생긴 원피스에 벨트를 감아서 허리를 나누는 의상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갖고있는 옷중에 내가 입을수라도 있는 옷이랄게 일단 원피스종류밖에 없었으니까.
거기다 가슴사이즈도 안맞으니 입을게 뭐 없다. 완전 하늘하늘한건 내가 못입겠다고 하니까, 정말 딱 이거 하나 있더라고….
이것도 좀 가슴께가 많이 남아서 그렇긴 하다.
그나저나 유디라한테는 허벅지까지만 오는 길이라 각선미를 강조하는 의상이나, 내가 입으니까 좀 단정해지는 모습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키차이가 좀 있으니까… 밑단이 약간 무릎에 닿을락 말락한다.
"에휴."
아무래도 금방 오지는 않을 모양이네.
나는 밀크쉐이크를 좀 더 빨았다.
맛은 있는데 자꾸 그때의 맛이 떠오르는건 왜일까.
어쩐지 그 맛을 생각하니 자꾸 갈증이 나고, 참기가 어렵다.
으으, 제기랄. 안면몰수하고 그냥 한번 물어보지 뭐.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주문을 받는 사람들 옆을 들어가서 카운터의 알바생에게 물었다.
"저기요."
"아, ㄴ,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응?
왜 이렇게 당황하는거지.
내가 진상이라도 부릴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으음, 어쩌면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
카페에서 판매하는 음료의 레시피를 물어보는 짓이니까.
"혹시 이거 만드는법이 바뀌었나요?"
"예? 아뇨, 바뀐건 없는데요…?"
"아, 그런가요? 뭐 딸기 종류나 우유종류가 바뀌었다든가 하는건요?"
"전혀요. 계속 같은 재료를 씁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아."
거짓말은 아닌것 같은데….
진짜 뭐지? 그 맛을 다시 먹고싶은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몸을 돌렸으나, 카운터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호,혹시 뭔가 맛이 이상하신가요? 새로 만들어드릴까요?"
"아뇨.아뇨. 이미 저 반이나 먹었는데요."
"괘, 괜찮습니다. 만들어드릴게요."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난 그런종류의 진상짓을 하려고 했던게 아니었으므로 다시 테이블에 돌아가 앉았다.
그냥 마시지 뭐… 갈증해소는 되니까.
나는 밀크쉐이크를 강하게 흡입하여 전부 마셔버린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머리가 띵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흡혈귀.
이런 걸로는 머리따위 아파지지 않는다.
흠, 이렇게 또 하나의 일상적인 감각을 박탈당한것인가?
사실 너무 사소해서 별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나는 다 마신 밀크쉐이크를 빨며 빨대에 바람들어가는 소리를 효과음삼아서 미소녀수집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 참 웃기는 일이지.
피지컬이 올라가니까 오히려 피지컬이 필요없는 게임에 빠져버린다니.
하지만 이 피지컬은 원래 내것도 아니고, 내 노력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렇게되니 요새는 빠른 반응속도와 판단력을 요구하는 게임을 거의 안 건드렸다.
그리고 특히 그런 게임은 한야가 너무 잘해서 나는 이런 피지컬을 갖고도 진다는게 억울해서 자괴감이 쎄게 들었다.
아무래도 진짜 천재는 한야가 아닐까…. 그사람한테 시간의 마력식이 없었다면 이 세상엔 괴물 게이머가 탄생했을거다.
아, 또 안떴네. 대체 언제쯤 얼굴을 비춰줄래?
에라이, 돈도 많은데 질러버려?
아니야, 참자.
이런건 다 관성이 있다.
한번 지르기 시작하면 끝까지 질러야하고, 그 금액은 점차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욕조있는 집으로 이사한다는 내 원대한 꿈도 좌절되고 말것이다.
버는족족 게임사에 헌납하는건 안될 일이지.
"저, 저기요."
"예?"
난 순간적으로 휴대폰을 가리면서 나를 부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윽,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남들한테 씹덕겜하는거 들키면 좀 쪽팔린다.
일부러 인식저해까지 빡세게 걸어놨는데 누군가해서 봤더니,
…. 방금나랑 대화했던 카페알바생이었다.
으흠, 그럼 안통할만 하군.
"새로 만든 밀크쉐이크입니다.... 맛이 마음에 안드시는것 같길래 새로 만들었습니다."
"아, 괜찮은데…."
"그냥 서비스에요. 맛있게 드세요!"
"어…."
그러곤 그냥 카운터로 돌아가버렸다.
으음…. 안줘도 되는데….
새로 가져다준 음료를 받아들고 멀뚱히 알바생을 바라고보고있자, 꾸벅 고개를 숙인다.
다시 음료를 내려다보니 포스트잇을 뒤늦게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정말 죄송합니다!'
뭐지, 그렇게까지 미안할 일은 아닌데.
난 메모지보고 순간 번호라도 따이는거 아닐까 걱정했다.
자의식과잉이었던 모양이다.
휴우.
준거니까 그냥 마셔야지. 나는 빨대에 입을 댔다.
다시 휴대폰에 집중하기위해 이어폰을 끼려는데,
"야, 쟤 아니냐? 실존인물이었네."
"리얼이다. 무슨 딥페이크 영상인줄 알았는데."
"어? 왜 아까는 못봤지?"
아주 작은 소곤거림이었으나, 들려버리고 말았다.
그쪽을 바라보니 이야기하던 무리가 흠칫 놀란다.
으음…. 저거 혹시 내얘긴가.
아니겠지. 이것도 자의식과잉일거다.
고개를 저은뒤 이어폰을 귀에 꽂아버렸다.
그렇게 다시 2D의 세계로 들어가려던중.
"저기요, 혹시."
"예?"
"몇달전에 여기서 딸기 밀크쉐이크 드셨던분 맞으시죠?"
"그건 왜요? 당신 누군데요?"
나는 그를 조금 경계했다.
하, 오라는 한세찬은 안오고 이상한 사람만 꼬이네.
나는 한숨을 쉬고 이어폰 한쪽을 뽑은뒤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녀석을 올려다보니, 비쩍말라서는 알이 커다란 안경을 쓴것이… 약간 도민석의 느낌이 난다.
뭔가에 잘 몰두하게 생겼다는 의미다.
음, 사람을 인상으로 판단하는건 좋은 버릇이 아니기는 한데.
슥 훑어보니 딱히 사냥꾼도 아닌것같고, 나한테 말걸 이유가 없지않나.
"아, 저는 이런사람입니다."
-YBS기자 박광식
제기랄, 뭐지?
기자가 나한테 왜 와?
겨우 카페에서 밀크쉐이크좀 빨았을 뿐인데?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서 혹시 내가 무슨 이상한짓을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봤으나, 뭐 기자가 날 찾아올정도로 이상한 일은 한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시죠?"
기자가 조금 수상하다는듯이 말했다.
그에 나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아뇨, YBS면 꽤 큰 방송사잖아요. 조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죠."
"아하, 평소 자주 방송을 보십니까?"
"물론이죠."
집에선 안보지만.
병원에선 자주 보고있으니까 말이다.
최근 놀이공원사건이후 어떤 식으로 발표되는지 뉴스를 확인하기도 했고.
그때는 그냥 집단 식중독같은걸로 대충 처리된 모양이다. 사망자는 어떻게 묻은거지 싶긴하지만 말이다.
"일단 이 사진을 좀 보시죠."
"엥?"
무슨 심리 상담도 아니고, 사진을 왜 보여줘?
보여주는 사진도 좀 이상하다.
카페, 백화점, 그냥 거리를 찍은 사진. 이게 다 뭔데?
"무슨 테스트에요?"
"흐음…. 글쎄요."
기자는 갑자기 카메라를 들어 나를 찍었다.
순간 놀라며 인식저해를 급히 지우고 얼굴을 가렸다.
이새끼 진짜 대체 뭐지?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해치울까? 안돼, 참아 릴리.
"아니, 뭐하시는 건데요?"
"그 능력은 마음대로 껐다켰다 하실 수 있나 보네요."
"예?"
기자, 박광식이라는 사람은 나에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것 같았다.
위험한데.
내 표정이 순간 굳어지는게 느껴져서 일단 혈류까지 돌려가며 얼굴근육을 풀었다.
어디까지 알고있을까. 혹시 흡혈귀의 존재에 대해서도 아나?
내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일반인은 당연하고, 사냥꾼들에게도 비밀인 사안이다.
눈길을 끌어서 좋은점이 전혀 없었다.
"무슨 능력이요?"
나는 일단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기자가 사진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배경사진, 전부 당신을 찍은 사진들이에요. 최근 이곳에서 유령을 봤다는 목격담이 꽤나 유명하거든요."
"하하, 제가 유령이라는 말씀이세요, 지금?"
"그럴수도 있겠죠. 그만큼 아름다우시기도 하고."
녀석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조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어이없어서 웃기다.
유령같은 소리하네, 나는 흡혈귀야 멍청아!
유령처럼 아름다운건 대체 뭔 소리래?
웃음이 나왔다.
아. 이사람 나에대해선 하나도 모른다.
나에게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지 얼마안된 일반인이었구나.
달의 세계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있어.
그정도로 철저히 숨겨진 사회의 이면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사람만 어떻게 손봐주면 끝나는 일.
재밌겠네. 계속해봐.
"당신을 저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여전히 찍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찍혀있죠."
"됐고요, 초상권 침해입니다. 안지우시면 경찰 부를거에요."
진짜 당신 그러다 훅간다고.
어디 한적한데 데려가서 최면어플로 묻어버려? 아니면 깔끔히 기억을 다 날려버려도 괜찮다. 부작용이 어떨진 모르겠는데, 뭐 사냥꾼의 세계는 모르는게 약이다.
게다가 이사람이 명함을 건넨것이 나같은 푼수 흡혈귀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였다면 이 남자가 명함을 건넸을때 이미 목숨줄도 같이 넘긴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나만해도 이런 남자하나 어떻게 처리할지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전문적인 사냥꾼인 한세찬이라면 얼마나 깔끔히 처리해버릴 수 있을까?
세계의 뒷처리를 맡는다는 장의사들의 솜씨는 또 어떻고?
"흐음, 죄송합니다. 일단 지우죠. 단지 저는 인터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이건 그냥 제보받은 사진들이고요."
"재밌는 농담이네요. 그래서 절 대체 어디서 봤다는거죠?"
기자는 내 반응이 뭔가 이상했는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눈치는 빠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