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패밀리어
나는 대충 남는 방 하나를 쓰게 되었다.
아니, 집에 방이 남는게 있다고? 존나 신기하다….
정말 남는 방이었는지, 가구가 하나도 없었는데, 나는 그냥 이불만 깔아줘도 잘 잔다.
실버가 침대를 양보해주겠다며 자꾸 떠밀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미안해서 그럴수가 없다며 계속 거절했더니, 갑자기 실버가 침대를 하나 사오겠다며 나가버렸다.
"어…. 진짜 안그래도 되는데…."
나 그러면 정말로 여기서 살아야할것 같잖아….
솔직히 좋기는 하지만, 너무 부담스럽다. 빚이 생기는 기분이잖아!
나를 바닥에 재우면 우리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단다.
흑흑, 전 지금 당신 볼 면목이 없어요 실버… 그는 자신의 머리칼만큼이나 새하얀 인성을 가진 남자였다.
"흐아암, 오래 깨있었다. 잘자, 릴리. 바닥 불편하면 같이 잘래?"
"그게 더 불편할 것 같아요."
정말로.
나는 유디라의 센스를 보고는 경악했다.
유디라의 방을 열었을때, 바로 보이던것이 검게 칠해진 길쭉한 나무 관짝이었다.
방은 여기저기 어질러져있었지만, 그 검은 관짝하나는 완전히 반짝반짝하게 닦여있었다.
"관이 왜 여깄어요?"
"아. 이거 내 침대야. 잠자리가 바뀌면 잠이 안오거든. 그래서 어디 갈때마다 가지고 다녀."
"허어…."
이것이 리얼 내츄럴 본 흡혈귀의 스웩이라는 말인가?
관짝을 침대로 이용한다니.
"한번 누워볼래? 진짜 편한데. 뚜껑 닫으면 빛도 소리도 안들어와서 최고거든."
"아뇨, 전 죽기전엔 관짝에 들어가기 싫은데요."
불길하잖아. 왜 이런데서 자는거야.
하긴, 낮에 잠을 자야하는 흡혈귀의 입장에선 빛이 완전히 차단되는 이런 구조의 침대가 편하긴 하겠지.
관뚜껑을 열고 몸을 안쪽에 뉘이는 유디라를 보니까 진짜 저기서 자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관의 내부에는 푹신하게 뭔가 빨간 천같은것이 언뜻 보였다.
으음… 안락해보이기는 한다.
뭔가 저기서 자면 영원히 못 일어날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어서 그렇지….
"하암, 잘자고. 이따가 밤에보자구. 릴리."
그렇게 유디라는 손을 흔들고 하품을 하며 관뚜껑을 닫아버린다.
… 조금 탐나기는 하네.
그치만 저런거 좀 그렇지않나?
잠깐, 설마 실버가 저런걸 사오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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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냐.
그리고 어째서 분홍색이지?
"이런, 제가 실수했군요. 그저 흡혈귀시니까 그게 가장 편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유디라와 함께 다닌 기간이 너무 길어서 편견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지금이라도 바꿔 오겠습니다."
"아, 아뇨! 그냥 저거 쓸게요…! 감사합니다…."
분홍색 관. 옆에는 꽃도 그려져있다.
이런걸 대체 어디서 구한거냐.
그리고 이런게 어째서 세상에 존재하는거지?
뚜껑을 슬쩍 열어보니까, 유디라의 관과 비슷하게 사람의 몸이 닿는 부분이 상당히 부드러운 천으로 싸여있고, 또 폭신한 재질이었다….
아니, 이런거 무슨용도로 만드는거냐고….
설마.
어린 여자아이의 장례식에 쓰이는…. 뭐, 그런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꺼림칙하다.
지금이라도 바꿔달라고할까.
그치만 이걸 또 들고나가서 환불하고, 침대를 또 새로 구매하고 그럴 실버를 생각하니 그냥 좀 내가 불편한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았다.
아, 이거 그런데 색이라도 어떻게 안되나….
"페인트라도 칠할까요…?"
"색이 마음에 안드십니까?"
"좀 그렇긴하네요…."
"으음, 자꾸 깜빡하는군요. 죄송합니다. 그저 릴리양과 어울리는 색을 생각하다보니까…. 딸의 생각이 나서 그만, 죄송합니다."
"딸이요?"
실버에게 딸이 있는줄은 몰랐는데?
"딸이 있었어요? 그 아이도 실버씨처럼 은발이었으면 예뻤을것 같네요."
어쩐지 동질감도 느껴질것같고 말이야. 언제 한번 만나고싶네, 실버씨의 딸이라면 꽤 예쁠테고, 게다가 예의도 바를것같은데.
내 주변엔 죄다 이상한사람뿐이라서, 매일 정신이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고.
"하하하. 아뇨, 평범한 검은 머리였습니다."
"아."
조금 아쉽….
….'였습니다'?
잠깐, 어, 어째서 과거형인것이냐.
실버, 아니죠?
그냥 머리색을 바꿔서 이제 검은색이 아니라는거지?
"따님이 혹시 염색을 했나요?"
"…하하하, 릴리양의 농담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군요. 알리나는 하늘의 별이 된지 12년정도 되었습니다."
"……."
"아하,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병이었으니까요."
"아니, 그게…."
실버는 아무래도 내가 딸이 흡혈귀에게 살해당한거라고 생각해서 표정이 굳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냥 딸이 있었다가 없어졌다는게….
"신경쓰실필요 없습니다.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정말로 행복했으니까요. 이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죠."
"예에…."
나는 조용히 관의 뚜껑을 열었다.
분홍색 관의 겉에는 흰색 백합과 국화가 무늬처럼 그려져있었고, 관 내부의 안감도 부드럽고 광택이나는데다, 꽃의 무늬가 음각되어 빛이 반사될때마다 무늬가 언뜻 언뜻 나타난다.
참…. 비싸보이기는 하다.
자세히보니까 좋긴하네. 이불같은거 깔면 더 좋겠다.
"그냥 이대로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강요하는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싫으시면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아니에요. 보다보니까 진짜 뭔가 괜찮을것 같긴해요."
"아아, 그치? 역시 흡혈귀는 이게 침대라니까. 한번써봐. 진짜 편해."
"……."
유디라, 당신 언제 일어났어.
"자려고했는데 니가 받은 관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더라고. 이건 꽤 귀엽다."
"관이 귀여워서 어쩌자고요…."
하여간, 흡혈귀의 센스는 이해할수가 없다.
본래 관이라는건 사람이 죽은다음에야 들어가는것 아닌가.
"한번 들어가봐."
"으으…."
내가 살아서 관짝에 들어가볼줄은 몰랐는데.
왠지 기분이 오싹오싹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집어넣었다.
지금 입고있는 옷은 청바지에 티셔츠라는 병문안룩이었기 때문에 수면을 하기엔 썩 좋은 의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안정감은 든다.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뚜껑을 조심스레 닫자, 적막한 어둠이 나를 감싼다.
마치 고치가 된것같은 기분이다.
흡혈귀가된 이후 강화된 청력때문에 언제나 어디서 나는지 모를 씨끄러운 소음을 벗삼아 얕은잠을 잤는데, 소음이 하나도 들리질 않았다.
요즘 여름이 거의 지나가서 이전처럼 많이 들리지는 않지만 미친놈마냥 나무에 매달려 성행위를 부르짖는 매미새끼들도, 대낮에 할일없이 도로위에서 크락션을 울려대는 또라이들도, 윗집이나 아랫집이 틀어놓은 TV소리도, 전부 차단되는 기분이다.
이곳은 이미 나만의 수면공간이 된것같다.
이런곳이라면 정말 아주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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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역시 좋지?"
"에에… 어? 제가 잤어요?"
"응. 뚜껑 닫자마자 자던데."
….인정한다.
흡혈귀는 관에서 자야돼.
이렇게 편안할줄은 몰랐다.
이건 뭐, 노이즈캔슬링이 따로 없네.
부스스하게 관에서 일어나니까 밖은 이미 밤이었다.
허. 정말 푹 자버렸네.
"으음, 너 옷은 가져와야겠더라. 내건 사이즈가 맞는게 많이 없네. 그 라이칸슬로프 꼬맹이는 어떻게 할거야?"
"이라도 데려와도 될것 같네요. 아, 실버는 괜찮대요?"
"물론 괜찮댔어. 오히려 언제 데려올거냐던데."
"그럼 내일쯤 세찬이한테 집에서 제 옷 전해받을때 같이 데리고 올게요."
이라는 지금은 세찬이랑 같이 있었다.
난 데리고 오고싶었는데, 이라가 자기가 세찬이를 돕는게 나을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찬이가 알아서 할텐데. 왜 그럴까?
그치만 이라는 그 또래 아이들보다야 머리나 눈치가 좋으니까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봤을 수도 있기야 하다.
"어, 그런데 유디라. 왜 그런 차림이죠?"
잠결에 흐릿했던 시야를 몇번 깜빡이다가 유디라를 쳐다보니 그녀는 거의 속옷차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냥 속옷차림이라고봐도 된다.
검은 나비무늬가 복잡하게 짜여진 보라색 속옷위에 반투명한 실크 네글리제를 입은 차림이니까.
꽤나 선정적인 장면이다. 그녀는 흡혈귀답게 일단 지방살없이 몸매가 좋았고, 가슴도 꽤나 있는 편인데다, 170정도로 키가 꽤나 크면서 몸의 비율도 좋으니말이다.
흡혈귀가 아니라 서큐버스라도 되는것같다.
누굴 유혹하려는건가? 설마 실버씨를?
뭐, 둘다 성인이고, 둘 사이에 내가 뭐 할 말은 따로 없기는 하지만….
설마 나를?
나는 흠칫 주먹을 꽉 쥐고 혈류를 돌릴 준비를 핬는데, 유디라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 이거? 월광욕 준비중이었는데. 너도 할래?"
"월광욕…이요?"
뭐 그딴걸 다 해, 또.
괜히 오해를 했다는 사실이 쪽팔려서 얼굴에 피가 좀 쏠린다.
"흡혈귀는 달의 기운을 받는 종족이잖아. 이게 흡혈귀들한테 얼마나 좋은데. 나는 매일 하고있어."
"그게 대체 어디에 좋은데요?"
일광욕은 들어봤어도 월광욕은 진짜 처음이다.
오늘 흡혈귀에대해 참 많은걸 배우네.
난 그냥 겉핥기 흡혈귀였다.
애초에 흡혈귀라는 자각도 별로 없긴하다, 자꾸 흡혈귀라서 못하는거, 기분나쁜거, 좆같은거만 느껴지다보니까 그냥 흡혈귀인 사실이 회의감이 들고 있었으니까.
여러가지 도구나 수련으로 많은걸 되찾기는 했지만 말이다.
"피부미용에도 좋고, 혈액순환에도 좋고, 아무튼 좋아. 너도 하려고?"
"안해요."
피부미용은 관심도 없고, 혈액순환은 뭐, 내 몸의 피는 내의지로 돌릴수도 있는데 뭔 소용이냐.
좀 더 스무스하게 돌릴 수 있게 되는거냐?
"이것도 한번 해보면 못 참을걸? 진짜 좋다니까."
"싫어요, 혼자하세요."
나는 유디라를 뿌리쳤다.
아니, 그리고 저거 하려면 옷을 벗어야하는거 아니야?
유디라 앞에선 좀 그렇다.
뭔가, 약간 내 사생팬같은 느낌이 든달까, 내 손가락에서 피좀 빨아먹었던날 이후 아주 크게 달라붙은 거머리같은 느낌이다.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니었던것 같은데.
유디라는 그럼 나중에 후회하지말라고하며 베란다로 가버렸다.
베란다를보니까, 무슨 수영장에서 볼법한 길다란 의자가 놓여져있었다. 뭐라그러더라 저거? 썬베드라고 그러던가?
이 경우는 썬베드가 아니라 문(moon)베드로군.
흐흐흐….
"아, 찝찝해."
밖에 나갔다온 의상 그대로 잠을 자버린탓일까, 정신이 들고보니 갑갑하고 찝찝했다.
아, 목욕이나 해볼까. 그래, 욕조…! 욕조를 써보는거야!
나는 오랜만에 뜨거운물에 몸을 담굴 생각에 즉시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혹시 유디라가 들어올까봐 문을 잠그고, 욕조에 물을 받으며 간단히 몸을 씻었다.
으음, 뭐 이렇게 통이 많아. 샴푸가 어떤거지? 린스, 트리트먼트…스킨로션…이런건 대체 어떻게 쓰는거야?
아니 그런데 흡혈귀가 뭐 이렇게 관리를 많이하지.
머릿결라든가 피부같은건 그냥 냅두면 알아서 회복되면서 깨끗해질텐데 말이야.
혹시 흡혈박탈때문인가? 그거 회복하는데 사용되는 피가 아까워서?
어째든 내가 모르는건 내버려두고, 샴푸와 바디워시라고 쓰여있는통만 대충 써서 빠르게 씻어냈다.
욕조에 어느정도 물이 들어찬듯해서 손을 집어넣어봤는데, 괜찮은것같았다.
으음, 이 몸으로 뜨거운물에 몸을 담그는건 처음이라 무슨 뜨거운물이 차갑게 느껴지고 그러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느껴졌었는데, 생각해보면 뜨겁고 차가운건 다 정상적으로 느껴졌으니 당연히 괜찮겠네 싶었다.
이 몸은 화상과 동상, 감기와 같은 질병에 강한것이지, 온도변화에도 둔감한건 아니었던것이다.
나는 몸을 전부 집어넣는다.
욕조에 받아둔 물이 조금 넘쳐흘러내며 촤아악-!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도 너무 아름답게만 들린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원래 좋아했다.
그냥 그런 소리가 주는 안정감같은게 있잖아?
"흐어어어…. "
몸이 녹는것같다.…
여름에 에어컨없는 거실에 자빠져서 바닥에 늘어붙듯이 녹는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이다.
똑같이 녹는기분인데 물속에서 녹는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난 잠깐 아이기스와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흐음, 아이기스는 빼놓지 말라고해서 언제나 끼운채로 씻는중이고, 초커는 애초에 뜯어내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으니 그냥 끼우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귀걸이같은걸 빼놨다가 회복력때문에 귀에 뚫어놓은 구멍이 막혀버리면 조금 낭패다.
그때는 또 은으로 뚫어내야할텐데, 그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 아파서.
갑갑하기는 하다.
저번에 지혜에게 목욕하면서도 그걸 안벗느냐고 한소리 들은것도 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인다고할까.
뭐, 그래도 난 이제 피부염같은건 나지 않게 되어버렸지만.
"또 잘것같은데…"
욕조에 누워서 온힘을 다 빼고있으니 뭔가 나른하고 기분좋은 탈력감이 몸을 감싼다.
한번 써보니 진짜 욕조있는 집으로 이사하고싶은 감정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진짜 욕조는… 전설이야….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남의집 욕조에서 자면 안되겠다 싶어서 일어났다.
정신차려보니 온수가 조금 식을정도로 오래 들어가있던 모양이다.
물속에빠져있던 머리카락을 건져올리고, 쭈욱짜서 물기를 털었다.
긴머리가 귀찮다는 생각은 바뀌질 않는다.
처음엔 예뻤는데, 관리를 못하겠다고할까. 원래 손재주도 별로 좋지 않아서, 머리를 정돈하는 방법같은걸 찾아봐도 영 하는대로 안되고 스트레스만 가득찼다.
그러고보면 어릴적부터 여자애들은 대부분 손재주가 좋던데, 평생을 이런걸 만지고 관리하면, 자연스럽게 손재주도 단련됐던게 아닐까.
그리고 화장같은것도 하잖아. 얼굴에 그림그리는건 또 얼마나 높은 수준의 손기술을 필요로 하겠는가.
나는 평면에 대고 그림도 못그리는데, 굴곡진 사람얼굴에 그림을 그린다니.
여자들은 다들 이미 훌륭한 화가야.
나로써는 상상도못할 기예다.
저주받은 손재주를 탓하며 대충 머리를 걸레마냥 쥐어짰다.
자기 머리카락을 이렇게 짜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그런생각을 하니까 좀 웃긴다.
정말 난 너무 내 몸을 믿고 막 써대는게 아닌가 싶다.
수건은 어디있나 한참 찾다보니까, 거울뒤에 공간이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공간활용이라니. 안그래도 넓은데 얼마나 더 넓히려고….!
수건으로 몸을닦고, 머리를 털다가 역시 귀찮아져서 대충 감아올리고, 속옷을 찾으려했는데 그게 없었다.
음.
젠장, 왜 자꾸 까먹지.
난 목욕실 옆에 행거에 걸려진 목욕가운을 발견해서 그걸 입었다.
으음, 목욕가운도 처음 입어보는거다.
보드라워서 기분 좋은데. 폭신한 수건을 감싸고있는것같다.
유디라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상식이 있는 여자인것 같다.
그동안 나한테 했던말을 생각하면
갑자기 욕실문이 열리고 막 이거저거 당해버릴줄 알았는데, 문고리가 덜컹거리는 일은 없었다.
휴우.
목욕가운을 걸치고 허리의 끈을 묶으며 나오는 내모습을 본 유디라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말했다.
여전히 속옷차림으로 월광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어, 목욕했니? 속옷없지않아?"
"그러게요. 찝찝해서 그냥 해버렸네요. 아니, 그런데 한밤중에 왠 선글라스에요?"
"음, 의외로 달빛은 상당히 밝으니까. 달을 똑바로 쳐다본적 있어?"
"아…니요? 그걸 볼일이 없었죠."
달빛의 밝기는 태양의 몇배라더라? 아무튼 말도안될정도로 어둡다.
나는 뭐 그런가 하며 달빛을 제대로 쳐다보니까, 확실히 태양저리가라였다.
흡혈귀라서 그렇게 보이는건가? 정말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밝다.
어쩐지 밤에도 낮처럼 밝더라니.
밤하늘에도 태양이 떠있는데, 당연히 밝을수밖에.
"자, 너도 와봐."
유디라가 썬글라스를 건넸다.
아니, 이건 또 문(moon)글라스인가?
…. 좋아 1절만 하기로하자.
그나저나 누군가 보면 미친년둘이라고 생각하겠네.
한밤중에 베란다에서 썬베드에 누워서 썬글라스를 끼고 월광욕을 한다니.
나는 어차피 옷도 벗었으니 그냥 한번 어울려주기로 했다.
뭐, 덮쳐졌을땐 반항하면 유디라의 팔다리정도야 금방 꺾어낼 자신이 조금 생겼달까.
그렇게보니 애초에 유디라가 나한테 뭘 할 수가 없기는 하네.
어중간한 흡혈귀로 변한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시간뒤. 유디라는 정말로 월광욕을 즐기는것 같다.
왜냐면 한시간동안 아무말 없이 정말 누워만 있었으니까.
"흐으음…뭔 차이가 있는진 모르겠네요…."
"그렇게 가운으로 다 가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안 벗어요."
"또 튕기기는. 이 언니가 하는것중에 안좋은거 없다니까."
"……."
그렇긴하다.
돼지피건도 그렇고, 우유도 그렇고, 관수면도 그렇고…. 유디라가 알려준 흡혈귀적 생활의 지식들은 꽤나 쓸만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다른 문제다.
애초에 나는 이거 벗으면 알몸이야.
"아아, 그렇지. 기다려봐. 내 속옷중에 맞을만한게 있는지 찾아줄테니까."
"에? 그러지 마세요."
내가 당신 입었던옷을 어떻게 입어?
그것도 찝찝하잖아.
그냥 입고온거 빨아서 내일까지 말리면 되는거 아닌가.
"괜찮아. 잘 안입던걸로 줄게."
"아니, 어째든 중고잖아."
다른 여자가 입던 속옷을 입는 남자라….
이제 남자는 아니지만, 그냥 좀 정신적으로 그렇다.
아무리그래도 여자로 변한지 겨우 3달밖에 지나지 않았거든.
3달이면 길면서도 짧은 기간이다.
내 몸이 익숙해지는데는 충분한 시간이지만, 내 머리가 받아들이기엔 조금 부족하다고할까.
"그거 참 까탈스럽네. 자, 받아."
"후, 당신…. 언제한번 방청소하죠."
유디라의 방은 베란다에서 고개를 돌리면 창문 너머로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또 슬쩍 내부를 보고 말았다.
정말 잘도 어질러 두셨군…. 먹은 과자나 혈액팩 쓰레기가 마구잡이로 쌓여있었다. 쓰레기통은 안비우는건가?
"나름대로 정리한건데…. 뭐, 그래."
"저게요..??"
빈말로라도 깔끔하다곤 말할 수 없겠는데.
실버는 그동안 잘도 같이 살았군.
"쓰레기는 버릴때 한번에 버리니까. 쓰레기만 버리면 끝이야."
"예…."
그 쓰레기를 쌓아둔게 문제라고 하는겁니다.
알몸vs 속옷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그래도 알몸보다는 속옷이라도 입은게 낫겠지.
체념하며 유디라가 건네준 속옷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었는데….
"아니, 이건 좀 화려하지않습니까?"
"네 가슴에 맞을만한게 이거뿐인걸. 그리고 이거 세트야."
브래지어쪽은 가슴사이즈가 맞을리가 없으니 그렇긴하다.
그래서 내게도 이제 익숙한 캐미솔을 찾아준 모양이지만, 내가 입던거랑은 좀 다른느낌이다.
완전 레이스로 이루어진 정말 '속옷'같아보였다.
내껀 그래도 런닝처럼 골반까지 다 가려지는 디자인인데 이건 배랑 배꼽까지 노출되고.
그런 레이스장식과 세트라는듯이 아주 야무지게 장식된 팬티.
내가 한벌 갖고있는 가터벨트랑 세트인 팬티도 이것보단 덜 요란할것 같은데.
"……."
받아서 입기는했지만, 결국 목욕가운은 벗지 않았다.
월광욕도 하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