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패밀리어 (53/101)



〈 53화 〉패밀리어

"와, 새카맣게 타셨네요."
"하하. 그렇지?"


오랜만에 본 연구자의 모습은 정말 많이 탄것같았다.
여전한 장발머리와, 정리하지읺은 수염이 그를 건강한 남성보다는 무슨 무인도에서 방금 돌아온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케했다.
그동안 대체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여기저기 돌아니면서 자료찾고 연구시설 들리고 고고학적 유적지까지  돌아다녀봤더니 정말 많이 탔더라고."

연구자는 하하 웃으며 안경을 고쳐썼다.

"그렇군요.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정말 오랜만에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연구실에 앉아서 채혈을 받았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연구자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호오. 이거 정말 흥미로운데. 으음, 정말 복잡하군."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 문제는 아니야. 단지… 생각했던것보다 더 좋은걸. 최근 사냥꾼을 시작했다고 했던가?"
"예. 그렇죠. 어쩌다보니까."


안하겠다고 그렇게 뻐팅겼는데, 결국 사냥꾼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흡혈귀인 몸으로 일상에 녹아드는것 자체가 쉬운일이 아니더라고….
연구자는 모니터에서 갱신되는 활자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화면에 몰입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것 같다.


"혹시 그후로 흡혈은 어느정도나 했어?"
"일단 사람피는 안마셨고요, 에이샤 그래멀린이라는 가주급흡혈귀 하나, 돼지피 여러팩, 뭐 키위맛나는 피 몇개랑….아, 근데 그거는 무슨 피인지 모르겠네요."
"….자잘한건 안 말해줘도 돼. 그런데, 사람피를 안 마셨다고?"
"네. 안마셨는데요?"

데이터를 확인하던 연구자가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난 정말 마신적이 없는데?


"흐음, 사람의 DNA가 섞였는데… 꽤 대량으로. 너 혹시 몰래 사람하나 먹은건 아니지?"
"뭣, 말도 안돼요! 제가 얼마나 참았는데….!"

나는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계속 세찬이나 실버같은 사냥꾼이랑 다녔다구요! 세찬이한테 물어보면 될거 아니에요!"
"어어. 진정해, 난 그저 정보를 말했을 뿐이야. 네가 사람을 먹든, 흡혈귀를 먹든, 나를 먹어치우고싶은게 아니라면 괜찮아. 그런 융통성은 있어, 내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휴, 답답해!
나는 화가나서  밖에서 대기하던 한세찬을 불렀다.

"세찬아! 와서 말좀 해줘, 내가 언제 사람피를 먹었냐?"
"뭐?"

한세찬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어이없다는  물었다.
봐, 쟤도 어이없어하잖아!

"아, 별건 아니야. 혈액검사를 했는데, 못보던 DNA가 추가되어서 말이지. 성인 남성."


연구자는 세찬이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여전히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다.

"봐,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리고 내가 남자 피를  빨겠어? 나도 남자인데, 남자 몸에 이빨 박아넣겠냐고! 상식적으로!"

너무나도 억울했다.
이건 모함이다.


"아 맞다,  최근 수혈을 좀 받기는 했어요. 변종 바이러스 항체 만든다고 체력을 좀 많이 써서. 지금도 조금 받는중인데."
"그건 나도 들었어. 그리고 그 피는 rh+ O형의 여성의 피뿐이었고,  DNA는 등록되어있지. 흡혈귀에게 제공하는 모든 혈액은 기록되니까. 그런데 이건 기록에 없는 DNA거든. 널 믿지 못하겠다는게 아니라, 정보가 그래."
"아."

그러자 세찬이가 뭔가 떠오른듯 이마를 짚었다.


"젠장, 거의 다 잊었는데."
"뭐?"
"너, 마신적 있었어. 내가 말을 안했을 뿐이지."
"뭐라고?"

내가? 언제?  말을 안해줬는데?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되어서 조금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쩐지 요즘 흡혈충동이 자주 들더라니, 이새끼 탓인가?
그냥 충동억제제 약빨이 떨어진줄 알았는데?
하필 또 성인 남성은 뭐야?

"그게 얼마전이지?"
"한 두달정도 됐습니다."
"흠, 알겠어. 시간대도 얼추 비슷하네. 네가 한거라면  필요해서 했겠지. 그런데 왜 말을 안한거야?"
"하아, 그럴 일이 있었죠. 젠장."


두달전, 내가 사냥꾼이 됐을땐가?
그때 내가 남자 피를 마셨다고?
왜? 세찬이가 나 자는중에 일부러 주사기라도 꽂아줬을리는 없는데?
그리고 마실 이유도 없었던것….

"아, 두달전이고, 성인남성이라면 저도 하나 떠오르는게 있네요."

그 나이프를 든 흡혈귀 사냥꾼이겠지.
내 배때지를 쑤셔놓고, 오른팔을 잘라냈던 그 사람.
그런데 난 그사람 피를 빨 정신이 없었는데.
게다가 그사람은 남자인데다 무섭게 생겼어.
그런사람 몸에 내가 제정신으로 입을 댈 수 있을리가 없잖아.
아니면 기절하면서 정신을 잃었을때 나도 모르게 흡혈을 해버렸다는걸까?


"근데 진짜 왜 말을 안해줬던거야?"
"그럴 일이 있었다고. 내가 더이상 물으면 다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윽."

녀석은 요즘 말로해서 안될것같으면 일단 못부터 꺼냈다.
자꾸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폭력 반대!
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자세를 잡고 대치했다.
더이상 허벅지를 내줄 생각은 없다. 나도 나름 성장이란것을 한다고!
비록 지금은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긴 하지만, 휠체어에서 내려서 걸을 정돈 된다. 피할수 있을까?
미리 구속제어는 풀어둬야겠다.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가해진 제야…ㄱ."
"허? 그렇게 나오시겠다?"


자, 잠깐 타임, 이거 주문 생각보다 좀 길다.
주문 외울시간은 줘야지. 만화같은거보면 변신할때 안건드리는게 국룰이라고!
악!

"성추행이야! 어딜만져! 어딜 만지냐고!"
"뭘 만져, 만지긴! 나와! 또 섹드립을쳐?"

익, 그런데 이게 재밌는걸 어째!  수 있는건 유용하기 써먹어야지! 그게 나의 변해버린 성별이라고해도!
의자를 내밀고 이리저리 세찬의 손길을 회피하던중, 연구자가 진지하게 다그쳤다.

"거기 둘, 내 연구실에서 꽁냥대지말고 일단 앉아줄래?  이야기가 많거든."
"넹."

나는 자리에 다시 의자를 끌고  앉았다.
세찬이도 불만이  있는 표정으로 멈췄지만, 세찬이가 자꾸 나를 흘끔거릴때마다 난 어깨가 떨렸다.
힝, 목사님…. 구속제어해제 주문 좀 짧은걸로 해주시지….


휴우. 얘기해주기 싫은 이유가 있겠지.
딱히 듣지 않아도 세상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을 것 같기는 하니까.
내가 알아야하는 중요한 일이면 세찬이가 말해줬을거다.
이러니 저러니 좋으니 싫니해도 내가 살아가는데 꽤나 도움을 주는 녀석이니까.

뒤이어 연구자는 에이샤 그래멀린에 대해 물었다.
나는 뭐 에이샤에대해 아는거라곤 나쁜년이라는 것밖에 아는게 없어서 세찬이가 대답했다.

"그래, 에이샤 그래멀린? 자기가 가주흡혈귀라고 했어?"
"네. 자기입으로 전에는 가주였다는군요. 이제는 오라클의 사제라고."
"흐음, 이 녀석도 이상한 반응이네. 오라클의 흡혈귀라, 이녀석 혹시 포획했어? 아니면 시체라도?"


세찬의 설명에 연구자는 눈에 이채를 띄며 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의 사체는 가진게 없었다.

"아깝게도 없어요. 찾아가보니 이미 도망친 뒤더군요."
"흐음, 정말 아쉬워. 이녀석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것 같은데. 릴리스의 혈액패턴과도 조금 유사한 부분이 있고."
"그런가요?"
"상당히 열화된듯 하지만, 특정 부분의 경우엔 놀랍게도 유사해. 흐음, 재밌네. 재밌는 연구감이야…. 이 패턴은 의미하는게 뭐지? 뭔가…."

연구자는 모니터에 혼을 빼앗긴듯 보였다.
그러고 약 10분을 계속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길래, 나랑 세찬이는 몇마디 잡담을 떨다가 그냥 '뭐, 필요하면 다시 불러라' 하며 돌아가버렸다.

그후로 혼자서 10분을 더 기다렸는데도 그러고있어서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앞으로가서 모니터와 그의 얼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연구자씨, 정신좀 차려요'라고 말하자, 그는 그제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아, 미안. 이런 자료는 정말 오랜만이라서…. 하아, 내가 챙겨온 사례들중에 이런게 있었던것 같은데…. 조금 찾아봐야겠네. 아, 맞다. 석주씨."
"예."


계속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중얼대던 연구자가 드디어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석주씨라, 좋은 울림이다.
내가 연구자를 이래서 좋아한다니까, 나를 그냥 석주씨라고 불러주잖아.
내 과거의 모습을 전혀 모르는 그에게 듣는것은 함축된 의미따위 결여된, 그저 호칭일 뿐이지만 말이다.


"몇달전에 얘기했던거 기억하고있어? R-CELL을 추출해서 해석하고 너한테 주사해보겠다는 이야기."
"예. 했었죠."
"출장다니며 여기저기 연구시설을 빌려서 만들어낸 혈청이야. 피의 출처를 숨기느라 진땀좀 뺐어."
"오호, 이게요?"

연구자는 책상위에 놓여진 크고 튼튼해보이는 금속제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는 상당히 큰데, 들어있는건 검지손가락 정도 크기의 자그만 유리관이었다.
꽤나 신경쓴 포장이네.

"지금 괜찮아? 몸상태는 어때?"
"별로 좋지는 않긴 한데, 그거 예상되는 부작용은 뭐죠?"
"잘 모르겠는데, 내생각으론 고열, 실신, 땀…. 일단 이건 기본일것 같고…."

더 들어볼것도 없다.
미루자.
더이상 병약한 흡혈귀가 될 수는 없어.

"… 나중에 할게요. 괜찮겠죠?"
"그래, 상태가 안좋아보이기는 하네. 몸조리 잘 해. 지금은 킵해둘게. 아 맞다. 석주씨, 그래도 이건 한번 맞아줘야할것 같은데."

연구자는 의학용 냉장고를 열고 가지런히 놓여진 약품들 사이에서 자그만 유리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뭐라고 써있는 것 같은데.BB?
무슨 새로나온 비비크림이라도 되나?
...물론 아니겠지.

"그게 뭔데요?"
"혈액 부스터. 흐음, 일시적으로 VP를 끌어올려서 과흡혈 상태로 만들지. 아, 과흡혈상태가 뭔지 아나?"
"물론 모르죠."
"사냥꾼 시작한지 두달이나 됐다면서."
"….들어보기는 한것 같네요."

연구자가 조금 이상하단 어투로 물었다.
저번주에 놀이공원에서 세찬이가 과흡혈이 어쩌고 한걸 듣긴 했다.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격상의 상대의 피를 마시면 흡혈귀는 폭주하게돼. 겉으로봐선 폭주한 흡혈귀는 거의 타락한 흡혈귀와 다르지 않아. 하지만 좀더 흡혈귀의 본질에 가까워지거든?"
"본질이요? 흡혈귀의 본질이 뭔데요?"
"흡혈귀의 본질. 그건 악마야."
"오."

악마.
악마라.
악마라고하니까 갑자기 악마사냥꾼이 떠오르는데, 그여자 요즘 뭐하고 지내려나.
요즘 흡혈귀랑 자주 엮인다더니. 확실히 흡혈귀한테 뭔가 있기는  모양이지.

"학계에선 비주류지만,  그렇다고 보거든. 그런데 문제는 과흡혈 현상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그런가요?"
"애초에 과흡혈 현상에대한 자료 자체가 별로 없다고 해야하나? 정말 희귀한 사례거든. VP차이가 극심한 상대를 흡혈한 흡혈귀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명명은 되어있는데…. 그런 일이 어디 흔하게 일어나겠어?"

그건 그렇겠지, 어떤 흡혈귀가 VP차이가 그렇게나 극심한 흡혈귀에게 흡혈을 당하겠냐.
나같은 호구새끼나 당하는거겠지. 시부럴….
그래도 친구들은 다 구해냈으니 됐다….


"그런데,  피는 과흡혈 현상을 억제하는 부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지?"
"예. 세찬이가 그러더라고요.  피를 마신 와인트리한테는 과흡혈 현상도 없다고."
"와인트리?"
"지하실에 박제된 흡혈귀 이름이요."


내가 지었어요.
솔직히 잘 어울리는것 같은데.
뭔가 상큼한 느낌도나고.


"역시 그렇군. 너는 다른 흡혈귀랑은 뭔가달라. 네게서 만약 과흡혈 현상을 유도할 수 있다면 내 연구도 막바지…."
"흐음…."

연구자의 눈이 빛난다.
의사도, 연구자도, 결국 자기 하고싶은일 앞에서 상당히 솔직해지는 부류구나.


"그건 부작용이 없나요?"
"아아, 조금 어지러운 정도야. 이걸 맞고 강화된 VP로 무리하게 혈류를 돌리지만 않는다면 금방 안정되겠지."
"그래요?"

조금 어지러운 정도야 뭐….
나도 흡혈귀의 본질이나 그런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었다.
흡혈귀에 대한것을 파헤치다보면, 언젠가 내가 다시 인간 김석주로 돌아갈 실마리로 연결되지 않겠어?


지금 연구자는 무슨 악마론에 꽂혀서 시야가 쏠린것 같기는 하지만, 어쩐지 정답에 가까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여자의 감'일까?

나는 팔뚝에 BB몇방을 맞았다.

"느낌이 어때?"
"뭐 별 차이가 없는것 같은데…."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난 뭐 별로 달라진걸 못 느끼겠다.
계속 시간이 지나니까 괜스레 화장실에 가고싶어졌다.
흐음…. 참고있을 필요가 있을까.


"저 잠깐 화장실좀…."
"아, 다행히 반응은 오네. 자."


내가 일어서려고하자, 연구자가 책상 밑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에….?"

나는 연구자가 내미는 컵을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이게 뭐야.

'소변 컵'


"과흡혈 현상의 전조증상은 혈뇨거든. 일단 그걸 연구할거야."
"이, 변태같은….."

성희롱으로 고소할거야, 진짜로!
아, 신분. 신분이 없어.
젠장…! 고소하려면 신분부터 만들어야하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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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처음이네. 시부럴…."

정말 혈뇨가 나왔다.
으음…. 연구하는데 쓸거라곤 하지만 이거 되게 기분 요상하네.
특히, 소변컵을 대고 소변을 보는건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앉은채로 컵 주둥이를 소변줄기에 맞추는건 즐거운 행위는 아니었으니까.


왜곡된 성욕…. 그런건 아니겠지.
병원복도를 걷는데, 저기서 유디라가 커피를 마시며 서있었다.
저사람도 가만보면 믹스커피 참 좋아해.
나는 그녀를 지나쳐갔다.
그런데 유디라가 내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와, 릴리야. 그거 뭔음료수야? 되게 좋은 향이 나는데?"
"이거 먹는거 아니에요!"


시발, 맞다. 유디라는  피라면 생리혈마저 탐내는 미친년이었지.
혈뇨는 아주그냥 레드레몬에이드가 따로 없겠군.

"응? 이게 뭔데?"
"꺼져요, 그냥!!"

난 손으로 컵 주둥이를 가리고 유디라를 발로 차듯이 밀었다.



"알았어, 안 뺏어먹어. 치사하게말이야."
"치사한거 아니니까! 내가 마실것도 아니고!!"

시발! 손에  묻었잖아! 아악!!
그치만 이걸 흘리면 다시 그짓을 할거 생각하니까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후우…."

 여자는 생긴건 멀쩡한데 대체 왜 저러는거지.
어째든 배달업무를 무사히 마친 나는 연구자에게 뭐라고 따졌지만,  불평은 듣는 둥 마는둥, 무슨 기계같은데 바로 넣어버리는 모습을 보고는 포기했다.


얼굴을 보니까 무슨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같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하고있다.
젠장, 시커멓게 탄피부의 안경쓴 로빈슨크루소 모습으로 아이같은 표정을 짓다니…….
그래 뭐, 어찌보면  순수한 사람이다.
단지 연구에 미쳐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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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끝에, 나는 퇴원했다.
입원과 퇴원이 너무 반복되니까 이것또한 일상같다.
이제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고, 돈도 생겼으니 더할 나위가 없을것 같지만….
지혜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할지 참….


난 당분간 실버씨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해서 지금은 실버씨의 자동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지혜한테  행적이 전송되는 것 때문에 당분간  집에는 못 들어갈 것 같았다.
게다가 실버씨 집에 있으면 둘러대기도 편하고 말이다.
걔들은 실버씨가 내 아빠인줄 알고 있으니까.
으, 엄마는 없는데 아빠가 둘이라니. 미친걸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생각을 돌렸다.


음, 세찬이 혼자서 밥은 챙겨먹을지 모르겠네.
또 맨날 라면만 처먹는거 아닌가.
그러고보니까 김치도 담가줘야하는데 말이지. 한여름에 김장이라니,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말이야.

"여깁니다, 릴리양."

 말을 듣고나서야 나는 차 시트에서 눈길을 떼고 실버가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 여기가요?"
"급하게 구한거라 조금 평범한 아파트입니다."
"그렇다기엔 좀…."

넓다….


"로비도 있는데요, 실버…."

호텔인가?
나는 몰랐지…. 이런데서 살고있을줄은….
우리집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죄송합니다. 아직 초대를 안해드렸군요. 들어오십시오."
"아, 아뇨. 그냥 좀 정신을 놓고 있어서요. 감사합니다."

내가 아직 초대받지 못해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줄 알았는지 실버가 죄송하다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냥 진짜로 정신을 놓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수도권, 릴리양의 자택과 가까운 곳에 적당한 넓이의 주거시설은 여기뿐이더군요."
"어허…. 이 가구들은 다 들여놓은건가요?"
"하하, 급하게 구매했죠. 아무래도  오래 파견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거실의 가구들도  모던한 분위기로 맞춰서 구매한걸보니 센스도 좋아 보였다.
우리집엔 이케아 조립식 테이블이랑 앉은뱅이책상에, 주방에 대충 어울리지도 않는 나무 밥상이 있을뿐인데.


난 화장실을 열어보고는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지도 몰랐으니까.

"욕조…! 욕조가 있어...!"


심지어 비데까지 있잖아!
완전 금수저나 살법한 아파트!!

"실버씨, 저 이런데서 살아도 되는걸까요…?"

손이 벌벌 떨린다….
이거 진짜야?
내 꿈이 벌써 이루어졌어…!
실버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릴리양이 원하신다면야, 얼마든지요."
"끼야아아아악!"

행복한 비명이었다.
미중년 너무 간지야! 멋이 흘러넘쳐!
하지만  기분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잘부탁해, 릴리."
"아."

유디라랑 같이 살아야한다고…?
이게 가장 중요한건데 까먹고 있었잖아?
….일단 물리저해는 풀어두기로할까.

"신의이름으로나에게가해진제약을해제하노니나는어둠속에서도빛을바라는자라."
"응? 릴리야, 방금 뭐했어? 랩한거야?"
"아뇨,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내 정조는 내가 지켜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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