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블러드 카니발 (42/101)



〈 42화 〉블러드 카니발

"뭐야, 왜 타조가 없지? 다 자러간건가?"
"아뇨, 형. 저기 숨어있어요."
"어, 진짜네.  저런데 숨어있대. 더워서 그런가."

이라가 손을 뻗어 가르킨 통나무뒤에, 자세히보니 타조가 머리를 단체로 바닥에 처박고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음, 떨고있는걸 보면 더운건 아닌것 같은데.
저기는 추운걸까?
동물들이 더울까봐 에어컨이라도 틀어주는건가.


"오늘 무슨 날인가, 동물들이 다 더위라도 먹었나봐."

확실히 덥긴하지만.
그렇대도 동물들이 다 왜 저러는건지 전혀 알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타조는 더운데서 사는동물 아닌가? 타조가 더위를 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는데.
그만큼 우리나의 불더위가 빡세다는 뜻이려나.


우리는 의아함을 느끼며 타조를 구경하다가, 사자우리를 발견했다.
사자는 숨어있지 않았는데, 조금 이상해보였다.
뭔가 싸움을 준비하는 기백이 느껴진다고해야 하나.
그것을 본 선민이가 놀라움을 표했다.

"와, 사자다. 나 사자가 안자는거 처음봐."
"그러게. 저렇게 서있는 사자라니, 디게 신기하다."

선민의 여자친구, 이채연 역시 그런 사자의 모습은 처음인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사자라는놈은 원래 맨날 동물원에서 보면 잠만 자는 모습이 디폴트인데.
내가 생각해도 사자는 자는모습밖에  기억이 없었다.

"신기하네."

세찬이 역시 조금 놀라운 듯 했다.
나는 슬쩍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흡혈귀랑 관련이 있는건가…?"
"그건 모르겠지만, 동물들이 뭔가에 겁을 먹었군."
"니 얼굴보고 쫀거 아닐까?"
"…."
"이거봐. 쫀다니까."

무서운표정 짓지말고.
진짜로 이거 보면 사자도 지릴걸.
나는 킥킥거렸다.

그런데, 어쩐지 유령의 집에 갔다온뒤로 지혜가 멍한 상태다.
무슨일이 있었던건가?

"어이, 근데 지혜한테 뭔가 했어?"
"고백거절."
"…. 그렇구나."


으, 결국 고백을 했구나. 뭐, 분위기는 있긴했지.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걸로 저렇게 완전히 멍하게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게 정상인가, 무슨 두뇌파괴같은거 당한건 아니겠지?
실연의 아픔이라는거 느껴본적이 없으니 내가 알턱이 있나.

"근데 제대로한건 맞지?"
"아마도?"
"아마도?"
"뭐, 경험이 그닥 많지 않아서."
"음."

그건 그렇네.
 바퀴벌레건 이후로 녀석은 제대로 된 이성교제는커녕, 여자랑은 말도 제대로 안했으니까.
지금이야 여자랑 대화하는건 괜찮아진것 같다만, 아직도 벌레는 극도로 혐오하는 중이다.
벌레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나는 꽤 좋아하긴 해.
난 옛날부터 벌레같은거 잡는것도 좋아했다.

난 어릴때 아빠랑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벌레랑 가까워질 기회가 많았다고 해야 하나.
세찬이는 나랑은 다르게 도시에서 이사온 가정이었다.
중학교이후, 수도권으로 이사를 해오긴 했지만, 그전엔 나랑 잠자리리나 매미를 잡거나, 개미집을 들쑤시고 멍하니 보고있거나, 장수풍뎅이랑 사슴벌레를 싸움붙인다던가 하고 놀았었다.
그땐 나나 세찬이나 정말 순수했지.


물론 그때라고해서 세찬이가 벌레를 엄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내가 데리고 다녔던거였네.
그때는 세찬이도 숫기가 없었으니까.

아무튼, 각설하고.
여기저기 쏘다닐때마다 이상한 동물들의 행동만을 계속해서 보게되니, 확실히 뭔가가 있는것 같았다.
흡혈귀가 동물을 조종할수 있다던가?

"그럴수도 있긴하지. 정신간섭능력이 있다면."
"음, 그… 나한테도 있는 그거? 혹시 나때문에?"
"아니야. 그리고 정신간섭이라면 내가 알아차렸을걸."


그런가, 녀석은 정신능력을 주로 사용하던 흡혈귀, 릴리스를 사냥한 사냥꾼이다.
사냥꾼들중에서도 정신간섭에 대해 이녀석보다 자세히 알고있을 녀석은 우리아빠 말고는 없겠지?
그런 한세찬이 정신간섭이 아니라면 아닌걸거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계속 벌어졌다.

조류테마의 건물에 들어가자 모든 조류들이 각자 낼 수 있는 울음소리로 고막이 터지게 울어대며 파닥거렸다.


사파리테마의 맹수들은 모두 으르렁거리며 위협했고, 아프리카 테마의 코끼리나 하마, 기린같은 녀석들은 모두 미친듯이 몸을 떨어대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때 기린의 울음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다.


"야, 이즈음되면 좀 무서운데…."
"그러게, 유령의 집보다 무서운거같애."


선민이가 채연과 나누는 대화는 심히 공감이 갔다.
지금 주변이 밝아서 그렇지, 밤에 이랬으면 오늘 잠은 다 잤다.
그만큼 이해할수 없는 동물들의 행동은 사람의 원초적인 본능에 내재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이해할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치 사람들이 수학이나 영어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래서 어디 정상적인 동물은 없는건가 해서 하염없이 동물우리 사이를 걸었다.

그때 이라가 내 팔을 잡아끌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손끝이 향한곳은 토끼우리.

"누나, 이게 토끼에요?"
"응, 맞아."

토끼역시 정상적인 녀석은 별로 없었다. 바르르떠는녀석, 죽은듯이 쓰러진녀석, 미친듯이 깡총거리며 도망치는녀석….
그중에 한마리가 아주 의연하게 서있어서 신기했는데, 이라랑 다가가서 보니까 의연하게 서있는게 아니라 선채로 기절한거였다.


"음…. 얘들은 또  잘못 먹었나. 왜이러지."

이라가 그렇게 발광하는 토끼들을 앉아서 지켜보다가, 나한테 손짓한다.  손짓은 마치 나에게 고개를 내려달라는 듯 해서, 나는 자리에 앉아 이라에게 귀를 내주었다.
이라는 나에게조차 아주 작게 들릴정도로 목소리를 낮춘채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동물들이 저를 무서워하는것 같아요."
"뭐?"
"잘은 모르겠지만 느껴져요. 이 아이들이 저를 무서워하고 있다는걸…."

잊고있었지만, 이라는 라이칸슬로프. 그것도 멸종한 라이칸슬로프의 마지막 개체다.
진짜 하나도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사람들이 멸종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세상에서 희귀해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나는 사실 이라에대해 뭐 아는것이 별로 없었다.
달의 기운에따라 '격'이 달라지는 종족이고, 인간상태의 이라는 늑대인간으로써의 격이 높아진 상태라는 정도만을 알고있을 뿐.
이거 정보통제 아니냐? 알려주는게 너무 없잖아.
내가 그다지 알려고하지 않은것도 있긴 하지만.

"그럼 네가 어떻게 할 수 있어?"
"글쎄요….. 잘은 모르겠는데, 한번 해볼게요."
"그래."

이라는 토끼우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이라가 우리의 창살너머로 손을 집어넣고 이리오라는 듯 손짓하자, 검은 토끼가 벌벌 떨면서도 이라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댄다.
작은 손으로 그런 토끼를 살살 어루어만지자, 토끼의 떨림이 잦아들며 호흡이 안정되어가는게 눈에 띈다.
어느정도 진정된것같아 보이자 이라가 손을떼고 잘가라는듯이 손을 흔들자, 토끼가 완전히 쌩쌩해져서는 여전히 겁에질린 토끼 무리에 돌아간다.

토끼무리는  흑토끼가 아무일 없이 귀환하자, 광기가 점차 사그라드는것이 눈에 띈다.


"와, 어떻게 한거야?"
"그냥 심호흡하고 정신을 좀 가다듬었어요. 누나가 하는것처럼요. 예전에 저랑 저택에서 누나가 했던거 있잖아요."
"음…. 어떤거? 한게 좀 많아서 생각이 잘 안나네."

내가  했었지.
이라랑 한거? 뭔지 잘 모르겠다.


"그, 저…. 누, 누나가 저 껴안고, 창고에서… 그거요…"
"어? 어어…. 내가 그랬나?"

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서? 이라가 얼굴이 시뻘개진걸 보니 뭔가 엄한일이 있었나본데.
그런데 내가 생각해봐도 그때 별 일은 없었다. 그냥 좀 끌고다녔을 뿐인데.
대체 어땠더라. 생각을 떠올려보니 사냥조라고 했던가, 그놈들이 보일때마다 이라를  붙잡아 안고 인식저해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심호흡하고, 정신을 집중한다는거. 내가 인식저해를  주변에 걸기전에 하는거랑 비슷하네?

그렇다면 이라가 방금 한것은 일종의 인식저해로 기척을 숨긴거라고 봐야한다.
…. 이라 녀석, 재능충인가? 나는 유디라한테 설명을 듣고도 감이 안와서 겨우겨우 하는거를, 어깨너머로 보고 감각만으로 흉내낼수 있단거 아니야?
아니, 나는 흡혈귀가 된지 3달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거지.
이라는 최소 몇년을 늑대인간으로 살면서 감각을 다루는법을 알고 있었을테니까, 출발선이 다르다!

에휴, 이딴 생각해서 뭐하냐. 패배감이 사라지는것도 아니고….
앉아서 한숨을 쉬고있자, 도민석이 다가왔다.

"릴리야. 이라랑 뭐해. 어? 토끼들은 멀쩡하네?"
"네, 민석이 형."
"어우, 멀쩡한 동물을 보니까  힐링되네."

평온함을 되찾은 토끼우리에서 하얀 토끼를 찾은 녀석이 '오. 저기 릴리토끼다.'하고 시비를 걸었지만, 외형같은건 이제 대충 받아넘기는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제꼈다.
가만보면 이놈도 애새끼랑 다름이 없다니까. 괜히 말 놓으라고했나.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것 같다.

그렇게 다시 동물원을 거닐던 우리 일행은 바뀐 동물원 분위기에 한숨을 쉬었다.

"정상적인 동물을 보니까 정말 좋다. 하아…. 아무래도 더위때문에 맛이 갔던 모양이야."
"그러게, 역시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기 태어난대로 살아야하는것 같아. 으으 무서워."
"……."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채연이 하는 말에는 나의 가슴을 찌르는 강한 뼛조각같은게 들어있었다.
'태어난대로 살아야 한다.'
분명히 인간 남자로 태어났는데, 흡혈귀 여자로 변해버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걸까.
흡혈귀 여자처럼? 아니면 인간 남자처럼?
20살의 흡혈귀 릴리처럼? 23살의 인간 김석주처럼?

이미 나는 어느정도 20살의 릴리처럼 행동하고 있기는 하다.
대학도 관두고, 세찬이한테 내 연기를 시키고, 지혜에게 저런 충격을 주고, 지금은 흡혈귀 사냥꾼으로 흡혈귀 잡겠다고 이짓을 하고있네.
23살의 인간 김석주라면 절대 안할 짓이다.
그건 결국 사람은 외견에 맞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뜻인가.
내면따위는 외면에 종속되는건가?

아니, 그럼에도 나는 김석주였다.
왜냐하면 결국 남들에게 나는 릴리로 인정받는게 아닌, 조또 없어도 김석주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내가 힘들게 쌓아올린 친분과 인간관계에 릴리라는 이방인을 끼워넣기 싫었었다.
나는 여자처럼 행동하는것이 쪽팔린건줄 알았는데, 그냥 남들에게 나는 릴리로 보여지는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굳이 쉬운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갔을지도.
세찬이에게 내 연기까지 시켜가면서 대리만족을 느낀것일지도 모른다.

"왜그래? 몸상태가 안좋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를 걱정하는 민석이 녀석의 목소리에 조금은 퉁명스럽게 쳐냈다.
내가 기억을 지웠으니 어째서 날 김석주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이제와서 날 다시 김석주라고 밝힌다면….


라고 생각하니까 그동안 내가 했던 릴리연기가 떠올랐다.
녀석의 정신이상이 먼저일까 내가 쪽팔려서 자살하는게 먼저일까.
난, 그거 감당이 안돼.

"와, 이것봐. 여기도 있네, 토끼."


도민석이 가르킨것은 토끼모양 가면이었다.
그야 토끼가  놀이공원 마스코트니까 그렇겠지….
중절모와 외안경을  토끼, 리본을 매단 토끼, 게다가 그냥 토끼귀도 있고 그렇다.

잠깐, 설마  씹덕이 이걸 사준다고 하지는 않겠지?


"하나 사줄까? 릴리야, 어때?"
"정말 하나도 쓸데없으니까 돈낭비 하지 말아요."

뭔 토끼귀 머리띠를 내가 어따가 쓴다고. 쓰기도 싫은데다 오늘 하루 밖에는 못 쓰는거 아니야.
나는 돈 쓰는데는 매우 효율적인 사람이다.
얼마나 효율적이냐면, 집에 있는 물건중에 일주일에 한번이상 쓰지 않은 물건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그정도로 필요한것이 아니면 아예 구매를 안한다는 뜻이다.
요즘엔 너무 많은 옷가지때문에 그 수치가 조금 변동이 있기는 할테지만, 그렇다고 쓰레기를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겠지.


나는 문득 햇빛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계를 꺼내보았다.
곧 6시가 될것같았다.
나는 세찬에게 다가갔고, 시간에 대해 귀띔했다.

"세찬아, 이제 곧 6시야."
"그럼 동물원은 전부 돌았으니 빨리 저쪽으로 돌아가야겠군."
"걸어가서는 시간을 맞추지 못할것 같은데, 축제는 블러드 시티서부터 퍼져나가는 컨셉이라고 했어."
"음, 일단 실버와 유디라를 보내고 빠르게 합류해야지."
"위험하지 않을까? 흡혈귀가 나타난다면?"
"얘들한테는  옆이 가장 안전해. 여차하면 결계술로 격리시키면 되니까."
"그럼 우리는 좀 늦어버릴텐데. 포위망에 구멍이…."

그렇게 작전을 수립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는데, 선민이가 외쳤다.


"어이, 거기. 속닥이는 거 그만두고! 블러드시티까지 걷기도 귀찮은데 리프트 타는게 어때?"
"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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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찬이 왼쪽에, 이라가  오른쪽에, 그리고 오른쪽끝에 도민석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리프트에 올라탄후에 당혹스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여기보다 높은데서 떨어져도 멀쩡했던 경력도 있고, 작지만 태양을 막아줄 천막도 있으니 딱히 무서울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아무생각없이 올라탄 리프트가생각보다 강력한 흡혈귀 고문도구였던 탓이다.

살이 익는다….
천막이 아무런 역할을 못해주고 있잖아. 이거 왜 달려있는건데?
장식용?
나는 리프트에 탄채로 양산을 펼쳐 생긴 그림자에 내 몸을 구겨넣다시피해서 신체를 보호했다.
으윽, 정말 긴 치마라서 다행이다.


"릴리야, 괜찮아? 많이 힘들어?"
"으음, 괜찮아요."
"피부가 생각보다 많이 약한가보네. 미안하다. 생각해주질 못했어."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짜 괜찮으니까."

정말 미안한듯이 시무룩해 보이는 도민석의 배려심에 나는 감명을 받았다.
괜히 흡혈귀인거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는 것이다.
아마 녀석이 23살먹고 흡혈귀라는게 실제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을테니, 내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누구 피라도 빠는 현장을 들키지 않는 이상은 눈치챌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녀석이라고 태양에 전기구이 통닭마냥 구워지는 흡혈귀를 구해낼 재간이 없잖아.
 그냥 신경을 다른데로 돌려서 고통을 좀 덜어내보려고 지상에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꺅꺅대는 꼬마들, 서로 솜사탕을 먹여주는 커플, 우리랑 비슷하게 남녀가 아무렇게나 섞인 그룹….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놀이공원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어땠더라.
나는 잠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시작부터 롤러코스터, 바이킹, 자이로드롭같은 일단 큰것부터 탔었다.
그리고 쉰다면서 오락실에서 간식값까지 날려가며 게임을 했었지.
그때도 선민이랑 묘한 승부욕이 붙어서 인형뽑기에 돈을 꽤 썼는데, 그땐 도민석이 3개나 뽑았고, 유선민은 하나도 뽑지 못했었다.
한동안 놀림감이 된 선민이가 부들대는 광경은 웃기긴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남자 셋이서 인형 하나씩 들고 놀이공원을 활보하다가 쪽팔려 죽는줄 알았다. 버릴수도 없고.
결국 길가다 보인 꼬맹이들한테 다 나눠주기는 했지만.

도민석은 그때 꼬맹이한테도 존댓말을 했었지.
그때 왜 꼬맹이한테도 존댓말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냥 초면에 반말하면 기분이 나쁘잖아'라며 씨익 웃었다.
나는 상당히 감명받을 뻔했다.
뒤이어서 '애니메이션 캐릭터중에 존댓말 캐릭이 멋있더라'라고 지껄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한테 처음 말을 걸었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때에도 그랬고, 몇년이지난 지금도 그런다는게 신기하긴 하다. 극한의 컨셉충인가, 그냥 농담이었던걸까.


"또 웃긴 생각해?"
"으앗?"

난 깜짝 놀라서 양산을 놓쳐버렸다.
좃됐다….
너무 깊이 생각했나, 그냥 잠깐 신경만 돌리려고 했던건데….
양산이 만들어주던 그늘이 사라지자, 내 살은 태양에 완벽하게 노출되었고, 태양열은 내 피부를 갈아마실것마냥 긁어댔다.
끄아아 정화된다!

"미, 미안해. 많이 놀랐어?"
"…."

뭐라고해야해.
괜찮다? 아니면 이제 어쩔거냐고 탓을 해야 하나?


"가,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떡해요."
"몇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조금 웃길래…."
"……."
"금방 멍해지는게 석주랑 비슷하네…. 어릴적부터 친해서 그런가?"
"…그런가요."


딴생각 하는것좀 줄여야하나, 쓰벌.
사실 양산을 놓친건 내가 정신놓고 있어서 그런거지, 민석이 잘못은 그냥 말 건것 밖에 없긴하다.

"그나저나, 괜찮아? 피부가 빨개지는데…."

자외선 차단제가 아무리 쎄도 흡혈귀인이상 태양에 영향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자외선 차단제는 강력한 태양빛으로 인한 흡혈귀의 세포붕괴를 막는거지, 태양빛을 완전히 막는건 여전히 불가능하니까.
어쩌지? 리프트에서 뛰어내려? 땀이 흐르면서 자외선 차단제도 씻겨내려가는듯 하다. 점점 따가워지는데.
이러다가 몇달전에 병원에서 집으로 갈때마냥 온몸이 축축해질것 같다.

나는 왼편의 한세찬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으로만 '도와줘'하고 오물거렸다.
그런데 녀석도 마땅히 방법이 없는지, '어떻게?'하고 물어온다.
 일단 최소한, 얼굴이라도 가리려고 손바닥을 들어 얼굴에 그늘은 만든다.
그러자 세찬이도 뭔가 감을 잡은건지, 그 팔을 들어서 그늘을 만들어줬다.
팔도 두껍고 손도 커서 만들어지는 그늘이 넓다.
나는 한숨 돌렸다 싶었다.
다른곳은 여전히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있는것 같지만, 최소한 얼굴만은  따가워졌으니….


"휴우…."
"아, 릴리. 잠깐만."


민석이가 자기가 입고 있던 체크무늬 반팔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고 내게 펼쳐 엄청 큰 그늘을 만들어줬다.
와, 이건….

내가 멈칫하고있자, 도민석이 자신의 셔츠를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냄새나? 나 뇌절한거냐?"
"…풉, 전혀."


뇌절이라니.
전혀, 오히려 신의 한수라고 불러도 좋겠지.
확실히 앉아있기 편안해졌으니까.
그런데 운동부족인가, 저녀석 얼마나 들고 있었다고 팔이 부들부들 떨리냐.

"팔 아픈것 같은데, 혹시 제가 들어도 될까요?"
"어…. 미안한데, 내가 맡아도 냄새가 조금 나."
"괜찮으니까."
"뭐…. 그럼…. 못참겠으면 말해."


민석이가 마지못해 셔츠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냄새가 나기야 하지만, 새삼스러울것도 없었다.
원래 땀내 자체는 계속 맡고있었으니.
이것도 강화된 후각의 영향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새삼 그렇게 불쾌한 정도는 아니다.


나는 셔츠를 히잡마냥 두른뒤 살짝 앞을 들어서 쓴다.
살것같네.
대체 흡혈귀는 뭐한다고 이런 놀이공원에 처박혀있는거래. 나같으면 절대 이런곳은 안온다.
아마 앞으로도 낮에는  오려고 할것 같은데. 내가 다시 인간이 되지 않으면.

게다가, 우리는 벌써 놀이공원의 80~90퍼센트는 수색을 마쳤다.
여전히 놀이공원안에 있고, 낮에 활동한것이 아니라면 아마 블러드 시티에 있는것이 확실하겠지. 좀비분장의 알바생들 사이에서 활동하는건가?
좀비 분장을 하면 어느정도 흡혈행위를 보여주더라도 일종의 퍼포먼스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퍼포먼스라고해도 실제로 사람이 부상을 입으면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는데, 멀쩡히 넘어갈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뭘 노리는걸까?

문득, 토끼탈을 쓴 인형탈 알바생이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는것이 보인다.
와, 다시봐도 정말 극한직업이네.
저걸 이 날씨에 하고 있다니. 나같으면 못한다. 아니, 오히려 태양은 확실히 피할수 있겠… 는걸?

잠깐만, 인형탈을 쓰면 태양을 피할수가 있잖아?


나는 다시한번, 토끼탈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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