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블러드 카니발
이상하다, 지혜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김밥을 싸온것은 고맙긴하지만, 네 앞에 있는거 내가 아니라 세찬이인데.
세찬이도 그 말에 숨은 뉘앙스를 잡아냈는지 굉장히 당황했다.
그런데 뭐 고백한것도 아니고 그냥 김밥좀 먹는건 괜찮지 않을까. 아, 그런데 세찬이가 부담스러우려나.
어쩌지, 무슨말을 시키지, 그렇게 고민하고있자 한세찬의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어, 어어. 잠시만. 민석이네."
"응."
도민석, 나이스타이밍! 일단 덕분에 급한불은 껐다.
완전히 진압했다기보단 그냥 미래로 떠넘긴 느낌이지만, 그게 어디야.
세찬이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어, 그래. 괜찮아. 지금? 알았어."
전화는 짧았다.
"뭐래?"
"지금 바이킹 줄 끝났대. 가봐야겠다."
"그래, 김밥은 나중에 먹자."
지혜가 벤치에서 일어나 먼저 걸어가자, 세찬이가 뒤따라가듯이 걷는다.
그리고 벤치 뒤에 숨어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을 검지로 가르킨후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음, 대충 해석하자면, '이제 나보고 어쩌라고?'라고 하는듯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뭐라고 해야하는건데?
지혜가 보내는 호의는 나를 향한것이지만, 그것은 이제 일반적으론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다.
나는 이제 몇달전의 김석주가 아닌탓이지.
그렇다고 세찬이가 지혜랑 사귈수가 있을까?
에바지, 그것도.
지혜한테도 실례될 일이고.
차라리 깔끔하게 거절하는편이 나을것이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는편이 낫겠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음에 그런 분위기가되면 거절해줘. 음…. 기왕이면 상처받지 않게…. 김밥은 그냥 한번 먹고."
김밥한번 먹는게 뭐 대수라고.
나라면 아마 먹었을테니 의심받을 짓은 안하는편이 나았다.
세찬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혜가 근처에 있는 탓이겠지.
어휴, 힘들어. 이거 무슨 아바타 조종하는것 같네.
흡혈귀가 빨리 튀어나와줬으면 한다. 후딱 끝내고 집에 가게.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도 못타고, 첩보물이나 찍고 있다니.
잠시 뒤를 쫓아서 바이킹이 있는곳으로 향하자, 민석이 손을 크게 흔든다.
"여기! 여기로!"
여전히 텐션 높네. 고딩때랑 다름없어.
세찬이도 중퇴하고나서 연락좀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세찬이는 고등학교 졸업이후 얼굴이 팍 삭아서 나이보다 상당히 늙어보이는 감이 있다.
일행이 또 놀이기구에 입장하고나니 또 잠시 휴식기가 생겼다.
나는 다시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고는 생각하기시작했다.
일단, 지혜의 일은 이제 제쳐두자.
세찬이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본의치않게 힘든일을 시켜버렸다.
아니 그런데 어쩌겠어, 내가 고백을 받은것도 아닌데 찰 수 있는것도 아니잖아.
내가 0고백 1차임을 지혜에게 선사한다니….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지.
그리고 흡혈귀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나 유디라는 흡혈귀이기때문에 흡혈귀를보면 아, 이녀석 흡혈귀구나 하는 촉이 온다.
그런데 뭐 수상해보이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너무 평화롭다. 낮이라서 그런걸까?
유디라가 다가와 조금 떨어진 화단에 기댔다.
그녀는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캔커피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음, 흡혈귀의 흔적은 아직 못 찾았어. 그나저나, 네 친구들 참 재밌게 노는데."
"그러게나말이에요. 에휴……. 저도 이몸만 아니면 저기서 놀고 싶은데……."
이제는 이렇게 된 몸 때문에 같이 놀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 우울해진다.
후우…….
"음, 들어보니 이번엔 야간개장도 한다던데. 밤에 조금 놀다가면 되지 않겠어?"
아, 야간개장. 그런게 있었구나!
흡혈귀 잡고나면 조금 돌아다녀볼까.
……라는 희망은 유디라의 말에 금방 산산히 깨져나갔다.
"뭐, 그 흡혈귀를 대체 언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 확실히 흡혈귀가 있는거 맞아?"
유디라가 조금 말소리를 높였다. 인간인 실버에게는 잘 들리지 않을 거리였으니까.
"글쎄요, 흡혈반응은 확실히 있었습니다만…. 수치가 미묘합니다. 뭔가 혈인능력을 사용한것 같은데…. 능력을 각성한지 얼마 안되었을수도 있어요."
"그럼 별로 기대는 안되네."
아쉽다는듯이 입맛을 다시는 유디라였다.
그런데 사냥꾼의 오버테크놀러지는 가끔보면 너무 대단해.
어떻게 그런걸 알아내는거래.
"드론이죠. 세상이 참 많이 변했거든요."
"…."
"지금도 저기에 띄워뒀습니다. 보이시나요?"
와, 진짜네.
자세히보니 검정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쿼드콥터형태의 드론이 하늘을 날며 두개의 카메라를 돌리고있었다.
"무작위로 한달에서 일주일정도사이에 전국을 수색용 드론으로 스캔합니다. 스캔원리는 기밀이라 말씀드릴수가 없으니 이해해주시기를."
"어… 그렇군요."
흡혈귀가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네.
사냥꾼도 나름대로 상당한 사람들이다.
그럼 나도 스캔대상인건가…?
"그, 혹시 저도 찍혔을까요?"
"흡혈을 한다면 그렇겠지요."
"…."
나는 에이샤를 흡혈했을때를 떠올렸다.
그때 드론에 찍힌거 아니겠지?
나는 과속방지카메라에 찍힌 운전자의 마음이 이해가 될것같았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찍혔다면 날아오는건 벌금고지서가 아니라 사냥꾼의 비수일테지.
아빠가 왜 사람피는 빨지 말라고 했는지 알것같은 느낌.
"그래서 흡혈귀가 결계를 치는건가요? 드론에 안찍히려고?"
"그렇죠. 하지만 어찌되었든 결계도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을 사냥하는 흡혈귀는 모두 사냥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실버의 말은 제법 섬뜩하게 들렸다.
흡혈귀와 사냥꾼. 그들의 싸움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것일까….
나는 어째서 릴리스의 몸이 되어버려선 이런 골치를 썩히고 있는거고….
-꺄아악!
바이킹이 최고점을 찍고, 세찬이 옆에 사람들의 비명이 스피커로 전해지는 크기가 점차 커진다.
왔다갔다,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바이킹을 보니까 마치 최면에 걸릴듯하다.
'나를 타….' 하고 유혹하는것같기도 하고.
으으, 정신차리자. 나는 일하러 온거잖아.
그런데 선민이도 온다고 들었는데, 걔는 언제 오려나.
그녀석은 예전부터 여자가 많이도 바뀌는 녀석이었다.
뭐, 2년만에 보는걸려나. 군대갔다고 들었는데, 휴가인가?
아, 제기랄 그러고보니 나 군대 어쩌지. 휴학중이니 입대연기는 가능할텐데….
유디라가 뭔가 발견한듯이 검지손가락을 펼쳤다.
"어, 실버. 저기, 수상한 옷차림이."
"군복입니다. 한국은 징병제 국가이기때문에 군복정도는 흔하죠."
"흐음?"
군복이라,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군인이다. 웬 여자도 같이 있고. 설마, 저거 선민이인가?
눈에 혈류를 아주 조금 돌려서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니, 내가 아는 유선민이 맞았다.
그런가, 휴가를 나온김에 놀이공원에 온거구나.
이런곳은 군인할인같은거 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없어도 놀이공원은 간다고 했던거군.
군인의 휴가는 짧으니까.
조금 집중하자, 선민이와 그 여자친구로 보이는 상대와의 대화가 들려온다.
"어, 고등학교때 친구들이야. 괜찮아?"
"괜찮아."
"부담스러우면 말해. 얼굴만 비추고 따로 놀면 되니까."
"진짜 상관없어. 나 그렇게 꽉 막힌여자 아니거든? 자기 고등학교친구들 얼굴도 좀 봐두고싶고."
난 바이킹에 탄 채 진자운동중인 사람들 사이에서 한세찬의 얼굴을 찾아냈다.
흡혈귀의 동체시력과 시력이 그짓거리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찬, 내말 아직들려? 들리면 만세해."
한세찬이 수줍게 만세했다.
아무래도 멀미인모양이다. 고생이 많구나. 내가 대신 타주고싶은데.
"내 고등학교친구 유선민이 도착했어. 군대갔던녀석인데, 휴가나온것같아. 여자친구도 데려왔고. 알아야할거 더 생각나면 말해줄게. 괜찮지? 그리고 처음 만나면 '군인왔냐'라고 하면 될것같아."
-문,문제없다.
-어? 석주야 방금 뭐라고했어?
-뭐? 아무말도 안했어.
고생이 정말 많구나.
옆자리사람은 지혜였으니까, 아마 지혜가 들은모양이지.
민석이는 어디갔지? 찾아보니까 자기혼자 저 맨 앞자리에가서 앉아있었다.
스릴을 즐기는군. 원래라면 나도 저 앞에 앉았을텐데.
잠시후 바이킹이 끝나고 사람들이 출구로 빠져나왔다.
"어! 군바리다!"
"군인 왔냐."
"그래, 새끼들아!"
세찬은 내 말대로 인사를 건넸고, 유선민 역시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야, 한여름에 군복을 입었네. 덥지도 않아?"
"여친님 보여주려고 입었지. 할인도 받고."
"하이씨, 그렇게 입으면 휴가증 보여줄 필요도 없었겠어?"
"스바, 그래도 보여달라드라."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민석이랑 선민이는 상당히 친했으니까.
"인사해, 이쪽은 내 여자친구, 이채연이야."
이채연, 그녀는 조금 아담한 사이즈에 약간 볼륨감있는 몸매였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스타일일까? 앞머리를 일자로 잘라 눈썹을 덮고, 조금 펌을 넣은 긴머리가 나름 잘 어울렸다.
선민이녀석, 취향이 한결같구나.
"안녕하세요. 전 도민석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전 송지혜라고해요."
"전 김석주…라고 합니다."
조금 더듬기는 했지만 그정도면 괜찮았어!
… 라고 생각했는데 선민이의 여자친구는 조금 의아한듯 보였다.
"듣던거랑 조금 다르게 생긴것 같은데…?"
"그래? 하나도 안변했는데."
"으음…. 그래…? 아무튼 반가워요.
"야, 맞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사진한방 찍어야지."
선민이가 휴대폰을 꺼내들자, 한세찬이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잠깐, 나 화장실좀."
"음, 그래. 그러고보니 이새끼 안색이 별로 안좋네. 갔다와."
한세찬이 급히 일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후, 세찬이와 연결된 휴대폰으로 음성이 흘러나온다.
-잠깐 따라와봐.
잠깐, 그럼 일행 감시는 누가해?
"실버, 유디라, 잠깐 봐줘요. 저는 세찬이한테 가볼테니."
"알겠습니다."
"그래."
난 빠르게 세찬의 뒤를 밟았고, 녀석은 화장실 뒤편에서 벽에 기대어있었다.
"많이 힘들어? 아침보다 더 새하얘졌네."
멀미랑 겹쳐서그런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안색이 안좋긴 하다.
"이건 금단증상….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나 사진 찍히면 안돼."
"어째서?"
"카메라는 속일 수 없으니까."
"어?"
그럼 진짜 큰일인데?
"뭔가 방법이 없어?"
"글쎄, 그리고 그 선민이라는 녀석 여자친구는 석주를 모르나?"
"모르겠지. 처음 보니까."
"일났군."
세찬이가 한숨을 쉬며 벽에기댄채 주저앉는다.
왜?
"널 모르는 사람은 날 봐도 여전히 나, 한세찬의 모습으로 보일테니까. 인식간섭이라고 말했잖아?"
"헉."
인식간섭이란게 그런거였구나.
만능이 아니었던거야?
"어떡하지, 아직 흡혈귀는 못 찾았는데…. 지금 갑자기 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근처에 있을수가 없으면 여차 해서 불똥이 튈때 즉각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할거고…. 흡혈귀가 잡히기 직전에 발악하는건 법칙이니까.
"일단 사진은 최대한 피하고, 찍더라도 인식저해로 조금 흐릿하게 만들지. 그리고 간접최면술로 사진이라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가 이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잠깐만, 말이 너무 빨라. 중간에 처음 듣는 단어가 있었단말야.
"잠깐만 멈춰봐, 간접최면술이 뭔데?"
"아. 내 휴대폰 줘."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한세찬에게 건넸다.
녀석은 빠르게 잠금을 해제하고는 액정을 몇번 두드려 어플을 켰다.
"이거야. Ai 최면어플. 대상의 정신분석자료를 통해 시각, 청각적으로 간단한 암시를 걸수있지."
"어?"
나 이거 야한 동영상에서 많이 본건데.
이런 기술이 실존한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뜨며 세찬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이상한짓 하고다니는거 아니야?
살짝 나는 손으로 몸을 가렸다. 나한테 쓰지는 않았겠지?
"아니, 뭘 생각하는거야? 정말 '간단한 암시' 밖에 못 걸어. 예를들면, 앞으로 몇시간동안 사진에대해서 떠올리지 못하게 한다. 정도로 '간단한 암시' 말이야."
"막, '후후후, 넌 이제 내 성노예가 된다'같은건 못하고?"
"너 정말 또라이냐?"
한세찬이 정말 어처구니없다는듯이 말했다.
아니… 내가 본게 그런거뿐인데, 생각할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