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아야, 살살좀 해!"
"있어봐, 나도 최대한 조심스러운 거니까…."
제기랄, 머리좀 풀어주고 가라고 할걸.
정교하게 땋은 머리는, 다르게보면 정교하게 얽어놓은 밧줄과도 같았다.
땋은 머리는 생판 처음 만져보는 둘이라서,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난감할 따름.
거기다 도움을 청할만한 두 여자는 도움이 전혀 되지 못했다.
의사는 그저 실실 웃다가 돌아갔을 뿐이고, 유디라는 손재주가 별로였다.
"아파! 머리 뽑힌다!"
"그냥 자를까? 그편이 빠르겠는데."
"뭐? 그거……. 괜찮은 방법인것 같은데."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야기를 아는가?
그때 알렉산드로스 3세도 묶인 매듭을 풀다가 빡쳐서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는데, 딱 그꼴이다.
게다가 혈류만 돌리면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니까 말이야.
괜히 힘뺐네!
어디선가 가위를 가져온 세찬이 매듭을 풀다 말아서 흉측해진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그야말로 쾌도난마.
그러고보니 쾌도난마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랑 비슷한 이야기였던거 같은데.
역시 세상 사람들 생각하는게 다 비슷한가 보다.
툭, 투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에 잠깐 혈류를 돌리자, 깨끗한 은발이 다시 자라났다.
음! 머리감기 귀찮으면 삭발을 하면 되려나, 하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살짝 머리가 띵- 해지면서 어금니가 찌르르 울렸다.
이 감각은 아마도 흡혈귀가 느끼는 흡혈충동.
"아, 이거 피 소모가 좀 큰가봐……."
나는 관자놀이를 잠깐 누르며 충동을 참아냈다.
하긴, 머리카락이라지만 신체 재생이니까.
없는 부위를 만들어내는데 리스크가 적을리가 없겠지.
생각보다 자주 쓸만한 방법은 아닌 모양이다.
머리를 풀어내고나서 젖은 옷을 벗어 수건을 몸에 두르고, 세찬이의 깁스와 옷도 벗겨준다.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서있을 수는 없는 상태이니.
팔뚝과 종아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빨갛게 부어 있어서 상당히 아프긴 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놈을 밀쳐서 이러고 있다니, 나도 참 죄가 많아.
그나저나 이렇게 빼곡한 문신이 사실 마력식이었다고?
이렇게보니 조금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등에도 문신이 그득했는데, 이것도 마력식인가.
며칠전에 업고 뛰어다닐때도 느꼈지만, 씻기려고 벗겨놓으니 등판이 참 넓구나 싶다.
이런 문신으로 반팔같은걸 입고다니니까 사람들이 쫄지.
이라도 그랬잖아.
더벅머리에, 썩은동태눈에, 귀걸이에, 빼곡한 문신에, 180을 넘기는 키에 어울리는 등판과 근육까지.
대체 무슨 캐릭터냐고 이게.
그래도 이런 몸을 보니 조금 부럽긴 하다.
이제 이 몸으로는 아무리 근육트레이닝을 해도 이 형태로 도달하는게 불가능하겠지.
"그러고보니 같이 목욕은 했어도 씻겨주는건 처음이네."
"그렇겠지."
우리가 무슨 게이도 아니고, 굳이 두손두발 멀쩡한데 서로 씻겨줄 이유가 하등 없긴하다.
지금은 세찬이 두손 두발 멀쩡하지 않으니 불가항력이지만.
내 오른손이 날아갔을때도 그렇고 말이지.
이번 일은 그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건 아닌것 같다.
병주고 약주는거니 그거랑 비교가 안되는것 아닌가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그건 애써 무시하기로했다.
이건 녀석이 나를 자극한 것도 책임이 있…을걸?
나는 물을 틀어서 온도를 대충 맞춘뒤 세찬이 머리에 물을 부었다.
머리 감기는 정도야, 매우 쉬운일….
"야, 악력조절좀 해!"
"으흠…."
너무 셌나보군.
어쩌지, 사람 머리통의 경도가 얼마나 돼는지 감이 안온다.
그도 그럴게, 200kg악력기도 나름 큰 힘 안들이고 쥐락펴락 하는 악력이잖아.
게다가 아무리 진통제를 먹었다지만, 사지를 부숴가면서 에이샤를 압박하면서도 신음하나 안흘리던 그 한세찬이 아파서 소리를 지를 정도라니.
어…. 물리저해 목걸이라도 끼고 와야하나?
"…혹시 그 목걸이 남는거 있어…?"
"하…. 아마 내 병실 서랍장에 너네 아빠가 두고 간게 들어있긴 할거다."
"잠깐만 있어봐. 갔다올테니까."
목걸이의 위치를 들은 나는 샤워실을 나와서 세찬의 병실로 향했다.
수건한장 걸치고 복도를 걸으니 기분이 묘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중 마주칠 만한 인물이 의사, 유디라 정도라고 생각하니 조금 진정이 된다.
나도 수치심이라는게 있으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상상도 못할 짓이다.
…생각해보니 의사한테는 보여지면 조금 그렇네.
그러고보니 내 의지로 그 개목걸이를 다시 끼게 될줄은 몰랐는걸.
역시 너무 강한 힘은 얻어봤자 허무할 뿐인가….
목걸이에서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력증과 탈력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잘 작동하긴 한다.
원래 흡혈귀를 생포해서 수송하기위한 도구답게, 일말의 자비도 없이 힘을 빼가는 도구라고 하던데.
애초에 이 도구를 찬 상태로 평범히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강한 흡혈귀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걸 힘조절용으로 그냥 끼고다녀도 되는건가.
하지만 뭐, 지금으로썬 방법이 없다.
유디라한테 팔찌를 받고서 이 도구를 채운다면, 유디라는 안그래도 약해진 상태인지라, 바닥에 기어다녀야 한다던가.
나는 괜스레 두손을 쥐었다폈다 반복하며 샤워실로 돌아왔다.
뭔가 힘이 안들어간다는 감각이 오랜만인것 같은 기분.
최근 이 도구를 쓸 일이없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세찬이도 대충은 믿어주는 눈치고.
"나 왔어."
"어."
세찬은 여전히 내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채, 바닥타일만 세고 있었다.
으음… 이거, 부끄러워 하는건가.
하기사, 헐벗은 함상궂은 남정네 뒤에서 미소녀가 등을 씻겨준다고?
한세찬 이새끼 복터졌네.
나도 미소녀가 씻겨줬으면 좋겠다. 흑흑.
아무튼 순조롭게 힘조절 신경쓰지않고 머리를 벅벅 긁어서 거품을 내준 후에, 샤워타올에 바디워시를 뿌려 거품을 낸다.
근데 내가 한세찬이 부러운건 둘째치고, 나도 슬슬 기분이 요상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얘랑 볼거 못볼거 다 봤다지만, 몸을 만지다보니 자꾸 다른 생각이 든다.
얘는 아무렇지도 않나?
당장 내가 이녀석 입장이었으면 금새 발딱 세웠을….
"크흠.흠. 우리 세찬이 많이 컸구나…."
"뭐, 뭐?"
"괜찮아. 이번엔 이해한다. 안 놀릴게."
"크윽……."
어느새 분기탱천한 세찬의 그것이 수건으로 텐트를 세웠다.
역시, 녀석도 고자는 아닌가보네.
원래 얘가 이것도 이렇게 컸나?
내가 남자였을때보다 좀 더 큰거같은데….
어쨌거나 저렇게 화난 물건을 내손으로 닦기엔 좀 그렇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그냥 그렇다. 남의 그걸 왜 만져.
거품낸 샤워타올을 녀석의 손에 들려준 후에, 나도 따로 샤워를 끝냈다.
"휴, 힘든 작업이었다."
뭔가 심정이 복잡해지기는 했는데, 아무튼간에 말이다.
아. 머리가 다시 길어져서 말리는데 하루종일이다.
미치겠네.
그나저나, 옷가지러 간 한야는 언제쯤 돌아올까.
알아서 잘 헹군듯 하니, 수건을 가져가서 세찬이의 몸에 물기를 닦다가,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절대로 세찬이 씻겨준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될거같다.
조금 변태같애.
야성적인 건달놈 뒤에서 수건으로 닦아주는 내 모습.
이거까진 괜찮아도 거기에 개목걸이라는 SM스러운 악세사리가 문제다.
좀…. 무슨 노예랑 주인 플레이같아서 많이 그렇다.
다행히 아무도 안 봤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세찬마저도.
목욕하는거 훔쳐볼만한 사람은 여기 없으니까.
단지 내 기분이 좀 이상해졌을 뿐이다.
사이도 약간 어색해지고 말이다.
"어, 음…. 됐지? 이제 나가자."
"그래…."
할말이 많이 없구나.
밖에 준비된 환자복을 걸치고, 세찬이 입는거 도와주고, 나른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하나 뽑아왔다.
내가 마실건, 유디라한테 빼앗ㅇ…아니, 양도받은 혈액팩이었다.
음, 이건 포도맛이 아니네. 살짝 새콤한게… 이건 키위맛이다.
뭐야, 무슨 피맛이 과일 종류별로있어.
좀 있으면 오렌지 주스맛 피도 나오겠네.
"자. 마셔라. 고생했어."
"뭐, 고생은 너가 했는데…. 왜 나도 힘들까."
이해한다.
아마 녀석은 번뇌랑 싸우느라 매우 힘들었을테지.
머릿속으로는 왜 꼴리느냐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속은 한세찬인 미소녀가 나를 씻겨주는 상상을 했다.
흠…. 난 괜찮을거같은데?
솔직히 얘 얼굴이 문제지 성격은 나름 괜찮은 편인데. 내가 아니라 얘가 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망상이기도 하고, 의미도 없었다.
진심으로 생각하는것도 아니고.
하아.
"미안해."
"뭐가."
"밀친거, 니 말 안듣고 무작정 들어간거. 하여튼 그런것들."
"알았으면 됐다. 다음에 이런 일 생기면 혼자 바로 들이박지말고, 너네 아버지한테 한번 전화드려. 그게 제일 나으니까."
"그럴게."
그렇네.
아빠가 짱센 사냥꾼이란걸 깜빡하고 있었다.
뭐, 그때는 순간적으로 떠오르질 않았는걸.
게다가 아빠는 미국에 있으니 도움을 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고.
한세찬이 목발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악마사냥꾼을 너무 믿지마. 적은 아니지만, 딱히 아군도 아니니까."
"그랬어? 사냥꾼이라서 같은 편인줄 알았는데."
"흡혈귀랑 악마는 전혀 다른 거야. 그녀의 목적은 악마의 사냥이지, 흡혈귀랑은 별로 상관이 없어. 최근엔 조금 자주 얽히고는 있다고 하지만."
"그렇구나."
딱히 아군은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왜 이라는 나한테 맡겨둔걸까?
뭐, 이것도 의뢰취급이라서 돈이 들어오는 모양이긴 하다만.
어, 그럼 대체 얼마나 받은거지?
"그런데, 세찬아?"
"뭐야, 갑자기?"
평소와 다른 비음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내니 기겁하는 한세찬.
"그 악마 사냥꾼한테 얼마나 받았어?"
"일단 순수익으로 따지면 5000만원 정도. 그 라이칸슬로프 의뢰까지 하면 월 500은 들어오겠네."
"5000만원! 월 500만원!"
하룻밤에 그렇게 벌다니! 1억의 절반이잖아! 5000만원이면 편의점 알바를 얼마나 해야되는거야?
한달에 100만원씩 벌어도 50달은 일해야 벌 수 있는돈이잖아!
거기다 월 500의 양육비(?)라니!
"상당히 손해본거라고 생각해. 그 에이샤 그래멀린의 시체라도 건졌으면 2억은 넘게 벌었을텐데 말이다."
"어? 시체 못 건졌어?"
"뭐야. 니가 다 처먹었잖아."
세찬이 의아함과 짜증이 반정도 섞이 표정으로 나에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나는 시체를 먹진 않았다고, 그냥 피만 조금 빨았을 뿐인데.
거기다 2억이라니!
차라리 진짜 먹었으면 2억이 아깝지라도 않지!
"아니, 아무리 내가 흡혈귀가 됐다지만, 미친 식인종마냥 사람을 통째로 처먹진 않죠."
"뭐? 그럼 시체가 그냥 혼자서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이야?"
정적.
어? 진짜로?
"허, 정말 질긴 흡혈귀네. 어떻게?"
"그야 나도 모르지….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방법이 있나."
이미 잠적해버린 흡혈귀를 잡기는 솔직히 거의 불가능하다.
인식저해에, 결계술에, 탁월한 신체능력과 직감을 가진 존재중에서도 특별히 한명을 특정해내기는 어려우니까.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에이샤….
"세찬아."
"어."
"소이탄 하나가 얼마나 하냐?"
아무래도 진짜 호신용품처럼 들고다녀야 될거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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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번껍데기도 오래는 쓰지 못했네.
라고, 에이샤 그래멀린 이었던 것은 생각했다.
혈액 응고제에 당해, 거의 새벽까지 움직이지 못한 것이 너무 크다.
에이샤의 심장은 진작에 멈췄지만, 그녀는 본래부터 정상적인 흡혈귀는 아니었다.
심장과 뇌, 그리고 일부 장기를 그래멀린 가의 가주였던 것의 시체에 시술한것에 불과했다.
운이 좋았다.
불에 탔다면 꼼짝없이 소멸했을테니.
적어도 가주급이라, 오래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릴리스의 육신이 너무 강대했던 탓인가.
그녀가 능력 대부분을 잃은 상태라지만, 여전히 강대한 흡혈귀였다.
그녀는 탐이 났다.
그 육체가, 그 능력이, 그리고 그 미모가.
자신이 쓰는 이 흉측한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아름다운 모습이 자신의 위에서 목에 이빨을 박아넣고 기절해 있었다.
그것에게 본디 성별 따위는 없지만, 그 외모는 성별따위 아무래도 좋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흡혈귀의 여왕, 어머니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너무 큰 욕심은 화를 부르는법.
오라클의 왕께서 그녀를 원하신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릴리스의 육신을 취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그녀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까?
고작 이름을 취한 흡혈귀 사냥꾼 하나 때문에?
설마, 그 멍청한 흡혈귀놈들도 하지 못한 것을 그 험상궂은 인간하나가 해냈다는 것인가?
그것은 정말 흥미롭군.
'다음엔 조금 더 준비를 해야겠군.'
그것은 에이샤의 시체를 내부에서 먹어치우고, 부정형의 괴물이 되어 새벽 어스름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