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29/101)



〈 29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이라와 손잡고 세찬이 병실로 돌아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대체 이라는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어서 그 상황을 '부끄러운 행위'로 받아들인걸까?
저번에 옷 입을때도 그렇고.
의외로 조숙한 면이 있었다.
방 안에 갇혀서 자랐는데, 그 흡혈귀가 무슨 성교육같은걸 해줬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라야. 아까전에 말이야."
"네? 아,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니, 그게아니라. 너, 그동안 방안에만 갇혀서 지냈다며? 그런 지식은 다 어디서 난거야."
"아…. 그게…."
"그게?"
"방안에 책은 많았거든요. 그, 남자랑 여자랑 연애하는 소설같은거요."
"아."

에이샤. 보기와는 다르게 소녀 취향이었구나.
요런 꼬맹이한테 로맨스 소설을 다 챙겨주고 말이야.
그럼 무슨 장면이 떠올랐길래 그러는걸까?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라가 부끄러워 했을까?"
"예? 어, 그…. 말해야하나요?"
"아니."


솔직히 감당할 자신은 없군.
그냥 해본소리지.
솔직히 여자가 남자옆에서 상의탈의 상태로 '봐도 상관 없는데'이따위 말을 한 뒤에 벌어질 일은 쉬이 짐작이 가긴 해.
그게 세찬이랑 내 관계라는게 문제지.
녀석은 속에는 남자고, 겉모습은 부모님의 원수인 나를 좋아할리도 없고, 내가 세찬이를 이성으로 생각할 일도 결코 없을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싫은 티를 안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녀석인거다.


"나랑 걔는 그냥 친구사이야. 어릴때부터."
"책을 보면 그 관계가 제일 위험하던데…."
"어허."


어릴때에는 둘다 그냥 시꺼먼 남정네 둘이었어.
아마 그 소설이랑 비교하면 관계도가 좀 복잡할걸.
그런데 이걸 이라한테 말해줘도 되나?
충격받을까봐 말을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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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밤에 소란이 있었지만, 아침이되니까 그제야 비가 좀 그쳤다.
이라는 밤동안  말상대를 해주느라 조금 피곤했는지 금방  골아떨어졌다.
세찬이도  혼자 있는게 나을  같아서 실버의 병실을 찾았다.


유디라나 아빠도 다시 자란 내 머리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실버는 기절한듯이 자고 있었고.


"흐음, 그런 회복력이 생겼단 말이지."
"원래 릴리스는 이렇지 않았어?"
"회복력을 보기전에 최대한 화력을 퍼부어서 제압했으니까. 뭐. 아빠도 잘은 몰랐지. 그 이전엔 이렇다 할 피해조차 주지 못했고."
"으음…."

살짝 살벌하네…….
어쨌든  생존력이 오른거니까 좋은거겠지.


그리고 한편엔 실버씨의 피묻은 복부의 붕대를 갈아주던 의사가 말했다.


"그럼 오늘 검사한번 어때? 손도 제대로 재생됐는지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피검사도 해보고, 조직검사도 해보고…"
"으음…. 나중에요."


지금은 솔직히 피곤해서.
나중에 병실이  빌때나 검사 받는게 나을것 같다.
뭐 병원이 두명 입원하니까 사냥꾼들의 만남의 장이 되어버렸다.


"아쉽네, 단발머리도 꽤 괜찮았는데. 후훗."
"……."

언제 본거야.
혹시 낮에 나 잘때 옮겨놓은게 아빠가 아니라 이 여자였나?
대체 뭔 짓을 했는지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한편엔 유디라가 실버의 피묻은 붕대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정말 한결같은 흡혈귀야.
아마 누가 보고있지 않았으면 붕대에 묻은 피도 쪽쪽 빨아들였을게 분명하다.
어제 밤에 우리 병실에 있었다면 유리조각에 묻은 내 피까지 핥아먹었을 것 같다.
흡혈박탈 때문에 그런가?
피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같애.
결국 그걸 보다못한 아빠가 유디라에게 한소리 했다.


"유디라.  붕대에서  떼."
"칫, 그냥 보기만 하는 거잖아요. 내가 뭐."

그거 무슨 다이어트하는 여성이 먹을걸 앞에두고 헬스 트레이너한테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나저나, 실버씨는 어때요? 아직도 혼수상태?"
"아, 지금은 진통제맞고 자는거야. 별로 생명에 지장은 없어."
"휴우…."

의사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라녀석이 물어서 이렇게 됐다고 했으니까, 그때 본 크기로 보면 진짜 세게 물렸으면 죽을수도 있었겠어.


그런데 이렇게 한동안 내 호위가 둘 사라졌다.
지금은 물리저해가 없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도망정도는 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쪽 세계의 상식이 부족한 나로썬 불안하다.

"그럼, 그동안 하루살이가 네 호위를 맡아줄거다. 아빠는 당분간 한국에 있을테니까, 문제있으면 전화하고."
"어…. 그 여자가 더 불안한데."
"나름 실력은 있어. 실수가 잦긴 해도."
"으음…."

전혀 믿음이 안가.
잠시 앉아서 실버의 붕대를 갈고 아빠랑 이야기하는 의사를 보다가, 문득 연구자는 왜 안보이는건지 생각나서 물었다.


"아, 연구자? 걔 요즘 잠도 안자고 연구만 해. 아마 지금은 또 뭘 찾겠다고 멀리 갔을걸."
"뭘 찾는대요?"
"글쎄, 그건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겠네. 아, 연구자도 말했어. 다음에 꼭 검사 한번 받아줄래? 슬슬 혈액 샘플도 더 필요해서 말야."
"알겠어요, 뭐…."

여태껏 병원비도  받았는데 그정도는 해줘야지.
몸땡이 자체가 무슨 의료보험이다.
검사좀 해주면 진료가 무료라니.
원래는 신체검사도 돈주고 받는건데 말이지.

그리고 잠시 후, 한야가 병실문을 열었다.


"스승님! 부르셨어요!"
"그래, 왔냐."
"제가 호위할 대상은 얘군요!"
"그래. 잘 부탁한다. 그리고, 너도 힘조절 잘 하고. 그것때문에 하루살이를 쓰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  쎄게 잡아당겼다고 두개골파손, 척추골절로 즉사할줄은 몰랐지.
사람이란게 그렇게 쉽게 죽을줄은….
나는 힘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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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깨끗해진 내 병실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다음번에 병원 올  생기면 게임기라던가, 읽을만한걸 꼭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몸 멀쩡한데 병원에 있는건 역시 고역인듯하다.

게다가, 비가 그쳤으니 빨리 집에 가서 쉬고싶었다.
병원 침대는 아플땐 괜찮던데,  아프면 오히려 체력이 빠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뭘까.
병원 침대는 건강한 사람의 에너지를 뽑아서 안 건강한 사람한테 옮겨주는 구조로 세상에 만들어진게 아닐까?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병실의 창문을 보니, 검은 판초우의를 쓴 한야가 비를 맞으며 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낫을 이따금 허공에 휘두르기도 하고, 자루부분으로 땅을 파기도 하고, 물웅덩이를 만들어서 찰박 거리기도 한다.
주의력결핍장애일까?
아니면, 그냥 기분이 좋은건가.
나는 창문을 열고 외쳤다.


"그렇게 좋아요?"
"나는 비가 좋아서. 그리고 장화도 좋아해!"
"그렇군요."


비를 좋아한다니, 신기한 사람이네.


나는 비가 싫었다.
일단 비가 내리면 축축해지고,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도 걷어야하고, 밖에 나가면 젖는다.
게다가,


'흡혈귀는 흐르는 물을 못 건너?'
'그래서 안 돌아간거 아냐?'
'몰랐는데….'

이게 비가 그쳤는데도 산을 내려가지 못한 이유다.
으아! 뭐야 이게.
그 폭우가 내린 뒤 산에는 이곳저곳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거의 작은 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진짜 많이도 내렸으니….

그렇게 생긴 물줄기를 건너가려고 하면, 마치 남이 초대하지 않은 집에 들어가려는 것 마냥 힘이 빠진다.

대체 릴리스는 이런걸 다 어떻게 해결한거지?
다른 흡혈귀들은 어떻고?
이런 제약조건을 다 씹고 최강으로 군림하려면 무슨 짓을 해야했던걸까.

실제로 아빠가 릴리스에게했던 전술중 하나가, 반경 300m를 미사일과 폭격으로 날려버리고, 물탱크를 퍼부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둔 것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빚이 생기지. 미치셨나.
왜 그렇게 돈도 많이 번다면서 이렇게 서민적으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한꺼풀 풀리는 느낌이었다.

탈것에 타면 괜찮다고 하던데.
산속에 들어올 만한 탈것이 뭐가 있겠는가.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뭐, 헬기라도 타야하나?


집에가서 쉬고싶었는데.
밀크셰이크도 추가주문하고.
이런날에 카페에서 진짜 딸기밀크셰이크를 사먹으면 최고일텐데.
아니면, 정말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서 제대로 즐겨볼 수도 있을거다.
이번엔 어떻게 마시는지 인터넷에 검색까지 해서.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저기서 아직도 저러고 놀고있는거지.

"그나저나, 제가 부탁한거는 다 가져오신거에요?"
"물론. 여기서 던져줄까?"
"아뇨. 그러다 쏟아지면 안돼요."

그래서 나는 한야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집에들려서 책상에 올려둔 게임기와 옷을 가져다 달라고, 덤으로 딸기밀크셰이크도.
흡혈귀가 되고나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걸 안마시니까 갈증이 생기더라.
이쯤되면 중독이 아닌가?
밀크셰이크가 뭐 나쁜걸로 만들어진것도 아니고, 딱히 상관 없겠지.


"여기. 주문하신 딸기 밀크셰이크야."
"감사합니다."

흐음, 맛이 조금 변한것 같은데. 기분탓인가?
만드는 사람이 바뀌었나. 여전히 맛있긴하지만.
그런데 한야가 내가 부탁한 또 다른 물건을 들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새로운 휴대폰?"

아아, 모르는건가?
이것은 '게임기'라고 하는것이다. 재밌지.
몇달 전 병원신세를 졌을때엔 한세찬의 팔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서 혼자 했었는데, 원래 게임이건 뭐건 같이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다.

"아. 그거, 게임기에요."
"오! 그래? 신기하네. 나 이렇게 생긴 게임기는 처음 봐."


음, 기억이 9년전에 고정된 상태라면 닌o도 스o치는 존재할리가 없는 게임기겠네?
처음보는것도 무리가 아니지.
나는 컨트롤러를 분리해 그녀에게 한쪽을 건넸다.

"같이 하실래요?"
"진짜? 어떻게 하는건데?"
"잠깐만요. 이걸 누르면 앞으로 가고, 이게 아이템사용이고요…"

.
.
.


"이겼다! 또할까? 이거 재밌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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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왜 이렇게 잘하는거지….
혹시 전에 해본적이 있는건… 그럴리가 없지.
솔직히, 진심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처음 시작한 초보자한테 그러기는 너무 가혹하니까.
확실히 처음에는 조금 봐주기도 하고, 일부러 조금 성능이 낮고 해본적없는 캐릭터를 해보기도 하고, 아이템을 좀 안쓰기도 하고 그런식으로 핸디캡을 자체적으로 두고 몇판 했었다.
그런데 점점 실력이 눈에띄게 발전하더니, 지금와서는 거의 진심으로 플레이하는데 이길수가 없었다.


흡혈귀가 되면서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도 엄청나게 좋아졌고, 신체능력은 말할것도 없다.
거기다 비록 자주 안했다곤 하지만,  게임기의 주인인만큼 게임에 대한 경험과 지식도 충분하다.
질 이유가 없는데, 왜 지는거냔 말이다!


"이거 이제 재미없다. 딴거 하자!"
"윽."


무슨 말이지.
이제 나는 너무 좆밥이라 같이 하기 싫단건가?


'수준이 너무 차이나서 이젠 질 수가없어지니 재미가 없네~'

라고 하는 듯한 한야의 모습이 마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다.
후우… 진정하자. 손에 너무 힘을 주면 컨트롤러가 부숴질지도 몰라.
이번엔 진짜로 완전히 100% 진심으로 이기고 말거다.
캐릭터도 본캐로 골랐어!


"한번만 더…."
"흠. 질리는데. 그럼 내기할래?"
"내기요?"
"원하는거 들어주기?"


내가 뭘 원할줄 알고?
여태껏 내가 봐준줄도 모르고 내기를 걸다니, 이거이거.


"좋아요."

내가 이기면 집까지 나를 업고가는걸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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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것도 귀엽고. 이것도 귀엽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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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졌지?
분명 초중반엔 압도했을텐데….
마지막에서 한순간에 역전당해버렸다.


"난 원래 몸으로 배우는건 빨라. 후후후. 놀랐지?"
"으…….."

말도안돼.
아무리 배우는게 빨라도 그렇지, 그 플레이가 어떻게 오늘 시작한 사람이 할 수있는 플레이냐고.
나라도 하라고하면 솔직히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을 정도다.
이 여자, 사실 똑똑한데 멍청한척 하는거 아닐까?
여태껏 보여준 푼수같은 모습은 그걸 감추기 위해서….

"음…. 좋아. 완벽해."
"끝이에요?"

내기에서 진 벌칙으로 머리를 만지게 해달라고 하더니, 뭘 해놓은건지 모르겠다.
잠깐 거울이라도 보고싶은데.
아마 머리카락을 좀 땋은 모양인데, 어떻게 된건지 나도 궁금하다.
앞머리가 안 흘러내리는건 맘에 드네. 꽉 고정된 느낌이야.
뒷머리는 어떻게 한건지 아예 모르겠네.
뭔가 오래 만지는것 같았으니 엄청 복잡한 모양일것 같다는 거?
한야가 허리에 손을 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너무 잘 됐는데? 다른사람들한테도 보여주자!"
"그것까지는 얘기 안했잖아요…."
"하지만 아까운걸. 자랑도 하고싶고."
"하아……."

그래. 남자가돼서, 내기에서 진 벌칙정도는 똑바로 수행 해줘야겠지….
아니, 지금은 남자 아니긴 한데.


"알겠어요. 뭐…. 그정도야…."


나는 나도 모르는 형태의 머리모양을 한채로, 세찬의 병실에 끌려갔다.

"무슨 하루마다 머리를 바꿔대냐, 너는. 호빵맨이야?"
"씨, 씨끄러!"

하여간, 사람 속을 어떻게 긁어야 하는지 아는 놈이다.
나도 그거 신경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호빵맨은  웃기긴 하지만!


한야가 씨익 웃으며  몸을 한바퀴 돌렸다.


"어때요! 제 자신작!"
"와, 꽤 공들였네요? 어떻게 한거지? 저도 해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오히려 유디라가 꽂혔는지, 자기도 해달라며 눈을 빛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나도 보여줘!
아빠는 이미 병원에서 나갔기 때문에 없었다.
그건 조금 다행일지도.


"어우, 사냥꾼씨. 솜씨가 좋구나? 누구한테 해봤어?"
"헤헤, 학교에서 쪼끔. 제가 반 애들 머리 전부 다 해줬거든요. 미용사가 꿈이어서."
"호. 그거 아쉽네. 마력식만 아니었어도 훌륭한 미용사가 됐겠는걸."
"감사합니다!"

의사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대며 덕담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좀 보여달라고 빼꼼거렸으나, 한장만, 한장만더를 무한반복하는 의사의 카메라질에 질려서 인식저해를 켜버렸다.
왜 여기 여자들은 다  이럴까.

"아앗! 너무해! 인식저해라니!"
"그만큼 찍었으면 됐죠."

가만 냅뒀으면 사진만 찍고 있었을거면서.
인식저해 덕분에 휴대폰을 뺏을 필요가 없으니 참 편하다.
흡혈귀 최고!

"대충 보여줬으니까 됐죠? 이제 갑시다."
"잠깐만 있어봐! 이사람 머리만 좀 만져주고!"

이미 유디라의 머리를 가지고 놀기시작한 한야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눈치를 보다가 슬쩍 병실을 나와서 화장실로 향했다.

괜스레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치도록 인식저해를 조정하니 드디어 내 머리상태를 확인 할 수있었다.
앞머리는 좌우로 갈라 땋아서 무슨 서클렛마냥 뒤쪽으로 이어놨고, 목을 돌려 옆모습을 보니 뒷머리에 무슨 은색의 커다란 꽃이 피어있는 것 마냥 되어있었다.
그 뒤로 또 굵게 땋아놓은 머리사이에 작게 땋은 머리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조신하게 내려와있었다.


"와…. 실력이 대단하긴 하네…."


거의 예술작품 급인데 이건?
그런데 한세찬 이새낀 뭐? 호빵맨?
디지게 패야할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그때 목발을 짚고 서있는 세찬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보였다.
나는 그대로 거울에 비친 세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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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여기 여자화장실인데."
"여자들은 지금 다 내 병실에 있잖아. 너도 여기 있으면서."
"왜 병실에 안있고?"
"거기 있으니까 자꾸 나한테 이건 어떻니, 저건 어떻니, 물어봐대서."
"그런가."


그야 지금은 남자가 얘 혼자니까.
실버는 진정제때문에 눈을 뜬적이 없고, 이라는 내 병실에서 자고 있는데다 너무 꼬맹이고, 연구자는 연구때문에 병원에 없고.
그런데 그걸 얘한테 물어본다니.
이놈은 여자가 꾸미든 말든 별로 신경쓸만한 놈은 아닌데.
엊그제도 그렇잖아. 무슨, 머리잘랐냐는 말이 바로 안나오고, 물어보니까 그제서야….
뭐, 나한테 그런거 해봤자 전혀 의미없는 짓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화장실로 도망쳤다는 얘기겠지?
그러다가 내가 있는거 발견하고 들어온거고.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던 세찬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멍청이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줄은 몰랐네."
"그래?"
"별로 이런걸 보여주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뭐, 자기 머리를 이 수준으로 땋을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녀석도 내심 신기하기는 했던 모양인지, 내 뒤통수에 피어있는 꽃에 시선이 고정되어있다.


"뭐야? 너도 감수성이란게 있었냐?"
"어? 아니, 뭐…."
"만져보고 싶어서 그래? 그냥 만져봐도 돼."
"뭔 소리야?"


그럼 뭐 때문에  뒤통수에서 시선을 못 뗀대.
 손을 털어서 티셔츠에 물기를 닦으며 몸을 돌렸다.
세찬은 잠시 말을 고르는듯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이번일. 아무리 악마사냥꾼한테 얘기를 들었다고 해도, 너무 대책없이 들이박은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한다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 아니야?"
"결과적으론 그럴지 몰라도, 실패했으면? 리스크를 생각했어야지.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들이박는게 말이 돼?"


왜 이 상황에서 시비를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하네.
내가 구해준건데 왜 욕을 들어야하나?


"아니, 다 될거같으니까 한거지. 그렇게 따지면, 가기전에 물리저해는 풀어주고 가던가."
"그걸 풀어준다는건 그냥  따라오세요, 하는거잖아. 미쳤냐?"
"아니, 그럼 그놈의 결계라도 똑바로 치던가, 악마사냥꾼은 잘만 뚫고 들어오더만!"


그거 때문에 쪽도 팔렸고, 아빠가 내 속옷차림도  봤다고!
이, 이새끼는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결계따위로 막을 수 있는 여자는 아니긴 한데…. 아무튼, 진짜 큰일 날 뻔 한거야. 알아?"
"담부터 조심하면 되잖아. 왜이래? 갑자기."

평소 별로 잔소리도 안하던 놈이.
화가나서 감정이 격해진 나는 녀석을 살짝 밀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상상태가 아니었던 녀석과, 물리저해가 풀려서 힘을 주체못하는 내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조금 파괴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굉음. 깨지는소리. 쓰러지는 소리.  모든게 동시에 터져나와서 대체  소리인지 묘사하기도 힘든 소리가 났다.


"하…."

좀 세게 날려진 세찬이 여자화장실의 칸막이를 부수고 변기도 부수고, 변깃물에 흥건히 젖은 상태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바로 달려가서 세찬이를 일으켜세웠다.
변깃물이 나한테도 묻긴 했지만, 그런 자잘한것에 심리적으로 꺼려질 상황은 아니었다.

"미안, 진짜미안!"
"다음부터 조심을 해? 조심의 뜻을 모르는것 같은데."
"윽."


나,  마음에 상처입었어.
나도 조심은 하고 있는데….
소리를 들은건지, 한야가 빗을 손에든 채로 달려왔다.

"둘이서 여자화장실에서 뭐해?"
"어, 그게…."
"뭐야? 싸웠어?"
"조금요…?"


말싸움이었지만.
저건 가볍게(?) 밀친 결과물이고.
그, 그러게 왜 자꾸 날 자극하는거야?
하아…. 진짜 실수투성이네.


"허어, 이거는 목욕을 해야겠는걸? 다른것도 아니고 변기물에 빠지다니 말야."


어느새 한야의 손길이 닿았는지, 명성황후처럼  머리를 한 의사가 나타났다.
진짜 솜씨가 좋네.
이 짧은 시간에 저렇게까지….

아니, 이런 생각은 잠깐 제쳐두고, 목욕이라고?
뭐, 집에가면 할 생각이기는 했다만….
여긴 갈아입을 옷도 없고.
세찬이도 저꼴로 목욕을 할 수있을리가 없잖아.

"물론 누가 도와줘야겠지?"

의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설마 제가?"
"싫으니? 설마 여자인 나한테 남자인 목수의 몸을 씻기라고 하는건 아니겠지? 어차피 보아하니, 너도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예? 뭐, 그건 그렇지만…."


실버도 환자고, 이라는 꼬맹이라서  거한을 씻기기엔 무리가 있겠지.
아빠는 바쁘니까 지금은 병원에 없고.
소거법으로 따지면 나밖에 없기는 하다.


"예? 얘는 여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조금 다르긴 하지."

의사의 표정을 살피던 한야가 뭔갈 깨달은 듯이 박수를 쳤다.


"아하! 뭔지 알겠어요. 후흐흐. 저는 그럼 다시 릴리 옷 가지러 갔다올게요!"

뭘 깨달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한야는 그러곤 또 쌩하니 가버렸다.
두번이나 배달을 보내는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수 없지 변깃물 젖은 옷을 다시 말려서 입기도 찝찝하니….

"나는 병풍인가? 내 의지는 어디로 간거지?"
"다친게 죄야, 세찬씨."
"맞아. 다친게 죄더라."


나도 몇주전만해도 절절히 느꼈던 감정이거든.

"넌  닥치고."
"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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