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머리가 자랐다.
그렇다는것은 8만원이 그냥 날아갔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도, 왜 갑자기 자라는데?
라푼젤이냐?
"야한생각 하면 머리카락 빨리 자란다더니 진짠가보네."
"개소리를 하고있어!"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한세찬의 농담에 맥이 탁 풀렸다.
뭐, 야한생각?
뭔 생각을 해.
이제 그것도 없는데.
옛날에 모아둔 야동을 봐도 몰입이 안돼서 강제로 도닦은지가 벌써 한달이 지났다.
그도 그럴게, 남자였던 내가 여성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은 더욱 격렬한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의지랑 상관없이 목소리가 새 나오는것, 그게 또 평소랑 전혀다른 목소리라서 무섭기도 하고.
감각도 완전히 다르잖아.
뭣보다 박는쪽에서 박히는 쪽으로 입장이 변한게 몰입을 해하는 가장 큰…….
……지금 하는건 야한생각이 맞잖아…?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대체 뭐 때문에?
"설마. 그거 회복되는거 아니냐? 손 회복됐던 것처럼."
"뭐?"
머리카락도 회복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럼 대체 왜 지금 갑자기 급격하게 회복되는 건데?
결과가 있으면 원인도 있어야지.
원인이 대체 감이 안잡힌다.
그러고보니 아까전에 한야를 실수로 죽여버렸을때도 조금 머리카락이 자란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은 갑자기 급격하게 자라버렸다.
그니까 그게 무슨 공통점이 있지?
나는 목이 타는걸 느끼며 와인을 따르려고 다시 손을 뻗었다.
-챙그랑!
아, 젠장. 또 힘조절을 못 했군.
너무 당황스러워서 이런 세세한걸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깨진유리가 손에 박혀서 피를 뚝뚝 떨구고 있었다.
고통은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은도 아니라서 그런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고통에 더욱 면역이 생긴것 같은데.
좋은건지 나쁜건지.
그나저나 고통이 없다해도 와인도 아깝고, 떨어지는 내 피도 아깝다.
유리조각있는데 핥아도 되나?
나는 큰 유리조각을 떼어내고 혓바닥으로 손가락과 손등에 튄 피랑 와인 정도만 핥았다.
와인이랑 피랑 섞이니까 맛있네….
내가 진짜 미쳤나.
유리조각을 빼내다가 조그맣게 보이는 유리파편들은 어떻게 빼야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 혈류를 밖으로 돌리면 피랑 같이 빠지는거 아닐까, 생각하고 살짝 혈류를 돌렸다.
"어라…?"
그러자 그냥 상처가 재생되어 버리는게 아닌가?
게다가 유리파편 부스러기는 피부 밖으로 어느새 빠져 나와있었다.
사실 안그래도 금방 낫기는 했지만, 상처가 아무는게 눈에 보일 정도라니?
혈류로 이런것도 가능했던거야?
혹시 에이샤의 피를 마셔서 그런걸까?
에이샤 정도의 미친 회복력을 목격한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회복능력처럼 보일만한게 그 흡혈귀가 보여준 회복능력밖에 없으니까.
머리에 박힌 총알까지 뽑아서 회복했던 녀석인걸?
정말 미친 성능의 회복력이었지.
"회복능력……. 릴리스가 이런것도 가능했었나?"
"모, 몰라. 나도 방금 알았는데."
일단 이 난장판이라도 정리해야겠어.
화장실 가서 손도 좀 씻고.
"나 대걸레랑 빗자루 가져올게."
오늘 세찬이 병실 청소를 두번이나 하게 되다니.
이게 다 물리저해팔찌를 벗은 탓이다.
다음에 세찬이랑 교회가서 주문할땐 내 맘대로 벗을 수 있는 팔찌로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원래 유디라같은 흡혈귀 전용 장비라서 마음대로 못 벗는다는게 큰 문제점이다.
흡혈귀인 내가 사냥꾼이 된다는 것 자체가 전례없는 특혜라고 하니까, 사냥도구 같은건 나에 대한 준비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야, 잠깐. 저거라도 입고 나가지?"
"아, 맞네."
세찬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나는 지금 상반신 탈의에 얇은 이불만 덮은 상태였다.
젖은 캐미솔이라지만, 그거라도 입는게 낫겠지.
밖에는 이라도 있을거고.
머리카락이 길어져서 젖은 옷을 입는게 조금 고역이었다.
등에 착 달라붙는다고 할까.
그걸 어떻게 빼는 작업이 조금 힘들었다.
"으흐으, 차거라."
그리고 젖은 옷이라 역시 차갑다.
대걸레를 가지러 화장실로 향하면서 이라는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도망친걸까.
뭐, 알아서 돌아오겠지.
내가 방금 찌그러트린 대걸레와 빗자루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내 병실에 버려둔(?) 하루살이의 시체도 확인했는데, 그냥 그대로 있었다.
하긴 시체가 어딜 가겠어.
아까 이 시체를 치우고나니 머리카락이 조금 자란 기분이 들었으니 뭔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달달한 혈향 말고는 별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건데.
대걸레로 와인을 닦고, 유리조각을 빗자루로 치우고, 손걸레로 바닥까지 전부 닦아내고 있다.
하루살이 시체 부산물은 어차피 6시가 지나면 사라지니 대충 닦으라고해서 그렇게 했지만, 와인자국이랑 유리조각들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을테니 꼼꼼히 치울 수밖에 없지.
"…."
장래에 먹고살 길 막히면 청소부로 나가도 될 것 같군.
나처럼 청소 잘하는 남자도 드물지.
아니, 이제 여자인가?
또 장래계획이 늘었다.
"그 회복능력. 혹시 에이샤의 피라도 마신거냐?"
세찬이 내가 청소하는걸 보면서 말했다.
"어, 음. 그랬지. 역시 그거때문인가?"
그때는 너무 피도 많이 흘렸고, 갈증도 참을 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흡혈귀가 피를 빨면 그 능력도 가져오는게 당연한가?
"그런게 됐으면, 애초에 고유능력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않았겠지. 연구자한테 듣지 못했나? 원래 능력은 그런식으로 얻어지는게 아냐."
"그건 그렇네."
"그냥 그 흡혈귀가 떠올라서 한말이다."
릴리스가 특별한 걸 수도 있고, 사실 이런 능력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을 수도 있지.
상처에 혈류를 돌려본단 발상을 그동안 해보질 않았는걸.
하지만 잘린 손이 급격히 회복한것은 에이샤의 피에 영향이 있는것 같긴한데.
회복력이 늘어났을 수도 있겠다.
"그럼 그, 머리가 자란것도 비슷한 맥락 아니겠냐?"
"뭐가 비슷한 맥락인데."
"머리카락도 신체라고 치면, 회복하는것도 당연한거겠지. 싶은데."
무슨 유교인가? 신체발부 수지부모인가 뭔가?
아니 머리카락도 내 몸에서 난 거긴 하지….
그런데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이고, 피도 안 흐르는 거잖아. 머리카락 회복은 어떤 원리로 가능한거야.
그리고 내가뭐 머리로 혈류를 돌…린…적이…?
잠깐만.
혈류라는건 즉, 피의 흐름.
내가 가진 피의 흐름을 조절해서 원하는 신체부위로 돌림으로써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흡혈귀가 가진 특수능력이다.
그렇다.
나는 몇번 머리쪽으로 혈류를 돌렸던 것이다.
결코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쪽팔려서 얼굴에 피가 쏠리는것도 혈류가 돌았다고 친다면 칠수가 있다는 거다.
솔직히 그동안 쪽팔림을 많이 느껴보긴 했지만, 머리를 자르고나서 느껴본 압도적 당황스러움과 쪽팔림이 갑작스런 머리카락 회복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는거겠지.
뭐 이딴 성능이….
그러니까 나는 괜히 8만원만 날렸고, 앞으로도 머리카락을 자르더라도 그게 유지되고 싶다면 머리로 피가 쏠리는 짓은 하면 안된다는 얘기네.
"하하…하…. 이러면 머리스타일 강제고정이네."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떠오르는게 있긴 하네.
관리를 안해도 머릿결이 어느정도 좋았던건 기본적 회복능력 때문이었나.
그래도 외부에서 묻은 노폐물의 찝찝함과 갑갑함때문에 목욕은 자주 했지만 말이다.
이거, 그럼 염색같은것도 안되나? 염색도 신체변형이라고 치고 회복시켜버리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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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야~ 어딨어~"
기다려도 이라가 돌아오지 않아서 결국 찾으러 나왔다.
대체 어디까지 도망을 친건지.
어디서 길 잃은거 아닌가 모르겠다.
-콰르릉!
그나저나 밤의 병원은 뭔가 오싹한 뭔가가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억수같은 빗소리도 그렇고, 이젠 아예 천둥까지 치고있었다.
나는 어깨에 두른 이불을 꾹 잡았다.
아무리 감기에 걸리지 않는대도 온도변화엔 민감한 몸이고, 추위를 즐기는 취미도 없기때문에 이불을 두르고 있는것이다.
물론 이번엔 덜 마른 캐미솔을 입은 채이지만.
밤의 어둠도 결국 밤의 주민인 흡혈귀에겐 아무런 장해도 되지 않지만, 왠지 지금은 평소보다 더 어두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으스스한 기분도 들고.
트라우마인가, 며칠전 싸운 거대 슬라임이 떠오른다.
어쩐지 창문에서 눈깔이 돋아날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촉수가 건물을 무너트리려고 들이받는 소리로 들리는데….
"시, 시발. 세찬이라도 끌고올걸…."
하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녀석을 끌고와서 뭘 하겠어.
진짜로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나 혼자 있는편이 낫다. 지금은.
그때처럼 물리저해도 없고, 체력도 만전에, 새롭게 회복능력까지 각성한 지금 그 슬라임이랑 싸우라고하면….
그래도 답이 없군.
앞으로는 화염병이나 소이탄이라도 들고다녀야하나.
호신용품으로 소이탄이라니. 미친발상같지만.
고추가루스프레이보다야 훨씬 성능이 좋을건 분명하다.
…그러고보니 마늘즙스프레이를 들고다니면 흡혈귀 내쫓을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면 나한테도 데미지가 들어오겠군.
나중에 마늘냄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도구를 얻는다면 모를까.
세찬이랑 교회 갈 날이 기다려진다.
"흐흫."
역시 잡생각을 하니까 조금 낫다.
트라우마같은건 나랑 어울리지 않아.
지금이면 근력도 민첩성도 엄청 높은 상태잖아. 만약, 나쁜것들이 나타나면 바로 팔을 비틀어서….
공포심을 잡생각으로 덮어버리고 머릿속에서 가상의 괴물과 쉐도우파이팅을 하며 병원을 걷다가 문득, 복도를 뭔가가 막고 있는걸 깨달았다.
처음엔 무슨 벽인줄 알았는데, 뭔가 질감이 다르다.
손을 살짝 대보니, 겉은 풍성한 털로 덮여있고, 내부는 마치 돌처럼 딱딱했다.
뭐지?
그것이 내 손길에 반응했는지, 움찔거리며 꿈틀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 통로를 막은 거대한 벽처럼 보였던것이, 생물체였던 거다.
그것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퍼런 안광을 내비쳤다.
-콰릉!!
번쩍.
꽤 근처에 내려친 번개였는지, 창문 너머로 전기의 불빛이 강하게 째려들어옴과 동시에 천둥소리가 내 귀에 꽂힌다.
"으큭!"
강화된 청력에 직빵으로 꽂히는 소음이 고막을 강하게 때렸다.
그 충격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어우, 얼얼해.
내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열고닫기를 반복하자, '그것'이 내게 고개를 내렸다.
너무 갑작스런 벼락의 빛때문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그것이 내게 얼굴을 가져와 눈을 마주치니, 조금 얼어붙었다.
"어…?"
개다. 아니, 이걸 개라고 불러야하나?
이 통로 전체를 가로막는 개라고?
심지어는 통로가 너무 좁다는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코끼리수준의 압도적인 크기.
그런 모습의 거대한 개가 지금 나를 똑바로 마주치며 얼굴을 들이 밀고있는 것이다.
이게 마음만 먹으면 나같은건 한입에 삼켜버리겠지?
어? 진짜 먹으려는건가?
왜 입을 여는거야!
그래선 안될걸 알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핥짝.
"…?"
그러나 이빨의 단단함은 느껴지지 않아서 의아해 한쪽 눈을 살짝 떠보니, 거대한 혓바닥이 나를 핥고 있었다.
뭐야, 얜 핥아먹는게 취향인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넋을 놓고 있었는데, 뭔가 사락사락, 바닥을 쓰는 소리가 들려서 그쪽을 바라보았더니 거대한 먼지털이 같은게 바닥을 좌우로 쓸고 있었다.
아니, 이거 꼬리인가?
잠깐만, 설마 이거?
"혹시 이라니?"
-커웅!
"악!"
커진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성량에 나는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청각이 좋아진건 좋은데, 이런건 너무 성가셔.
생각해보니까 청각 덕을 본것도 별로 없는거같다.
에이샤의 저택에서야 도움이 됐지만….
나는 다시 귀에서 삐이이- 하고 들리는 이명이 사라질 때까지 얼굴을 찌푸린채 귓구멍 열고닫기를 반복했다.
-끼잉….
이라…가 맞겠지?
아무튼 거대이라가 풀죽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둥이를 떨어트렸다.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커진거야.
"우유라도 마셨니? 왜이렇게 커졌어?"
-끼이우웅, 끄으응….
아, 사람말을 못하는구나.
나는 이라의 얼굴 위에 올라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몸집이 조금씩 작아지는것 같더니, 마침내 인간으로 돌아왔다.
옷은 변하면서 다 찢어진건지 벗어둔건지, 처음 변했을때처럼 알몸이었다.
나는 몸에 둘렀던 이불로 몸을 덮어주고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커진거야?"
"그게, 제가 무서우면 가끔 이렇게 변해요. 저도 조절이 안돼서…."
"그렇구나."
뭐가 무서웠길래.
음, 밤의 병원이 솔직히 조금 무섭긴 하지.
그런데 저렇게 커질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그보다도 내가 생각하던 늑대인간이 아니야.
뭔가 좀, 개로 변하면…아니 늑대로 변하면 완전히 늑대고, 인간으로 변하면 개털같은 머리카락 빼곤 완전히 인간이잖아.
늑대인간이라더니, 늑대 / 인간 따로따로라서 늑대인간인가 .
"그런데 옷은 어떻게 했니?"
"그, 변하기 전에 어떻게 벗어놨어요. 찢어질거 같아서…."
"잘했어. 그거 없었으면 환자복이라도 빌려야 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