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27/101)



〈 27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그렇구나. 그럼 뭐, 하루살이한테  의뢰금은 내일 전해주면 되고."


뭐, 어차피 매일 죽었다 살아나는거나 마찬가지인 하루살이라서 그런지, 아빠도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시체청소는 내가 하라고 했다.
… 하긴,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내가 치워야지.

"물리력저해 팔찌가 지금은 남는게 없는데. 정 제어가 안되면 1급 흡혈귀 구속구라도 가져와주마."
"아냐…. 괜찮아 아빠….나 아무것도  건드릴게…. 힘조절 빡세게 해볼게…."

나는 시체를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수갑은 싫어요.
개목걸이도 싫어요.

비주얼을 보면 완벽한 살해현장이긴 했다.
실제로 죽이기도 했고….

이라는 완전히 멘탈이 나갈뻔 했지만, 필사적인 내 해명과 아빠와 세찬의 설명덕에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랑은 약간 거리감이 생긴것 같은 느낌.


"이라야, 혹시 너는 내가 손잡을때나 머리 쓰다듬을때 아프지 않았어?"
"저는 원래 튼튼해서 괜찮긴한데…. 전보다 누나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기는 했어요."


으음…그래….
이라도 위험했구나.
다행이다, 죽은게 하루살이라서….
미안해요, 한야씨.
나는 이기적인 사ㄹ…. 아니, 흡혈귀인가봐.

"그럼 아빠는 실버한테 가볼테니까, 조심히 있어. 네가  아들일거라고 믿고싶으니까."
"으응, 절대 안그럴게요 아빠."
"그래. 머리 잘 어울리는구나. 그게 훨씬 낫다."


나는 머리를 잠깐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조금 자란거같은데, 기분탓인가?


시체를 옆 병실, 그러니까 내가 있던 병실에 던져넣고, 대걸레로 핏물들을 다 닦아낸 나는 드디어 세찬의 침대  걸상에 앉았다.
물리력저해가 없으니 이런 육체노동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힘을 잘못줘서 대걸레를 작살낼뻔 하기도 했지만, 극도의 집중력으로 대걸레의 대를 조금 우그러트린 정도로 끝냈다.
와, 이라야. 진짜 너 튼튼하구나.
 이라  잡을 정도로만 힘을 줬었는데, 그정도 힘으로도 대걸레자루는 내 손가락 형태가 남았다.


세찬은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 담배마렵다."
"이 기회에 끊지그래? 몸에도 안좋은거."
"일주일 참아서 끊을  있었으면 군대 훈련소에서 끊었어."
"자랑이라고…."


그때 이라가 옆에서 물었다.

"담배가 뭔가요?"
"음, 몸에 아주아주 나쁜거야. 이라야 넌 절대 하면 안된다."
"네, 누나가 하지말라면 안할게요."
"그럼그럼."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내가 하는 말은 다 듣잖아!
맨날 토달고 씹고 말이야.
세찬이는 이래서 안된다니까.

그때였다.

-쾅!

"릴리! 여기서 피냄새가 났는데!"
"아, 유디라…. 그거 옆방일걸요. 사냥꾼 하나 거기다 치워놨거든요."
"뭐?! 여기서 사냥꾼을 죽인거야?! 어떻게 구속되지 않았어?"
"아….  사냥꾼이 좀…. 특이한 사람이라서."


죽어도 죽은게 아니고, 그녀의 피를 마셔봤자, VP가 오르지도 않는다.
일시적으론 조금 강해지겠지만…. 6시가되면 신체를 구성하던 모든것이 지정된 곳으로 되돌아가는것이다.
그러니까, 흡혈귀의 뱃속에 들어간 그녀의 피 마저도.


"그래서 별로 마시는걸 추천드리지 않아요."
"후우. 좋다 말았네. 어쩐지 왜 실버가 가보라고 했는지 알겠어."
"그런가요?"

실버는 나의 호위이자, 유디라의 파트너이자 감시역.
그런 그가 아무리 내 스승이라지만, 피 냄새가 나는곳으로 흡혈귀를 뛰쳐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얘기해준거겠지.
딱히 상관은 없다고.
하기사, 여기서 물리저해까지 달린 유디라가 난동을 피우는건 불가능하기도 하니.

"아, 실버는 어때요? 괜찮아요?"
"물론이지. 릴리, 그거아니?  아저씨, 개한테 물려서 그렇게 됐다더라. 꼴불견이야."
"……."

유디라의 말에 이라가 흠칫했다.
으음…. 그런가?
하기사, 세찬이한테도 도망치던 녀석이 실버한테선 도망치지 않았을리가 없지.
그럼 어떻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온거지?
나랑 만났을때는 인간이었는데.

"그, 죄송합니다. 저는 저… 진짜로 죽는줄 알고…."
"응? 릴리. 얘가  이러는거니?"
"아 그게요…."

대체 이 설명만 몇번 하는건지.
간략하게 얘가 라이칸슬로프고, 아마 실버를 문것도 이녀석일거라는 말이었다.
유디라는 역시 놀랐다.

"이녀석이 그 천년전에 멸망했던 그 라이칸슬로프라고? 어떻게?"
"오라클이라는 집단에서 만들어낸 모양이에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크다고해봤자,  허벅지까지밖에 오지않던 이라가 물었다고 그렇게 되는 실버가 이해가 안되네.
사실 이라는 변신하면 세지나?

"그런데 세찬, 이렇게 다친건 참 신기하네요. 언제나 자기 몸 건사하는걸 최우선으로 챙겼으면서."
"됐어요 유디라. 알아서 할테니."

세찬이가 몸을 일으켰다.

"유디라, 석주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거죠?"
"역시 세찬은 눈치가 빨라요.  때문일것 같나요?"
"뭐…. 짐작가는게 없진 않습니다만."


"어? 나한테?"


내가 들을 말이랄게 딱히 있나?

"그, 릴리의 피를 마시고나서부터 이렇게 됐어…. 볼래?"


그녀가 입안에 검지손가락을 넣어 벌렸다.
입안의 빈 공간이었던 송곳니가 있을 자리에 작지만 이빨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흡혈박탈이라면서.
도로 자라나면  뽑아야하는건가?

"최근 오히려 흡혈량이 줄었는데도 송곳니가 재생되기시작했어. 이거 아무래도 네 피 때문인것 같거든?"
"예?"
"역시 맛있는 피는 몸에도 좋은걸까?"


그녀가 웃었다.
으음…. 순간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정신차리자.
상대는 흡혈귀야.
그런데 송곳니의 유무는 흡혈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들었는데, 다시 자라면 어쩌자는거지.

"큰일인거 아닌가? 이거 괜찮냐?"
"몰라, 다시 뽑으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아니! 여기서 더 안자라고 있다구요! 다시 뽑지는 말아요!"
"흐으음…."

나는 내 송곳니도 살짝 만져봤다.
확실히 흡혈귀가  후, 송곳니가 길어지긴 했는데.
나로썬 고기먹다가 혀 씹을 위험성이 증가했을 뿐이었는걸.
그런데 흡혈귀한테는 이 송곳니가 굉장히 중요한 기관이라니.


"그치만…. 릴리한테 도움받은건 사실이야. 최근 흡혈충동도 많이 나아졌고…."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요."

"그래서말인데…. 그, 진짜 안될까?"
"또 뭐가요."
"그, 화장실에서 했던말…. 딱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유디라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하기는 했지만, 뭔 소리인지는 바로 이해했다.

"나가!"


그건 백화점 화장실에서 제안한 '한달에 한번 어차피 버리는 피'에대한 소유권 주장을 위한 언행이다.
흡혈귀한테는 힘조절 적당히 안해도 되겠지?
난 바로 그녀를 번쩍 들어서 병실밖으로 던져버린 뒤, 문을 닫았다.

"후우…. 원래 이렇게 정신없나?"
"너 때문인거 같은데."

병문안이라는게 원래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그냥 세찬이  놀리다가, 과일좀 뺐어먹고, 잡담이나 좀 떨다가 집에 가는 걸 생각했는데, 와서 한게 충격에 충격에 충격만 받은것 같다.
이만 집에 돌아가서 쉬든가 해야지.
오늘은 밤에 잘것같네.


"피곤하니까  이만 돌아갈란다. 이라야. 집에가자."
"네, 누나."
"그래, 들어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병원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뭐야. 비가오네."

오늘 분명히 날씨 맑았는데.
아침에만해도 기막히게 좋은 날씨 아니었나?
뭐 금방 그치겠지.
하필 산중에 있는 병원이라서 비가 내리면 완전 진흙바닥이 되어버린다.

이 신발 새건데, 거기다 흰색이란 말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돌아와 세찬의 병실문을 열었다.

"왜 또 왔어?"
"비가 엄청나게 내리더라고. 망했다."

조금만 내리는거면 뛰어서 집에 갔을텐데.
저렇게 내리면 신발 버리는건 확정이다.

"그치면 가야지, 뭐. 하암…."

걸상을 벽으로 끌고와서 등을 기댔다.
이라도 옆에 세워놓고 머리를 대니까 적당히 한숨 잘만한 자세가 됐다.

"야, 잘거면 옆 병실 가서 자. 왜 여기서 자려는데?"
"옆 병실에 시체 치워놨단 말이야. 으, 찝찝해."

무슨 벌레 치워놓은 것마냥 말하는것 같긴 하지만….
비슷하긴 하지. 하루살이니까.
또 속으로만 미안해진다.
으음…. 이건 살인인가 아닌가.
분명 내가 한 행동은 살인이긴 한데, 다음날이면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았던게 되어버리잖아.
그럼 살인이 아닌건가?
그치만 첫인상부터 자살하던 여자라서 목숨값이 되게 싼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찬은 여전히 TV를 보며 누워있었고,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건가 해서 나도 화면을 봤더니, 그건 뉴스였다.

-2일전, 정체모를 지진으로인해 다수의 싱크홀이 발생하고, 건물에 금이가거나 파괴되는등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해당 지진으로 한빛아파트 2동 전체가 무너지는 참사가….

이거, 우리가 한짓거리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그 흡혈귀가 한거지만.


"결국 이건 못 덮었다. 준비도 미흡했고, 규모도 너무 컸어."

세찬이 중얼거렸다.
보통의 전투는 이면차원이나 유사차원으로 흡혈귀를 끌어들이고 시작하는데, 이번 일은 애초에 잠입및 탈취가 주 목적이고 겸사겸사 저택 폭파로 흡혈귀의 대량사살을 노린것이었다.
그런데 폭파시킨 저택이 사실 저택모습을 한 타락한 흡혈귀일줄 몰랐고, 에이샤 그래멀린이 그렇게 강한 흡혈귀일줄도 몰랐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뭐 때문에 이라를 만들고, 제물로 써먹으려 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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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푹 잤나.
눈을 떠보니, 걸상이 침상으로 대체되고, 이불까지 덮여진채로 자고 있었다.
뭐여.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눈을 비볐다.
하루 자고 일어났는데 뭐지. 벌써 머리가 이렇게 자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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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도 슬쩍 치워내고, 어느새 개로 돌아간 이라를 슬쩍 내려놓았다.
음, 지금이 몇시지?
12시 30분이네.
병원 침대를 보니 세찬은 자고있었고, 창문 커튼을 열어보니, 아예 비가 그칠생각도 없이 미친놈마냥 내린다.
와, 강이 흐르네 아주.
저렇게 흐르는 흙탕물을 보고있자니, 조금 신경쓰인다.
병원에 물 들이차는거 아니야? 내려가봤더니 물난리 나있는거 아니지?
최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언제 내리려나 생각하기는 했는데.
저따구로 내릴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흠. 사람이 가장 심심함을 느낀다는 12시 30분.
슬슬 tv프로그램도 끝날때고, 여긴 인터넷도 안돼잖아.
나는 병실을 둘러보다가, 아빠가 놓고간건지, 다른사람이 놓고간건지 모를 간식과 과일이 놓여져있는걸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부스럭, 부스럭.


"…뭐하냐…."
"아, 깼어…?"

쳇, 몰래 다 먹어치울라 했건만.
들켜버린이상 어쩔 수 없지.

"너도 먹을래?"
"됐다.  팔로 내가 뭘 먹냐. 너 다 먹어라."
"쳇, 싫어해야 뺏어먹는 맛이 있는건데."
"… 요즘  이렇게 깝칠까."

옛날에 비해서 너가 좀 많이 무서워졌잖아.
어릴땐 조금 무뚝뚝했을뿐인 녀석이, 점점 무슨  다리에 문신도하고 벌크업도 하고 인상도 더러워지는데, 평범한 성인 남성이면 아무리 불알친구여도 그렇게 안 깝죽대지.
물론, 옛날에도 적당히 장난은 쳤지만.


"아, 그래도 병원은 시원해서 좋다. 그치?"
"어."


집에 있었으면 이불을 덮는건 사치였을거야.
선풍기바람 멈추는순간 사람…. 아니, 흡혈귀 죽는다니까.
밤에는  버틸만 한데 말이지.

나는 과자를 집어먹다가, 바나나를 베어먹다가, 사과를 씹어먹거나, 하며 세찬의 눈앞에서 음식들을 천천히 학살했다.
게걸스레 집어먹지는 않았다. 다만 우아하게, 하나씩 하나씩 집어먹었다.


"배고팠냐?"

세찬이 나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배고픈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심심해서."

할게 먹는거뿐이니 먹는거다.
그리고 한두개 집어먹을 줄 알았나본데, 다먹으려면 다 먹을 수 있다.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말그대로 심심했기 때문에. 아무렇지않게 벌어지는 폭식…!
내가 먹는걸 바라보던 세찬이 말했다.

"물이나 좀 줘."

그래, 손발없는 찐따가 하는 부탁인데 어쩔 수 없지.
난 폭식행위를 멈추고 냉장고를 열었다.
음, 이건 오렌지주스인것같고, 다른건… 와인인가?
한약같은것도 있고, 맥주 같은것도 있다. 이건, 보드카?
대체 병원 냉장고에 술만 가득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되고나서 술도 끊었다.
끊었다기보단, 마실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하나.
보통 도민석이랑 마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만남을 최소화 하다 보니까.
요즘은 연락도 대체로 씹는다.
미안하긴 하지만, 흡혈귀랑 엮여서 좋을게 없으니 말이다.
막연히 생각했는데,  크툴루신화급 괴물딱지를 보니까 없던 위기감이 마구마구 샘솟아서 말이야.

아무튼.
견물생심이라고,  보니까  오랜만에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술 마실래?"
"어이,  환자야."
"그래서 안마신다고?"
"조금만 마시겠다는 얘기지."


큭큭, 어째든 녀석도 결국은 술 담배 좋아하는 사람이라 술 마시자는 말에 거절을 한적이 없었다.
담배는 끊으라면서 술은 같이 마시는 이 모순을 견뎌내며, 나는 종이컵에 담을 술을 매우 공평한 척척박사님께 물었다.
척척박사님의 선택은 와인이었다.
코르크 따개같은건 없었지만, 그냥 코르크를 병속에 밀어넣어버려서 해결했다.
흡혈귀의 근력때문에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검붉은 와인이 종이컵에 담겨지고, 무슨 맛일지 궁금해 살짝 마셔보니까, 이거  달다.
맛있네, 비싼건가?

"자."

종이컵에 술을 담아 건네자, 왼손으로 받아드는 세찬.
제대로 쥘수는 있나 불안불안했는데, 실제로도 불안한 자세로 종이컵을 받아들어 와인을 마셨다.

"음. 좋군."
"이거 이름 뭔지알아?"
"몰라. 사실 내것도 아냐."
"뭐야."

남의 거였나.
음, 이왕 이렇게된거 다 마셔버려서 증거를 없애 버리자.
종이컵의 와인을 원샷때린 후에 한잔  가득 채운다.
달아서 그런지 쭉쭉 들어가네.
이거 사실 포도주스 아닐까?

"좋네. 비오는날 느긋하게 와인이라니. 겁나 분위기 있잖아."
"분위기? 와인을 종이컵에 담아서 원샷하면서 무슨 분위기야."
"말이 그렇단거지."


아니, 딱 상황만 보라고.
창밖의 빗줄기를 보면서 와인을 음미하는 거잖아.

집에도 와인잔은 딱히 없었는데.
나중에 의뢰금 확인하고 와인잔이랑 와인도 적당히 몇개정도 살까?
와인은 자주 마셔보질 못해서 어떻게 마시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지.
와인잔 정도는 있어서 나쁠것 같지는 않은데.
창밖에 미칠듯이 내리는 빗줄기가 고요한 병실의 창문에 부딫히는 소리가 기분좋은 백색소음을 만들어낸다.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떠오르는 감정들을 배설하기위해 입을 열었다.

"요즘 삶, 너무 허무하다."
"갑자기?"


세찬은 내 뜬금없는 한탄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분위기가 무거워지는걸 원한건 아니라, 그냥 농담처럼 내뱉었다.

"고깃집도 못가고, 마늘간장치킨도 못먹고, 김치도 끊고…. 낮에는 더워죽고, 밤에는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처음엔 얼굴이라도 이쁘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별 감흥도 없고. 보고있어봤자 현탐만 오더라."


세찬은 내가 늘어놓은 불만들을 가만히 듣고는, 툭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하긴, 니가 제일 힘들겠지."
"오. 니가 위로를  하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흡혈귀가 해뜨는 방향을 걱정하는거냐? 너는 해나 걱정해."
"큭큭, 그럴까?"


얘가 날 위로해주는 날이 다 올줄이야.
감개가 무량하구만.

그런데, 순식간에 종이컵 두잔을 비워서 그런지, 약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전혀 취하진 않았다만.

아, 이놈의 머리카락. 자른지 얼마나 됐다고 자꾸 귀찮게 눈을 찌르는거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치우고 말했다.

"아. 김치먹고싶다. 마늘치킨도 먹고싶어. 고깃집도 가고싶다…."


식사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에 하나잖아.
인류의 모든 기술과 발전은 다  먹고  살자고 발전한건데, 잘 먹기를 박탈당했다!
허무하지 않을수가 있나.

처음부터 몰랐으면 몰라도, 마늘에 중독된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달반 넘게 참았으면, 다 참았지!!
그리고 나때문에 집에서 라면에 김치도 못 먹는 세찬이도 불쌍하잖아.

세찬이 문득 떠오른 듯이 이야기했다.

"… 언제 한번 교회나 같이 가지."
"어? 교회?"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교회?

"전도하냐?"


세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흡혈귀 사냥 도구 만드는 곳 말이야. 어차피 네 팔찌 새로 해야해서 가긴 할거다. 그러는김에, 제작의뢰나 해보자는거지.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런건 없다면서?"
"만들 이유도 없었으니까. 주문제작할거야. 한두푼으로 되진 않겠지만, 그 여자한테 돈도 받아냈고."

그여자라면, 아마도 악마사냥꾼을 이야기하는거겠지.

"그래? 그럼 당연히 가야지!"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마늘을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김장부터 다시 한다.
거의 모든 레시피에 다진마늘이 들어가는 한국.
그동안 먹을거 가려먹느라 힘들어 죽는줄 알았다. 진짜로.
더욱 슬픈건, 기억상으론 분명히 마늘의 맛과 향을 기억하고 있는데, 막상음식에서 풍기는 냄새가 하수구 처리장의 냄새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저주받은 코를 고칠수 있게 된다면, 진짜 코걸이라도 낄 수 있을 것이다.

"허무함은  낫냐?"
"물론! 고맙다! 역시 너 밖에 없어!"


나는 기쁨에 겨워 녀석을 끌어안았다.

촤악!

"아."

너무 하이텐션이었나.
세찬이 손에 들고있던 와인이 나와 세찬에게 쏟아졌다.

"미안. 너무 신나서…."
"… 됐다."

빨리 씻으면 지워지겠지?
세찬이는 병원복이라 상관 없겠지만, 나는 이거 꽤 비싼 옷이다.
아빠의 등골이나 마찬가지.
나는 즉시 화장실로 뛰어가 티셔츠를 벗고 세면대에서 물로 씻었다.


"아, 속까지 젖었네."

캐미솔까지 같이 벗어서 빨았다.
상탈하고 세면대에서 빨래하는 여자라니.
잘 안지워서 박박 문지르다보니….
구멍이 났다.

"쓰발, 맞다! 힘주면 안됐는데…."


또 사고쳤다.
얼룩지우려다가 얼룩자체를 물리적으로 지워버렸네.
하필 구멍난 부위도 가슴부분이라, 이런거 입으면 뭔 변태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어쩔 수없이 캐미솔은 살살 문질러서 얼룩을 조금 뺐다.
이거만이라도 입어야지.
다행히 캐미솔은 집에서도 자주 입기때문에 세찬이도 별로 곤란하지는 않을거다.
말이 캐미솔이지, 조금 장식된 여성용 런닝셔츠잖아?
내가 입을땐 그런 감각인데.
그렇게  가슴도 아니고 말이지.


"으, 차거."


흡혈귀라서 감기는 걸리지 않겠지만, 차가운건 차가운거다.
수건은 딱히 없나.
나는 그냥 팔로 몸을 감싸고 차가움을 느끼면서 병실로 돌아왔다.


"뭐야, 티셔츠는 어쩌고?"
"세면대에서 빨다가 구멍내버렸어. 힘조절을 못해서…."
"참나, 저기 수건이라도 써라."
"감사…."

수건을 몸에 두른 나는 젖은 캐미솔을 벗어던지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서, 그냥 이불을 망토처럼 둘렀다.
잠깐 뒀다가  마르면 입어야지.
그런데 세찬의 반응이 조금 희안하네. 왜 당황하는거지.

 




"뭐, 뭐야?!"
"뭘 그렇게 놀래냐. 다 가렸고, 전에는 목욕도 도와줬으면서. 그러면서  봤잖아? 안그랬어?"
"절대 안봤다, 이 미친놈아!"
"그렇군요. 난 보여져도 딱히 상관 없는데."

솔직히 어릴때부터 같이 목욕탕 간게 한두번도 아니고,
 이런걸로 뭐라하기엔 내가 그런 장난을 너무 많이 쳤다.

그래서 녀석이 내 몸쯤 본다고해서 별로 기분 나쁘다거나 하진 않은데.
내가 이 몸이 된건 내 의지가 아니잖아.
딱히 태도가 바뀔 이유가 없지.

오히려 그, '순수한 호기심 속옷'이 보여졌다는게 더 쪽팔리다.
그건  의지로 사서 입은거니까….
…잠깐, 이거 물어봐야되나?
아냐, 묻지말자.
안봤다면 내가 의심을 사는것이고, 봤다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타다닥! 사사삭!


"힉! 뭐야?"

갑자기 무슨 거대한 물체가 바닥을 달리는 소리가 나서 순간 바퀴벌레라도 나왔나 싶어서 깜짝 놀랐다.
아, 바닥에 내려놓은 이라가 사라졌네. 아마 김이라였던 모양이다.
세찬이가 소리질러서 깼나보네.
이라는  옆에 구석에 틀어박혀서  발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뭐하는거지?

"이라니? 구석에 틀어박혀서 뭐하는거야?"

나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역시 개로 변했을때가 만지는 감촉이 좋다.
서서히 인간으로 되돌아온 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죄, 죄송해요! 볼생각은 없었는데… 저기, 두분이서 할거 하세요!"
"뭐?"


나는 순간 벙쪄서 이라가 병실 문을 열고 도망치듯이 나가는걸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만약 세찬이가 소리지른 시점에서 깬거라면…. 아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 시발…."


머리에 열이 오른다.
갑자기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는듯 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완전  대사아냐…!"


오열했다.

"야, 잠깐 너?"

세찬이의 경악한 목소리.
뭘보고 저리 경악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받아줄 정신이 없다.


"뭐. 지금 이라한테 어디부터 설명해야될지 정리중이거든? 말걸지 말아줄래?"


그렇지만 뒤이어진 세찬의 말에 나또한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리가 다시 자라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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