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에이샤 그래멀린
나는 한동안 미친듯이 달렸다.
"허억, 하악……."
숨이 차오른다.
폐가 터질것 같이 괴롭고 아랫배가 땡긴다.
아무리 흡혈귀라고해도 출혈도 아직 안 멈췄고, 피로도 상당해서 잠깐 쉬어주지 않으면 뛰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달리면서 촉수를 피해내기만해도 급해서 어디 쉴만한 곳을 찾을만한 여유가 없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나는 내 등에 업힌 세찬에게 물었다.
"한세찬, 어디 숨 돌릴곳 없을까!"
"저기, 저 건믈로 들어가! 나부터 집어넣고!"
세찬이 커다란 상가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부터 집어넣으라고? 왜?
의문은 들었지만 그러라고 했으니, 그러도록 했다.
까각.
지금은 새벽2시.
생각해보니 상가건물이 열려있을리가 만무한데 힘을 주니까 그냥 잠금장치가 부숴졌다.
그리고 나는 시키는대로 세찬을 굴려 집어넣었고, 나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미친.
촉수가 내 팔에 스쳤어!
콰직!
내 팔에 스친 촉수를 급하게 떼내서 짓밟아 끊어내자, 세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윽, 들어와."
그리고 나는 그때서야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준을 모르겠다고. 흡혈귀가 못 들어가는 건물의 조건이 뭔데?
이 상가자체가 하나의 집으로 취급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를 먼저 집어넣으라고 했던거였나!
"헉, 헉……."
나는 숨을 몰아쉬며 건물 바닥에 그냥 냅다 누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흡혈귀는 초대받지 않은 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이상한 제약조건이 걸려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
그렇다는건 저 촉수들도 일단 흡혈귀인만큼, 이 건물에 누가 허락하지 않는한 못 들어온다는 거겠지!
그렇게 보니까 촉수도 상가 건물을 들어오질 못 하고 있었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하아, 어질어질하네. 정신도 몽롱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손목을 그래놨는데 당연히…."
세찬이 왼손으로 몸을 힘겹게 돌리려고 하길래, 내가 발로 뒤집어줬다.
손은 손목을 붙잡고 있느라 못 쓰니까 말야.
"하아, 이거 주사해."
세찬이 방탄조끼 앞주머니중에 하나를 열어서 뭔가를 나한테 건넸다.
일반적인 주사기 모양은 아니었다.
끄트머리를 꺾어서 주사하는 안약같은 느낌의 주사기였다.
"이게 뭔데?"
"혈액 응고제. 손목출혈을 막을거다."
아하, 나는 곧바로 상처에 주사를 놓았다.
"어윽, 이거 꽤 아프네…"
세찬의 말대로 곧 출혈량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혈액응고제라서 그런지, 왼손으로 혈류를 돌리거나 하는 건 이제 못 할것 같다.
혈류가 손목에서 막히는 느낌이네.
그 감각에 나는 머릿속이 번뜩 하는걸 느꼈다.
이거, 어쩌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혈액 응고제로 혈류를 막으면 일시적으로나마 능력봉인을 하는거 아냐?
그럼 이걸 에이샤한테 주사하면 회복을 못 하지 않을까?
혹시 나는 천재가 아닐까?
이 이야기를 세찬에게 쏟아냈더니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걸 그렇게 쓸 생각은 못해봤군."
그야 그렇겠지, 누가 흡혈귀한테 혈액응고제를 주사해.
제대로 사냥에 준비가 된 사냥꾼이라면, 자기 출혈 막을 응고제를 흡혈귀한테 꽂을 생각은 안하는게 보통이다.
회복억제방법은 혈액응고제 말고도 여러가지 있으니까.
"하지만 응고제가 2개밖에 없었어. 많이 챙겨다닐만한 물건은 아니라서……."
세찬의 말로는 응고제를 쓰게 됐다는건, 그만한 출혈이 전제되었다는 건데 두개 이상 쓰게 될 정도면 그냥 죽었다고 보는게 낫단다.
솔직히 맞는 말인것 같다.
"그럼 이제 하나……. 어떻게 하지? 어디에 주사해야할까?"
세찬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마도 심장에 주사하면 될것 같은데."
심장.
혈액을 온 몸으로 넘기는 기관.
거기의 피가 응고된다면, 확실히 몸 어디에도 혈류를 보내기 어려워지겠지.
어쩌면, 주사를 꽂은 시점에서 끝날지도!
나는 심장의 위치를 대충 찾기위해 내 심장의 위치를 더듬었다.
근데 옆에서 보기엔 내가 갑자기 자기 가슴 만지는걸로 보였는지, 세찬의 표정이 미묘해져서 그만두기로 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흘려준 후에 하나남은 혈액 응고제를 받아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졌던 소매를 찢어서 손목에 감자, 이제 트레이닝복은 민소매가 되었다.
정말 개성있는 디자인이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이제 양손이 좀 자유로워졌다.
더이상 오른손으로 눌러서 지혈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혈도 확실히 되는 것 같고, 여전히 몽롱하긴 하지만.
내가 눈을 비비고있자, 그걸 본 세찬이 말했다.
"너, 빈혈이 심각한것 같은데."
"아? 괜찮아. 아직 버틸만 해."
"그런가. 힘들면 내 피라도 마시라고."
"웩! 니 피엔 관심없어. 내 첫 흡혈이 너라고 생각하기도 싫고."
그러자 세찬이 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피에 관심없다는게 그렇게 큰 충격인가?
아, 내가 억지로 흡혈을 참는거 때문에 그런건가.
이녀석 눈치는 꽤나 좋으니까 내가 겨우 참아내고 있는걸 아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피 안빨겠다고 약속해서."
"그래도 필요하면 말해라. 굶주림에 타락하는것보단 마시는편이 좋을테니."
"그러지 뭐."
콰앙! 쾅!
갑작기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지진?"
"아, 들어올 수가 없으니 아예 부숴버리려는 모양이군. 집이 아니게되면 초대따위 필요없지 않겠냐."
"미친."
외진곳의 상가건물이고 한밤중이니 사람이 없을 것 같긴하지만, 그래서야 안될 일이다!
저건 잠금장치 부신거랑 비교가 안되는 테러행위잖아.
나는 황급히 세찬을 업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이미 문 밖엔 눈동자들이 가득하다.
창문도 그렇고, 뒷문도 그렇다.
와, 진짜 코스믹 호러네.
이런걸 보고나면 유령의 집 같은건 눈에도 안 들어오겠어.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3층으로 올라갔다.
마찬가지였다.
이거 건물 전체가 다 이꼴이면 어쩌지?
나는 즉시 모든 층을 스킵하고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물론 잠겨있긴 했다만, 문고리를 당기니까 무리없이 그냥 열렸다.
경첩이랑 잠금장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건물이 무너지려고 하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여긴 괜찮네!"
아직 7층까지 감싸지는 못한 모양이다.
"릴,리스…. 포..기…해라…"
거대한 코스믹호러 눈깔 촉수 슬라임이 옥상에 머리를 들이민채 이젠 무수한 입을 만들어서 나에게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다. 꿈에 나올까봐 무섭네. 눈 입 촉수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다행히 이렇게 되고나서 꿈은 그 한번 빼고 안꾸고 있다는게 그나마 나은점이다.
그런데 원래 매달려있던 에이샤가 안 보인다.
그러고보니 이 괴물 어디에 에이샤가 매달려있는지 모르네.
이래서야 응고제를 주사할 수 있을리 없다.
혹시 나는 바보가 아닐까?
한순간 천재에서 바보로 전락한 나는 소리쳤다.
"에이샤! 나와라!"
"그리할 이유가 없지 않나."
정론이다!
이대로 그냥 잡아버리면 끝이잖아?
이래서야 겨우 생각한 혈액응고제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차라리 응고제가 한트럭 있으면 저 괴물에다가 주사하는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더니, 촉수가 움직임을 멈추고 꾸물텅거리며 의자를 하나 꺼냈다.
어디서 난건지….
그러고보니 저거 원래는 저택이었지, 참.
이건 저택의 가구중에 하나인 모양이다.
"앉지. 피차 더이상 힘빼고 싶지 않을테니."
"…."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나야 좋다.
하지만 이 의잔 뭔데? 고급스런 장식이 들어간 의자이긴 하다만, 저 더러운 괴물놈 속에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니까 앉기는 커녕 닿기도 싫어.
나는 의자를 발로 차서 괴물에게 맞췄다.
팍!
콰직!
차낸 의자가 괴물에게 날아가 박살났으나, 괴물은 역시 미동도 없다.
"드러워! 그냥 바닥에 앉고말지."
사실 앉을 생각도 없어.
말은 서서도 할 수 있고, 수틀리면 또 튀어야 할테니.
그런데 왜 갑자기 대화를 시도하는거지?
나는 생각을 시작했다.
아마 왕께 나를 바치라는 말을 했으니, 나는 아마 최소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뭐 죽여서 데려가도 된다면 좀더 과격한 수단을 쓰지 않았을까.
진작에 죽이려 들었겠지. 잡는게 아니라.
그리고 저 거대한 괴물이 움직이는데 사용되는 연료는 인간, 흡혈귀, 그런거다. 그런데 일부러 최대한 사람 없는 쪽으로 튀었고,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시간대도 시간대인지라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보충'은 없었다.
저런 괴물딱지가 연비가 좋을리가 없으니까, 슬슬 기력이 빠진거 아니려나?
그냥 추측이고, 여력을 얼마나 남겨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도 제상태가 아니고, 상대도 제상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대화는 누군가 먼저 얕보이면 끝이란 거지.
운이 좋다면 서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끌어낼리는 없으려나.
어떻게든 빈틈을 노리도록 하자.
잠시 지켜보던 에이샤의 괴물이 다시 수많은 입을 열었다.
말하는 입이 많으니까 메아리쳐서 들리는것만 같다.
"상당히 지쳐보이는데, 그냥 앉지. 도망칠 생각은 그만하고."
"싫어. 나는 그 눈깔 촉수 주댕이 앞에서 앉아있고 싶지가 않거든."
에이샤의 본체가 보이지 않는 이상, 사실상 공격은 불가능하다.
그럼 다시 도망쳐야하나?
여기 7층인데,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괜찮으려나?
… 나는 괜찮을것 같은데, 세찬한테 가는 충격량을 내가 잘 받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거의 빈사상태라서 내가 4층 계단을 올라갈 즈음에 팔에 힘이 풀렸었다.
숨은 쉬는걸 보니 죽은건 아니고 기절한것 같네.
"뭐, 그렇게 있어도 상관없어. 알아서 하라고."
"이제 말투는 괜찮은가?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이렇게 입을 털지?"
"제안하나 하지. 네가 포기한다면 사냥꾼은 놔주겠다."
"헹, 내가 왜 응할거라고 생각해? 바보냐?"
"애초에 릴리스, 왕께 몸을 바치는건 네가 원한 일이었잖아. 대체 왜 이러는건지 이해 할 수가 없군."
"나도 니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난 모른다니까? 그리고 내가 그런걸 원했을리가 없잖아."
대체 뭔짓을 하고 다닌거냐 릴리스.
니가 싼똥을 왜 내가 치우고 있어야해.
원래 릴리스가 뭐 어떤 흡혈귀였는지 모르겠다. 뭐, 출장 안마사같은 그런거였나? 왕족전용의?
"기억을 못하는것 같군, 그렇다면 설명해주지. 듣고 판단해라. 너는 흡혈귀들을 배신하고 오라클에 붙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네가 바라던것을 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지."
"내가 바라던것? 그게뭔데?"
"그것은 왕만이 알고계신다."
어쩌란거야.
"……제안해줘서 고마워, 다음 시간까지 알아보고 대답해줘. 지금은 갈테니."
"후후, 여기서 어디로 가겠다는거지? 설마 그 사냥꾼을 데리고 뛰어내리기라도 할텐가? 그런짓을 하면 사냥꾼은 반드시 죽을텐데?"
"걱정 고맙네. 하지만 더이상 할 얘기가 없어."
"그거 다행이군. 이쪽도 마찬가지야."
"뭐? 애초에 이야기를 제안한건 그쪽…."
------!
갑작스런 굉음이 들린 방향으로 나는 급히 고개를 꺾었다.
그러자 굉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를 경악케하기에 충분했다.
"미친, 아파트가…"
500미터정도 떨어진 거리의 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진것이다.
무너진 잔해에서 익숙한 부정형 괴물이 잔해 사이로 나타났다.
대화하는척 하면서 뒤로는 저런걸 하고 있었던건가?
아무리 밤이라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고해도, 집안에는 사람이 있을수밖에 없다.
몇명이나 있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미친, 미친, 미친년아! 무슨 짓거리야!"
"아. 연료가 부족해서 말이지. 미안하지만, 네건 없어."
"시발년이!"
역시 대화는 미끼였다.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는데, 저런 짓을 할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머저리지!
촉수가 쏘아졌고, 나는 당황해서 반응이 늦었다.
그 댓가로 양 발목이 촉수에 붙잡히고 말았다.
"끄히이익! 징그러!!"
으아! 소름이 돋아!
세찬을 업던 왼손을 빼서 바로 저항했지만, 곧바로 다른 촉수들이 뻗어져서 내 손을 묶었다
하나를 떼어내면 두개가 날아온다.
끝이 없잖아……!
"아아아아악! 히이읏!"
나는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소름끼치는 감각에 숨을 삼켰다.
왜냐하면 이제 촉수가 팔을 전부 휘감았으니까!
붕대 만드느라 소매를 찢어버려서 촉수의 촉감이 너무 노골적이야!
표면이 마치 사람 피부같아서 무수한 치한이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끔찍해!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촉수들은 아예 내 몸을 번쩍 들어올려셔 땅에서 떨어트려버렸다.
이제 저항할 수단이 없어!
팔다리를 마구 바둥거렸지만, 이미 들려버린 내 몸은 저 거대 괴물의 몸뚱이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벼운거야!
다른 촉수들이 세찬과 나를 떼어놓으려고 잡아당겼지만, 나는 세찬의 허벅지를 받치는 오른손에 힘을 주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등을 빼앗기면 절대안돼……!
그렇게 촉수랑 힘싸움을 하고있는데, 거머리같은 입이 달린 촉수가 꾸물텅거리며 다가오는게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잠깐, 뭐, 뭘 하려고……! 으큭!"
상처를 막아둔 임시붕대가 찢겨나갔다.
왼손의 상처에서부터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먹지마! 흐아앗!"
먹힌다.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더욱 세게 발버둥쳤으나, 이미 온몸을 꼼꼼히 구속한 촉수는 내 피를 마시고 더욱 세게 조여오는것 같았다.
세찬을 내 등에서 떼어내려는 힘도 더욱 강해진다.
"그렇게 되었어도 역시 여왕인가, 100명의 인간이 여왕의 피 한모금보다 훨씬 못하다니……."
"이거, 놔!"
아등바등거려보지만 전혀 꿈쩍도 안한다.
나는 내 몸을 구속한 촉수다발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만 피 빨수 있는줄 알아?"
너만 흡혈귀냐, 나도 흡혈귀다!
그렇게 나는 팔을 움켜준 촉수를 깨물었다.
그런데, 피가 진짜 맛이 없었다. 흡혈귀가 되고나서 피가 맛이 없었던적이 없는데…?
이 맛은, 마치 구토를 먹는 것 같았다.
"우욱, 웨엑!"
"하하하! 타락한 흡혈귀의 피를 먹다니! 그렇게 피가 고픈가? 정말 미안하군, 이미 인간의 피는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거든. 뭣하면 그 너한테 업힌 사냥꾼의 피라도 마시지 그래? 당신이 미치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좆까! 나는 사람피 안빨아!"
사실 아까부터 세찬이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한다.
그치만 사람피는 안빨겠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세찬 피는 더 싫었다.
그럴것이, 애초에 남자사이에 '친구'란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 피부만 닿아도 온갖 오버에 지랄지랄을 하는 사이.
그런데 그런놈 피부에 입을 갖다댄다? 그게 어떤 부위든 존나 싫을수밖에 없다.
… 진짜, 만약에, 혹시나, 내 등에 업힌게 한세찬이 아니라 지혜나 다빈이같은 여자애들이었으면……. 아마 그런 거부감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뭐, 그럼 됐고. 잠깐 자고일어나면 다 끝나있을테니."
그렇게 찾던 에이샤의 본체가 드디어 보였지만, 이제와서 내가 할 수있는게 없었다.
그리고 곧 괴물의 몸체에서 이상한 가스가 뿜어져 내 얼굴에 쏘아진다.
"이, 이게, 뭐야아아으이익!"
뭐야, 갑자기 촉수에 이빨이라도 생겨난건가?
촉수와 닿은 부분이 마치 긁혀나가는듯이 아프다.
가기다 왼손은 무슨 그라인더에 갈려나가는 느낌이야!
"으그극……!"
여기서 아예 날 먹어치우려는건가?
억지로 눈을 떠서 내 몸을 보았지만, 피는 한방울도 나고있지 않았다.
뭐야, 몸이 갈려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어쩐지 몸에 힘도 들어가질 않는다.
"아차, 수면유도가스가 아니라 고통증폭 마비가스였군. 뭐, 어쨌든 발버둥은 멈췄으니 상관없으려나."
에이샤가 씨익 웃었다.
고통증폭이라고…?
"이윽,흐이! 미아내! 푸러,으윽! 풀어줘! 아아윽! 아,아파!"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해도 그녀가 내 몸을 풀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분명 고통은 어느정도 익숙해진줄 알았는데…….
온몸이 슬라이스 치즈처럼 껍질이 한겹한겹 얇게 잘려져나가는것 같아, 왼손의 고통은 이제 뭐랑 비교해야할지도 모르겠어, 너무 아파!
제발, 그만해.
멈춰줘.
차라리 이 촉수들이 내 목이라도 졸라서 기절시켰으면 좋겠다.
팔다리를 잘라버리면 어떨까, 이 고통이 줄어들 수 있을까?
아니면 차라리, 여기서 죽여달라고하면…….
"그만! 그만!"
서걱! 서걱!
갑자기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눈동자와 에이샤만 보이던 시야에 갑자기 푸른빛 밤하늘이 담긴다.
뭐야, 괴물의 몸에서 나온건가? 나는…
콰당!
"끄히이아악!"
바닥에 처박은 것 뿐이지만 고통에 너무 예민해진 지금은 거의 충격에 온몸이 조각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등을 짓누르는 세찬이 원망스럽다.
"오호! 드디어 찾았다! 한세찬! 그리고, 김석주…… 아닌가? 뭐, 일단은 상관 없겠지, 도와주러왔어!"
"누구야……?"
허리까지 내려묶은 검은 포니테일, 그리고 선홍빛 눈동자.
여유롭게 헤실거리는 표정이, 날카로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 길다란 봉을 붙잡고 내앞에 앉아있었다.
아니 눈동자를 돌려보니 그건 봉이 아니라 거대한 낫이었다.
비록 특이한 생김새였지만 그건 확실히 낫이 맞았다.
그녀는 대낫을 바닥에 찍어 지팡이삼아 몸을 일으켰다.
"질문은 다음에! 지금은 일을 해야지!"
뒤늦게 에이샤의 괴물이 반응했다.
입이 모두 사라지고, 그 공간마저 촉수로 채워 대낫을 든 여인에게 쏘아졌다.
"히히,하하핫!"
그녀가 미친듯이 웃으며 다시 낫을 휘두르자, 가을철 추수하듯 촉수가 떨어져나갔다.
결코 저 낫이 가볍지 않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휘두를 수 있는거지?
인간이 맞나?
하지만, 촉수는 베어짐과 동시에 또 다른 촉수를 만들어냈다.
그 끝이 없었다.
"으큭……!"
나도 얼른 힘을 내서 돕기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 맞다맞다. 이거 가져왔었는데."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얼핏보기엔 빨간색의 깡통처럼 보인다.
무한히 뻗어오는 촉수를 화려한 동작으로 모두 베어내며, 깡통의 윗부분에 달린 핀을 이빨로 뽑아내며 팔을 뒤로 젖히는 모습.
아, 수류탄인가.
언더쓰로로 던져진 깡통이 괴물의 몸에 박히자, 그것은 맹렬히 불타오르며 괴물의 피부를 빛과 열로 지져버렸다.
저거 수류탄이 아니라 소이탄이었어!
콰앙, 콰앙!
-끼이에에에!!
입이 많아서그런가, 비명도 수준급이군.
귀가 다 아플 지경이야.
괴물이 고통에 발버둥치며 건물을 때렸다.
음, 결국 세찬의 말대로다.
불태우는게 최고구나.
괴물에게 불을 붙인 그녀는 미친듯이 웃으며 또 뭔가를 꺼냈다.
이번엔 기름병인가?
"아!"
그러나, 그것은 던지기 전에 먼저 발화해버리고 말았다.
발화점이 상당히 낮은 기름인가, 싶었다.
화르륵!
"순서 틀렸다."
갑자기 팔에 불이 붙어버린 여자가 허망하게 자신의 팔을 내려보았다.
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그녀를 보고 중얼댔다.
"뭐, 뭐지?"
뭔가, 계획이 있는거겠지?
혹시 이번에도 내가 모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서, 금방 불이 꺼지는거 아닐까?
그런 생각은 불이 번져감과 동시에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 이걸 먼저 뿌리고, 했어야했나? 으아! 뜨거! 불이, 불이 안꺼져!"
"미친, 대체 뭐냐고! 오지마!!"
나는 그녀에게 벗어나려했지만 아직 몸을 제대로 움직일수가 없어서 그저 무력하게 몸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간다.
나랑 세찬이를 알고있는걸 보면 아군인 모양인데, 그 아군이 등장하고 몇분도 안돼서 자기몸에 불을 질러버리고있다니?
"끼아악! 으그, 그극, 너무 뜨거워!"
"뭐, 뭐야?!"
그녀는 온몸에 불이 붙어서 죽어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괴물에게 몸을 던져 넣는 행동은 실로 영웅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결국 나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자신의 실수로 죽어버린 것이지만…….
상황은 나를 혼란스럽게만 했지만, 그녀의 희생은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대체 뭐냐고…"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불타는 괴물을 허무하게 바라보다가 괴물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에이샤를 보고 말았다.
"끄흐윽…!"
또 누군가가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만들어준 기회를 허투루 만들 수 없었다.
이름모를 그녀는 비록 실수로 허무하게 갔지만, 그렇게 저 거대한 괴물을 처치해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아 저 괴물을 불러낸 사악한 흡혈귀를 처단할 의무가 있다.
마비가스로 움직이지 않던 몸뚱아리를 강제로 일으킨다.
내 등의 한세찬이 옆으로 쓰러져내리는게 느껴진다.
"에이샤아아!!"
나는 기합처럼 포효했다.
에이샤가 들었을까, 못 들었을까?
뭐, 상관없지.
아직까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서고 나니까 어느정도 마비가 옅어지는게 느껴진다.
나는 다시 피가 흐르는 왼손을…아니 왼손이 있던 곳을 부여잡았다.
혈액응고제는 하나뿐.
나한테쓰던가, 에이샤의 심장에 박던가. 둘중하나였다.
원래라면 이런상황에서 나는 내 왼손의 출혈을 막았겠지.
하지만 방금전의 대학살, 이름모를 그녀의 죽음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에이샤를 끝장내야만 했다.
그렇지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될것만 같아.
지금은 괴물도 없잖아, 분명히 육체능력으론 내가 압도했었다.
머리가 극심히 어지럽고, 토할것같이 울렁거리고, 이빨은 찌르는듯이 아프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신은 괜찮아.
아까 고통증폭으로 온 몸이 축축해졌지만, 노폐물을 빼서 그런가 몸도 조금 가볍다.
아니면 피를 많이 흘려서 진짜로 가벼워진 것일수도 있겠지.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콱!
예상대로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찌르르 하고 꽤나 깊은 충격이 느껴지지만, 고통증폭가스에 유린당하던때에 비하면, 참을만 해!
나는 얼마 남지않은 혈류를 돌려 강하게 땅을 박찼다.
팡!
도망치던 에이샤의 등에, 처음에 먹였던 것과 같은 어깨박치기를 꼬라박았다.
"끄헉!"
거의 순간이동 수준으로 들이받힌 에이샤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단순한 물리법칙에 따라 내 엄청난 운동에너지를 전달받은 그녀는 그대로 거의 총알처럼 쏘아져나간다.
그렇게 그녀가 도로위에 주차된 차에 박히고, 건물을 관통해 어두운 뒷골목의 쓰래기더미에 처박히는 순간,
"끄으윽, 어째서…. 아까 그 사냥꾼은 대체……?"
"나도 몰라, 그냥 이제 죽어라."
나는 발로 엎드려있는 그녀를 뒤집고 두 팔을 밟아 부쉈다.
그리고 그녀의 배를 깔고 앉아서 무릎으로 부러진 틈새를 짓이겨 막으며 회복을 억제했다.
아무리 미친 회복력을 갖고있어봤자, 회복에 장애물이 되는 물체를 치우고 회복하는건 불가능하겠지.
"끄헉!"
나는 혈액 응고제를 꺼내기위해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의수가 똑바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갑갑하네, 이제 손이 없는데.
다행히 약지와 엄지는 제대로 움직여주었기에, 어떻게 응고제를 꺼내들 수가 있었다.
이빨로 끄트머리를 뜯어내 주사바늘을 뽑고, 그녀의 심장을 찾기위해 왼손, 아니 손목 절단면을 심장부분에 갖다대고 심장박동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찾는다.
"여기구나."
"대체, 무슨짓을…!"
푸욱…!
응고제가 든 주사바늘이 심장을 찔렀다.
"끄흐으읍… 이, 이건…?"
끝이다.
더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내 몸이 피를 너무나도 갈구하고 있는것이 느껴진다.
"하아, 목말라. 인간의 피는 마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그렇다면 흡혈귀의 피는 마셔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