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에이샤 그래멀린
맞지 않았다.
어쩐지 계속해서 달달 떨리는 것이,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해친다는 생각 때문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는데 세찬이가 안 맞은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두 남녀의 시선이 내게 꽂히자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뭐하는거야? 꼬맹이는 어쩌고!"
"택시 태워 보냈어. 비번 알려줬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총을 꾹 쥐었다.
살짝 큰 감이 드는 권총 손잡이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땀때문에 미끌미끌하다.
생전 처음으로 총을 쥐어, 그것도 누군가를 향해 겨눠본것이 처음이라 긴장될 수밖에 없다.
좀더 가까이서 쏘면 맞으려나?
은탄이라니까 일단 맞추면 될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에이샤와 한세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에이샤는 굳어져있던 표정을 풀며 웃었다.
"하하, 이거 수고를 덜었네. 릴리스, 도망쳐서 나중에 다시 붙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굳이 가장 승률이 낮을때 싸워보겠다고?"
승률? 이녀석 착각을 하고있군.
나는 에이샤에게 권총을 겨누고 말했다.
"어이, 뭘 모르나본데! 애초에 나는 한세찬 구하러온거거든. 승률은 어찌됐든, 이새끼 구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것 아냐?"
"허."
"네 말대로, 나중에 제대로 싸워주지! 이건 구출작전이니까!"
사실 작전따윈 없지만.
그리고 총알은 7발중에 4발을 쐈으니까 3발, 그 안에 승부를 봐야한다.
3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고 하던데, 그럼 완전히 좋다는 얘기겠지?
아까는 4발, 불길한 숫자라서 맞추지 못한걸지도 몰라.
"세찬아, 움직일 수 있겠냐?"
"…. 그래."
에이샤가 군청색의 눈동자로 나를 주시했다.
나 역시 그것을 마주 노려보며 총을 그녀에게 겨눴다.
아무리 내가 총을 못쏜다고해도 지금은 불과 5m도 안되는 거리, 이번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장난감으로 날 상대하겠다니, 맞추지도 못하잖나?"
아니, 못 맞추긴 했지만!
지금 다시쏘면 맞춘다니까?
좀 무서워해봐.
하지만 자신이 없는건 정답이었기에, 세찬에게 슬쩍 물었다.
"이거 탄창 더 없냐?"
"그건 가방에. 지금은, 저기 깔렸지만."
"……."
세찬이 턱으로 가리킨 곳은 세찬이 탈출용 로프를 고정했던 못이 박혀있던 장소……. 였었다.
지금은 콘트리트 잔해에 묻혀 돌무덤이 되었지만.
"음……. 괜찮아. 맞추면 되지."
절대 빗맞추면 안된다.
근데 어떻게?
"맞춘다고? 릴리스, 아무리 네가 대단한 흡혈귀였다고 해도, 지금은 절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어느틈에……!
갑자기 눈앞에 에이샤가 튀어나왔다.
나는 급하게 x자로 팔을 교차해 가드를 했지만,
그녀의 올려치기에 가드가 간단히 풀려버렸다.
만세하는 자세가되어 완전히 노출된 복부로 에이샤는 체중을 실을 발차기를 박아넣었다.
"쿠윽!"
나는 한참을 날아가서 바닥을 굴렀다.
검은 트레이닝복이 돌가루가 묻어 회색이 되었고, 가드한 팔을 쳐낸게 단순한 어퍼컷이 아니었는지 소매도 찢어져서 너덜거렸다.
비싼 옷을 입고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일부러 인터넷구매한 체육복으로 입었는데.
하지만 고통은 참을만 해.
은못으로 관통 당한것보다는 확실히.
"겨우 이정도냐? 아프지도 않구만!"
나는 오른손에 총을 잡아쥐고 일어났다.
총알만 좀 충분했으면 마구 쏴볼텐데, 어쩔 수 없지.
에이샤가 다시 땅을 박차서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내려찍기, 팔찌를 벗지않더라도 반사신경은 인간이미 인간을 초월한 몸이다.
보이는대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회피하고 오른손을 움직여 총구를 에이샤의 복부에 꽂아넣는다.
탁!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녀가 총을 아래로 쳐내서 총구가 바닥을 향했다.
나는 놀라서 방아쇠를 당길뻔 했지만, 오른손이 의수인 탓에 반응이 느려 총알을 아꼈다.
나는 곧장 왼손으로 에이샤가 총을 쳐낸 손을 붙잡아 체중을 실어 당겼다.
아무리 흡혈귀라고해도, 그 몸의 무게가 인간인 한에는 겨우 50kg남짓한 무게를 더한 관성력만으로도 균형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원리는 그렇다쳐도 어떻게 한건지는 도대체 모르겠다.
그냥, 넘어트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몸이 움직였을 뿐.
잠시 균형을 잃은 에이샤에게 재빨리 오른손의 총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엔 맞는다!
탕!
"큭……!"
머리를 노렸는데… 총알은 어깨에 박혔다.
나 진짜 조준실력 형편없어. 아니면, 에이샤가 피한건가?
중요한건 그래도 이번엔 맞추긴 했다는 사실이랄까.
"크윽, 이렇게돼도 역시 릴리스라는건가? 진심으로 상대해줘야 겠는걸."
"아니야. 하던대로 해줘도 되는데."
진짜 머리에 박았으면 좋았을걸. 이제 두발밖에 안 남았다.
다음부턴 진짜로 확실히 맞춰야해.
에이샤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몇걸음 뛰어 거리를 벌렸다.
나도 한세찬의 옆으로 달려가 다시 사격자세를 잡았고.
물론 이대로 쏠 생각은 없지만, 이러면 그래도 위협이 되지 않을까……?
그런 나를 보던 에이샤가 씹어뱉듯 말했다.
"이거 꽤 귀찮은 탄이군. 파편때문에 회복을 못하잖아."
오오, 그런 기능이? 몰랐어.
쟤한테 안좋은거면 나한텐 좋은거잖아?
"그럼 이제 우리가 유리……."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어깨에 손톱을 집어넣어서 살을 뭉텅이로 뜯어내더니,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했다.
뭐야저거, 액체괴물이냐?
나는 사격자세 그대로 세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나도 할수 있을까?"
"아니. 저건 가문의 고유능력이다. 그 손 재생 못한거 보면 넌 못하니까 몸좀 사려."
아깝다는 생각을 제쳐두고, 나는 다시 총을 똑바로 파지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저런 놈을 겨우 총알 두발로 어떻게 잡아.
두발 다 머리에 쏴버리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안될것같은데…….
"……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준비해라."
내 불안을 들은 세찬이 다시 전투자세를 잡는다.
그런 너덜너덜한 몸상태로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자 완전히 회복한 에이샤도 총에 맞았던 어깨를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벌써 회복한건가?
나는 세찬에게 말했다.
"아, 알겠어."
팡!
그건 세찬의 다리에서 나는 소리다.
소리에 걸맞게 엄청난 돌진 속도!
하지만 그렇게 내딛었던 오른 다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에이샤는 돌진하는 세찬을 피해 몸을 틀었지만,
우득, 퍽!
하지만 세찬도 급격히 허리를 꺾어서 아직 멀쩡했던 왼다리를 휘둘러 옆구리에 꽂는다.
이제 세찬의 두 다리가 전부 부러졌다.
아니, 이미 부러져있던게 또 부러졌다고 해야하나.
반면에 에이샤는 약간 주춤했을뿐, 큰 타격이 없어 보였다.
한세찬은 그 찰나에 왼손을 휘둘러 그를 잡으려던 에이샤의 오른손을 긋고 팔에 두 다리를 걸어 암바를 걸어 팔을 뒤로 꺾었다.
팍!
그리고 노출된 등에 왼손의 못을 박아넣었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했고, 나는 그게 세찬이 어떻게든 한다던 기회임을 직감했다.
"끄흑!"
"지금! 와서 쏴!"
나는 신호가 내려지기도 전에 달려가서 움직이지 않는 에이샤의 머리통에 정확히 총구를 가져다 댔다.
이렇게하면 절대 빗나가지 않겠지!
탕! ㅌ..
두발을 다 머리에 박으려했지만 에이샤가 한발을 쏜 시점에서 총을 붙잡았다.
"끄으… 고정…마법식… 성가셔….."
머리에 총을 맞고도 살아있다고?
이거 절대적으로 화력이 부족한게…….
나는 기겁해서 잡힌 총을 온힘을 다해 뽑아냈다.
아니, 그냥 놓아준건가?
그녀는 총을 맞았던 부위에 손을 집어넣고 헤집어서 또 뼛조각과 살점, 뇌조각들을 뽑아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리의 총상마저 치료하고말았다.
"우웩! 징그러워!"
내가 기겁을 하던말던, 에이샤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아,아아, 우으아,…끄, 으음. 킇큿. ...아아. 좋아. 이제 괜찮군. 뇌세포는 재생하기 꽤나 까다롭다고. 부디 자제해주길 바라네. "
그렇게 말한 에이샤가 왼손으로 오른손에 탄 세찬을 벗겨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나무에 매달린 매미 허물을 뜯어내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다.
세찬은 이미 기력을 다했으므로,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떨어진 세찬은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제발 죽은건 아니길…….
그녀는 뒤로 꺾였던 오른팔을 다시 앞으로 꺾고 몇번 팔을 굽혔다 펴며 자신을 점검하고 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는 아득해졌다.
이제 어쩌지? 남은 총알은 단 한발.
기회를 만들어준 한세찬은 이제 더이상 움직일 수 없다.
게다가 정확히 미간에 박은 총알마저 회복하지 않았는가.
이제, 방법은 없나?
생각해야한다.
이 한발로 가장 큰 리턴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머리에박는건 안된다.
두발이면 몰라도, 이제 한발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박아넣더라도 치명상은 못된다는 사실이 걸린다.
심장?
글쎄, 내가 혼자서 노리기에는 너무 어렵다.
세찬이가 도와준다면 몰라도, 지금은 나혼자 노릴수가 없어.
그외의 다른 신체부위는 전부 의미가 없다.
그래, 애초부터 에이샤. 저 여자한테 총알을 쏜다는 것 자체가 오답이 아닐까?
그래, 이 한발은…….
"릴리스, 나도 숫자는 셀 줄 알고있어요. 그 총은 7발밖에 들어있지 않았지? 내 사제실 창문의 결계를 부수는데 최소 3발, 그리고 나한테 3발을 낭비했으니, 1발밖에 남지 않았네. 한발정도로는 나를 절대 어떻게 하지 못해. 나도 고통따위 느끼기 싫으니, 얌전히 총을 내려놓는게 어떤가? 그리한다면 나도 자비를 베풀어 고통없이 모시도록하겠소.
."
"하, 혓바닥이 기네. 말투도 오락가락하고!"
나는 에이샤에게 총을 다시 겨눴다.
내 모습을 본 그녀는 씨익 웃으며 대답한다.
"후후, 소용없다니까."
"총 맞으면 많이 아픈가? "
"그야 그렇지. 그러니 그건 내려놓고 얌전히…."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에이샤를 향해서?
아니.
탕-!
콰작!
나의 왼쪽 팔목을 날려버렸다.
"끄흑!"
존…나 아프네…!
순간 기절할 뻔 했는데, 고통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팔목이 너덜너덜해졌어…….
하지만 그것은 팔찌도 마찬가지.
더이상 내 팔목에 붙어있을 수 없는 팔찌가 힘을 잃고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몸에 활력이 드는것이 느껴진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걸!
역시 퍼즐은 한발짝 떨어져서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니까!
"결단력이 놀랍군, 하지만 그런 출혈량이면 너도 곧 쓰러질것 같네만."
"머리에 총맞더니 말투가 통일이 안되냐? 너따위는 임마, 내가 진심펀치 한번 날리면 떡실신이야."
"내 말투를 지적하기 전에 당신의 언행부터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에이샤는 이번엔 마치 소녀처럼 웃었다.
미쳐버리겠네.
저 운동선수같은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걸.
진짜 총맞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자기 피로 빨갛게 물들어버린 금발과 얼굴때문에 그 미소는 더욱 기괴했다.
"끄윽! 시끄러워!"
피가 나는 왼 팔목을 오른손으로 눌러 지혈하며 발을 박차자,
콰앙!
폭발적인 스피드가 몸에 휘감긴다.
왼손의 격통과 함께 몸에 느껴지는 전능감!
이거,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것 같은데!
"흡?"
그리고 그 추진력은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요 몇주 혈류 훈련과 인식저해같은 특수능력만 배우느라 물리저해를 벗지 못해서 힘조절이 전혀 안돼.
콰앙!
"크헉!"
폭발하듯 쏘아져나간 내 몸은 별다른 동작 없이 그저 엄청난 속도로 에이샤의 몸에 파고들었을 뿐이었지만, 그 물리량은 겨우 권총탄 한발에 비할바가 못 되었다.
180cm의 거구가 복부에 꽃힌 나의 어깨 박치기에 허리를 접고 날아가 저택의 잔해에 처박히게 되었으니까.
"케흑, 쿨럭.콜록… 아, 갈비뼈가 나갔네. 꽤 강한 공격이었어."
하지만 에이샤는 금방 회복하고 일어서고 만다.
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회복할 수 있는거야?
"뭐, 아직 살아있어?"
그렇다면 죽을때까지 짓밟아줄 뿐.
나는 곧바로 다시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주변환경이 뒤로 지나가고, 에이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가 회피하기엔 이미 반응이 늦는다.
왼팔의 팔목은 부서졌지만, 그래도 아직 혈관은 존재한다.
혈류를 이동시키고 감각을 떠올린다.
유디라를 죽일뻔했던 그 감각을.
한번밖에 해보지 않은 공격임에도 나는 어렵지않게 그 감각을 다시 이끌어내며,
투쾅!
그것을 그대로 펀칭머신을 후리는 듯이 때려박는다.
콰앙!!
잔해의 폭발.
불붙은 살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에이샤는 두 팔이 부러져 잔해에 처박힌다.
"크헉!"
하지만 원래 이정도가 아니었는데.
손목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위력이 매우 약해진 모양이다.
그리고 출혈도 너무 심하고.
피의 소모가 너무나 극심하잖아.
힘이 없고, 피곤한데다 어금니가 간질거려.
나는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아서 붙잡은 왼손목을 다시 꾸욱 눌렀다.
고통이 느껴지면 정신을 차릴 수 있으니까.
"끄하악!"
정신을 차린건 좋은데, 너무 세게 쥔거같다.
너무 아파…!
"하아, 그래도 강하네. 역시 혼자선 어쩔수가 없구나."
에이샤는 다시 잔해에서 일어났다.
아니, 자세히보니 에이샤가 일어난게 아니라 잔해가 일어나고있었다.
그녀는 그냥 잔해에 그대로 누워있었으니까.
살점이 꾸물텅거리면서 무너진 살점건물이 액체마냥 이어져 몸을 일으켰다.
"씨발, 이건 또 뭐야?"
이거 무슨 전대물인가?
파워레인저도 아니고, 질것 같으니까 거대화 하는거냐.
근데, 나는 거대로봇호출 버튼같은거 없다고……!
거대한 살덩이의 피부에 수많은 선이 생겨나더니, 일제히 벌려져 눈동자가 된다.
크기도 제각각에,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어있는 눈동자들이 나를 일제히 노려본다.
나를 발견한 '그것'은 수많은 촉수를 만들어 꾸물텅댔다.
섬뜩.
"어허, 이건 좀."
아무리 그래도 촉수물은 좀 아니지!
나는 촉수물은 찾아도 안봤다.
내취향은 아주 건전하니까.
슈욱!
만들어진 촉수는 바로 내게 쏘아진다.
"윽!"
생각보다 빠른 촉수의 속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 바닥을 굴러 피해냈다.
촉수는 또 어떻게 상대해야되냐?
나는 내 발목을 노리는 촉수를 밟아 끊어냈다.
팔을 노리는 촉수는 수도로 쳐냈다.
머리로 뻗어지는 촉수는 피해냈다.
"징그러워! 소름끼쳐!"
나는 뒤로 세걸음 뛰었다.
미끌거리고 꿀렁이는 감촉이 아주 혐오 그 자체다.
게다가 묘하게 사람 피부같은게 더 극혐이야.
저런게 도심에 있는데 왜 아무도 모르는거야?
이 한밤중에 건물 폭파도 하고 그랬는데, 왜 119 소방차 하나가 안오는거지?
우리나라의 신고정신이 이렇게 메말라있었나?
"아, 뭐야. 내 눈이 잘못됐나?"
멀리 떨어진 한세찬이 바닥에 누워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하긴, 눈뜨자마자 저런게 보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것 같다.
"어! 깨어났구나! 저런건 어떻게 상대해야하냐?"
"아, 하. 제기랄…."
한세찬이 나의 왼쪽 팔목과, 누더기가 된 정장을 입은채 괴물에 그녀가 매달려있는 상황, 그리고 그 커다란 촉수괴물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래, 뭔 상황인지 알겠다. 마지막 한발을 팔찌에 쐈군."
"정말 훌륭한 관찰력과 추리력이야."
역시 사냥꾼이라고 해야되나?
너무 대단해서 박수라도 쳐주고싶지만, 그럴 여력도, 필요도 없어서 그냥 고갤 끄덕여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저건, 저택 그 자체인가? 이런 괴물도 잡아본적은 있지만……."
"어떻게 했는데?"
"그땐 백린탄으로 불태웠어. 지금은 쓸 수 없는 방법이군."
그래, 생물이면 다 불에 약하지.
퍽 좋은 방법이지만 내겐 백린탄은 커녕, 휘발유나 라이터조차 없다.
뭐, 경찰에라도 전화해? 미친 30미터짜리 괴물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그러고보니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
마치 크툴루신화에서 기어나온듯한 미친 괴물이 꾸물텅거리면서 날뛰는데 말이야.
내가 신고하지 않았더라도 경찰사이렌정도는 울려줘야하는거 아닐까.
폭탄도 막 터졌는데?
"왜 이럴때 경찰이 안오는거야."
"….저거 재료가 뭔지 기억해봐, 멍청아."
아, 타락한 흡혈귀.
그러면 인식저해가 저 거대한 부정형 괴물의 전체에 코팅되어 있는거나 마찬가지라는건가?
보이지않는 대량살상병기라니. 사냥꾼들은 사람들 몰래 이런거랑 싸우고 있었단 말인가.
난 불태우는거 못해.
정신간섭? 쓸줄몰라.
그냥 죽을때까지 패는거? 그전에 내 체력이 바닥날 것 같은데.
이건 턴제게임으로 치면 공격, 스킬, 아이템 세가지가 전부 막힌 상황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세찬아, 기억하냐? 이건 구출작전이라고 했던거."
"아. 설마…."
나는 세찬을 등에 업고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음, 체격 차이가 너무 커서 제대로 업기가 힘들긴 하네.
하지만 전혀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물리저해가 없는 지금의 나는 달리기 만으로 충분히 빠르니까, 이게 가장 생존률이 높다고.
"그냥 최대한 사람 없는쪽으로 달리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