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지옥
몇몇 서류를 가방에 챙기고, 세찬은 또 폭탄을 꺼내서 중앙의 고급스런 목재 테이블에 올리고 말했다.
저 가방에 대체 폭탄이 몇개나 들어있는걸까.
폭탄설치가 끝나는걸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자."
그렇지만 나는 문득 이상한점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여긴 계단같은게 없었으니까.
불나면 어쩌려고 비상구를 안 만들지?
심지어 엘리베이터에도 층수는 적혀있지 않고, 내려가는 버튼 하나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그럼 여기가 최상층은 맞는것 같은데…
"옥상 출입문이 없는데 어떻게하지."
내 물음에 세찬은 잠깐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내가 아까 준 총 잘 간수하고 있냐?"
"응."
나는 바지춤에 끼워둔 총을 꺼냈다.
이걸로 뭘하려고?
총을 세찬이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따뜻하게 뎁혀놨어."
"…미친놈. 들고 따라와."
세찬이 질색하며 만지기 싫다는 듯 양손을 들며 말한다.
이렇게 된 후 장점중 하나는 세찬을 놀려먹기 좋아졌다는 점도 있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어도 유머를 잃으면 안되지.
맨날 얘랑 시덥잖은 말이나 해댔다보니, 이런 상황에도 도통 진지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얘가 막 나를 죽이려고 할때도 솔직히 나는 진지해질 생각을 했던적이 없었던거 같다.
나를 증명해야할때 하필이면 야동취향은 대체 왜 나왔던건지.
흠.
세찬이 그 집무실인지 호텔 VIP실인지 모를 방의 거대한 창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창문도 훌륭한 탈출구지."
"응?"
"자,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를 쏴. 취약점이야."
세찬은 세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고,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챙그랑!
생각보다 큰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지만, 이명이 가라앉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복한건가.
어우, 권총이어도 소리가 꽤 크구나.
삼각형으로 깨져나간 창문의 너머는, 내가 들어올때 봤던 폐건물 너머였다.
드디어 탈출하는건가! 집에가면 일단 씻고 아이스크림부터 조질것이다.
애는 뭐, 악마사냥꾼이 데려오라고 했댔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벌써 집에 도착했을때 할일 목록을 짜고 있는데, 내려다보니 여긴 높이가 꽤 된다.
인간이든 흡혈귀든 날개 없는건 똑같다.
뛰어내리면 죽든가 치명상이겠지.
세찬이가 가방에서
로프를 꺼내 자신의 대형 못에 묶고는 창문 근처에 박아넣고 로프를 내렸다.
저걸 잡고 내려가자는 건가?
"이거… 안전한거 맞지?"
"다른 방법이 있냐?"
없긴하다.
그런데 무슨 로프도 챙기고 다닌대.
상비용으로 챙겨다니기엔 좀 길잖아?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띵! 하는 소리가 난다.
문 너머로 보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중이다.
"야! 빨리!"
한세찬은 이미 애랑 로프를 붙잡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어느새? 엄청 빠르네!
나도 급하게 오른손으로 로프를 붙잡고 뛰어내렸다.
그러자 뒤이어 들려오는 외침.
"저기다! 결계를 뚫었어!"
"제기랄, 얼른 저 줄 붙잡아!"
나는 사실상 떨어진다 싶은 속도로 줄을잡고 내려갔다.
바닥이 가까워지는건 한순간이었고, 손에 힘을주니 엄청난 속도탓에 마찬가지로 엄청난 마찰열이 느껴져야 했을테지만… 오른손이 의수라서 괜찮았다.
이런건 도움이 되네.
"건물에서 떨어져! 빨리!"
이미 아래에서 폭발스위치를 치켜든 세찬이 외쳤다.
난 땅에 발이 닿자마자
충격이 전달되기 전에 건물 반대로 굴렀다.
내가 이런 움직임을 할 수 있었다니?
낙법을 내가 배운적이 있었던가?
콰쾅, 콰광쾅!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지만, 겉보기에는 건물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분리된 차원에서 터진 폭탄은 진짜 차원인 이곳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나?
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길지가 않았다.
쩌억-!
갑자기 공간이 터져 불타오르잖아?
결계가 파괴되며 깨어지는 공간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르고, 건물과 연결되어있던 밧줄도 불에 타서 끊어지고 있다.
결계가 완전히 파괴되며 나타난 건물의 외형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나는 그냥 저택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무슨 고기로 만든 탑처럼 징그러운 살점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폭발로 여기저기 터져나가 빨간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점이 더욱 그로테스크하다.
"하, 이 둥지의 재료는 타락한 흡혈귀였군. 그렇게 시체를 많이 쌓아둔 것도 이해가 돼. 인간은 이 은신처의 유지비용으로 사용된거다."
사람을 연료로 쓰는 거대한 생체건물이라.
대체 이런걸 먹이려면 그동안 대체 몇명의 목숨이 필요했을까.
아무리 내가 흡혈귀라고해도 그런 사실을 듣고도 기분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기분이 더러워졌으니까.
끔찍하게 죽은 시체를 볼때는 그냥 시체라고 생각해서 괜찮았던 모양.
그들이 죽어야했던 이유가 겨우 집세때문이라니.
"왜 저딴걸로 집을 쳐 짓는거야? 미친건가?"
"튼튼하고, 자가재생하지. 그리고 만들어지는 속도도 빨라."
"무슨 신소재도 아니고…."
세찬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거, 고문실이 있을때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걸 악마사냥꾼은 이걸 알고있었나?"
"그렇겠지. 그래서 너를 언급했던거군."
"나를?"
나라고해봤자 여기서 뭘 할 수는 없다고.
내가 할줄 아는건 다른 흡혈귀도 할 줄 알고, 나만 할줄 아는건 나도 할줄 모르며, 물리력은 손에 들고있는 7발짜리, 아니 이제 4발이 된 권총이 끝이잖아.
"타락한 흡혈귀는 정신오염에 취약하지. 이미 거의 정신이 나갔으니까. 아마 릴리스인 너라면 정신간섭으로 별다른 힘 안들이고 건물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지도."
"와! 대단해. 그런데 나 정신간섭? 그거 할줄 모르는데."
"맞아. 악마사냥꾼이 그걸 몰랐군."
좆된거잖어.
나는 땀을 흘리며 눈을 굴렸다.
"그, 뭐시냐. 그냥 튀자. 나 바이크 저기 대놨는데…."
쾅!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바위가 날아와 바이크를 짓뭉갰다.
건물 근처에 있던 바이크는 이제 형체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도저히 세찬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질 않는걸.
나는 억지로 세찬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바위가 날아왔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타는 살점으로 이루어진 벽의 파괴된 틈새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이런, 이런. 결국 탈출했나? 사냥꾼. 검은사신의 제자이자, 목수. 그리고 그옆엔……. 내가 오랜 세월 공들인 제물이로군."
거리가 꽤 멀었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세찬아, 쟤가 너 아는것같다. 꼬맹이도 자기가 아끼는 제물이래. 바위도 쟤가 던졌을거야. 분명해."
나는 바로 한세찬에게 고자ㅈ…아니 브리핑을 해줬다.
그리고 바이크에 대한 과실을 그녀석에게 떠넘겼다.
급하게 떠올린거지만 신빙성이 있다.
저녀석 꽤 쎄보이고, 흡혈귀면 바위정도야 들어서 던질수도 있겠지.
결코 내가 건물 가까이에 주차해둬서 폭발 잔해에 깔린게 아닐걸?
아닐거다.
"아, 아아. 그래. 저녀석이 날 안다고?"
녀석이 빠져나간 영혼을 겨우 붙잡는듯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네가 우리 아빠제자인것도 아는데? 완전 나쁜놈인가봐. 스토커야 스토커."
"좀 조용히해. 필요한 말만 하라고."
"넵."
세찬이가 존나 화났다.
나도 좀 당황스럽고 미안해서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게 자극하는 꼴이 된거같다.
얼굴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에서 마치 얼음같은 한기가 느껴지는게 백퍼센트 화를 삼키는 중이다.
어째든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보아하니, 혼자다.
다른 사람들은 건물에 깔려 죽었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며 점차 형상이 또렷하게 보인다.
검은 정장에 붉은 목폴라티를 입은 짧은 금발의 여성이었다.
흡혈귀들은 죄다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걸까?
한여름에 폴라티를 입는다니?
그러고보니 에이샤 그래멀린? 여자이름이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저 여자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알 수가 있었다. 유디라때는 그녀밖에 흡혈귀를 보지 못했으니까 몰랐는데, 이렇게 다른 흡혈귀를 마주하니까 알것 같다.
이 여자는 흡혈귀고 꽤나 강하다.
점차 형상이 뚜렷해지고, 불타는 건물이 광원이 되어 그녀를 밝히자, 제대로된 얼굴이 보인다.
깔끔한 단발로 잘라낸 보이쉬한 머리스타일은 전투에 적합해보였다.
그리고 시원해보이기도 하고.
가슴은 별로 없지만 키가 180cm는 되어보인다.
큰 키는 부럽다. 나 남자일때보다 크잖아.
그리고 어깨가... 당연히 한세찬의 떡대보다야 못하지만.
짙은 군청색 눈동자, 내가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는건, 그녀도 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는 뜻이다.
"릴리스, 당신이군. 이제와서 우리를 배신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무사할줄 알았어?"
"쟤, 뭐라는거야?"
아직 세찬에게는 들리지 않는 거리인가, 녀석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로 짜증난 목소리로 자기 할말만 할 뿐이다.
"우리들의 왕께서 노하셨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와서 왕께 몸을 바쳐."
"왕?"
"모르는척 하기는, 백치가 되었다더니 정말인가? 허접한 인간 사냥꾼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질 못하더니."
한세찬이 나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내 종아리에 박았던 그 두껍고 길다란, 못이라고쓰고 말뚝이라고 읽는 그것을 마치 단검처럼 쥐고 있었다.
"너는 꼬마나 데리고 멀리 가있어."
"이런, 사냥꾼이 릴리스의 편을 들다니. 혹시 이름이라도 잡혀있는거야?"
그녀가 빈정거렸다.
물론 내가 한세찬의 이름을 알고 있는건 맞는데, 딱히 그걸로 뭘 할줄은 모른다니까.
나는 세찬의 뒤에서 벌벌떨고있는 꼬마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말하기를 '공들인 제물'이라고 했지.
어디다 쓸 제물이라 그렇게 공들인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째든 그녀에게 중요한거라면 우리가 데리고있는게 맞겠지.
"괜찮니 꼬마야?"
"ㄴ,네, 누나. 전 고,괜자찮아요."
"…전혀 안괜찮아보이는데."
꼬마는 거의 기절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까 폭발소리에 격하게 반응하더니, 큰 소리에 약한걸까?
아무튼 괜찮다니까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꼬마를 데리고 뒤로 조금씩 빠졌다.
"너로군. 그때 거지같은 상황을 만든 당사자가."
"음? 거지같은 상황이라니? 무슨일이 있었나?"
그녀는 샐쭉 웃었다.
한세찬은 내가 모르는 사냥꾼에게 공격받아서 손목이 잘린걸 그렇게 마음에 담아뒀던걸까?
내 손은 재생될텐데, 그래도 미안한 감정은 있었나 보네.
"네가 에이샤 그래멀린인가?"
"이런, 목수가 나같은 것의 이름을 알고있는줄 몰랐군.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건가?"
"죽여야할 이유가 더 늘었을 뿐이지."
그녀가 에이샤 그래멀린.
세찬이 죽이려했고, 나에 대한걸, 아니 릴리스에 대한걸 알고있는 흡혈귀.
그리고 그 흡혈귀를 상대하는
한세찬은 만신창이.
누가봐도 이쪽에 승산이 없는데?
뭘 믿고 앞으로 나선건지 생각하고 있을때, 세찬이 외쳤다.
"꼬마 데리고가! 김석주, 여긴 내가 막는다!"
"뭐?"
"빨리 가라고, 5분정도밖에 못 움직여!"
온몸에 침을 박아넣으며 말한 30분이라는 시간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그럼 더 위험하잖아, 5분뒤엔 확실히 진다.
단순히 지기만 할까? 최소한 죽겠지.
"아하하핫! 5분? 겨우 그정도로 뭘 할수 있겠어? 아, 릴리스. 그를 너무 충직한 부하로 만들었는걸? 부러울 따름이군."
"5분이면 충분하지. 널 죽이는덴."
"그거 무섭군. 그렇다면 왜 릴리스를 도망치게 하는거지? 차라리 함께 싸우는편이 승률이 더 높지 않겠어?"
"……."
"그래, 차라리 함께 싸우면 되잖아!"
비록 공격력은 낮아졌어도 맷집은 변하지 않았다.
내 몸은 꽤나 끈질기잖아. 아마 왠만해선 죽지 않을테니…….
"너, 지금……. 죽을 각오가 있냐?"
"…."
죽을 각오라니, 그런게 되어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변하고나서 바로 죽으려고 했을지도.
살고싶어서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현재를 받아들이고 고민하며 발버둥치는 건데 죽을 각오가 되어있을리가 없지.
그래서 나는 세찬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가방을 챙겨 나왔을때부터 되어있었어. 그래서 너한테 오지 말라고 한거고."
세찬은 쓰게 웃었다.
그럴것 같더라.
어쩐지 되도않는 선글라스를 끼고있다 했어.
역시 그건 표정을 숨기기 위함이었나.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렇게까지….
"미안했다. 처음에, 병원에서 믿어주질 못해서."
…미안함때문에 목숨을 걸어줄 수 있는 친구라니, 내가 참 사람하나 잘 사귀었다.
"그러니, 가. 지금은."
나는 녀석의 각오를 받아들여 고개를 들었다.
"좋아. 한세찬, 믿는다."
"그래.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일반적인 동체시력으론 보이지도 않을 전투가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꼬마를 데리고 멀리 벗어났다.
세찬이가 말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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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진 듯 하자, 나는 꼬마의 손을 놓았다.
"누나?"
꼬마는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아마 내가 뭘 할건지 알것같은 모양이다.
나는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아빠카드와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자, 이거받고, 택시아저씨한테 여기 써져있는 데로 데려다 달라고 그래."
"택시요…?"
"아, 택시를 모르나? 그… 아, 저기 온다. 택시!"
운이 좋군, 이 밤중에 택시를 바로 잡다니.
술집골목으로 향한게 역시 정답이었다.
이런 밤중에 택시는 이런 곳에 많으니까.
"집 비밀번호는
3392야. 들어가서 기다리고있어."
나는 택시 뒷좌석 문을 열어서 꼬마를 태웠다.
그리고 나는 우리집의 주의사항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ㄴ…나도 금방 갈테니까, 아.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은 딱 한개만 먹어."
"네?"
"아 맞다. 집에 이상한 사람이 있을수도 있어. 빨간머리에, 무서워 보이는 사람인데 별로 무서운사람 아냐. 착해."
"아니, 릴리누나……."
"아저씨, 출발해주세요."
다급하게 말을 끊는 꼬마를 무시하고 나는 택시를 출발시켰다.
따지고보면 이거 사실 납치잖아?
그런데 택시기사 아저씨는 별다른 의심도 안했다.
내 외모랑 꼬마와의 분위기가 의심스럽지 않도록 한거겠지.
나는 빨리 세찬에게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누나! 꼭 돌아와요!"
꼬마가 창문을 열어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손을 흔들어서 배웅했다.
당연히 돌아가야지.
나는 죽을각오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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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손톱을 세운 손끝찌르기가 내질러진다.
손톱은 흡혈귀의 신체중에서 이빨 다음으로 튼튼한 무기이다.
필요할때는 칼날과도 같은 예리함을 자랑하는 그 무기는, 손끝에 달려있기 때문에 흘려내거나 회피하기가 굉장히 까다롭지만, 한세찬은 닳고닳은 흡혈귀사냥꾼이었다.
세찬은 찔러오는 손등에 오히려 못을 찔러넣는다.
에이샤는 예상한듯이 손을 돌려 못을 붙잡으려했다.
촤악!
하지만 한세찬이 빠르게 못을 회수하며 못날에 위치한 섬세한 작은 갈고리들이 톱날처럼 에이샤의 피부를 긁었다.
"큭, 익숙한가보네."
"직업이니까."
"나는 이게 삶이야."
에이샤도 사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른 베테랑이다.
특수공법을 이용한 은제 무기라도, 이런 생채기정도는 전투함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혈류를 집중해 생채기를 단숨에 치료했다.
그래멀린의 가문능력은 자기재생.
오라클의 사제가 되어서 가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각성한 그 능력은 가주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세찬의 눈빛에 흔들림이 순간 담겼으나, 곧바로 침착한 상태로 자신을 되돌린다.
"가주였나?"
"훗, 지금은 오라클의 사제일 뿐이지."
세찬은 자신이 이길 방법을 궁리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저 흡혈귀에겐 빈틈이 보이지않아.'
확실히 오라클의 사제자리를 도박으로 따낸건 아닌 모양인지, 타격과 잡기, 할퀴기로 매우 유연하게 변형되어서 대응하는것만으로도 까다롭다.
그러나 에이샤는 시간을 끌고있었다.
아무리 다 죽어가는 사냥꾼이래도, 이명을 가진 사냥꾼이다.
한번이라도 공격을 제대로 허용한다면, 에이샤라도 죽을 수도 있었기에.
이명이 있는 사냥꾼들은 모두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사냥꾼의 이명은 흡혈귀가 붙인다.
사냥당하는 입장인 흡혈귀들이, 자신들끼리 원활한 정보 공유를 위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목수' 한세찬.
그가 못을 무기로 삼는 이유는, '고정'의 마법식을 다루는 사냥꾼이기에 그렇다.
그의 마법식으로 갈무리된 은못에 적중당하면 마치 전신을 십자가에 못박은듯, 흡혈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일시적인 효과지만.
전투상황에서 그 일시적인 정지는 생명의 영원한 정지로 이어지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에 에이샤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5분만 끌어도 자신의 승리는 확실해지므로.
'멍청한 녀석. 상대한테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다니.'
물론 그것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5분이 아닐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무슨 상관이랴?
그는 점점 지칠 것이고, 결국은 패배한다.
제물을 잃은것은 출혈이 크지만, 여기서 목수를 제압해 마법식을 빼았는다면, 오히려 이득일수도 있다.
'백치가 된 릴리스는 나중에라도 천천히 옭아매면 돼.'
그녀는 사냥꾼에게 붙잡힌건지, 물리력저해 팔찌를 벗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팔찌는 스스로는 벗기가 매우 힘들지.'
전성기면 몰라도 지금의 릴리스는 너무나도 약해진 상태, 단 한명의 사냥꾼조차 압살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아마, 주변 도움이 없으면 벗지 못하겠지.
그것도 어느정도의 흡혈귀나 강한 사냥꾼이 아니라면 힘들것이고.
"싸우다가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별것 아니고. 그냥 앞으로의 일을 조금."
"여기서 뒈질텐데, 머리아프게 그런 생각을 해서 뭐하게?"
"훗, 허세는. 목수. 어차피 내가 가만히 있어도 너는 진다. 이제보니 골절로는 안되겠어. 이번에는 팔다리를 아예 뽑아버려야겠네."
"저런, 죽이지 않나? 이거 영광이군."
숨을 고른 세찬이 쏘아져나갔다.
슬슬 신체가 비명을 질러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미뤄둔 고통은 찾아왔을때 한방에 쓰나미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고해도, 고통을 참으며 전투를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심지어 전투중에 30분동안 미뤄둔 고통을 한번에 느껴야 한다면….
마약성 진통제 탓에, 운동능력도 상당히 저하된 상태다.
하지만 그 모든걸 무시하고 세찬이 몸을 움직였다.
한대라도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에이샤는 제대로된 공격은 딱히 하지 않았다.
그저 얕고, 힘을 싣지도않는 가벼운 공격만을 행하고, 계속해서 전투상황을 유도했다.
캉, 촤악!
배로 찔러들어오는 주먹을 왼손으로 쳐낸 세찬이 물 흐르듯 오른손을 쳐올려 에이샤의 가슴께를 베었다.
에이샤의 목을 감싸던 폴라티가 찢어지며, 목에 몇 바늘일지도 모를 수술자국이 늘어선게 보인다.
목을 가리는 날씨에 맞지 않는 복장은, 저 상처를 가리기위해서 입은것인가?
하지만 세찬은 그런걸 신경쓸 틈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움직일뿐.
진작 5분은 지났다.
슬슬 스스로의 상태를 고정했던 마법식들이 바래고, 스멀스멀 고통이 번진다.
연약한 나무의자로 만든 부목따위는 진작에 터져나갔다.
아마 공격이든 수비든, 할 수 있는 횟수는 많아야 세번.
"끝났네. 팔다리가 멀쩡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어."
세찬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은 늘어트린채 왼손에 못을 역수로 쥐고 자세를 잡았다.
다른 사냥꾼들이 잠입이 제대로 이뤄지기만 했었다면.
또는 꼬마가 어떤 방식으로 실버에게서 도망쳐 그를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다면.
아니면,
그저 내가 다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이미 지난일을 가정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탕!
총소리?
에이샤는 당황했지만, 총알은 애초에 그녀를 향해 제대로 날아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총소리가 가져온 시선집중효과는 커서, 그녀도 한세찬도 총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경악했다.
"한세찬! 도와주러왔다!"
"아니,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