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지옥 (17/101)



〈 17화 〉지옥

카페에서 딸기밀크쉐이크를  빨고있으니까 진정이 되는것 같다.
이런 세상에도 즐길거리는 있는것이었다.
어쨌든 사람은 입안에 당분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질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생리라는게 원래  아프고, 불쾌한 거라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은 것 같고.
불쾌함도 당혹감과 억울함을 빼면 그럭저럭 버틸만 할  같다.
기저귀를 찬 것 같은 느낌은… 그냥 익숙해져야 하려나.

지금은 이 새콤달콤한 맛에 집중하자.
으음, 좋아. 맛있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아빠카드다.
내 통장은 이미 텅 비어버렸으니까.
그나마 하던 알바도 더이상 할 수 없을거고.
그에 비해서 요새 돈을 너무 많이 쓰는것 같다.

충동구매도 많이하고, 생필품 구매도 많다.
내가 버는 돈은 한푼도 없는데, 쓰는건 진짜 물쓰듯이 쓰고 있으니까 죄책감이 좀 든다.


사냥꾼들은 대체 돈을 어떻게 벌길래 생활이 유지되는걸까.
궁금하면 물어봐야겠지, 나는 컵을 내려놓고 세찬에게 물었다.


"사냥꾼은 평소에 어떻게 돈을 벌어?"
"뭐, 의뢰를 받는거지. 흡혈귀를 사냥하거나."
"으음…"


이미 여러번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사냥꾼을 하는 데에는 거부감이 든다.

사람같이 말하고 행동하면 그게 사람이든 흡혈귀든 죽이는데 망설임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게다가 나도 흡혈귀라는데.
그런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세찬은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살짝 눈썹을 치켰다.

"보통 우리가 사냥하는 '흡혈귀'는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자아까지 망가진 것들이야. 그런 녀석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응? 인간의 형태랑 자아를 잃어?"
"그냥 괴물이라는 얘기지. 멧돼지잡는거랑 비슷해."

유해동물 처리작업 같은건가.
정말 사냥꾼이랑 똑같네.


옆에서 카페라떼를 마시던 유디라가 말했다.


"멧돼지라니, 말이 심하네요. 그건 불쌍한 녀석들이라고요."
"예, 그러면 그렇다고 해두죠. 어차피 사냥하는데엔 변함 없으니."
"그렇긴 하지만……."

둘의 말싸움은 결국 유디라가 눈썹을 모으며 세찬을 노려보는 것으로 끝났고, 세찬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태연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모금을 빨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아마 세찬과 유디라는 서로 좋은 친구는 되지 못 할것 같다.
혹시 저번에 목수라고 불렸다고 삐진걸까?
그러고보니 이새끼, 거의 발작적으로 목수라는 별명을 싫어하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건가 싶지만…….

이유는 무슨. 그냥 쪽팔려서 그런거겠지.


"뭐, 좋아. 대충 알았어."
"이정도만 알면 충분해. 어차피 나중에 보게 될테니까. 눈으로 보면 너도 왜 사냥꾼이라는게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겠지."


흐음, 그렇구나.
나는 다시 음료에 전념하기로 하고 빨대를 입에 댔다.
그런데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단걸 좋아했던가.
지금 맛있으면 됐지 뭐.


음료를 세게 들이키다가 갑자기 머리가 띵해져도 관자놀이를 한번 눌러주면 통증이 가라앉는다.
역시, 흡혈귀라 통증이 빨리 회복되는건가.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세찬의 시선이 느껴진다.


"왜."
"한번 먹기 시작한걸 계속 처먹는건 딱 김석주네. 집에다 밀크쉐이크맛 아이스크림도 산처럼 쌓아놓고 처먹는게."
"닥치렴."

검증된 맛을 계속 찾는게 뭐가 문제냐.
나는 원래부터 안정적인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조금 소심하다고 생각해도 될테지.
수분기가 없어졌는지 빨대로  올라오지 않는 밀크셰이크를 젓고 있자, 세찬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계속 있을거냐? 상관은 없지만."
"아니, 생각해보니 집에서 좀 살만하게 있으려면 필요한게 좀 있더라고. 에어컨을 사던가, 최소한 선풍기라도 하나 더 사야할것 같고. 암막커튼이랑 식재료도  사야하고."
"그래, 요즘 네가 먹는거 감당이 안돼. 너무 처먹잖아."
"많이 먹어야 손도 빨리 자랄거 아니야. 키도 클지도 모르고."
"성장기 애새끼냐? 키가 자라게."
"……."


클수도 있지, 말을 참 싸가지 없게 하네.

나는 나름 175cm였던 내 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지, 이런 모습이 된 뒤로 작아진 키는  컴플렉스가 되었다.
사람을 볼때 키부터  정도로.
그래서 유디라가 굉장히 부럽다.
젠장, 여자인데도 내 남자키랑 비슷하다니!
진짜 존나 부럽다.

내 마음을 도려낸 한세찬을 팔찌를 빼고 한대 더 때려주고싶다.
반대쪽 어금니도 털어서 대칭으로 만들어볼까.

하지만 이게 착용자의 의지론 벗기 힘든 도구라고 하니, 어쩔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때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혈류로 신체를 강화하면 벗겨지려나 해서 슬쩍 힘을 줬지만, 왠만한 혈류로는 안 될것 같다.
지금은 일부러 피를 왕창 소모해서 힘을 줄 필요도 없으니까 뭐.

"인생  기구하구만……."


나는 다시 빨대를 물며 일정을 복기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암막커튼, 대량의 식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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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은 없었다.
그래, 이 지옥같은 폭염에 에어컨이 남아있을리가 없었던것이다.

결국 우리는 리모컨이 딸린 선풍기를 하나 구매했다.
물리력저해 팔찌를 벗을 수 있으면 내가 들어줄텐데, 지금의 나는 연약한 소녀의 허약한 팔목에 어울리는 근력으로 봉인된 상태.

크큭, 내 오른손의 팔찌가  힘을 봉인하는군…….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며 세찬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재료를 골랐다.
 커다란 박스를 한손에 들고 계속 걷던 세찬이 불현듯 말했다.

"선풍기는 제일 마지막에 샀어도 됐잖아."
"그 얘기를 선풍기 보러갔을때 했어야지."


멍청한 놈!


사실 나도 멍청하네, 밖의 더위때문에 내 머릿속 구매순위가 쇼핑의 편리순서가 아니라 필요순서로 정렬되었기에 선풍기를 제일 먼저 구매했다.


근데 세찬도 그 자리에서 지적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결과적으로 똑같은 얼간이라는 얘기다.
동료가 있으니까 별로 부끄럽지가 않군.

"스팅레이, 이것좀 차에 갖다줄  있습니까? 얜 어차피 저랑 있을테니."
"뭐, 세찬님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충분히 대처 하실테죠. 그럼 저는 차에 가 있겠습니다. 즐거운 쇼핑 하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세찬이 포장된 선풍기박스를 실버에게 건넸고, 실버는 그것을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쪽으로 걸어갔다.


대낮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무슨 일이 있겠냐만은.
흉악한 쾌락살인마도 이런곳에서는 살인을 참을  있지 않을까?
그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공간이었다.

불쾌지수 최고인 밖이라면 모르겠지만, 여긴 상쾌한 에어컨바람때문에 사람을 마치 부처 비슷한 것으로 만드는 마력이랄까, 그런게 느껴졌으니까.

아,  살인마가 생리중이라면 모르겠네.
제길. 배터리가 떨어졌다.

"야, 나 화장실좀."
"그래. 유디라가 같이 가주시죠."
"예, 세찬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으음. 이게 호위인가.
이런 취급은 뭐랄까,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또 오라클의 사주를 받은 사냥꾼이 달려들어서 내 모가지를 따는게  중대한 일이니까 참기로 했다.
애초에 그것때문에 붙은 호위니까.


"다 됐니?"
"잠깐만요."


아. 젠장. 접착면끼리 붙어버렸네.
떼어내려하니 이번엔 오른손의 의수에 붙어버렸다. 아! 짜증나.
아까는 한번에 했는데 왜 이러냐.
나는 떼어내려고 손을 흔들다가, 왼손을 이용해 겨우 잡아뜯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붙이지.
접착면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라서 잘못 잡으면 또 의수에 붙어서 안 떨어질텐데.
그냥 하나 새로 까야겠다.


유디라의 도움따윈 절대 받을  없다!
밀폐된 공간에 둘만 같이 있다간 진짜로 정조가 위험할것 같거든.
물리저해를 당한 지금은 그녀를 뿌리칠  있을지도 모르겠고.


"유디라. 그거 하나만 더 던져줘요."
"뭐? 알았어. 잠깐만."


두번째 시도는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손의 회복이 빨라졌으면 좋겠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다시 뽀송뽀송함을 느끼며 걸을  있었다.
이렇게 되어보니, 남자로 사는게 참 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평생에 여자옷, 여자속옷입고 생리대까지 차본다는 경험을 할거라고 상상이라도 했던가?
여자옷, 외모, 체형, 신체능력, 흡혈귀가 가진 제약같은건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무슨 게임캐릭터가 된 것같은 느낌으로 애매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이었는데.

생리현상은 좀, 현실적이라서 겪을때마다 충격이다.

지금도 가끔 화장실가면서 기분이 좀 그렇다.

그리고 한세찬, 이새끼 변기시트 올리고 싸라니까 존나게 말 안들어.
나도 남자였으니까  귀찮음을 모르지 않는데, 시발. 나는 지금 큰거나 작은거나 똑같이 앉아야하잖아.

크아악!
더러운 인남충!
그런 느낌을 담아 한세찬을 째려보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이새끼, 이렇게 되더니 표정변화가 참 다양해졌네."
"뭐, 나는 귀엽다고 생각해요. 후후."
"…."

역시 짜증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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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커튼은 이거면 될거고. 맞다, 집에 샴푸도 슬슬 떨어져가던데."

비누를 써도 되긴 하지만, 또 샴푸가 세일을 하길래 집었다.
그렇게 카트를 밀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다가 문득 오늘 먹을것들을 안 샀다는게 떠올랐다.

"식재료는 뭘로 할까……. 역시 고기지?"
"그래."


식료품코너.

나는 삼겹살 4kg과 소고기 2kg중에서 고민했다.
둘다 구우면 맛있는것은 똑같지만.
나는 세찬에게 의견을 구했다.


"야, 질과 양. 뭐가 나을것 같냐?"
"음식에 대한 질문이라면, 당연히 양."
"좋아. 삼겹살로 가자."


4kg. 꽤 많아보이지만, 이게 먹어보면 금방 사라진다.
평범한 성인남성보다 최소 두배이상은 먹는 세찬,  그보다 두배이상을 먹는 나.
1~2kg정도를 사면 1끼에 사라지는 것이다.
나온김에 사둬야지. 고기는 대충 구워도 맛있으니까, 요리하기도  좋다.

"오늘 저녘은 삼겹살이다."
"점심은? 밖에서 먹게?"
"뭐, 나온김에 외식하자는 거지. 싫어?"
"나야 상관없는데…."

집에 가봤자, 식재료만 축낼 뿐이지 뭐.

"유디라는 어때요?"
"흐음, 이 나라에서 외식하는거 쉽지않을텐데…. 나도 거의 매일 햄버거나 피자, 토스트만 먹는다니까."
"아. 그런가."


으음, 한국의 음식문화는 누누히 말했듯, 마늘과 함께 발전했다.
마늘이 안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 흡혈귀 비친화적으로 누군가 악의를 갖고 일부러 설계한 나라가 아닐까.
최소한 조금만, 마늘 한쪽만 들어가는거면, 차라리 먹을 수라도 있겠지.
청국장도 먹으니까.
그런데 이 대단한 민족은 '마늘을 넣는다'고 치면 최소한 3쪽은 들어가야 '아, 마늘 조금 넣었네'하는 민족인 것이다.


"으윽, 밖에서 먹는 계획은 포기해야하나. 하지만 집은 더워서 싫은데."
"어쩌겠어. 외국으로 뜨던가."
"……."


 더위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마늘도 없는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있기는 한걸까?
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미워도 한국이다.
내 피에 아직 김치국물이 흐르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김치가 그리운 한명의 한국인일 뿐이다.
타지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김치가 그리워지다니!


"진짜 마늘냄새 안나게 해주는 도구 만들어줄 수 없냐…"
"그런거 없다니까."
"왜 힘들게 그런걸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맙소사, 유디라는 원래 흡혈귀라서 마늘이 얼마나 대단한 향신료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지, 대변냄새가 나는걸 굳이 먹으려고 할 이유따위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불쌍해진다.


"유디라는 김치를 안먹어봐서 그렇죠."
"윽, 그거. 매일 먹는것도 아니잖아."

 여자, 한국을 정말 모르는군.

"매일 먹는데요?"
"매일?"
"심지어 매 끼니 먹어요."
"…?"
"무려 김치전용 냉장고도 팔아요. 아까 가전제품 있는데서 봤잖아요."
"농담이지? 세찬, 이거 저 놀리는거죠?"


놀랍게도 진실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김치와 함께 이어져왔다.
그리고 그 김치엔 마늘이 들어가.

세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요."

그런데 세찬은 그런 한국인이면서 지금 김치를 못 먹고 있다.

이건 내가  미안하군.
김치냄새가 좀……. 어련히 심각했어야지.
있는걸 죄다 민석이한테 짬을 때려버렸으니, 집에선 김치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못먹는다고 세찬이까지 못먹게 한 꼴이지만, 얘는 그걸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세찬이 한숨을 쉬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라면에 김치도  먹는게 말이 되나."
"……."


그렇다. 이제 우리집은 라면에 김치가 대신 단무지를 먹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라면에 김치의 맛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잡소리는 이만하고. 어쩔거야."
"그, 잠깐만. 마늘 안들어가는 음식좀 찾아보자."


으음, 일단 왠만한 한식은 전부 아웃이다.
떡볶이는 저번에 먹었고, 짜장면? 이것도 마늘이 들어가네. 파스타? 이건 괜찮을것 같은데.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어떨까? 아, 다른 테이블에서 알리올리오같은거 시키면 큰일나겠구나.
입 부여잡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나갈지도 모른다.
면류도 아웃인가.
크으윽… 시련이다.
마늘이 안들어간 음식을 연상할 수 조차 없다니….
한국인의 저주다.
그렇다면 재료가 적게 들어가는 음식을 생각해봐야하나, 하며 검색을 하려던중, 극단적일 정도로 재료가 적게 들어가는 음식이 하나 떠올랐다.

"회? 초밥? 그거 먹으면 되겠네."
"뭐, 좋아."

이렇게  먹을  있는 것 리스트를 채웠다.
이건 상당한 수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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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도 자주 먹어야겠어."
"맛있게 즐기셨다니 다행입니다, 릴리양."
"이런 곳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잘 먹었습니다."
"별 말씀을."


초밥집은 실버가 봐둔 곳이라며 데려다 주었다.
무한리필이라니, 질보단 양이라는 우리의 테마에도  맞았다.
게다가 딱히 질이 나쁜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흡혈귀여도 초밥은 거리낌 없이 먹을  있었다.
사실은 거의 먹다가 쫓겨날 뻔 했다.

아니, 쫓아내려고 시도한건 아니었지만, 비슷했다.
종업원이 우리의 눈치를 엄청 보면서 시계를 자꾸 확인했기 때문에 쫓겨나는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름 속도를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나와 유디라와 실버가 있어서 참아준거 아닐까.
한국은 특히 이렇게 생긴 백인계 외국인한테 약하니까.
이렇게 된 몸에 도움을 받다니.
나는 한국인이지만.
어찌됐든, 먹은 양에 비하면 상당히 터무니 없을 정도로 싸게 먹었다.

"몇 접시 먹었지?"
"몰라, 40접시 넘어갈때부터 귀찮아서 안셌는데."


어림잡아 세명이서만 100~200접시는 가볍게 넘겼을거다.
무한리필이라는 단어는 정말 무섭구나.
유디라도 흡혈귀라서 먹는양이 보통은 아니니까.
조금 죄책감을 가져야 하려나?


그에 비해 고깃집은, 굽는 마늘의 향기들로 굶주린 흡혈귀를 미리 부적처럼 이용해서 무한리필 고기집을 들어오지 못하게 결계를  두는것이 아닐까?
 초밥집은 그저 그런 준비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지.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표정이네. 요즘 자주 그런다."
"나 그렇게 얼굴에 다 드러나냐?"
"너 원래 표정관리 못했어."

그런…가?
뭐… 요즘 들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긴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생각해보니까 너무 다양하니까 콕찝어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럼 평소엔 대체 어떻게 표정을 관리했었지?
아, 그냥 아무생각을 안했었나.
흠.

아무튼, 이제 집으로 돌아갈때가 되었다.
집에서 선풍기를 조립하고, 커튼을 달고, 장본것도 냉장고에 정리해야하고.
더위에 집에서 도망치려고 뛰쳐나온것 치고는  즐거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이 하필 그날이었지만, 뭐. 그 외엔 별 일도 없고.


조금이라도 평온한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
… 좀있다가 생리대 갈아줘야겠다.
내일은 멈췄으면 좋겠네.
조금 좋았던 기분이 조금 나빠져서 제자리가 되는 기분이다.





 근처에 다다라서 잠깐 차에서 내려 걷던중.

"누구지?"


돌연 세찬이 경계하며 어느새 대못을 빼들었다.
아니, 쟤 반팔인데 어디서 꺼낸거야?
무슨 마술사같네. 아니 뭐, 기억조작하고 결계쓰고 그러는데 마술사 보다는 더 대단한가.
아무튼, 세찬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갔더니, 사람이 있었다.

이 더운 날씨에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검은 후드, 청바지에 운동화.
몸의 실루엣을 보니 여성이다.

 



그녀가 손을 들어 후드자락과 함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치웠다.
귀에 매달린 은색 십자가.
사냥꾼의 표식이다.


혼자서?
혹시 나때문에 찾아온걸까?
지금 여기엔 두명의 사냥꾼, 그것도 꽤나 강할거라고 생각되는 두명의 사냥꾼과 두명의 흡혈귀가 있다.
만약 습격이라면, 혼자서 이렇게 대놓고 나타날  없었으리라.

나타난 사냥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스쳐보고는, 세찬을 노려보았다.
앞머리를 가린 붉은  머리칼 사이로 검은 홍채가 살짝 비친다.

"아, 당신이 어떻게 여길……."


세찬은 그녀를 아는 모양이다.
실버를 올려다보니, 그도 그녀를 아는 눈치였는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품 안에 손을 넣고 있었다.
혹시,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걸까.


여성 사냥꾼은 후드를 다시 매만지고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명함을 끼워 내밀었다.
대체 저 명함은 또 어디서 나타난거지, 사냥꾼들은 죄다 저런 마술을 배워야하는건가.

세찬은 명함을 받아들었다.
표정이 조금 심각해보이는데, 괜찮은거겠지?

"……."

말은 없었다.
그저 그녀는 명함을 건네는것만이 목표였다는 듯이, 세찬이 명함을 받자마자 몸을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와 그렇게 눈이 또 맞았다.

"흐읏…"


그러자, 뭔가 강렬한 느낌이 느껴진다.
내 머릿속을 헤집는 느낌.
이게……. 대체 뭐지?

"그만 하시죠, 이녀석은 지금은 적이 아닙니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는 걸  세찬이 그녀를 제지했다.
나한테 뭔가 한건가?

"……."


붉은 머리의 사냥꾼은, 세찬을 스윽 스쳐보더니,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몸을 완전히 돌리자 신기루처럼 아예 사라져버렸다.
뭐지, 진짜 마술인가?


"흐우우… 대체 뭐지? 방금건?"


밥  먹고 집 가려는 길에 이게 무슨 꼴이람.
죽는줄 알았어.
그냥 눈만 마주친것 뿐인데…….
세찬이 명함을 내려보다가 말했다.


"그녀도 사냥꾼이야. 최초이자, 최후의 악마사냥꾼."
"뭐? 세상에 악마도 있어?"


흡혈귀도 있는데 악마라고 없겠나 싶긴하지만, 사실  뜬금없긴 하다.
흡혈귀 사냥하는 사람들 사이에 악마사냥꾼이라?
하지만 세찬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제는."


"그런데 왜 악마사냥꾼이란게 있는건데?"

"그거야……. 옛날엔 있었으니까요, 악마도."


실버의 설명은 간결했다.
음, 그렇구나.


"이건……. 초대장이다. 스팅레이, 준비하죠. 오랜만에 큰 일이 들어왔어요."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바로 연락드리죠."
"뭔데."

나, 조금 불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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