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지옥
훈련은 내 수준에 맞춰 재조정 될 필요가 있었다.
나도 몰랐던 재능이 발현된건지 모르겠는데, 배움이 너무 빠른것 같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강한 듯하다.
그래도 호위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힘을 주체하질 못하니 평소에는 물리력저해 팔찌를 벗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강해도 이길 수 없는게 있었다.
더위.
그것은 인간이든 흡혈귀든 피해갈 수 없는 자연현상이지.
너무 더워서 낮잠, 아니 잠도 못자고 있다.
흡혈귀가 낮에 자는건 낮잠이 아니라 그냥 잠이라나 뭐라나.
내가 흡혈귀가 되면서 온도로부터는 어느정도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날씨가 더운건 덥다.
여름의 더위는 태양이랑 관련이 있잖아.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 뜨거운 물같은건 괜찮던데.
에어컨을 안 달아둔게 정말 후회된다.
"네, 한달은 지나야 설치할 수 있다구요? 아…"
에어컨 설치기사들도 바쁜 모양이다.
뉴스에는 오늘이 얼마나 더운 날인지를 몇년만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떠들고있다.
나도 알아. 존나 더운거.
왜냐면 내가 지금 존나 덥거든. 더운거 누가 모르냐?
궂이 뉴스로 떠들 필요가 뭐가 있어?
더우니까 짜증이 나네.
안타깝지만 우리집에 선풍기는 한대다.
원래 세찬은 집에 자주 들어오는 편이 아니었고, 외박도 자주 하면서 집에 오면 씻고 먹고 잠만 잤기 때문에, 녀석은 집을 정말 숙박용으로만 이용했으니까.
선풍기같은걸 굳이 두대나 살 필요가 없었다.
선풍기가 회전하며 바람이 멎을때마다 숨이 막힌다.
온몸에 땀이나서 찬물로 이미 온몸을 적신지 오래지만, 금방 도로 더워진다.
나는 제대로 물도 안말리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 수건 베고 누웠다.
입은 옷이 젖는게 느껴지지만, 어쩔거야. 가만히 있어도 땀때문에 알아서 젖는데.
밀크셰이크 아이스크림을 링겔처럼 입에 물고 한세찬에게 눈을 돌렸다.
한세찬도 오늘은 정말 더운 모양인지 웃통을 아예 벗고 쇼파에 누워있다.
부러운 새끼다. 몸도 좋고, 키도크고, 웃통도 벗을 수 있고.
얼굴은 썩은 동태눈깔에 안좋은 안색 때문에 영 아니지만.
"더워 죽겠는데, 나도 그냥 벗을까."
"아니."
"……그래, 생각해보니 좀 아닌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러면 쟤도 좀 거북하겠지.
나는 별로 신경 안쓰지만, 괜히 세찬이 시선을 의식하는게 보이면 나도 부담스럽다.
여기서 내가 입은 하얀 캐미솔을 벗어던지는게 과연 남자다운 행동인지, 남사스런 행동인지도 의심스럽고.
결국 나는 집에서 버티기를 포기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배틀로얄 게임에서 자기장에 타들어가는 꼴이 되고 말거야.
나는 윗몸을 벌떡 일으키며 세찬에게 말했다.
"야. 우리 나갈까. 에어컨 나오는곳에 처박히는거야."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군."
나는 다시 한번 찬물로 몸을 씻고, 특수 선크림을 온몸에 바른다.
연구자가 보내준 양은 적어도 이번 년도 여름은 버틸 수 있을만한 양이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두껍게 발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리들에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겨드랑이 부분에 썬크림을 바르던 중에, 한세찬에게 물었다.
"맞다, 너 자동차 없잖아. 대낮인데. 나 타죽는거 아냐?"
차는 없는데 오토바이만 3대인 웬수가 여기있었다.
왜 3대나 필요한건지 물었는데, 오프로드용, 온로드용, 자가용으로 나누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얘가 자가용 말고는 타는걸 못봤는데.
어지간히도 다른걸 아끼는 모양이지.
"몰라, 아마 너라면 죽지는 않을텐데."
이새끼는 맨날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픈건 어쩌고? 죽지만 않으면 땡이냐?
"택시탈까."
"그냥 스팅레이한테 태워달라고 하지? 어차피 호위라서 따라와야 할텐데."
아무튼 나는 실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실버씨.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오늘 너무 더워서 에어컨 나오는 데 있으려고 하는데, 차좀 태워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저는 릴리양의 호위니까 어딜 가시든 따라가야죠. 어디로 가실겁니까?
"어, 백화점이라도 갈 생각인데요. 가서 에어컨도 좀 보고."
비록 아직 내가 돈은 없지만, 아빠가 준 카드가 있지.
이미 천만원정도 옷에 썼는데, 백얼마쯤이야 생존을 위한 백색가전 한대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불효막심한 생각이 든다.
아마 지금 사더라도 바로 설치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죄송해요 아빠, 사냥꾼이든 상하차를 하든 막노동을 하든 꼭 돈 벌어서 효도할게요.
그러고보니 이 몸으로 상하차나 막노동하면 개꿀 아닌가?
힘은 되게 좋던데.
아니, 면접에서 떨어지려나.
-알겠습니다. 도착할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실버씨. 맞다, 훈련일정 조정은 어떤가요?"'
-뭐, 그럭저럭 되어갑니다. 사실, 릴리양은 지금 현장에 견습으로 따라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보스의 의견도 있어서.
"그런가요. 나중에 아빠랑도 연락해봐야 겠네요. 알겠어요."
내가 사냥꾼을 시적하게된 것은 호위를 붙일 명분이 필요해서였지, 별로 사냥꾼으로써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랬던건 아니셨다.
그러니 딱히 급하게 견습을 나갈 필요는 없겠지.
적당히 간좀 보다가 하면 될 것 같았다.
-네. 잠시후에 뵙겠습니다.
실버와의 전화통화가 끝나자 세찬이 담배를 물고 현관문을 잡았다.
지금 밖은 불지옥과 거의 다름 없는데, 입에다 불붙인 종이막대기까지 물겠다니.
비흡현자인 나로써는 이해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더워 죽겠는데 그걸 피우고싶냐…"
"엉."
녀석은 너무나 당연하니까 묻지 말라는 듯이 나가서 문을 닫았다.
놀라운 정신력이다.
역시 사냥꾼의 정신력이 대단한 건가, 아니면 그냥 존나 골초인걸까.
녀석이 나가자, 나는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가벼운 옷을 찾아 입었다.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 청색 숏팬츠.
아예 머리도 묶어서 뒷목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바람이 좀 통하니까 시원하네.
머리를 묶는걸 해본적이 거의 없으니 당연히 제대로 됐을리가 만무하지만, 뭐 어떤가. 시원하면 됐지.
나는 뒤로 묶인 머리를 몇번 흔들었다. 찰랑 찰랑.
언제나 포니테일을 하면 느낌이 신선해서 흔들어보게 된다는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더우니까 취향이고 자시고 그냥 잘라버릴까, 생각도 든다.
그것도 나름 어울리긴 할 것 같은데.
나는 홀로 돌아가는 선풍기를 고정시켜서 블라우스 아래를 들고 선풍기바람을 집어넣었다.
"으어, 시원해."
흐흐, 목소리는 소녀인데 말투는 되게 아저씨같네.
남들이 볼땐 내가 완전 가련한 여자애로 보이겠지.
하지만 사실 가련하지도 않고, 진짜 여자애도 아닌데.
"시발."
이건 그냥 이 목소리로 욕을 하고싶어져서 나온 욕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나 같지가 않으니까.
더워서 그런지 아주 기분이 싱숭생숭 하다.
쓸데없는 생각도 하고, 쓸데없는 말도 하고.
아까 세찬이 나갈때 굳이 한소리 한것도 그렇네.
쟤가 담배 태운게 어디 1~2년도 아닌데.
고등학생때부터 담배를 피웠지.
나한테 권유는 안했었지만.
그래서 나도 녀석이 담배피우는걸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딱히 더운날에 세찬이 담배피운다고 꼽줄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더워서 그런가."
더워서 짜증이나는 거겠지.
나는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아, 오늘 가면 핸드백도 하나 사야겠네.
핸드폰이랑 지갑을 계속 손에 들고다니기도 그렇고.
아빠,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도착했습니다. 문앞에 주차해두겠습니다.
의수때문에 더운데도 장갑을 껴야하는 것도 짜증나. 하지만, 어쩌겠어.
무슨 연금술사 애니메이션 마냥 백금빛 의수를 장착하고 당당히 돌아다닐 깜냥은 없다.
이미 충분히 눈에 띄니까.
진짜 인식저해 없었으면 나 어떻게 살았으려나.
하얀 장갑에 손을 넣고, 양산을 집은 뒤에 현관을 열었다.
어우, 몇대나 피운거야.
재떨이에 꽁초가 하나 둘 셋…아홉개다.
이새낀 담배가 무슨 아폴로인가?
매일 밤 꽁초를 치우니까 내가 자는 아침에 얼마나 피웠는지 몰라도 일단 오늘 아직까지는 피운게 9개는 맞다.
게다가 아직도 한개 물고있네.
세찬은 내가 나온걸 보고 피우던 담배를 크게 들이쉬고 재떨이에 비비며 등을 돌렸다.
"왔대?"
"응. 가자."
등 돌린 채 말해서 세찬의 담배연기는 나에게 닿지 않았다.
모든 흡연자가 이랬으면 좋겠네.
나는 빠르게 앞장서서 계단으로 향했다.
담배냄새가 안나는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후각이 좋아져서 더 심하게 난다.
대체 무슨 담배의 냄새인지는 모르겠는데 독하기는 엄청 독하다.
폐를 폐휴지로 만들고 싶은걸까.
긴 계단을 내려가니, 실버씨가 차의 뒷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존나게 아가씨가 된 기분이다.
실버의 품위있어 보이는 몸짓 때문에 더욱 부담스럽다.
내가 비록 상류층 매너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동장의 세련됨같은걸 구분하는 능력도 없지만!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뭔가 외모랑 어울려서 더 이상하다.
"자, 타시지요."
"감사해요, 실버씨."
부담스러운건 부담스러운거고, 고마운건 고마운거지.
안그래도 한손에 양산. 다른손에 지갑, 휴대폰을 들고 있어서 손이 부족했으니까.
양산을 접고 차에 타니, 익숙한 목소리가 조수석에서 들린다.
"저번에 갔던 그 백화점으로 갈까?"
"아, 유디라씨도 있었나요?"
"물론. 나도 감시당하는 입장이여서."
유디라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두드렸다.
물리력 저해 팔찌.
역시 그런가. 아무리 조수라고해도 평소엔 나처럼 팔찌를 끼워지는 모양이다.
그녀도 역시 인간 세계에 풀어놓으면 위험한 흡혈귀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그나저나, 릴리스. 네 피를 마시고 난 뒤로 요새 몸이 좀 달라진것 같더라. 좀더 편해진 느낌이 들어. 많이 과장해서 전성기로 돌아간 느낌?"
"그런가요?"
내 피가 무슨 무안단물도 아니고, 그 정도로 대단할까.
"너무 많이 마셨군. 니가 적당히 끊었어야지."
뒤이어 세찬이 내 옆으로 타며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옆구리의 자극에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말했다.
"으윽, 아니. 한컵 분량을 어떻게 재냐. 입대고 빨아 마시는데."
"그럼 다음에는 컵에 따라서 주던가. 네 피는 다른 흡혈귀가 마시면 위험할 정도로 농도가 짙어."
"응?"
세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허접한 흡혈귀가 마시기엔 도수가 너무 세다고."
"어이, 사냥꾼. 나는 그렇게 허접한 흡혈귀가 아닌데."
"유디라는 흡혈박탈 때문에 흡수율이 낮으니까."
"이래봬도 가주 하나를 거의 죽일 뻔 했는데."
"죽이진 못했죠."
유디라는 허접한 흡혈귀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듯 했다.
세찬역시 어디가서 주댕이로 밀리는 녀석은 아니라서 아주 팽팽한 접전이었다.
그치만 저렇게 싸우는걸 보고 있기도 짜증이 났기에 나는 둘을 말렸다.
"서로 같은편 아니야? 싸우지 마."
"이바닥에 영원한 아군 없는 법이지. 흡혈귀는 특히…"
"아, 좀."
지금은 나도 흡혈귀고.
인정하긴 싫지만.
내 말에 담긴 뜻을 눈치 챘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세찬이 잠시 나를 내려다 보고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정적이 지속되자,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함인지 실버 스팅레이가 말문을 열었다.
"노래라도 틀어드릴까요? 혹시 듣고싶은 노래 있으십니까?"
"찬송가만 아니면 돼."
"이런, 아쉽습니다. 하하."
아마 유디라의 일침이 없었다면 우리는 찬송가를 들으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을까.
진짜 음악 재생목록에 찬송가를 넣고 다닌단 말야?
나나 세찬도 딱히 가리는 음악은 없었다.
판소리라던가 오페라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그냥 노래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질 않았으니까.
"그럼, 제 마음대로 틀겠습니다."
들려오는 노래는 퀸, 보헤미안랩소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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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침내 백화점 주차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직 엄청 후끈하긴 했지만, 태양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참을만 했다. 역시 태양문제인가. 집에 달아둘 암막커튼도 구매해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그건 그거고, 그 뒤로 재생된 노래들을 들어보면, 실버의 노래 취향을 알수 있었다.
…그냥 가사에 총이 나오는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들어본적 없던 팝송과 랩 사이에 있던 '총맞은 것 처럼'이 설명이 안돼.
언제적 노래야?
그렇게 생각해보니 다른 영어가사에도 꼭 총을 얘기하는 가사가 있었던거 같은데.
"참 좋은 노래에요. 그렇지않습니까?"
"하하하…네…"
이사람도 사실 어느 부분이 비정상인게 분명하다.
왜 이 세계엔 정상인이 없을까.
아무래도 내가 가장 정상인을 자처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보면 내가 제일 비정상적인 상황이네. 제기랄.
그런데 유디라가 코를 킁킁대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릴리스, 오늘 무슨 향수 뿌렸니?"
"아뇨, 아무것도 안뿌렸는데요. 선크림밖에 안 발랐어요."
"으음…. 그래? 음, 이상하네."
"저한테 무슨 냄새나요?"
아, 벌써 땀내나나. 혹시 머리를 안감아서?
으음, 이상한 냄새때문에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흡혈귀는 코가 좋으니까 내가 대충 물만 뿌리는 바람에 지워지지 않은 찝찝한 냄새가 남아있는 것 일수도 있다.
"이 냄새… 어디서 맡아봤더라."
"… 됐어요, 그만 맡으세요."
나는 자꾸 내 냄새를 맡아대는 유디라가 부끄러워서 그만하라고 했다.
무슨 냄새를 기억한다는 건가, 개도 아니고.
게다가 아직 집에 선크림을 제외한 화장품을 들여놓은 적도 없다.
애초에 그런거 필요도 없잖아, 내가 꾸며서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니니까.
"흐으음, 이거 설마…?"
유디라가 말 끝을 흐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뒷말은 이어지지 않은채, 미묘한 표정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음흉한 표정 같기도 하고… 암튼 이상하다.
실버씨가 주차를 하고 나, 세찬 유디라는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먼저 내렸다.
"릴리스, 이따 나좀 따라올래?"
"왜요?"
"급한거야. 너한테도 중요하고."
유디라는 세찬을 슬쩍 흘겨보면서 내게 말했다.
대체 뭐길래. 세찬이 들으면 안되는건가?
흡혈귀에 대한거면 딱히 세찬이 들어도 별로 상관 없는거 아닌가.
쟤도 사냥꾼인데 알만한 건 다 알겠지.
오히려 내가 너무 모르는게 문제 아닌가.
하지만 유디라는 진지하게 여기서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에, 뭐. 그러죠."
나는 대충 그러자고 했더니, 한세찬이 나를 조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것 같다.
뭐, 나도 모르지만 급하고 중요하다는데 어쩌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휴대폰을 쥐었다.
메세지나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민석이 메세지 몇 개 보낸거랑, 지혜가 보낸 잡담이 다였다.
대충 답장을 해주곤 잠금상태로 돌렸다.
핸드폰 타자를 치기엔 의수가 불편하다.
게다가 의수는 터치가 안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것은 외출용 장갑이 터치가 되는 특수 소재로 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손보다야 훨씬 불편하다.
언제쯤 다 자라냐. 아직도 손바닥 정도밖에 자라지 않았는데, 손가락은 대체 언제 나는걸까.
엘리베이터가 도착할때 쯤, 실버가 합류했다.
"출발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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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라가 나를 끌고 가는 곳은…. 여자화장실이었다.
화장실 갈거면 혼자 갈 것이지, 왜 나를 끌고 오는거야?
나는 딱히 필요도 없는데 여자화장실에 거리낌 없이 들어갈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
"아, 아니! 저를 왜 이런데 끌고 오는 거에요!"
"들어봐! 너. 릴리스가 된 후로 얼마나 지났어?"
그러고보니 얼마나 됐더라.
첫 일주일은 병원에 처박혔고, 그후 일주일은 방안에 처박혔다가, 그 후 일주일은 병원 갔다가. 또 훈련을 시작히고 일주일쯤 지났네.
일주일단위로 인생이 조져지는 기분이 드는데, 기분탓만은 아닌것 같지?
그 모든 일들이 한달만에 벌어진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지.
"아마 한달정도…"
"그럼, 이 냄새는 확실히 그냄새네."
"네?"
"피냄새야."
내가 어디 상처라도 났다는 말인가?
아픈곳은 딱히 없는데…
나는 내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상처난 곳을 찾아보려고 했다.
유디라가 내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여자애들이 한달에 한번씩 겪는 그거 말이야."
"…….?"
내가 잘못 들은건가?
혹시, 설마, 그럴리가 없지만, 그 말은….
"설마, 생리라고 말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너, 전혀 신경 안썼구나. 내가 아니었으면 어쩔뻔 했니?"
나는 엄청난 충격에 말을 잊었다.
무슨… 아니… 나는 남자인데…
"야, 릴리스. 정신차려. 혹시 생리대 가져온게… 있을리가 없나. 흠, 잠시 기다리고 있어봐. 언니가 사다줄테니까."
"……."
"얘는 왜 정신이 나갔대. 그렇게 충격이야?"
유디라는 내 눈앞에 핑거스냅을 하며 내 정신을 끌었지만, 나는 그런것따위에 정신을 할애 할 수 있을만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설마.
오늘 낮부터 일어났던 짜증나는 감정, 평소랑 다른 느낌, 불편한 기분같은게, 단지 태양빛이나 더위 탓이 아니었던건가?
설마 생리가 내 정신에 영향을 줘서 그랬던 거야?
오늘은 왠지 내가 아닌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앞으로 매달 겪어야 한다고?
내가 초점조차 잡지 못하고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두고있는게 답답했는지, 유디라가 다시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니까, 앞에 서있지말고 빨리 들어와. 화장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올테니까."
"아,아아. 예…"
나는 유디라에게 이끌려 거의 강제로 변기에 앉혀졌다.
무슨… 좃같은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 판단이 안된다.
제기랄, 내 평생에 생리를 겪어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흡혈귀가 왜 생리까지 해야하지? 이건 혈류로 못 막나?
그런데 유디라가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대체 또 무슨 폭탄을 날리려고 저러나 불안해진다.
"그런데… 그… 있잖아."
"…네…?"
"어차피 버리는 피인데, 그… 조금… 응?"
"닥쳐요! 미쳤나!"
아무리 피에 굶주린 흡혈귀여도 그렇지, 그걸 마실생각을 해!
또라이 아니야, 이거!
내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서 척수반사레벨에 박혀있는 웃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온 말은 저정도가 아니었을것이다.
아마, '씨발, 좆까는 소리 말고 제발 닥쳐' 정도는 나오지 않았으려나.
"아,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좀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테니까."
"하아…네."
유디라가 칸에서 나가자, 나는 문을 잠그고 한숨을 쉬었다.
이 미친 흡혈귀가…
대체 무슨 생각이야? 허락을 해줄리가 없잖아?
그보다 어떻게 마실 생각이었던건데?
진짜 미친거 아니야?
설마 흡혈귀끼리는 남의 생리혈 받아먹는 문화라도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유디라가 아니었으면 진짜로 대참사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필 숏 팬츠라서 피가 묻으면 절대 숨길 수도 없었겠지.
그건 고맙긴 한데, 이건 선넘는거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슬쩍 숏팬츠를 내리고 팬티까지 살짝 내렸다.
다행히 아직 피가 묻어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식을 두고 나니까 뭔가 달콤한 피 냄새가 난다.
나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내 피 냄새는 아주 많이 맡아본 베테랑중에 하나이므로, 이건 내 피냄새임을 확신 할 수 있다.
흡혈귀 후각 굉장해. 이걸 어떻게 몰랐지.
"씨팔."
정말 욕밖에 안나오는구나.
오늘 그냥 집에 있었어야 했던걸까, 하지만 집은 더워서 안그래도 짜증이 나서 절대 참을 수 없었을거다.
나는 대체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휴대폰에 생리를 검색했다.
와, 이걸 검색하는 날이 다 오네. 미쳤다, 시발.
그 간단한 두 글자도 지금 나는 굉장히 여러번 수정해 가면서 타이핑했다.
왼손은 물론이고, 의수로 대체한 오른손까지 미친놈마냥 떨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생리' 그 두 글자도 오타에 오타에 오타가 연달아 일어났으니까.
와, 시발, 하루만 하는게 아니라고?
생리대도 자주 갈아줘야하고?
대체 어떻게 이런걸 하지?
나는 거의 사색이 돼서 활자를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뭔가가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느낌이 든다.
그냥 내 의지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마치 코피 흐르는것을 주체할 수 없는것마냥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감각, 변기에 액체가 떨어져 액체와 만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침내 생리대 착용법까지 알아낸 나는 휴대폰을 끄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숏팬츠때문에 드로워즈가 아닌 삼각팬티를 입은게 다행인가.
생리대라는거 팬티에 붙이는 거라는걸 처음 알았다.
미치겠네.
소변은 하루이틀까지 참아지면서. 왜 이건 못참는거냐, 흡혈귀의 몸은 정말 알 수가 없다.
"흐흐흐…흐흐…"
이쯤 되니까, 걍 삶을 포기할까 생각도 잠깐 들었다.
내 모든 남성성이 지금 변기에 내 피가 돼서 흘러내리는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갈까,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최소한 자다가 생리해서 이불과 옷을 빨갛게 물들이지는 않았다.
또 그 참사를 세찬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지.
아마 집에서 나랑 세찬이만 있을때 이랬으면 존나 난리가 났겠지?
"나 왔어. 팬티는 어때, 괜찮아? 차는 법은 알고?"
"…괜찮아요. 방금 휴대폰으로 검색했어요."
"그래, 그럼 밑으로 넣어줄게."
나는 칸막이 밑으로 넘어온 생리대를 집어들었다.
시발.
이럴 줄 모르고 외출한 내 잘못이지.
나는 인터넷에서 본 정보대로 분노의 생리대착용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뭔가 기분이 매우 매우 이상했지만,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았다.
1~2시간마다 갈아줘야 한다는 인터넷 정보에 따르면, 나는 지금 1~2시간정도 지속되는 배터리를 장착한 로보트였다.
나는 드디어 화장실 칸을 열었다.
"유디라, 흡혈귀가 왜 생리를 하는거죠."
"그야, 흡혈귀도 생식활동은 하니까 그렇지."
"… 남들 깨물어서 흡혈귀로 만드는줄 알았는데."
"그런건 좀비잖아. 흡혈귀는 감염되는게 아니야."
감염되는게 아니면 나는 뭔데.
나는 왜 흡혈귀가 됐는데.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세찬과 실버에게 돌아갔다.
세찬은 어느때처럼, 내가 남자일때와 같이 대했다.
그러니까 이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잘 싸고왔냐?"
"아니, 시발."
"갑자기 욕질이야."
"나, 생리하더라. 염병."
"풉크헉, 켈록,켁. 뭐라고?"
놀랍지 새끼야? 나도 그래.
유디라도 옆에서 내 거리낌 없는 발언에 충격받았는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는 뭐 그런걸 다 말하고 있니?"
"뭐가요. 숨길 필요가 있나요."
"에휴… 뭐, 네가 괜찮으면 상관 없지만…"
유디라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내젓자, 세찬도 나에게 물었다.
"미친, 흡혈귀도 그런걸 해?"
"나도 몰랐어. 애시당초에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실에 경악했다.
실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매우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저, 릴리양…….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에 바래다 드릴까요?"
"아뇨, 억울해서라도 못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갈수는 없다.
이딴 좆같은 것 때문에 그 불가마 사우나로 돌아간다니, 그것도 억울해서 못참는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봐 줄 수밖에 없다.
"일단 딸기밀크셰이크부터 조지러가죠."
"진짜 안질리냐, 미친새끼야……."
기분나쁜일이 있으면 기분좋은일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