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실버와 유디라 (15/101)



〈 15화 〉실버와 유디라

"흠, 역시 스팅레이. 결계는 기가 막히네요."
"과찬입니다. 세찬. 검은사신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하하. 그런 거랑 비교하면 안돼죠."

한세찬이 오늘은 나와 유디라의 대련을 봐주기로 했다.
현실과 완전히 격리되는 이면차원은 술자가 들어가서 결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녀석도 꽤나 날리는 흡혈귀 사냥꾼이라고 실버씨가 말했었다.
뭐, 내 허벅지에 구멍내는 솜씨는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만.
시벌롬.


"그래, 오늘은 내가 봐줄테니 마음 놓고 싸워봐."
"아니 싸워보라고 해도…"


뭐 배운게 없잖아.
태생부터 스포츠는 원체 좋아하질 않았다.
스포츠보다는 되는대로 몸을 움직였지.
나는 막막함을 느끼며, 유디라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냥 한번 죽일듯이 달려들어봐."
"유디라, 그냥 몇대 쥐어박으면 알아서 덤벼들겁니다."
"그러려나. 그럼."

세찬의 조언아닌 조언에 유디라가 달려들었다.
흡혈귀다운 엄청난 속도였다.


"우왁!"

정확하게 얼굴로 날아드는 스트레이트.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허리를 숙여서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합!"

유디라는 내뻗은 주먹을 회수하지도 않고, 바로 다른 손으로 어퍼컷을 꽂았다.
이건 못피한다, 생각을 하자마자  몸이 공중에 떴다.

콰당!


일순간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저 바닥에 멍청하게 자빠져 있었다.

"그렇게 피하면 안돼. 다음을 대처할 수가 없잖아."
"네…에…"

뭐지, 보이긴 했는데.
내가 피한 자세가 너무 어정쩡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푸흐흡, 유디라, 꽤 하는군요?"
"어머, 이거 목수에게 칭찬을 다 듣고. 영광이네요."
"하하. 세찬이라고 부르십쇼."
"… 그러죠."

세찬은 목수라는 별명을 상당히 싫어하는것 같다.
유디라는 어느새 세찬이 손가락 사이사이 울버린마냥 꽂아든 은색의 대못을 보곤 살짝 굳었다.
목수라고 부를때마다 거의 발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방금건 너무 엉망이라서  지적할 수도 없었어. 다시."
"하아… 알았어."

나는 엉덩이와 등을 대충 털어내고, 머리카락을 흔든 뒤에 자세를 잡았다.
어깨넓이로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서 손을 얹은, 싸움 잘하는 법 이라는 짤방에 나오는 자세다.
무려, 어제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정보다.



"뭐하냐?"
"싸움잘하는 자세인데."
"…하아, 어제 그런걸 찾아보고 있었던건가."
"……"


나는 살짝 몸의 온도가 높아진것 같았다.
관자놀이와 머리를 묶어올린 뒷목 아래로 부끄러움에 식은땀이 흐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뭐, 시험삼아서 해보는거지……."
"자세부터 가르쳐야겠네. 내가 너무 급했어."
"다, 당연하지! 나는 완전 초보라고!"
"그래, 알겠다."


진짜 어릴적빼고는 누구를 때려본적도 없었고. 맞아본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싸움에 대해서는 신생아나 마찬가지!
요 며칠 한 훈련결과도 보면 그냥 힘  쎄진게 끝이다.

"신체는 뭐, 릴리스의 몸이니 완성형인데, 파일럿이 너무 구리네."
"…나도 알아."

신체스펙은 나도 매번 놀랐다.
제자리뛰기로 3층높이까지 뛰어오른다던가,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면 4초만에 돌파한다던가, 주먹질로 건물을 철거하는 수준의 파괴력을 낸다던가. 정말 수퍼맨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수퍼걸인가.
아무튼 몸은 강한게 틀림 없지만, 나는 따지면 튜토리얼도 스킵하고 남한테 만랩 캐릭터를 받아서 플레이중인 셈이다.
어떻게 능력을 쓰는지도 모르고, 어떤게 얼마나 가능한지도 모른다.

"일단 편하게 서봐."
"응."
"거기서 손을 이렇게, 몸쪽으로 들어.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기 편하게."
"아, 이렇게?"
"그리고 다리는 살짝 굽히고, 한쪽은 살짝 뒤로 빼. 언제든 앞 뒤로 빠질  있게."
"이렇게?"
"고개는 살짝 내려. 시야를 넓게 볼 수 있게."
"알겠어."
"좋아. 이제 다시한번 해보죠. 유디라."

세찬이 내 자세를 자세히 봐주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이유가 있었다.
손을 올리는 이유, 무릎을 굽히는 이유, 고개를 살짝 내리는 이유.
내 자세가 당연히 좋지는 않을테지만, 최소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나니까 그럭저럭 나한테 편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세를 잡고보니 어째서 아까 한번은 피했지만 두번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 알 것만 같다.

"합!"

유디라는 일부러 아까와 같은 자세로 들어왔다.
아까같은 스트레이트.
나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무릎을 조금 구부려서  자세의 변화없이 지르는 주먹을 회피해냈다.

유디라는 아까와 같이 어퍼컷으로 이었다.
아마도 일부러겠지.
나는 깨달았다.
역시, 아까랑은 다르게 나의 상황이 훨씬 좋았다.
뒤로 빠져나갈수도, 옆으로 회피할수도, 손으로 막을수도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

나는 옆으로 파고들었다.
내뻗은 오른손이 아직 완전히 회수되지 않았으므로, 이쪽방향으로 회피하면 유디라의 후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 짧은 순간에 이런 판단을 내렸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몸은 그 선택지중에서 옆으로 파고들기를 선택했다.


어퍼컷이 빗나간 유디라는 올려치던 왼손을 그대로 안면가드로 이었다.
나는 미처 반격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유디라는 반격을 상정한 움직임을 하며 경계했다.


공격이 이어지지 않자, 나와 그녀는 한걸음씩 떨어졌다.

"좋아. 아니, 좋은 정도가 아냐. 솔직히 말하면, 완전 초짜라고 했잖아. 너무 빠르게 배우는데?"
"어… 확실히 자세 잡으니까 좋네요."

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자세가 중요한거지. 다음 행동이 더욱 깔끔하게 이어질 수록 좋은 자세야."
"응. 고마워. 설명이 도움이 됐네."
"크흠, 당연하지. 누가 가르치는데."


세찬의 말을 들은 유디라가 짐짓 삐친척을 하며 말했다.


"어머, 얘는 지금 내 제자거든? 눈독들이지 마렴."
"예, 가지세요. 저는 미련 없습니다."

유디라는 눈을 빛냈다.


"정말 가져가?"
"무,무슨 소리에요. 대련하다말고."


눈을 빛낸 이유가 짐작이 가서 더 무섭다.
저번에 우리집에서 '그런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도 했다보니, 유디라가 좀 부담스럽다.
물론 미인이긴 하지만, 내 취향은 연하. 그게 아니더라도 내성적이고 가정적인 여성이다.
게다가 유디라는 나보다 키가 크잖아!
나보다  여자는 심리적으로 내가 위축되는 기분이라 싫다고.
원래는 175cm라서 이런 느낌 받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 여성을 올려다봐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아, 걱정하지마.  언니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뭐를요?!"
"그야 대련이지. 물론. 무슨 생각 한거니? 어머어머."
"……물론 대련 얘기였죠, 저도."


말렸다.
나는 이마를 닦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좋아. 믿어줄게."
"……."
"그럼, 다시간다!"

그녀가 다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매우 근접한 거리까지 주먹을 뻗어오지 않았다.
나와 유디라의 거리가 10센티가량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그녀는 팔을 뻗어오지 않았…


"헙!"


는줄 알았는데, 이미 거의 내 복부에 다다른 주먹을 가까스로 팔로 막아냈다.
주먹을 뻗어내는 타격이 아니라, 체중을 실어 밀어낸 공격이었다.
 말도안되는 힘에 비해서 체중은 너무나도 가볍기때문에,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떠밀려버렸다.


타닷.


나는 가까스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정쩡한 상태로 뒷걸음을 치고 있다.
자세를 바로하기도 전에 유디라가 다시 파고들었다.
자세를 잡을 수 없으니, 상황은 나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그녀가 내뻗은 주먹을 애써 잡아보지만, 내가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달리듯이 뻗어낸 왼발이 옆구리에 박힌다.
나는 다시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쿨럭, 쿨럭."
"미안. 혹시 아팠니?"
"아뇨, 아프진 않은데… 먼지 때문에요."


기침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그냥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났을 뿐이다.
흡혈귀가  이후, 통각이 둔해진건지, 고통을 참는게 수월해진건지, 은으로 쑤셔진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으음, 바닥에 굴러다녔더니 검은 트레이닝 복에 여기저기 희끗하게 묻은 흙들이 장난이 아니다.
이거 다음엔 어디 체육관이라도 빌려야 하나.


"이번엔 자세가 무너지니까 어땠어?"
"그렇네요. 좀 당황했어요."
"이런 밀어내는 공격은 자세를 무너트리기 쉽거든. 내 의도를 읽어내지는 못했구나."

나는 흡혈귀가 되어 강화된 동체시력으로 유디라의 움직임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 움직임을 '읽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야 그렇지.
대련이라는게 난생 처음인걸.

"으으, 어렵네요."
"그럼, 방어만 하지말고, 반격도 해볼래? 원래 싸움이라는게 공격으로 상대의 수를 차단하거나 반응을 유도하면서 싸우는 거거든. 방어만 하면 당연히 어려울  밖에 없지."

그런가.
그러고보니 그렇네.
대전액션게임에서도, 방어만 해서는 수싸움이 될 수가 없다.
대전이라는건 결국 심리전, 수싸움.
상대방의 수를 읽고, 내가 할수 있는 것으로 대응하며 상대의 수를 지워나가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치만,  때리는  좀 무서운데…"
"왜, 혹시 내가 죽을까봐? 걱정마. 흡혈귀는 물리공격으론 쉽게 죽지 않아."
"그런가요."
"잠깐."

세찬이 다시 붙으려던 나와 유디라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 바닥에 원을 그렸다.


"이 위에 서봐."
"어머, 이거 그거니? 현상기억?"
"예. 혹시 모르니까요."
"…  자꾸 내가 모르는  해?"


더러운 사냥꾼, 흡혈귀들.
자꾸 지들만 아는 말로 넘어가려고 한다.


"말그대로야. 어려운말 아니잖아? 지금 상태를 기억해뒀다가 다시 되돌릴 수 있는거.  원 안에서 3분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대련해."

세찬은 귀찮다는 듯이 설명을 끝냈다.
아무래도 사냥꾼의 지식에 관해서는 아기나 마찬가지인 나에게 매번 매번 설명하다가 질려버린것 같다.
이녀석, 누구한테 설명하는거 꽤 좋아했었는데.
점점 설명이 짧아진다.


"이거 꽤나 복잡하고 비싼거야. 생사결때나 쓰는건데, 혹시 모르니까."
"그건 나때문이야?"
"…뭐, 릴리스 때문이지."
"어머, 릴리스가 그렇게 강한 흡혈귀였나? 나는 들어보기만 했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세찬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그야 그렇겠죠. 릴리스는 다른 흡혈귀 없이 혼자 활동했고 상대한 인물들 중에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자꾸   몸한테 소름이 돋아."
"괜찮아. 그래도 나랑  아빠가 한번 죽여봤어."
"그것도 포함해서 소름이 돋는 건데."

내가 소름이 돋건 말건, 아무튼 세찬의 현상기억인가 뭔가는 완성이 됐다.
3분이 지나서 다시 우리는 자세를 잡았고, 이번엔 나도 공격을 할 것이다.
단지 몇번 부딫혀봤을 뿐인데, 감이 잡히는 느낌이야.

"흡!"


이번엔 유디라의 돌진에 맞춰서  역시 달려나갔다.
거의 동시에 내지른 주먹은 서로를 비껴나갔다.
둘다 오른손으로 지른 정권을 몸을 돌려 피해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같은 생각을 했던걸까.
유디라는 재빠른 사이드 스텝으로 몸의 높이를 낮추며 순식간에  왼쪽 옆구리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오른손을 회수하면서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유디라는 허리를 뒤로 슥 빼며 나의 왼 손을 피해냈다.
내 몸이 움직이는건지, 내가 움직이는건지 모르겠네.
나는 왼손의 관성을 이용해 몸을 돌려내서 다시 유디라를 내 정면에 두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눕듯이 넘겨서, 마치 덤블링을 하듯 사선으로 발차기를 해왔다.

"큭, 이건…."


막아냈지만 발차기는 무거웠다.
역시, 무거운 공격은 받아내면 안되나.
자세가 무너지려했지만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한 2미터정도 밀려난것 같은데.
바닥에 쓸린 11자로 난 자국이 2미터 정도니까 그럴것이다.
나는 유디라가 덤블링을 우아하게 마치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 할때를 놓치지 않았다.

한걸음이면 2미터정도는 충분하다.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언제든 스텝을 밟아 거리를 좁히거나 늘릴 수 있다.
나는 판단이 끝나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막아내야 할 것이다.
무리하게 피했다간 자세가 무너지고, 더 큰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을테니까.

"하앗!"


나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왼손에 혈류를 감았다.
오른손잡이지만, 오른손은 내 신체가 아니라서 혈류가 없으니까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이 좋다.
어떤 때보다 완벽하게 성공한 기분.
역시 실전이 최고인건가, 생각을 하며 내뻗는 지르기는 어쩐지 상쾌한 기분까지 든다.

"자,잠ㄲ-"

유디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가 무너지든말든, 그녀는 온몸을 틀어서 주먹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내가 거의 본능에 가깝게 구사한 완벽의 지르기는 내 상정보다도 훨씬 굉장했다.

겨우 주먹에 혈류를 감은  뿐인데?
상쾌한 감각의 정체는 공기를 찢어가르는 감각이었다.
찢어진 공기는 권풍이되어 주먹에 휘감겼다.
마침내 나의 동작이 완성되었을 때…


콰앙!

그냥 주먹질에서 폭발음이 왜 들리는거지?
하지만 정말로 폭발을 해버렸다.
폭풍이 내 앞을 찢고 가르며 바닥을 긁어올린다.
무참한 흙먼지의 폭풍.


후두둑, 투둑.

큰 덩어리가 가라앉아 시야가 어느정도 개었을 때 광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공터를 벗어나 차도까지, 누가 갈아 엎은듯이 처참한 모습이었기에.




"……이,이건, 좀…"
"음. 역시. 네가 다루기엔 그 몸이 너무 강해. 싸우는 법도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네. 스타일은 릴리스랑 다르지만."
"유디라는…?"
"저쪽. 되돌려놨어."

유디라는 어느새 세찬이 분필로 그린 원 안에 있었다.
그녀는 묶은 머리도 풀려서 완전히 귀신같은 산발이  채로, 원 안에서 무릎을 꿇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외쳤다.

"죽을뻔 했어! 아니, 죽었나?"
"죄,죄송합니다, 힘조절이!"

"내가 호랑이새끼를 키운거 아닐까?"


세찬은 유디라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호랑이 새끼보다야 훨씬 강하죠."


--------

대련은 취소되었다.
비록 유디라가 흡혈박탈로 인해 흡혈효율이 너무 나빠서 신체강화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의 한방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나도 왠만해선 물리력저해 팔찌를 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디라가 모자를 덮어쓰며 말했다.

"혈류 다루는건 늦었으면서, 왜 이건 이렇게 빠른건데?"
"그건 저도 잘…"
"하, 순진한 강아지인줄 알았는데, 송곳니를 숨긴 늑대였네. 호위도 딱히 필요 없는거 아냐?"
"……."


그러고보니 그렇다.
실버나 유디라는 호위와 훈련을 위해서 온 것이지, 같이 놀러다니라고 붙은 인원이 아니었다.
실버씨가 다가왔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충격파가 결계 밖에서도 미세하기 느껴졌습니다만."
"어… 진심펀치를 한번 날렸어요."
"음, 대련은 어땠는지  것 같군요. 유디라가 완전히 의지를 잃었습니다."


급기야 유디라는 눈물까지 찍어냈다.
장신의 쿨한인상의 미인이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으니 정말 못할짓 한것 같다.

"흐윽, VP도 잃었고……. 그거 10년은 모았던건데……."
"아……. 10년, 이나요……?"
"10년동안, 사냥따라다니면서, 모은건데…."
"……그 VP라는거 흡혈귀 피를 빨아도 오르는 거였어요?"
"당연하지……. 일단은 피니까…."


내가 좀만 더 힘조절을 잘 했더라면…….
남이 10년이나 모은 성취를 날려버릴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단지 상쾌함 이었다는게 좀 미안해진다.


"그럼… 제 피라도, 딱 한모금이라면…"
"지, 진짜로?"
"으윽, 한번만 이라면요."

어차피 병원시트랑 우리집 거실에 뿌려졌던 내 피를 합치면 이미  몸 분량의 피는 다 뽑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불쌍한 흡혈귀한테 한입 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어쩔까, 하는 시선을 세찬과 실버에게 보냈더니, 둘은 뭐라고 대화를 하고 세찬이 대답했다.


"한컵 분량이면 괜찮을거란다."
"정말 고마워 릴리스!  은혜 잊지 않을게!"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듯, 기운차게 말했다.
그런데 흡혈은 어떻게 하는거지, 영화나 만화같은데서는 목을 물던데, 유디라는 송곳니가 없는걸. 그리고 아무래도 목은 씹히면 아플것같아.

"이거, 피 내는곳은 아무데나 괜찮아요?"
"네 맘대로 정해! 설령 발가락에 내더라도 빨아줄  있으니ㄲ……."
"손가락으로 하죠!"

발가락은 이상하잖아!
변태같기도 하고, 마시는 자세도 불편하다.
손가락에 송곳니로 구멍이라도 내줘야하나, 싶어서 바라보고 있을  나는 떠올려버렸다.
유디라가 내 손가락을 빨아먹는 이미지를.


음,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손가락은 피도 잘 안뽑힐것 같고.
팔뚝으로 하는게 차라리 낫겠는걸. 피도 잘 나올거고, 나중에 밴드같은거 붙이기에도 편하겠지. 금방 낫겠지만…

"아, 팔뚝으로 하는편이 더…"
"쯉, 뭐라고?"


팔뚝으로 이야기를 바꿀 생각을 머릴속에서 끝냈을땐, 이미 유디라가 내 손가락에 구멍을 내고 쫍쫍 빨아내고 있었다.
아. 그냥 손톱으로 구멍 내면 되는거였구나. 생각해보니 혈류 훈련때도 그랬었지.


"와, 진짜 맛있는데!"
"네에……."

 보고 맛있다고 하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조금 야릇한 기분도 들어서 손을 멀찍이 떨어트렸다.
유디라는 아예 눈까지 감고 음미하는 중이다.
하지만 점점 소리가 외설적으로 들리는건 기분 탓인가?


"흐음,흡, 쮸웁. 후으…"
"으읏, 이상한 소리 내지마요…"
"후흐흐, 알았어. 조용히 먹을게."

세찬과 실버씨가 우리가 하는 행위를 보곤 고개를 돌렸다.
나는 꽤나 부끄러워져서 손가락을 얘기한 내가 원망스러워 졌다.
아니 하필이면 발가락 얘기를 하니까 손가락밖에 생각이 안났던걸 어떻게 해.
소리를 내지 말아달라는 내 부탁에 유디라는 아예 손가락을 깊이 물고 빨아들였다.
볼이 움푹 들어갈정도로 강하게 손가락을 빨아내니 츄릅, 츕, 하는 엉큼한 소리는 사라지고 거친 콧김만이 내 손등에 닿는다.
그치만 이제 혓바닥이 휘감는것이 부담스럽다.


"혓바닥도, 가만히…"
"프하. 우리 공주님은 바라는게 너무 많아."
"공주라고 할거면 이제 그만 마셔요."
"미안해. 조금만 더…"


흡혈행위는 5분간 더 지속됐다.
한입만 하라고했는데 너무 많이 빨린것 같다.
앞으로는 함부로 피를 준다고 절대 얘기하지 말아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