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실버와 유디라
"어때? 이면차원에 발을 디딘 소감은?"
"와."
나와 유디라는 현재 이면차원에 들어왔다.
이면차원은 실버의 설명에따르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울처럼 복사해낸, 비슷하지만 다른 차원이라고 한다.
현실과 똑같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
유사차원결계보다 더욱 복잡하지만 견고한 결계다.
참고로 유사차원결계는 전혀 다른 세계에 비슷한 차원을 만들어 현실에 겹친 결계라고 한다.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
뭐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아무튼 이면차원에는 나와 유디라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도 도로에 멈췄고, 공원을 걷는 사람도 전부 없어졌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번에 사라진 느낌?
실버는 결계 유지를 위해 결계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공간에는 완전히 나와 유디라. 흡혈귀 두명뿐이다.
아니 흡혈귀도 명으로 세는건가?
뭐, 그렇겠지.
마리라고 하면 나라도 기분이 나쁠것같다.
"음, 일단 흡혈귀는 자신의 피의 흐름을 느낄 필요가 있어. 몸속의 혈류를 조절하는 것이 기본중에 기본."
"혈류요? 피를 느낀다니요?"
내 평생에 한번도 의식해본적 없는 피의 흐름을 무슨 수로 느끼라는 건가?
최근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흐름은 많이 느낀거 같기는 한데.
그러니까, 과다출혈을 꽤 많이 겪었다는거다.
흡혈귀라면서 여기저기 피를 뿌리고 다녔네.
한번도 흡혈은 안해봤으면서.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유디라는 뒤통수를 긁으며 다가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아. 피 아까운데, 잠깐 손좀 줘볼래?"
"네."
나는 손을뻗어 내밀었다.
"아, 진짜손을 줘야지. 뭐하니?"
"앗."
크흠. 아무래도 오른손을 내밀었던 모양이다.
나는 살짝 민망해져서 뒷통수를 긁었다.
그런데 뭘 하려는걸까?
그러자 유디라는 내 손가락을 쫙 펼쳐서 손톱을 세워 손가락 끝마다 콕콕콕콕찍어 피를냈다.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살짝 움찔했다.
"아얏. 뭐에요, 갑자기."
"엄살은."
손이라도 따는건가? 하는생각을 하던중, 유디라도 자신의 손을 그렇게 땄다.
"잘 느껴봐. 한번만 할거니까."
그렇게 말한 유디라는 내 손에 피가 새어나오는 부분을 자신의 손과 맞췄다.
그러니까, 구멍낸 손가락 끝끼리 맞닿았다.
음, 이렇게 보니 의도는 알겠다.
아마도 내 손가락에 난 구멍으로 자신의 피를 주입해보려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손가락에서 무언가 느껴지려나 싶어서 내 손가락을 본다.
음, 조금 따듯해지는것 같기도하고.
뭔가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이게 피의 흐름인가?
"어때? 좀 느껴지기 시작하니?"
"네, 뭔가 따뜻한것이 스며드는것 같네요. 이게 피의 흐름인가요?"
"그래, 이제 그 감각을 생각하면서 심장의 흐름을 느껴봐."
유디라는 곧바로 맞닿은 손을 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더는 피가 흐르지 않도록.
저렇게까지 피를 애지중지 하는건가, 흡혈귀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심장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까같은 흐름이 살짝 느껴지는 것도 같고.
그냥 착각인가, 싶기도 하다.
흐으음. 이러고 있으니까 중2때 몸속의 마력이 흐르는 상상을 했던게 떠올라서 약간 부끄러워진다.
완전히 그런감각이잖아 이거.
"오, 꽤나 빠른데? 벌써 어느정도 제어를 하는 것 같네. 오늘은 느낌만 알아도 충분할줄 알았는데."
"하하, 뭐…"
중2때 하던 망상이 도움이 됐다곤 절대 말 못하지.
정말 인생 모르는거다.
"흐름을 제어할 수 있게되면, 기본적인 신체강화가 가능해지지. 한번 이거 쥐어볼래?"
유디라는 나에게 악력기를 던졌다.
나는 그걸 받아들어서 몇번 쥐어봤는데, 꽤나 장력이 세다.
오른손은 의수라서 그런가, 왼손으로 바꿔서 꽉 쥐니까 어찌어찌 한번 쥘 정도는 됐다.
어우, 생각보다 내 몸은 약한게 아닐까.
물리력저해 팔찌도 잠깐 빼놨는데 이정도라니.
"…약 200kg 정도의 힘을 써야 하는 악력기야. 특수제작이지."
"이게 200kg이라구요?"
나는 잠깐 멍해졌다.
200kg인데 이걸 쥐었다고? 이거 미친거아니야?
아니, 이 얇은 팔에서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거야?
그렇게 안절부절하고있자, 유디라가 말했다.
"그런데 좀 그렇네. 아직 육체강화를 안했는데. 벌써 쥐어버리면 어떻게 해."
"그…그런, 죄송해요."
"죄송할필요는…없지."
유디라는 잠깐 고민하는것 같았다.
나는 악력 200kg이라는게 살짝 실감이 안나서 잠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있었다.
수치로 들으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네.
내가 평소에 쓰던 악력기는 20kg정도였으니까. 10배정도로 생각하면 되는건가?
아니, 언젠가 재미로 측정해본 악력기계에선 60kg정도 나왔던거같은데.
아무튼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다.
흐음, 세찬이 얼굴이 그렇게 됐던게 이해가 간다.
"그래도 알긴 해야겠지, 신체강화. 아까 느껴본 혈류있지? 그걸 강화하고 싶은곳으로 보내는 느낌으로. 제어할수 있겠어?"
"한번 해볼게요."
나는 손가락으로 보낸다는 감각으로 피를 제어했다.
잘 안되네. 역시 서투른 느낌이다.
더운 사우나에서 닭살을 돋게 하려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떻게든 해보려고는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감각.
으윽, 쉽지않네.
"어때, 쉽지 않지?"
"잘 안돼요."
"뭐, 보통은 꽤 시간이 걸리지. 일단 그걸 하게된 이후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할거니까. 빨리 익혀둬."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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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잠시 쉬었다가 하자."
유디라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외쳤다.
그녀는 자신이 앉은 벤치의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그런 유디라 옆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그냥 집중만 했을뿐인데 왜이렇게 힘든걸까.
이빨도 간질간질하고.
"너무 심하게 피를 움직이면 흡혈충동이 심해져. 슬슬 이빨이 간지럽지?"
"아, 이게 흡혈충동이에요?"
"그렇지 뭐. 아, 이빨이 아플정도면 조금 위험할 수 있는데."
"아뇨, 그냥 살짝 간질간질한거에요."
"다행이네."
흐음, 이빨이 간지러운 감각. 이게 흡혈귀가 느끼는 '배고픔'이라는 감각인 거구나.
확실히 조금 거슬리는 감각이네.
이빨을 손톱으로 긁던 나를 유디라가 보고 살짝 웃었다.
"너무 가려워서 못참겠니?"
"아뇨, 그냥 긁으면 나아지려나 해서…"
"후후, 그럴리가 없잖아. 그 감각은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아."
"네? 진짜요?"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아, 아빠랑 흡혈따위 안하기로 약속했는데!
지금이야 조금 거슬리는 정도지만, 계속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걸까?
방금전 분명히 이빨이 아파질 정도로 발전할수도 있다고 했는데…
"후후, 괜찮아. 흡혈귀 훈련시키는데 아무것도 안챙겨왔을까봐?"
휴우. 다행이다.
역시 다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는거였다.
유디라는 재킷 주머니에서 무슨 한약팩에 담겨진 정체불명의 액체를 내밀었다.
이거… 피인가?
으윽… 흡혈은… 안돼는데…
"돼지피야. 사람피 아니니까 안심해."
"아, 꼭 사람피를 마실 필요는 없나요?"
"물론, 사람피가 제일 맛있긴하지. 그래도 동물피도 먹을만 해."
"아하."
기호의 차이였군.
아빠랑 약속한건 사람피니까 괜찮을거야.
"그런데 왜 흡혈귀는 사람의 피를 빨죠?"
"그야, 흡혈귀가 강해지는 빠른 방법이 인간의 피를 마시는거라서 그렇지."
"예?"
"흡혈귀는 인간의 피를 빨아야 강해지는 종족이야. 그리고 흡혈귀의 세계는 철저히 약육강식이라서 약한 흡혈귀일수록 강한 충동을 느끼거든."
"으으. 그렇군요."
강해지기 위해서 인간의 피를 빨다니, 조금 그렇다.
나는 이미 꽤 강한축의 흡혈귀여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팩의 끝을 조금 잘라서 냄새를 맡았다.
분명히 피인데, 달콤한 포도 향기가 난다.
포도주스같네.
흐음… 돼지 피라는 말만 듣지 읺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눈을 꼭 감고 이것은 포도주스다 생각하며 한 모금을 마신다.
정말 맛은 괜찮네, 피라는 생각만 안하면 되겠다.
사실 향도 맛도 완전히 포도주스인데, 이것의 본질은 피라고 해야할까?
마치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에 무엇을 고르겠냐는 난제 같다.
이 난제의 일부분은 나한테도 통한다.
릴리스모양 김석주는 릴리스인가 김석주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이제 다 쉬었어?"
"아, 잠깐 포도주스맛 피는 피인가 포도주스인가 생각을 좀 했죠."
"참 쓸데없는 생각이네, 피든 포도주스든 니가 마실거란 사실은 안변하잖아. 괜찮아졌으면 일어나서 하던거나 마저 해."
"네."
그 후로도 2시간정도 훈련은 이어졌지만, 뭔가 극적으로 달라진 느낌은 들지 않는다.
뭐… 원래 어릴때부터 조금씩 사용하면서 지연스럽게 익히는 거라고 하는데.
수련이 끝나니 다시 피가 고파져서 포도주스맛 돼지 피를 한팩 더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이런거 어디서 사는거지.
인터넷에 치면 파는데가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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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은 며칠더 지속됐다.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가만히 내 몸에 흐르는 피에 집중한다는게 무슨 명상하는 것도 아니고.
지루한데다 힘든 작업이어서 아주 고역이다.
"으으, 몸은 안썼는데 피곤해."
나는 트레이닝복을 벗어 던져버리고 편한 캐미솔, 드로워즈 차림이 되었다.
세찬도 이젠 내 복장에 신경쓰지 않으려는 모양이고.
계속 안 맞는 남자옷 입기도 그렇고, 이왕 새로 산 옷인데 안 입긴 아깝잖아.
...그리고 솔직히 어울리기도 하고.
예쁜게 최고지. 그게 지금은 내 몸이고 말이야.
하여튼,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고.
집에서는 편하게 쉬어야지.
밀크셰이크나 마시면서 누워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밀크셰이크를 얼린딸기와 갈아본다.
음, 얼리니까 비슷한것 같기도 하고… 집에서 만드는거라 조금 미묘한건가?
어째든 지금 내 몸은 당분을 원하고있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딸기밀크셰이크를 마시던중 세찬이 방금 목욕을 끝낸건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오늘 뭐 했는데."
"으음, 몸속에 혈류 제어하는법? 그걸로 육체강화를 할 수 있다더라."
"흐음. 육체강화. 사냥꾼도 비슷한 훈련이 있지."
"오. 진짜?"
나는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세찬이게 집중했다.
세찬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음, 근력운동, 유산소운동. 규칙적인 생활패턴, 식단조절. 뭐 그런거지. 인간의 몸으로 할만한게 뭐가 있겠냐."
"와… 존나 멋없네."
"시꺼. 훈련을 멋으로 하나?"
"그건 그렇지."
나는 뭔가 신비한 마술이라도 쓰나 했는데.
그냥 헬창이랑 다를게 뭐지?
확실히 건강해지기는 할것 같네.
하지만 세찬의 신체능력이 그런 평범한 훈련만으로 완성되었다기엔 좀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뭐, 자기가 말해주지 않은거 굳이 캐묻기도 이상하고, 실제로 저거만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쨌든 욕실이 비었으니 목욕을 해야되겠지.
오늘은 땀도 꽤나 흘려서 바로 씻고 잘것같다.
몸 움직이는 것 보다 피 움직이는게 더 빡센거 아닐까.
나는 머리를 감기위해 세찬을 부를까, 했다가 그냥 관두고 몸만 씻었다.
오늘은 너무 귀찮아.
겨드랑이를 거품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세찬이 문을 두들기고 말했다.
"야. 아까 도민석이 왔다갔는데. 술 언제 마실거냐더라."
"아 걔 술 놓고 갔었지."
까먹고 있었네.
한 일주일전인가. 녀석이 대뜸 술마시자고 집에 쳐들어왔다가 결국 흐지부지 된 적이 있었지.
지금 냉장고에 걔가 사놓고간 소주가 5병정도 들어있었다.
"미안한데, 나중에 찾아오면 대신 좀 먹어주라. 난 방안에 숨어있을게."
"하. 그래."
그녀석이랑도…….
관계를 정리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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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십니까? 릴리양."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생각을 하느라."
나는 어제부터 세찬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지금도 하고있고.
나름 도민석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에서 엄청 친해진 인연이다.
지혜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하던 모양이고, 다빈이는 좀 애매하지만, 일단은 친하고.
아무 말 없이 헤어져 버리는건……. 뭔가 못할 짓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하는 짓이 잘하는 짓이라는 것도 아니긴 한데.
"결계 완성됐습니다. 유디라, 들어가십시오."
"예스, 실버. 릴리스도 빨리 들어오고."
"네."
모르겠다 진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걸 생각하고 있어야하나.
나는 훈련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1시간정도 혈류를 꼼지락대고 있을때, 유디라씨가 나를 멈췄다.
"그만. 오늘 잡생각이 좀 많은것 같네?"
"아 죄송해요. 고민중인게 있어서."
"뭔데? 이 언니한테 말해봐."
윽, 언니라니.
누나라면 모를까.
하지만 내 정신과 몸의 괴리따위보다는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저, 사실은…"
나는 그녀에게 내 처지를 설명했다.
하루아침에 성별이랑 종족이 바뀌어버려서 사냥꾼이 아닌 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됐다고 해서 영영 작별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유디라씨는 엄지를 턱에 대곤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어렵네."
"그렇죠. 하아…"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은거지?"
"네. 친구니까요."
유디라는 씨익 웃었다.
뭐지? 불안한데…
"…친하게만 지내면 되는거잖아?"
"네, 일단은…"
"지금 다시 친해지면 되지. 흡혈귀가 사람피를 빨려면 유혹은 필수잖니? 언니가 알려줄게."
"아뇨, 그런 관계를 원하는게 아니라요… 그리고 사람피는 안 마실거에요."
역시 태생이 흡혈귀라 이해를 못하는 거 아닌가?
나는 훈련을 마친 후 실버씨에게도 같은 걸 물었다.
최소한 써먹을 만한 답변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흐음, 그렇군요. 어렵습니다. 뭐, 석주라는 존재를 지우는건 가능합니다만……."
"그러고 싶진 않은데요…"
차라리 진짜로 산속에 처박히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게 좋겠습니다. 일반인이 사냥꾼의 세계를 알게돼서 좋을게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
처음부터 민석이나 애들한테 다가가면 안됐었던거 아닐까?
오라클이 벌써 나의 존재를 알아버린것은 아빠도 몰랐던 일이라고 했다.
일이 이렇게 될줄 모르셨겠지.
그래서 어떻게해도 깔끔한 결말이 안나는 것 같다.
"그나저나, 혈류제어는 어떻습니까?"
"어렵네요. 생소한 감각이라. 그래도 이제 손까지는 강화 할만해요."
이제 신체강화를 하면 200kg악력기 따위는 아주 가볍게 움켜쥘 수가 있었다.
무슨 헐크가 된 기분이라, 조금 재밌고 신기하다.
"흠. 생각보단 느리군요. 하지만 그정도면 시험삼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도록 하죠. 오늘은…."
실버씨는 슬쩍 웃었다.
"오늘은 릴리양도 머릿속이 복잡하신것 같으니, 기분전환 겸 밤산책이나 하시겠습니까?"
"아. 그래. 난 좋아."
"좋아요. 세찬이도 부르죠."
나는 전화로 세찬을 불러냈다.
녀석은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나왔는지, 흰 런닝에 츄리닝 바지 하나 입은채였다.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다가왔다.
"스팅레이. 이 밤에 어디 가게요? 이 시간에 연데도 없을 텐데."
지금은 12시20분. 왠만한 가게는 다 문을 닫았고, 인적도 드물다.
"그냥, 밤공기좀 쐬려 합니다. 릴리양은 흡혈귀가 되고나서도 줄곧 아침에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랬죠."
지금은 좀 늦잠을 자고있다.
1~2시쯤 일어나거든.
"흡혈귀는 본래 밤이 주 무대이지 않습니까. 일단 걸을까요?"
세찬은 '뭐 잠시 돌아다니는 정도야.' 하고는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귀찮은 기색은 역력했지만서도.
밤이어도 대낮같이 보이는 시야덕분에, 나에게는 사람이 좀 없다는 것만 빼면 그냥 산책이랑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낮이 너무 과하게 눈이 부신거지.
세찬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그러고보니, 4명이나 같이 돌아다니면 인식저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텐데."
"딱히 작동하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지않을까?"
"그런가."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떡대 넓직한 남자 둘이랑, 쎄보이는 누님하고 같이 돌아다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한밤중이라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다.
한동안 도로를 걸으며 이야기를 한다.
내 말은 오늘은 200kg 악력기를 쥐다가 거의 부숴먹을 뻔 했다던가, 의수가 슬슬 안맞아서 다시 의사한테 가봐야 될것 같다든가 하는 얘기였는데,
세찬은 오늘은 자기가 빨래를 했으니 다음은 너라든가, 밀크 셰이크 말고 다른것도 좀 사보라는 등의 잔소리였다.
...대화를 하니까 기분이 상한다.
뭐지, 괜히 불렀나.
우리는 도로를 걷다가 포장마차 떡볶이집을 발견했다.
곧 마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 떡볶이 맛있었는데, 유디라를 꼬셔볼까.
"아, 유디라. 떡볶이 먹어봤어요?"
"흠? 저거 마늘 들어간거 아니니? 이상한 냄새 나는데."
"음……. 아마도 오뎅이겠죠."
으음, 나도 아무리 떡볶이가 맛있어도 이 냄새 맡으면서 저기 앉아서 먹는건 힘들것 같네.
"그럼 한세찬. 떡볶이 8인분정도 포장해올래?"
"……내돈으로?"
"나중에 돈 벌면 갚으면 되잖아. 어디 써놓던가."
"그래, 다른건."
"적당히 사다줘."
녀석은 진짜로 핸드폰으로 영수증을 찍었다.
정말 칼같은 놈이다.
나는 친구끼리 돈 계산은 대충 해버리고 잊어버리는 타입이라서 저렇게까지 하는게 대단해 보인다.
뭐, 저런 모습을 한 두번 본 것도 아니라서 별로 감정이 상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녀석은 자기가 빌린 돈에 대해서도 철저한 사람이라서.
원래 돈거래는 철저해야지.
곧 세찬이 비닐봉투에 떡볶이와 순대를 담아왔다.
세찬이 실버에게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어쩔까. 우리집 가서 먹는게 낫겠죠, 스팅레이?"
"좋습니다."
떡볶이 맛있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리고 집으로 향할 때 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릴리? 세찬? 멀리서 볼때는 긴가민가 했는데. 맞죠?"
"아. 민석이… 우연이네요."
세찬은 순간 반말을 할 뻔 했다.
세찬과 민석은 서로 얼굴은 알지만 서먹한 사이여서 말을 아직도 놓지 못했기 때문에, 말투를 바꾸었다. 뭐 갑자기 반말을 했다고해도 아마 민석이가 기분이 조금 나쁘고 끝이겠지만.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얘는 뭐지, 슬쩍 차림새를 보아하니 또 술인 모양이다.
편의점 봉투에 담겨진 실루엣이 누가봐도 소주병이다.
"4명이서 어디 가는거에요? 혹시, 석주네?"
"네. 뭐."
"음, 그렇군요. 이분들도?"
"네…"
"안녕하세요. 도민석이라고 합니다."
세찬은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도 뭐 딱히 도와줄만한게 없는데.
일단 나는 대화의 바톤을 넘겨받았다.
간단히 소개시켜 주도록 하자.
"아, 이분은…실버 스팅레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실버 스팅레이 라고 합니다."
"스팅레이? 아, 혹시 릴리 아버지세요?"
"……?"
아! 맞다. 아직 실버씨한테 그 얘기를 안했구나.
내 가명이랑 성이 똑같았는데!
나는 당황한 실버씨가 입을 다물고 나를 보는것을 확인하곤 급히 말했다.
"아…아빠에요. 네."
"…예. 그렇습니다."
"으음, 역시 그렇군요. 이렇게 보니 머리색도 그렇고 닮은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민석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실버씨는 표정관리에 들어갔고, 나는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는 의미의 제스쳐로 고개를 몇번 끄덕여 주었다.
"이분은 유디라. 아빠…의 직장 동료에요."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유디라가 슬쩍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민석은 좀 과하게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했다.
녀석, 유디라씨가 좀 미인이긴 한데. 반응이 과한거 아닌가.
아무튼 급한대로 불은 껐다.
아무래도 더 조지기전에 어디 다른 집이라도 알아봐야 하는게 아닐까.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시골로 내려가는게?
잠시 잡담을 나눈 뒤, 도민석이 세찬에게 물었다.
"혹시 석주는 집에 있나요? 그, 어제 문자를 받질 않아서요."
"아, 오늘…은 없어요."
"음,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석주한테 문자좀 보라고 전해주세요."
또 술마시기는 미래로 미뤄졌다.
그냥 냉장고에 넣어둔거 가져가라고 할까.
앞으로도 같이 마실일은 없을 듯 한데.
민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실버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 아버지…라는건 무슨 말씀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임시로 쓰던 이름이 그…'릴리 스팅레이'여서요…"
"아, 하필이면. 혹시 세찬님이 정한 가명입니까?"
실버씨는 고개를 세찬에게 돌리며 물었다.
"예. 그땐 꽤 급해서. 이름 쓴지는 3주정도 됐네요."
"이미 정해진걸 바꾸긴 어렵죠. 3주면… 기억삭제는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내버려 두도록 하지요."
"네. 아마 별 일은 없을겁니다. 수틀리면 잠적하면 되겠죠."
"그렇습니까. 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닌가 보군요."
…대학친구면 꽤 깊은관계 아닌가. 같이 여행도 갔었는데.
너무 쉽게 말하지 말라고.
요즘들어 관계에 대해서 현탐이 자주 오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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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서 우리는 떡볶이를 집어먹고 있었다.
"냠. 맛있네. 근데, 이 좁은 집에서 남녀가 같이 사는거니? 위험하지 않겠어? 성적으로."
"저기, 저 원래 남자였어요. 얘랑은 10년 넘은 친구고."
"저도 이새끼 여자로 못 봅니다. 아니, 애초에 제가 죽인 흡혈귀 면상인데요."
맞아 맞아. 요즘은 덜하지만, 처음 변했을땐 바로 이 몸땡이를 성적으로는 커녕, 물리적으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이었다.
정말 조금도 이성으로 봐주지 않기때문에 이렇게 좋은…아니 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거아닐까.
게다가 쟤는 사냥꾼이고 나는 흡혈귀잖아?
이성으로 보인다는건 택도 없다.
나도 남자를 이성으로 볼 수가 없고. 볼거 못볼거 다 본 한세찬은 더욱이.
유디라는 실망한 것인지 나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어?"
"있을리가. 저는 여자가 좋아요. 저런 시커먼 남자가 아니라."
아직 나의 머리속은 남성이니까.
나중에라도 남자를 좋아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언니도 그런거 신경안쓰는데."
"……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 누나는. 그런거라니?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제 취향은 연하에요!"
"아, 아깝네. 후후."
"……"
유디라는 웃으며 떡볶이를 하나 더 집었다.
"이거 꽤 맛있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음식은 잘 몰랐거든. 햄버거랑 피자말고도 먹을게 생겼네."
"예? 이렇게 한국어 잘하시잖아요?"
이상하네. 유디라가 하는 한국어는 내가 들어도 딱히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억양까지 자연스러운 것이 상당히 오래 한국에 있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후후후. 이게 다 흡혈귀의 능력이란다. 상대방의 표면적인 의도정도는 정신능력 없이도 읽어낼 수 있어서, 어느 나라 언어든 쉽게 배울 수 있거든."
"흡혈귀에게 그런 능력도 있나요?"
나는 그 말에 조금 놀라서 세찬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냥꾼에게도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가 있지."
"창과 방패의 싸움이네."
나는 떡볶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렇게보면 파워밸런스가 참 안 맞는것 같은데, 어떻게 흡혈귀가 아직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거지.
"그 도구라는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가요? 되게 신기한 것들이 많던데."
"도구는 흡혈귀의 신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신체는 훌륭한 마력전달물질이니까요. 주로, 혈액과 뼈가 도구에 사용되고, 근육이나 내장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죠."
"…윽."
괜히 물어봤나.
지금 내 귀, 목, 팔에 달려있는 이건 사실 흡혈귀의 몸땡이를 쪼개서 만들었다는 뜻이잖아.
살짝 질린다.
유디라가 문득 떠오른 듯이 말했다.
"아, 아까전에 고민이라고 했던거 말이야. "
"네."
"아직 인간이었을때 친구야? 아까 만난애가?"
"네. 도민석 말이죠?"
"아 그래. 그녀석을 패밀리어로 만들면 어때?"
"예? 패밀리어?"
"하수인이라고도 하지. 복종시키면 정체를 말해줘도 되잖아? 남들한테 말 못하게 하면 돼. 그리고, 평생 데리고 다닐수도 있을테고."
"아. 그런건 좀…"
실버도 비슷한 것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으음, 패밀리어라.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겠습니다. 사냥꾼의 '기어스'는 아직 불안정한 경우가 많고… 아, 기어스는 발언제한이라고 하는 편이 더 설명하기 좋겠군요."
"발언제한이요?"
"남들에게 전하면 안되는 정보를 알게된 대상의 기억제거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시술법이죠. 특정 단어나 문장을 발언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입니다만… 우회로도 많고, 위험도가 높아서 쉽사리 할만한 시술은 아닙니다."
이렇게보니 흡혈귀능력이 더 하이테크놀로지잖아.
사냥꾼이 쓰는 꼼수나 도구는 흡혈귀의 능력보다 하위호환이 되는 듯 하다.
"패밀리어…"
확실히 나에 대한걸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패밀리어로 만들기 위해선 일단 대상을 유혹…"
"안해요."
나는 유디라의 말을 끊었다.
그냥 산으로 들어가자.
군대도 잊고, 대학도 잊고, 그냥 히키코모리가 되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아.
…등록금은 조금, 아니 많이 아깝다.
"그냥 떡볶이나 먹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