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실버와 유디라 (12/101)



〈 12화 〉실버와 유디라

실버 스팅레이. 그가 찾아왔다.
한세찬과 비슷한 키, 은발을 좌우로 길러내린 헤어스타일의 미중년이었다.
은발때문인지 더욱 나이 들어보이는 느낌이지만, 늙었다는 느낌보다는 성숙하고 노련하다는 말이 어울릴 생김새.
전형적인 서양인의 움푹들어간 눈두덩이에선 희미하게 파란빛의 홍채가 가늘게 보였다.

"실버 B 스팅레이라고 합니다. 좋을대로 부르시길."


실버는 아주 능숙한 한국어사용자였다.
억양도 어색하지않고, 존댓말의 사용도 완벽한것 같다.
혹시 이 사람도 한국인일까?
이름은 외국이름인데…

"어? 그러고보니, 제가 들을 수 있는 이름이네요. 가명인가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역시 가명이었나. 아마 세찬이 어째서 내 가명을 릴리 스팅레이로 설정했는지 알것같다.
이 이름을 갖고있는 이 사람이 은발이기도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명을 급히 떠올려야 했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그나저나 아가씨라니. 아빠한테 내가 원래 남자인걸 듣지 못한건가?


"아, 아가씨라고 하지마세요."
"이런, 실수했군요. 어떻게 불러드리면 좋으시겠습니까."
"그냥 김석주, 아니…"

밖이나 다른곳에서 내 본명이 드러나는건 숨겨야 할것 같은데. 어째든 인간인나와 흡혈귀인 나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있게 되는 행위는 지양하는편이 좋을  같았다.

"릴리라고 불러주세요. 실버씨."
"알겠습니다 릴리양."

끄응, 어차피 여자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한다면 아가씨로 불려도 상관 없는거 아닌가.
그래도 아가씨는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 부담스럽다.
릴리 스팅레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야하려나.
임시로 정한 가명의 성이 같다는 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더 이상한 부분을 지적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기서 서있는 여자는 누구죠, 실버씨가 데려온 분인가요?"
"아, 보스가 보내신 교관입니다.저 여성분은… 들어오십시오."
"아,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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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밖 난간에 기대어있던 여자가 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175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중에서도 상당히 큰 키가 돋보인다.
검은 라이더재킷 안에 흰 폴라 티셔츠를 입고, 청바지와 부츠를 신은 차림새.
 키와 참으로 어울리는 복장이긴 하지만, 지금이 한여름임을 생각하면, 더워서 죽는거 아닌가 싶은 의상이었다.
그녀가 검은 모자를 벗자, 모자 뒤로  구멍으로 빼두었던 짧은 포니테일이 흔들린다.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벗어내자 보이는 얼굴은 차가운 인상이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적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집안을 살피더니 곧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가,  '검은사신'의 자식?"
"그게 누구죠?"


나는 김중구씨의 아들인데요. 검은사신인지 뭔지는  아빠가 아닙니다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실버씨가 설명했다.

"아, 검은사신이 제 보스. 그러니까 릴리양의 아버지가 맞습니다."
"에에…"


아빠 별명 너무 구려…
아무튼 아빠를 검은사신이라고 칭한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얘가 릴리스라고? 생각이랑은 좀 많이 다르네?"
"아, 뭐. 릴리스 본인은 아니라서."
"흐음… 확실히 뭔가 이상하네. 강한 힘은 느껴지는데, 위압감은 전혀 없어."


그녀는 나를 평가하듯 말했다.
그런데 대체 교관이라는게 무슨 뜻이지?

"그래서 이분은 누군가요? 실버씨."
"그녀는 유디라.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흡혈귀입니다."
"네?"
"아아, 맞아. 잘 부탁해. 릴리스."


유디라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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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에게 믹스커피를 건넸다.
조금 어색한데.

"그, 실버씨.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나요?"
"사냥꾼으로써 어떻게 되느냐는 말씀이시라면, 견습 사냥꾼으로 훈련을 받을것입니다. 그후 몇달간 수습사냥꾼으로써 현장에 동행하게 될 것이고, 다음엔 사냥꾼으로써 받아들일지 심사를 거쳐서 마침내 사냥꾼이 되시겠죠."


실버씨는 긴 설명끝에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흡혈귀가 사냥꾼이 되는건 처음입니다만."
"유디라는 사냥꾼이 아닌건가요?"

사냥꾼과 같이 다니길래 막연히 사냥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한세찬도 흡혈귀가 사냥꾼이 된 적은 없다고 했었지.
그럼 유디라는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실버와 같이 다니는걸까?

"내가? 흐음, 나는……. 따지자면 조수야. 사냥꾼이 아니라."
"그녀는 흡혈귀 사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가주의 피를 훔쳤거든요."


가주의 피를 훔쳐?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흡혈귀의 사회를 전혀 모르는 나로써는 잘 모르겠는걸.


"그녀는 흡혈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고, 가문은 유디라를 사냥꾼에게 팔았죠. 저희들은 그녀를 이용할 뿐입니다."
"맞아, 베라 그년을 죽이지는 못했어. 그게 제일 안타까운 일이지."
"아하."

피를 훔쳤다는건, 암살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뭐 그런 뜻인거같다. 아마 흡혈귀니까 피를 마시긴 했겠지 뭐.
그런데 흡혈박탈이라니, 그런걸 할 수 있는건가?

"그런데 흡혈박탈이 뭔가요?"
"아. 간단해."

유디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손가락을 넣어 옆으로 입구멍을 넓혔다.
그녀의 가지런한 치열에서 보이지않는 이빨이 눈에띈다.
송곳니가 모두 뽑혀있었다.

"흡혈귀한테 송곳니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지. 이게 빠졌다는건 앞으로 흡혈로 영양분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야."
"그런가요?"

그냥 조금 길어진  뿐인줄 알았는데.
흡혈귀의 송곳니는 무슨 다른 역할이 있나보다.
확실히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없으면 뭘 물어서 피를 내기가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유디라씨가  교관이라고 하셨죠."
"응, 내가 너에게 흡혈귀로써 어떻게 능력을 사용하는지 알려줄거야."

나는 실버씨를 살짝 바라보았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짐작한듯 입을 열었다.


"저는 흡혈귀를 상대하는 법은 알지만, 흡혈귀가 어떻게 능력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니까요. 알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그렇겠네요."

그렇게 말한 실버씨는 다시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맞는말이다.
나도 흡혈귀인 내 몸을 다루는법을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내몸을 나도 모르는데, 최소한 같은 종족이 아니면 설명도 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유디라가 눈을 가늘게뜨고 내 몸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슬쩍 몸을 가리고 말았다.

"왜, 왜그러시죠?"
"여자애가 왜 그렇게 무방비해? 옷은 왜 그꼴이고?"
"저, 저는 남자인데요."
"뭐?  그거 달려있어? 그런 모습으로?"

유디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금은 달려있지 않지!
하지만 내 정신은 확실한 남자다.
따라서 나는 나를 남자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금은 달려있는건 아니지만…"
"그럼 여자애 맞잖아! 너, 브래지어도 안하고있지!"
"쿠흡! 쿨럭, 쿨럭"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실버씨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시작했다.
뭐, 맞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샀던 속옷은 뭔가 잘 맞지도 않고, 불편해서 입기가 싫었다.
원래 남자여서 가슴에 뭔가 끼는듯한 감각이 생소하기도 하고.
결국 나는 그럭저럭 편의점에서  여성용 팬티만은 입고, 검은 티셔츠를 집안용 원피스처럼 입는다.
흰색은 비쳐서 조금 그렇길래, 나름 생각해서 검은색으로 찾아입는건데…

"집도 깨끗하고 잘 정리해놨으면서, 왜 네 몸은 꾸미질 않는거야?"
"그냥… 관심이 없어서…"

어차피 인식저해를 쓰면 아무도 못볼텐데. 그렇다보니 옷을 아예 구매하질 않아서 입을 옷가지 자체가 압도적으로 적다.
그런데 유디라는 이런 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실버. 이 녀석은 흡혈귀 이전에 여자로써도 심각한 상태야. 이걸 이대로 놔둬서야 되겠어?"
"뭐, 딱히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잖아요…"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들,  호위 겸 훈련을 위해서 온거잖아!
코디네이트 따위가 아니라!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는군요…"


실버씨가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입고있는건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문제가 있어보이긴 하지.
하지만 어차피 차려입어봤자 여기 멤버들이랑 세찬이 정도나 볼 것이다.
평소 외출은 인식저해와 함께하니까.

"인식저해를 너무 믿지 마. 그것도 만능이아니니까."
"그게 무슨소리에요?"

유디라는 내 질문에 답하기위해 약간 뜸을 들였다.
설명할 말을 생각하는 듯 하다.
잠시후  말이 정리되었는지 유디라가 입을 열었다.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그중엔 정말 사소한 것을 깊게 관찰하는 사람도 있어. 예를들면, 바닥에 굴러가는 낙엽하나도 자세히 보는 사람들. 일반인들 중에도 사실 그런사람은  많아. 관찰력이라던가,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 말이야."


유디라는 잠시 말을 멈추곤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사람들에겐 인식저해가 별로 의미가 없어. 금방 위화감을 눈치채고 말지. 그렇게 한명에게 인식저해가 뚫리면?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다른 사람이 또 눈치채겠지.
그렇게 몇명의 눈에띄면,  자리의 모든 사람의 눈에 띄게 될 수도 있겠고."


"그치만 저는 사람 많은곳은 잘 안다녀서."


구차한 변명이긴 하지만, 어째든 저 얘기는 사람이 엄청 많은 경우에나 통용될 일이다. 겨우 거리 전체에 열명 채 안돌아다니는 거리만 다니는 나는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훗,  사냥꾼 할거라면서? 흡혈귀가 먹는건 사람의 피지?"


"그렇죠?"


"그럼 당연히 사람이 많은곳에 흡혈귀가 있지 않겠어?"

아ㅡ앗!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젠장, 생각지도 못했던 논리다.


"그렇습니다, 릴리양. 유디라의 말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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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유디라는 실버씨가 모는 자동차에 타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대낮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쇼핑하는것은, 어느정도 햇빛을 봐도 좀 뜨겁고 달아오르고 마는 나와는 달리, 정말 화상을 입는 유디라에겐 무리였기에 건물 내부에 다 있는 백화점으로  수밖에 없었다.


실버씨의 자동차는 척봐도 비싸보이는 세단이었는데,
창문이 철저히 선팅 되어 있는지 흡혈귀인 나와 유디라도 대낮에 아무렇지않게 있을 정도였다.
운전하는 실버씨는 뭔가 노련한 집사같은 느낌이 풍겼다.
입은것도 하얀색의 양복이었고, 흰색 가죽장갑이 그런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나는 진짜로 무슨 아가씨가 된 기분이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속옷매장이었다.
내가 입는 편의점 속옷을 보고는 그런 원피스에 그걸 입은거냐며 무슨 벌레라도 본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뭐 나름 흰색으로 사서 깔끔한거 같은데…….
누가 치맛속을 볼것도 아니잖아.

"음, 별게 다있네요."
"이런건 부담스러워?"
"아니, 그냥 좀 신기해서요."


속옷매장에 막상 들어와보니  감흥은 들지 않았다.
누가 입고있는 속옷을 보는것도 아니고, 지금의 나는 완전 여자애가 맞으니까 남들이 봐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하겠지.
부끄러움이라는 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느끼는 거니까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는 행동이면 왠만해선 부끄럽지 않다.
내가 여자처럼 행동하는게 부끄러운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와, 이거는 놀랍네요. 어떻게 입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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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팬티를 하나 집어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거의 실이잖아? 가려지긴 하는걸까.

"그건 보지마."

유디라는 내 손에서 그 실쪼가리를 뺏어서  자리에 돌려 놓았다.
뭐, 나도 내가 저런걸 입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런건 어때."

유디라가 나에게 보여준것은 하얀색 프릴로 장식된 드로워즈였다.
호박팬티라고도 하던가? 아무튼 팬티같아 보이진 않았다.
프릴도 달린게, 지금 갖고있는 검은 원피스랑 어울릴것도 같고, 집에서도 바지처럼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네요."
"그럼 일단 이거랑 같이 몇개 사고."


그녀는 아까 집은 드로워즈랑 디자인이 비슷한 캐미솔까지  검은색, 하얀색, 보라색 각각 세트로  3개를 집어들었다.
으음, 나는 잠시 내가 그걸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나쁘진 않았다. 집안에선 저것만 입어도 괜찮겠는데?
하긴, 여성용 속옷이라고  몸을 노출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이거는 어때?"


유디라가 내게 가터벨트를 내밀었다.
이몸에 어울리긴 하겠지.
자동적으로 상상된다.
예쁘게 뻗은 슬렌더한 곧은 다리가 스타킹으로 덮혀 무광의 입체감을 살리고, 골반위로 걸쳐진 벨트와 이어지는 세로선, 그렇게 절대영역으로 드러나는 허벅지와, 은밀한 비밀을 숨기는 가련한 흰 삼각형의 란제리…

가히 미술적인 아름다움이겠지.


그치만 내가 입긴 좀 그렇잖아.


"이건 좀 야하지않나요?"
"야해? 왜?"
"…"

그냥 내가 가터벨트 취향이라서 그런건가.
나만 야했나봐.

아니, 보통은 이거  입지.
남들이 다 입고다녔으면 가터벨트가 남성들의 판타지로 불릴 이유가 없잖아.
남들이 안입으니까 판타지지.


"… 한벌만 사죠."


아, 솔직히 이건 나도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네.
물론 입은건 아무도 안보여줄거다. 나만 봐야지.
가터벨트에 맞춰 장식이 조금 들어간 브래지어까지 결국 하나 구매했다.
크흠.

"이제 좀 즐기는것 같네. 네 몸이니까, 네가 챙겨야지."
"…네."


그렇게 티가 났나.
솔직히 조금 즐겁긴 하다.
여자속옷 사면서 즐거워 한다니, 좀 변태같긴한데.
어차피 입을 사람도 나고, 보여줄 사람도 나니까 내가 즐거운게 맞지.
속옷은 나만 볼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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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류코너에 오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겉옷은 속옷과 달리 남한테 보여지는 것이다.
대체 의류만 몇층까지 있는거야…?


"으음, 역시 고딕풍이 제일 잘 어울려. 분위기가 딱 맞아."


"…"


검은 프릴로 장식된 검은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내가 전신거울 앞에 서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게 여간 부끄러운게 아닌데.
허리라인에 위치한 이 재봉선이 세로로 그어진 무수한 옷주름을 가르며 허리의 가련함을 드러내는것 같다.
검은 옷은 역시 윤기있는 은발과 잘 어울린다.
다른 색이 없어도 이 은발자체가 너무도 특수해서, 따로 색을 섞을 필요가 전혀 없다.

"다음은 이거!"

빨간 실크 블라우스와 하리까지 덮은 검은 롱스커트. 그리고 악세서리로 조그만 검은 넥타이.
빨간색도 눈색과 어우러져 굉장히 잘 어울렸다.
인식저해를 봉인할 용도로 만들어진 은색 목걸이도 검은 넥타이 위에서 반짝거리며 자신을 과시하는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좋아 다음은  캐주얼도 섞어서 이걸로."


흰색 터틀넥 민소매 셔츠를 타이트한 청바지 속으로 집어넣은 간단한 복장.
내 가슴의 존재감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여기 있어요, 하고 말하는 수준은 되니, 허리가 얇고 골반이 넓은 몸매를 더욱 강조한다.
치마가 아니라서 개인적으론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민소매라서 나름 시원하기도 하고.


"그럼 이젠 이걸…"
"잠깐만요!"


이번에 유디라가 가져온 의상을 슬쩍 보니까, 둥근 검은색 칼라가 돋보이는 하늘색 셔츠에 남색 테니스치마를 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나는 제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저 2시간째 피팅룸 밖으로 한발짝도 못나가고 있거든요! 이제 힘들다구요!"


그리고 저 인간들은 다 뭐야.
그냥 의류코너인데 무슨 패션쇼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
처음엔 그냥 직원들이 하나둘 모이던 것이, 사람이 사람을 부른다고 지금에 와서는 약 30명정도 되는 사람들이 몰려있다.
자꾸 사진을 찍으려해서 인식저해를 살짝 조정해, 카메라에 흐릿하게 찍히도록 했으니 사진때문에 별 일은 없겠지만…….


"그치만, 입어볼 옷이 이렇게 많은데? 움직이기 편한것도 사야지?"


유디라가 직원들이 준비한 의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중엔 다른 코너에 있던 직원도 많이 보인다.
신발까지 갖춰서 온걸보니 신발코너도 털어왔나본데, 그게 되나? 상식적으로?


"빨리 들어가, 이것만 입어보고 끝내자."

"그  한시간 전에도 했잖아!"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 소리를 질렀다.
이래서야 사냥꾼은 커녕, 바비 인형이다.
대체 이게 무슨 훈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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