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비일상으로 돌아갔다 (11/101)



〈 11화 〉비일상으로 돌아갔다

어딘가에 앉아있었다.
뭐지, 몸이 아프지 않아.
목이 마르지도 않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고개를 돌려보려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저택같은데, 불이 하나도 켜져있지 않아 어두웠다.
어둠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두꺼운 야상의 후드를 푹, 눌러쓴 수상한 자가 거대한 대검을 들고 의자에 앉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는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라니? 내가? 나는 누굴 낳은 기억이 결단코 없는데.
소름이  돋네. 하지만 어째선지 정말로 돋지는 않았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배신한거죠?"


무슨 배신을 했다는 얘길까.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희를 이끌어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런 기억이…….


"미안해."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표정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어머니가 포기하더라도, 가주들은 왕을 뽑을겁니다."
"이제 우리 한테는 왕 따위 의미없어."
"그럼 저흰 대체  해야 한다는겁니까? 이 모든것에 의미가 없다면, 지금껏 살아가는 우리들은, 고통받는 형제들은, 대체 무슨 의미를 쫓아 살아야 되는겁니까?"

그는 쥐어짜듯 말했다.
그에 대답하는 나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말하는게 맞나 싶지만 입술이 달싹이는 느낌이 드는것을 보니, 말하는 중이긴 한데 나한테 들리지는 않는다.
그 말이 끝나자, 내 앞의 남자는 눈에띄게 침착해졌다.

"저의 삶의 의미는 어머니 당신입니다. 당신이 정한 일이라면…"

열렬한 신도 나셨군.
상황을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나는  갑자기 이상한 공간에서 알수없는 대화를 엿듣고있는 거지?
이건 꿈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아니, 릴리스의 기억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거 꽤나 중요한 정보 아니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

 젠장. 깨버렸다.

 이러는건데.
보여줄거면 다 보여주던가.


역시 방금은 꿈이었나보다.
꿈이라는건 원래 자각하면 깨어나는 법이라고 하던데, 설마 그래서 깨어버린건가.

꿈에서 깨니 다시 몸이 무겁고 목이 무진장 마르다.
힘겹게 눈동자를 움직여보니 내 옆에는 세찬이 앉아있었다.
아주 밉상이다.
왜이렇게 늦게 돌아온거야?

"그새 잠들었냐."
"무…울…."


물이 목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신경도 쓰지않고 게걸스럽게 500ml한통을 다 비우고나니 그제야  살것같다.

"이제 살겠다. 연락은 끝이야?"
"그래. 아마 병원까지는 오지 못하겠지."
"그럼, 나는 멀쩡하고, 다 끝난거지?"
"별로 멀쩡한건 아니지."


세찬은 내 오른손을 턱으로 가리켰다.

"끝난것도 아니고."


세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자랄까?"
"그럴지도……."

그래! 흡혈귀의 재생력은 엄청나니까.
처음으로 이 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내가 흡혈귀가 되지 않았으면, 손 잘릴 일도 없었겠네.
다시 이 몸이 싫어졌다.
나 조울증인가.


밤길 조심해야 하는건 흡혈귀나 사람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석주야."


세찬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진짜, 진심으로 묻는건데. 너. 사냥꾼  생각 없냐."
"뭐라고?"


평소라면 그냥 넘겨들었겠지만, 이번일로 세찬도 나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라클이라고 했지. 그건 배신자들이 만들어낸 정보 단체야. 사냥꾼의 정보를 흡혈귀에게 팔고, 흡혈귀의 정보를 사냥꾼에게 팔지. 이 자들한테 네 정보가 넘어갔다는건 상당히 위험해. 너는 흡혈귀도, 사냥꾼도 아니니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세찬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스승님의 조직은 릴리스와의 싸움으로 많이 약화된 상태야. 거기에 흡혈귀에게 도움을  명분도 없고."
"그럼, 내가 사냥꾼이되면 뭐가 달라져?"
"일단, 너를 경호할 인력을 추가할  있게되겠지. '견습'을 명목으로. 아마,  쓰는법도 배울 수 있을테고."
"몸쓰는 법이라니! 뭔가 야해!"
"닥치고……."

한세찬은  헛소리를 능숙하게 무시하고선 말했다.


"사냥꾼 해라. 솔직히 이대로는 안돼."


언젠가 이런 날이 올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일이 일어난 뒤에 하게 될 줄은 몰랐지.
혹시 아빠는 내가 이렇게 될거란걸 알고 있었던걸까?

"아빠는 뭐라시는데?"
"너한테 미안해 하시더라. 오라클에 정보가 넘어간  몰라서 못 막아주셨다고."
"아니, 그게 왜 아빠탓이겠어."


나는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고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기니까 뭔가 자연스럽게 쓸어내리게 된다.
 머리는 이럴땐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잠시 정적이 흐른뒤, 세찬이 다시 제안했다.


"솔직히 이제 좋든싫든. 이쪽 세계랑은 엮일 수 밖에 없는데. 차라리 아예 푸욱 발을 담구는게 어때?"
"그, 이제 구체적으로 사냥꾼이 뭐하는 인간들인지 알아야겠어. 정말 흡혈귀 잡는데 미친놈들밖에 없는거야?"
"뭐, 요인보호라던가, 의뢰같은걸 받기도 하고. 그냥 무조건 흡혈귀를 찾아서 죽이기만 하는건 아냐. 이 짓도 나름대로 체계가 있다고."
"뭐, 그렇겠지."

깡패한테도 나름의 규율이 있는데, 사냥꾼이라고 없겠어.

"그럼 민석이랑 애들은? 어떻게 되는거야?"
"상관없잖아. 걔들 매일 보는것도 아니고. 사냥꾼도 매일 사냥하지는 않는다고."
"너는 그냥 매일 노는거 같은데."
"사실 너희 아빠한테  받아. 너 경호비로."
"뭐? 진짜?"
"오늘 일로 감봉당했지만."

세찬은 슬쩍 웃었다.
긴장 풀어주려고 농담하는 건가 지금?
웃음이 나오긴하는데 이건 헛웃음이다.
별로 재미없어.
 농담이 더 재밌는 것 같은데.


"알았어. 언제든지 그만둘순 있는거야?"
"등록만 하라는거야, 일단은. 이게 무슨 정규직도 아니고, 뭐. 사냥 안하면 백수지."
"그래. 알았어. 한번 해보자."

그래, 비일상적인 존재가 일상을 지키려면 비일상적인 힘이라도 사용해야 하겠지.
며칠전이랑은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
그냥 내 정체만 숨기면  줄 알았는데…

---------------


사냥꾼이 되기로 하고 하루뒤.
뭐 딱히 변한건 없다. 어차피 지금은 회복에 전념해야하고, 필요한 서류나 절차가 준비될 시간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뭐, 계약서라도 쓰는거겠지.

나는 침대에 기댄채 튜브형 밀크쉐이크맛 아이스크림을 빨아먹으며 Tv 예능프로를 보면서 나름대로 병원생활을 만끽하고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다준 세찬도 옆에서 예능프로를 같이 보면서 헛소리나 하는 중이었다.
왠지 요즘 병원생활이 더 편하네.
이게 제일 일상같아.


그리고  아이스크림 생각보다 괜찮다. 집에가면 왕창 주문해야지.
이런거 미리미리 떠올랐으면 밀크쉐이크 사러간다고  난리는 안피웠을텐데.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데, 누군가 병실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하얀색 의사가운을 입은 금발의 포니테일 여성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손을 흔들면서 내게 말했다.


"안녕. 나는 의사라고 불러. 연구자한테 얘기 들었는데, 역시 흡혈귀한테 이름 밝히는건 무서워서. 이해해줘."


나는 세찬을 바라봤다.
연구자는 어디가고 이사람이 오냐는 의미였다.

"이분은 '의사'. 온갖 불법적 시술의 달인이지. 이 시설의 관리자 이고."
"설명 고맙구나, '목수'!"
"푸흡!"


나는 아까운 아이스크림을 뿜어낼뻔 했다.
목수라, 못을 무기로 쓰는 녀석한테 딱 맞는 별명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남의 입으로 들으니까 더 웃기다.
세찬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별명 부르지마요. 불법적 시술이라고 해서그래요? 당신 면허 없는건 사실이잖아?"
"그런 속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안돼. 엉큼하긴."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뒤로 어깨까지 내려온 포니테일도 함께 흔들리며 시선을 끈다.
꽤나 미인이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그녀는 가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무슨 볼펜같은 물체를 나에게 내밀었다.
뭐지, 주는건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떨어지않게 이빨로 단단히 깨물고 그녀가 내민 볼펜같은 물체를 집었다.
그 물체는 엄청나게 진동하더니, 이내 금이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순것같은데, 어쩌지.
손대지 말걸그랬다.

 




"이, 이어, 이안언아여?(이,이거 비싼건가요?)"


나는 슬쩍 의사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하! 뭐야 그거! 귀엽네!"

윽, 어쩔수없잖아. 지금은 한손밖에 없단 말야. 나는 의사의 반응을 보고 비싼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구의 잔해를 대충 내려놓고 아이스크림을 쥔다.


"그나저나. 이런걸로는 측정도 안돼? 장난아닌데. 연구자녀석, 나한테는 말도없이 혼자 재미봤다 이거지."
"거, 당연하죠. 그런 허접한 탐지기로 가주급을 어떻게 측정해."
"진짜 그런가봐, 전성기보다 많이 약해졌다고 들었는데."

세찬은 당연한듯 말했다.


"확실히, 그땐 장난 없었죠. 애초에 측정해볼 수도 없었지만."
"와! 대단한데! 흡혈귀아가씨, 언니랑 잠깐 신체검사좀 할까?"

나는 무심코 네라고 대답할뻔 하다가, 의사의 눈빛이 뭔가 이상해서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저거, 성범죄자의 눈빛인데.


"어이 의사양반, 이상한 짓  생각 마세요."
"역시 이상한거 하려고 한거지?"


세찬의 말에 나는 맞장구쳤다.
저거 저 눈빛이 완전히 맛이 갔다니까.
절대 믿고 맡길만한 눈빛이 아냐.


"무슨 소리를, 나는 그냥 미소녀를 진료하는걸 좋아하는거 뿐인데."


"의사가 이상한데?"
"안타깝게도."
"후후. 정말 유감이야. 하지만 그런 얘기는 뒤에서 해주겠어? 상처 받으려고 해."


전혀 상처받은 표정은 아니지만.
자기가 받는다는데 어쩌겠나.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곧 의사가 말했다.

"그나저나, 배는 좀 어때? 장 맞추는거 힘들었는데. 아프진 않아?"
"아, 괜찮아요."
"그래그래. 원래 인간이라면 아이스크림도 먹으면 안되지만. 그래도 혹시 나중에 아프면 말해줘, 성실히 진료해줄게."
"네."


하지만 진료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미 내 귀여운 장들은 저 무서운 여자한테 유린 당했다는 걸까.
으으. 소름끼쳐.
나와 의사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세찬이 말했다.


"그럼 슬슬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연구자료는 봤죠?"

이야기가 길어질것만 같은 분위기에 나는 다 마신 아이스크림의 껍데기를 세찬에게 건넸고, 세찬은 그걸 받아들어 농구하는 듯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다.


"아, 꽤나 신기한 일이야. 정말 중요한건 이건데, R-cell의 분석결과가 대충 나왔어. 추출해서 분석하는건 처음이지만 얼추 맞을거야."

의사는 세찬에게 무슨 자료뭉치를 넘겨주었다.
차트, 그래프, 도표가 좀 보이고, 작은 글씨로 뭔가 빽빽히 쓰여있는데, 나는 봐도 모르겠지만 세찬은 꽤나 진지한 얼굴로 자료를 읽고있다.


"릴리스의 능력은 '복제'같은게 아니라 좀더 근본적인 뭔가가 있어.
원래 R-cell에 기록된 정보가 활성화된다는 느낌?
원래는 절대 안되는 일인데. 실험 결과가 그래. 다른 흡혈귀의 피랑 섞어도 전혀 반발하지 않는것부터 이상했단 말이지….
그래서, 혈액 정밀검사를 돌렸더니 또 고유마력파장이 존재하더라고. 원래 인간이었다고 했지?"


"그럼요. 저는 원래 김석주라고요."


"너한테 고유 마력식, 그러니까 '능력'이 있더라. '융합'이었어. 정말 신기한 우연이지?"

"예?"

나한테 원래 능력이 있었다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원래부터 무슨 초능력같은게 있었다는 말인가?

"흡혈귀의 피를 녹여내는거랑 융합의 마력식이랑 혹시 관계가 있을까요?"

세찬은 자신의 생각을 의사에게 질문했고, 의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몰라. 애초에 추출해서 해석하는게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원래 능력으로 생각했던 정신간섭은 해석조차 못했어."

"그치만 융합이라는 능력은 인간이 쓰는 마력식의 공식을 따라서 어떤 원리인지는 알아냈어. 보다 근본적인……. 뭔가를 끌어들이기 위한……. 그런 배열이더라고. 패턴분석에 따르면, 이건 '교체'라고 할수도 있겠네. 어쩌면, '환생'?"

그렇다는 얘기는, 설마  몸이 완벽하게 릴리스가  이유가…….


"그럼 원래 제가 가진 능력때문에 이 꼴이 됐다는 거에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축하해! 역사상 최강의 흡혈귀가 된거잖아?"
"아니! 그런 타이틀 필요없어요!"


그래도 그 말은 내가 그래도 확실히 김석주였다는 말이지?
차라리 그건 안심이다.

"그럼 릴리스에 대해서 알아낸건 뭐죠?"


"으음. 본질적인 뭔가가 숨겨져있다는거?원래 특기로 알고있던 정신간섭은 사실  능력이랑 상관없을 수도 있다는거?
확실히 릴리스는 뭔가 있어. 지금으로써 알수 있는건 많지 않아. 뭔가 이상한게 있으면 꼭 말해줘야해."

이상한거라...


"저, 어제 꿈을꿨어요."
"꿈이라고?"
"네. 릴리스의 기억같았는데. 저는 릴리스를 기억하는것 같아요."

세찬은 소리쳤다.


"뭐?"


나는 나의 꿈에 대해 설명했다.
어둡고 이성한 저택에 앉아서 정체모를 남자와 했던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
흡혈귀의 왕이 나타날거라는 이야기.

"왕이 대체 뭔데?"
"그냥 제일 강한 흡혈귀를 지칭하는 말은 아닌  같은데."

우리는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정보가 없으니 추측도 힘들었다.
혹시  꿈을 꾸게되면 말하라고하며, 의사는 병실을 나갔다.


---------------


그후로 몇주간 꿈은 꾸지 못했다.
나는 이제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대량으로 주문했다.
하하, 이제 딸기만 사면 되겠군. 밀크쉐이크 아이스크림과 딸기를 믹서기에 넣고 갈면, 그게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 아니냐?
나, 완전 천재!

나는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달아준 백금빛 의수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이상하게 보인다.
내부가 텅 비어있어서, 손의 재생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 디자인이다.
역시나,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잘린 손을 챙겨왔어야 했는데, 그럴 정신이 어딨어.

그래도 재생은 확실히 되고있으니 됐다.
이제 손바닥 밑둥까지는 얼추 올라왔으니까.
당분간 어디 나갈때는 장갑이라도 껴야겠다.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생활에 불편함은 없으니까.


최소한 갈고리보단 낫잖아?
젓가락질 같은건 아직 어렵긴 하지만, 뜨거운 냄비 잡을때는 확실히 편하다.
뜨거운 감각이 전혀 안 느껴지니까.


세찬이 라면을 끓여왔다.
아직 의수로 칼질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가 요리하다가 몇번 멀쩡한 손가락을 자를뻔 했기 때문에, 의수에 익숙해질 때까지 세찬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런데 삼시세끼 라면은 좀 심하지 않냐.

"너, 라면 말고 다른것도 좀 해봐."
"나는 모험을 하고싶지 않은데."
"사냥꾼이란 새끼가 모험심이 없어."
"사냥꾼이 그런거 있으면 죽어."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빨리 나으려면 많이 먹어야 하니까.
의수에 익숙해지는 수련을 겸해, 설거지는 내가 하기로 했다.
평소엔 수도요금이랑 세제가 아까워서 좀 몰아서 하는 편인데, 매일 라면만 먹어서 쌓아놓을 수가 없다.
냄비는 두개뿐이라서.
세찬은 아직 밥상에 앉은채 휴대폰을 하다가, 문득 내게 말했다.


"아 맞다. 네 아빠가 보내는 사냥꾼, 내일 올거래."
"그래? 어떤사람인데?"
"실버 스팅레이."


스팅레이. 내 가명에 쓰인 성은 여기서 따왔나보다.
그냥 아는사람이라서 따온걸까?


나는 그렇게 부실한 식사를 마치고 바로 설거지를 했다.


"좀 부족한가."

뭔가 채워지는 감각이 없다.
흐음,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배고픈건 아니니까 참자.

설거지를 끝낸 후 세찬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노트를 들고 앉아서 '가 나 다 라'등을 써내려갔다.
이것도 의수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여전히 삐뚤빼뚤. 지멋대로 선이 나간다.
세찬은 처음엔 보고 존나 웃었지만, 이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있다.


"그렇게 어렵냐?"
"존나 어렵다. 말걸지마라."


의수로 글씨를 쓰는 작업은 꽤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섬세하게 조작해야하니까.
내 몸은 그냥 생각만 하면 이미 손가락이 알아서  해준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립다, 오른손아.
이제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지면 가슴만 아프다.
나는 반대의 감각을 원했는데.


그리고 가장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기, 세찬아…"
"왜."
"나 머리좀 감겨줘…"


때는 한여름이고. 땀은 태양아래의 흡혈귀인 이상, 에어컨을 켜놔도 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선풍기라면…….


암만 커튼을 쳐놔도 태양은 흡혈귀를 조진다.
이래서 영화같은데서 흡혈귀들이 낮에는 관짝에서 잠만 자는 건가.
나도 관짝을 주문해야하나 싶다.


그래, 흡혈귀이면서 낮에 생활하는 나는 꽤 목욕을 자주 하는데, 이게 문제다.

 손으로 머리를 감기가 너무 불편하다.
의수를 한채로 목욕을 했다간, 고장은 둘째치고 손가락 마디의 틈새에 살이 찝히거나 머리카락이 걸려서 뽑힐거다.
비닐장갑이나 라텍스장갑을 덧씌운다쳐도 너무 딱딱해서 몸을 씻을때도 불편하다.


안그래도 긴 머리카락, 진짜 자를까 고민되지만 어쩐지 귀찮다. 언젠가 머리카락을 감는것에 대한 귀찮음이 머리를 컷트하러 가는것에 대한 귀찮음을 뛰어넘으면 가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 보여줄것도 아니라, 나중으로 미뤄지고 또 미뤄질 뿐이다.


그리고 원래 이상형이 긴 머리이기도 했다.
내몸이라도 일단 내 취향에 맞지 않으면 솔직히 사는 맛이 안나잖아.
 그래도 우울한데, 차라리 예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치만 부끄럽긴하다.
남자끼리 목욕하는건 아무렇지 않지만, 지금 남이 머리를 감겨준다는게 이상한 기분이다.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오히려 몸은 보여져도 별 상관은 없다.
아직 내 몸같지 않아서 그런가.
뭐, 한세찬이 본다고해도 별로 이상한건 아니지만.


"으으, 빨리 자랐으면."
"입다물어. 거품 들어가."


자상하기도 하지, 병원에서 의사에게 씻겨지는 느낌은 꽤나 최악이었다.
그녀는 나를 씻기려는건지 보내 버리려고 하는건지, 손길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후로 몸을 맡기지 않았다.
진짜 레즈인가?


'우후후, 반응이 꽤나 순수한 아이구나, 아직 그건 해본적 없는거야? 남자였다고 했나?'
'아니, 그런게  궁금한데 끼야앗! 손가락 넣지 마세요!'
'원래 다 이렇게 씻는거야, 남자들도 거기는 꼼꼼히 씻잖아?'
'잠깐만, 너무, 끼흣! 그냥 머리만 감겨주고 나가요, 내,내가 씻을테니까, 히익!'
'왜그래, 같은 여자끼리. 씻는 법 알려주는거야. 그리고, 수술한 부위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구.'


……생각해보니 레즈가 맞는  같다.
아니면 그냥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것이던가.
내 생에 그렇게 진빠지는 목욕은 처음이었어.
대체 내가 왜 그걸 해봤을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나는 거기에 아무것도 집어넣을 생각 없거든!


그래서 차라리 세찬에게 맡기면 딱 머리만 감겨주고 끝나니 아주 의지가 된다.
머리감는중엔 거품때문에 눈을 감으니 세찬이 무슨 표정을 짓는 모르겠지만, 아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억지로 하는 거 아닐까.
거품이 충분히 난것 같으면 바로 손을 떼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니까.
좀 미안하긴 한데, 어쩌겠나. 손이 나을때까진 신세를 져야지.


나는 꼼꼼히 몸을 씻고, 물로 헹군뒤 수건으로 머리를 덮었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거울로 보는 내 오른손이 어쩐지 징그럽다.
그래. 이제 목걸이를 벗어도 집중하면 거울에 비치게 할 수 있다.
꿈 때문인가? 능력을 조금은 다룰  있게 되었나봐.
별로 엄청난 능력은 아니긴 하다. 그냥 목걸이 쓰면되고.
아직 마음먹은대로 걸고 풀수가 없기도 하고, 실수로 인식저해를 아예 꺼버리면 대참사가 일어날테니 나갈  목걸이는 장착해야겠지만.
목욕이 끝난 나는 의수를 장착했다.

목욕후의 아이스크림은 진짜 최고지.
밥은 없어도 살겠는데, 이 밀크쉐이크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못 살것같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튜브팩을 찢어 내용물을 핥아먹었다.
 



내일 온다는 사냥꾼은 어떤 사람일까?
이상한 사람만 아니면 좋겠는데.
아빠가 골라준 사람이니 괜찮겠지.
나는 깔끔히 손가락에 묻은 아이스크림까지 다 빨아먹은 뒤에, 세찬의 '미친놈, 그렇게까지 먹어야하냐'라고 하는 말을 무시하며 침대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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