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일상으로 돌아갔다 (8/101)



〈 8화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결국 세찬이와 함께,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에선 지혜와 다빈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서있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검은 긴생머리를 깔끔히 늘어트린 글래머타입의 송지혜와, 아담하고 귀여운스타일의 흰색 티셔츠와 짧은 숏팬츠를 입은채 머리를 시원한 단발로 쳐내 주황색으로 염색한 잘달막한 여자애가 박다빈이었다.


다빈이는 부른적 없었는데, 과에서는 항상 같이 다니는 두쌍이다보니 결국 따라온걸까.

세찬의 등을 툭툭 치면서 저쪽을 가리키니, 한숨을 푹 내쉰 한세찬이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좋아, 거의 완벽한 내 억양이었다.
나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김석주……. 안ㄴ."

지혜는 드디어 휴대폰에서 눈을 떼며, 한세찬을 바라보았는데, 굉장히 놀라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췄다.

설마, 그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건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어서 도망칠 준비를 했는데,  이어진 지혜의 말에 안심했다.

"얼굴이 대체 왜 그래? 완전 박살났네?"
"계단에서 굴렀다."
"으휴, 조심 좀 하지…. 하필 얼굴을 다치냐."


생각해보니 한세찬은 얼굴 한쪽에 붕대를 감싸고 있었지, 그다지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다.
잠깐 나의 상처에 대한 걱정을 뒤로한 지혜가, 마침내 내게 시선을 향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여자애는 누구야?"
"아빠 친구 딸이야, 잠시 맡아두기로 해서."
"……그래?"


지혜가 탐탁치 않다는 듯이 내 모습을 훑었다.

나는 지금 저번에 한세찬이랑 옷을 사러가서 구매한 의상 그대로 입은채 태양을 피하기위한 양산을 들고있는 채였는데, 시선이 조금 압박적인 관계로, 역시 의상이 이상한건가 해서 부끄러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넌 이름이 뭐야?"
"나, 나는…."

다빈이가 물어오자, 나는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네?  이름을 뭐라고 말해야하지?
머릿속이 타들어갈 것 같다. 나 이름 잘 못짓는데!
지금 생긴걸 보면 영어이름으로 정해야하는건가, 모르겠어!

"릴리, 릴리 스팅레이."

내 이름은 의외로 한세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릴리 스팅레이? 그건 또 뭐야.
아, 릴리스에서 글자하나 뺀거구나. 그럼 스팅레이는 어디서 튀어나온 성이지?

"역시 외국인이구나! 되게 신기하다."
"……."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그녀가 얼굴을 들이대왔기 때문이다.

박다빈은 내 얼굴을 계속해서 신기한듯 들여다보고있다.
몇센티만 더 가까이 붙으면 속눈썹끼리 비빌수도 있을 정도로 가까이.


뭐, 신기하긴 하지. 나도 신기한걸.
그래서 화장실에서 세수할때마다 10분씩 표정갖고 노는짓을 하고있었다.
예쁜 여자애를 내맘대로 하는 느낌이라 재밌었으니까.
근데 남이 들여다보는건 좀 부끄럽다.

"으, 저기… 너무 가까운데…요…"
"어머, 미안미안. 신기해서. 속눈썹도 되게 길다."
"그만해."

보다못한 한세찬이 박다빈의 뒷덜미를 잡아서 나와 떼어냈다.
박다빈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지만,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마음속으로 한세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잠시 후, 박다빈이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네. 나는 박다빈이야, 이쪽이랑 친구고."
"나는 송지혜야. 김석주의 대학 친구고."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릴리'는 몰라야하는 정보니까,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릴리 스팅레이에요. 이쪽…. 이랑은 아빠끼리 아는 사이죠."

이미 한세찬에 내 이름을 설명했지만, 뭔가 자신을 소개하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내 입으로 다시 미리 맞춰둔 설정을 말했다.


"역시 한국말을 잘하는구나!"
"하하…."

한국인이니까, 나는 오히려 외국어로 하면 문제가 돼.

지혜가 내게 시선을 떼면서 한세찬을 올려다본다.
키차이가 10센티정도 나는데, 그건 별로 이상하지 않은건가?
그런 고민을 하던 중.


"근데 너, 갑자기 왠 휴학이야? 너 군대가?"
"아니, 그냥. 당분간 돈좀 벌려고."
"음. 등록금 때문에?"
"그렇지 뭐."

세찬은 이번엔 잘 해주는것 같았다. 좋아,  기세로 가자.

"그런데, 둘이 무슨사이야? 거리감 묘하게 가깝지 않아? 완전 수상해애~"


다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세찬의 옆구리를 찔렀다.
세찬은 표정이 썩는걸 숨기지 못했고, 나역시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푸핫! 왜그래 니들. 표정 완전 웃겨 푸흐흣."
"아, 그런사이 아니에요. 그냥 친한거 뿐이에요."
"으음. 그렇구나. 그래그래."

지혜랑 다빈이는 우리의 반응이 꽤나 실감났는지,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아니. 근데 민석이는 언제 온대? 얘는  지가 약속 잡아놓고 제일 늦는거야?"
"석주야 니가 전화해봐. 오늘 약속인지 모르는거 아냐?"
"그래."

핸드폰은 이미 세찬에게 있었다.
내가 지금 입은 검은 원피스엔 주머니가 없어서 내 핸드폰까지 세찬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이건 다행이네.

그러고보니, 여자들은 주머니도 없는 이런 옷 입고 어떻게 물건을 들고 다니나 했는데, 지금 송지혜나 박 다빈이 쓰는 핸드백을 보니 이해했다.


저거, 그래서 쓰는거였구나!

남자였던 나는, 바지주머니나 외투주머니에 쑤셔넣을  없는 모든것은 백팩을 사용했다.
보통은 지갑이랑 휴대폰만 주머니에 있으면 끝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입고 백팩은 패알못인 내 눈에도 말이 안되는 패션이었다.
부조화의 극치. 눈에도 엄청 띄겠지. 나도 그런 식으론 남들 기억에 남고싶지 않아.
세찬은 전화를 끊고 지혜와 다빈에게 말했다.

"30분정도 걸린대. 어쩔래?"
"일단 민석이는 오면 조지는걸로 하고,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있자. 더워."

나도 슬슬 피부가 햇빛에 타들어갈것 같았기 때문에 대찬성하며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양산을 접어 두손으로 말아쥐고 세찬의 옆에 섰다.


"릴리, 뭐 마실래?"


지혜가 나에게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골라봐, 내가 사줄게."


아, 사준다면 거절할  없지.
커피를 마실까,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안그래도 흡혈귀라 밤에 잠을 못자는데 카페인까지 들어가면 진짜 어떻게될지 몰라.
음료수중에 골라야겠다 생각하는데, 순간 다른 손님에게 나갈 음료중에 눈길을 사로잡는게 보였다.

"음…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요."

평소에는 절대 고르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빨간게 땡긴다.
금단증세인가?
그래도 누구 피를 빨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음, 그래.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랑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요."

 후 다빈과 세찬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진동벨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지혜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떠보는 듯이 물었다.


"릴리는 어쩌다 석주랑 같이 있게된거야? 지금은 어디서 지내?"
"아, 아빠가 일때문에 맡겨두신거라, 같은 집을......."
"남자랑 둘이? 무섭지않니?"


아. 그러네.
솔직히 여자애가 남정네 집에 같이 산다는게  저시기하긴 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조금 고민한뒤에 대충 말하기로 했다.

"괜찮아요, 서로 이성으론 관심도 없고. 우리 아빠 짱세요."
"하하핫! 그래? 야, 석주야. 조심해야겠다?"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 우리 아빠 짱세니까.
존재하지 않는 릴리네 아빠는 모르겠고.
세찬도 드립이 웃긴지 살짝 미소지으며 받았다.

"사실이지. 건드리려고 해도 무서워서 못건드려."
"그으래? 암튼, 오늘 어디가서 놀래? 노래방 어때?"
"나 지금 노래 못불러."
"에, 그런가? 아쉽네."

한세찬은  박살난 아갈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애초에 얘가 대중노래를 부르는걸 본적이 없는거보면, 그냥 데려다놓더라도 재미 없을  같다.


잠시 말을 고르던 지혜가 입을 열었다.

"석주야. 아쉽지않아? 너 복학하면 나 졸업하는데."
"뭐, 그때 적응해야지. 어떻게든 되지않으려나."
"하아……. 그래, 그렇겠지."

내가 휴학 하는데 왜 저렇게 아쉬운 표정일까.
과제셔틀이 휴학해서 그런가?
멍하니 진동벨을 만지작 거리던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다빈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와 릴리야.  귀걸이 되게 이쁘다. 어디서 샀어?"
"아 이거 아빠가 준거라 저도 잘 몰라요."
"되게 잘어울려. 아빠가 보는 눈이 있구나?"
"고, 고맙습니다."

자꾸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내 남자로써의 자존심이 깎여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내 표정을 보면서 다빈이가 씨익 웃었다.


다빈은 웃는 모양이  귀여웠다.


귀엽게 웃을 줄 안다고 해야하나, 그냥 얼굴상이 웃는게 귀여운건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참 귀엽게 웃을줄 안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니까, 목걸이도 신기하다. 열리는거야? 잠깐 봐도 돼?"


다빈이 몸을 들이댄다.
악! 너무 가까워! 여자끼리는 이게 보통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빼, 빼서 보여드릴까요?"

이미 다빈과 지혜에게는 내가 인식된 상태라 벗어도 딱히 인식저해봉인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장착하고 있다가 실수로 최대 봉인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일어날테니, 아예 벗어서 보여주는게 낫겠지.
나는 목걸이를 벗어서 테이블에 올렸다.

"와. 안쪽에 이거 혹시 다이아몬드야? 엄청 예쁘다… 릴리네 아빠, 재벌가 회장님인거야?"
"비슷해요."


돈이 많은건 사실이지.
이제  빚이긴 하지만.


"와우 부잣집 공주님이셨네. 석주한테 너무 과분해."
"그래. '절대' 안어울리지."

지혜가 웃으며 말했고, 세찬은 거기에 극렬히 동의했다.
나도 동감이야.
지혜는 우리를 보곤 재미있었는지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앗,  됐나보다. 내가 가져올게!"


목걸이를 만지던 다빈이 진동벨이 울리자 자기가 받아오겠다며 튀어나갔다.
나는 다빈이 테이블에 놓고간 목걸이의 봉인단계를 확인해 다시 2단계로 맞춰서 목에 걸었다.
역시 한번 확인하길 잘했다.
방금은 6단계로 설정되어있었네.
바로 찼으면 큰일날  했어.

다빈은 금방 돌아왔고, 내앞에는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가 놓여졌다.


"자자, 마시면서 얘기하자구."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지혜언니."

나는 음료를 가져와준 다빈에게 감사를, 그리고 지혜에게 사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공짜로 음료수를 사줬으니 언니 한번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지혜에게 감사를 표하고 밀크쉐이크를 한입 들이켰다.
별 기대를 하지는 않고서.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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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이거,  맛있어!

원래 밀크쉐이크란거, 이런 맛이었나?
새콤한 딸기맛과 달콤한 밀크쉐이크의 맛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진다.
맛있다를 넘어서, 행복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카페가 잘 하는건가? 되게 좋다.
앞으로 자주 사 마셔야겠어.

"그게 그렇게 맛있어?"


지혜가 말했다.

"네. 이거 엄청맛있네요! 여기 되게  만드나봐요!"
"그래? 예전에 마셔봤을 땐 그렇게까진 아니었는데. 한입 마셔봐도 괜찮아?"


어차피 지혜가 사준거니 한입정도는 괜찮지않을까.
다 마신다는것도 아니고.

"네, 괜찮아요."
"고마워, 어디…"

지혜가 한입 마시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별로 달라진건 없는데? 혹시 스트로베리 밀크쉐이크를 처음 먹어보는거야?"
"네? 아, 네. 그동안 쭈욱 병원에 있었던지라……."


거짓말은 아니지, 이 모습에 된 순간부터 계속 병원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아무튼, 내 설정은 그렇다. 병약한 여자애.
그, 아주 틀린말도 아니다.
이제 햇빛은 피해야하고, 보기에도 창백하니 건강한 모습은 아니니까.


"그렇구나, 아……. 그래서 못 마셔봤겠구나. 힘들었겠다."
"아. 그,그렇죠. 뭐."

윽, 괜히 오버한것같다. 좀 쪽팔리네.
잠깐 주변을 둘러보니, 왠지 내게 시선이 몇개정도 꽂히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화, 화장실이요……."

그리고 후다닥 화장실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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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게 뭐하는 짓이지……."

애들 앞에서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하고있는 꼴이라니.
더이상 자괴감을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세수를 했다.


사실은 간단하다.
끊어내면 돼.
관계고 뭐고  끊고 잠적하면 다 상관 없는 일이 되니까.

그치만 그걸 다 끊어버리고 나면, 나한텐 대체 뭐가 남지?

사회적으로 이미 인간 김석주는 사라졌다.
 모습이 사라졌고, 내 사회적신분이 사라졌다.
남은 거라곤 과거의 인연 뿐인내가, 관계마저 아무렇지 않게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죽여버리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랑 상관 없어지기 싫다.
인연의 형태가 달라진다고해도 손 닿는곳에 두고싶었다.


"……."


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어두운 생각이랑은 어울리지않아.
더 깊게 생각하면 정말 우울감에 빠져서 정신이 피폐해질것 같다.

세면대에 올린 주먹을  쥔다.

그래. 아직 아무도 날 떠나지 않았으니까.
이런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고.

아무래도 김치 못먹으니까 사람이 미치는거같다.
마늘은 대체제 없냐? 진짜 우울하다.
나는 고갤 들어 내 앞의 화장실 세면대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하얀색 3단 접이식 우산을 내려놓고, 검은색 고딕풍의 프릴이 달린 하얀 단추가 2쌍으로 달린 베이비 돌 드레스 입은채,  은색 머린칼을 대충 귀 뒤로 쓸어넘기는 중인 귀여운 여자애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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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을 보니 좀  우울해도 되지않나 싶다.
이쁘긴하지만, 역시 나는 감당이 안돼.

그렇게 한차례 감정을 추스린 나는 다시 애들이 있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밀크셰이크를 다시 한모금 하니까 약간은 정신을 차릴  있었다.


맛있기는 정말 맛있는데.
이게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라니, 대체 무슨 음료수야.
이건 악마의 음료다!
나는 왜 남자일때 이런걸 입에도 안댔을까.
인생 절반 손해봤어.
옆에서 세찬이 '그렇게 좋냐?'는듯이 흘겨보고있지만, 모르겠다.
집에가면 밀크쉐이크 레시피부터 검색한다. 딸기도 사재기해야지.

30분동안 이것저것 잡다한 이야기를 하고, 드디어 도민석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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