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흡혈귀가 되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허벅지는 거의 나은것같다. 왼쪽도 세게 힘을 주는게 아니면 그럭저럭 움직여진다.
와, 생각해보면 드디어 이 몸으로 첫 걸음마를 떼는건가?
정신을 차렸을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누워있거나, 앉아있기만 했었다.
그리고 어제 세찬의 지랄로 인해 휠체어는 수명이 간당간당한 상태.
나는 옆방에 있는 세찬에게 목발을 좀 가져다 달라고 소리쳐 부탁했다.
잠시후, 세찬은 병실문을 열고 들어와 목발을 건넸다.
나는 목발을 받아들고 한세찬에게 말했다.
"어이, 그거 아냐? 이거 지금 이 몸으로 하는 첫 걸음마야."
누구누구덕분에 말이지.
나의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찬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어쩌라고. 동영상이라도 찍어줄까?"
"…어차피 아무것도 안찍히잖아."
세찬은 '그렇지.'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나가려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녀석에게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녀석을 불러세웠다.
"잠깐, 가지말고 여기 서있어봐."
"왜?"
나는 목발을 짚고 일어나 세찬의 앞으로 나아갔다.
"등 대봐. 키좀 재보게."
"흠."
아마 내 기억상으론 세찬의 키는 184cm 정도다. 그 뒤로도 컸는지 안 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면 내 키는 175cm여서 남자였을 때도 나랑 세찬은 꽤나 키 차이가 났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서 보니까 좀 너무 큰거같은데?
나는 손으로 세찬의 정수리를 짚어보고 대충 차이를 가늠해봤다.
대충 머리통 하나는 넘게 차이나는것같은데. 사람 머리가 평균적으로 몇센티 정도지?
"160cm? 정도 될거같지?"
"아마도. 그런데 이렇게 보니 원래 릴리스보다도 작아진것같다."
제기랄, 키가 작아진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너무 작아졌잖아.
160이라고? 남자키 160이면 너무 작은거 아니야?
아니, 여자키로 생각하면 괜찮은건가?
게다가 세찬의 말로는 원래보다 더 작아졌다고 한다.
흡혈귀로 변하면서 작아진걸까? 그럼 반대로 생각하면 앞으로 클 수도 있다는 거겠지.
나는 키는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래 남자여서 그런게 아니라, 일단 시선 높이가 편해지고, 옷 같은걸 입어도 키가 크면 맵시가 살잖아.
괜히 모델들이 다 키큰 미남,미녀가 되는게 아니다.
키가 크면 상대적으로 머리가 작아지고, 비율이 좋아진다.
아니, 그딴 것보다 그냥 키는 컸으면 했다.
160은 시점이 너무 낮단 말이야.
앞으로 우유라도 매일 마셔야하나.
흡혈귀도 우유 먹으면 키정도는 크겠지?
"그래, 이제 끝났냐? 이제 나 밥먹으러 갈거니까 혼자 놀아."
"맞다. 세찬, 우리 아빠랑 따로 연락할 방법 같은거 있어? 여기 핸드폰은 안돼서."
"아, 너는 이게 없지."
세찬은 귀를 덮은 머리카락을 슬쩍 치워서 귓볼에 달린 귀걸이를 보여줬다.
은색의 가느다란 십자가귀걸이.
녀석의 더벅머리가 가리고있던건 흐리멍텅한 눈 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이걸로 멀리 떨어진 동료 사냥꾼에게 메세지를 보낼 수 있지. 정해진 단어, 문장만 가능하지만."
"오. 신기하다. 무전기 같은건가? 어떻게쓰는건데?"
내가 묻자, 녀석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귀걸이를 만지고, 정해진 단어, 문장구조를 조합해서 메세지를 만들어서 말하고 손을 떼면 돼. 상대쪽 귀걸이에 없는 단어는 문장이 되지 못하니까, 정해진 단어만 쓰도록 되어있는거지."
"음. 너 설명하는거 잘하는구나?"
물어보지도 않은정보까지 술술 말하고있는게, 투머치토커 기질이 좀 있는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녀석은 뭔가 설명하는걸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 오토바이도, 뭐더라? 혼다 머시기?
아무튼 그거도 모델명부터 성능, 특징점이라든가 줄줄 읊고다녔고.
무슨 위키백과인줄 알았어.
내가 볼때는 그냥 땡기면 잘 나가는 오토바이였는데.
"뭐. 너도 필요하냐? 남는거 있긴한데."
"오, 진짜? 그럼 고맙지."
이녀석 왠일이지?
오늘부터는 뭔가 달라지기로 한걸까?
"따라와."
나는 세찬을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음, 잠깐만, 생각해보니 저거 귀걸이잖아.
나 귀 안 뚫었는데. 어?
그렇구나. 이새끼 내 귀에 구멍낼 생각으로 친절해진것이 분명하다.
"그거, 무조건 귀에 달아야 쓸수 있는거냐?"
"물론이지. 안그랬으면 내가 이걸 뭣하러 귀에 달고 있는건데."
"그냥 중2병스러운 취향 같은 거 아니었어?"
"…"
뭐, 남자가 취향 맞으면 귀걸이 낄 수도 있지.
만약 얘가 자기 취향으로 끼고 있는 거라고 했어도 나는 별 말은 안했을 거다.
뭔가 메탈스럽다고 해야하나?
이녀석의 반사회적인 면상과 덩치때문에 조금은 어울리는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얘는 특별히 취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연구자씨 귀에도 귀걸이라든가 피어싱이라든가 좀 달려있었고.
아빠도 최근봤을 때는, 비슷한 귀걸이를 끼고있었다. 평소엔 빼놓고 있었나보다.
세찬은 어느새 작은 소형못을 하나 꺼내들었다.
"원래는 고문용 못이지만, 이정도면 귀는 뚫을 수 있겠지."
못에도 종류가 있는모양이다.
물론, 그게 원래 어디다 쓰던 건지는 전혀 궁금하지않았다.
역시 이새끼, 알고싶지 않은 정보까지 털어놓는게 설명충기질이 다분하다.
"굳이 고문용이란 말을 할 이유 없지 않아?"
"어떤 못이 어디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한번씩 박아 보고싶은데. 언제 한번 도와주겠어?"
"뭔, 개소리야!"
이놈은 왜 내 몸에 구멍을 못내서 안달이야?
이 몸땡이 안에 있는건 세상에서 하나뿐인 부랄친구 김석주라니까?
귀뚫으러 따라 왔다가 고슴도치가 될뻔했다.
녀석은 아쉽다는듯이 오른손으로 못을 만지작거렸다.
아. 그러고보니 이녀석 왼손을 깁스하고있잖아.
지금 얘 손으로 안전하게 귀를 뚫는게 되나?
뚫을때 뚫더라도, 이새끼는 일단 피하자.
"시바! 맞다. 너 지금 왼손 깁스했잖아! 나중에 해, 나중에."
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매번 늦게 깨닫는걸까.
한손, 거기다 익숙하지도 않은 손이면서, 무슨 배짱으로 내 귀를 조져놓으려고?
"어차피 금방 낫잖아?"
"그래도 아픈건 아픈거잖아!"
"그정돈 참을 수 있잖아."
"몰라. 다 나으면 해."
이제 조금이라도 아픈건 싫다고.
나는 목발을 짚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찬은 아쉽다는듯, 침대 옆 서랍에서 작은 플라스틱 못상자에 꺼냈던 못을 다시 가지런히 담아넣었다.
이놈은 사실 사냥꾼이 아니라 목수인거 아닐까?
"그래서, 스승님한테 뭐라고 하려고?"
"그냥 뭐하는지 물어보려고."
150억을 마련하려면 한동안 꽤나 바쁘게 계실것 같긴 한데, 어째든 아빠가 돌아와야 뭘 할 수가 있었다. 내가 사회에서 쓸 도구도 아빠가 가져다 준다고 하셨고.
약품 테스트도 어느정도 끝났다고 들어서 곧 퇴원할 수도 있을것 같은데, 나 혼자 집에 가기도 불안하고.
세찬은 귀걸이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음…현재위치, 합류기간, 언제?"
꽤나 딱딱한 단어였다.
잠시후 세찬이 입을 열었다.
"현재위치, 바티칸, 교회. 합류기간, 셋. 이라고 하시네. 아마 3일 쯤 뒤에 오실것 같다."
"오, 무슨 삐삐같다."
"삐삐 써본적 없잖아."
"그렇지."
나도 인터넷에서 봤을뿐이지, 써봤을리가 없잖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였던 구세대 유물이라고.
어째든, 3일은 더 있어야 병원에서 나가든 뭘 하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때면 세찬이 깁스도 풀겠네.
물론 내 귀는 안전한 사람한테 뚫어달라고 해야지.
------
"검사결과가 나왔어, 석주씨. 꽤나 흥미로워."
"어떻길래요?"
"축하해. 너는 완전한 흡혈귀가 됐어. 네 몸은 거의 릴리스 그 자체야."
"윽, 축하할 일이 아니잖아요!"
"몇가지 붕괴시술에도 꽤나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되는걸 보니, 완전히 가주급 흡혈귀. 어떤 원리로 이렇게 된건지는 솔직히 나도 밝혀낼 재간이 없다. 이런 사례는 정말로 몇천년동안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
"몇천년이요?"
"그래, 이정도로 완전한 변화는 과학이 아니라 신화의 영역이니까."
"앗…."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흡혈귀인 상태라는 거다. 그것도 가주급.
원인은 모르지만.
"그래도 네 덕에, 재미있는 사실도 알았고."
"재밌는 사실이요?"
"이건 사실 기밀인데, 석주씨. 가주급이면 흡혈귀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수능력을 사용 할 수 있어. 그게 가문의 상징이 되는거지. 그건 피에 새겨진 어떤 특수한 세포 때문이야. 우리는 그걸 'R-cell'이라고 불러."
"특수능력을 부여하는 세포요? 그게 가주한테만 나타난다는 건가요?"
"아니, 순서가 틀렸어. 그걸 가진 흡혈귀가 가주가 되는거지."
"아하."
그러니까 가주는 날때부터 그렇게 태어난다는 얘기구만.
연구자는 아주 신나서 줄줄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R-cell이라는게, 원래는 추출이 불가능해. 그러니 해석도 불가능하고. 그런데, 너의 피에는 서로 다른 R-cell이 충돌하지 않고 존재하더라고?원래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음, 혹시 몸이 바뀐거랑 관련되어있는거 아닐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중요한건 그게 아냐. 너의 피가 서로 다른 R-cell을 녹여낼 수 있었다는거지."
"그게 대단한건가요?"
잘 모르겠다. R-cell이라는것도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고.
무슨 의학 드라마를 각주없이 보는 느낌이다.
"혹시나 싶어서 실험해봤지. 네 피를 용매로 너희 아버지가 처음 사냥한 가주의 피에서 R-cell을 녹여내 추출해봤는데, 그게 성공했어!"
"와. 축하드립니다."
음. 성공했다니까 축하할 일이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도 되게 설명하는거 좋아하는것 같다.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를 인정받고싶어하는 심리라고 봐줘야 하려나?
"추출이 성공한김에 R-cell에 대한 해독연구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지. 아마 릴리스의 능력은 '정신간섭'따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봐. 그것도 꽤나 강력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래요? 그럼 원래는 어떤 거였는데요?"
"패턴해석이 완료되어봐야 알겠지만, 추측으론 아마 '능력복제'라던가, '덮어쓰기', '융합'... 뭐 그런 능력처럼 보이는걸?"
"..."
능력복제같은거라고?
보통 그런 능력은 어딘가의 마왕같은 놈들이나 쓸법한 능력인데.
말도 안된다.
생각보다 내 몸의 스펙이 높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데 만약 사냥꾼중 누군가가 내 몸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끔찍한 상상이 줄줄이 떠오르고만다.
중세의 마녀처럼 십자가에 묶여 화형을 당하거나, 의식을 잃은채 모 연구시설에서 죽을때까지 마루타를 당하거나….
"어이, 석주씨? 정신 아직 여기 있는거지?"
연구자가 눈 앞에다 몇번 박수를 치며 내 시선을 끌었다.
그제서야 상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별 일 없을거야.
"아, 아아 네. 뭐..."
"그래서 말이지. 그 추출한 R-cell을 해석해서 네 몸에 주사해볼 생각인데, 어때?"
"안전한건가요? 무슨 의미가 있죠?"
"그걸 알아보려는 거야. 정말로 능력을 흡수하는지. 아마, 죽지는 않을걸."
연구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듯한.
이거, 생각해보니까 나 이미 마루타 당하는 중인게 아닐까?
뭐, 여태껏 한 것들을 보면 임상실험 아르바이트 한다는 감각이긴 한데.
그래, 아빠 아는사람이라니까 믿겠다.
하여튼 릴리스 이 흡혈귀는 죽어서도 나의 정신을 뒤흔든다.
아니, 사실 이 모두가 릴리스의 정신간섭인가 뭔가로 이뤄진 환상같은게 아닐까?
마치 통속의 뇌처럼!
물론 이런 헛소리는 언제나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의미 없음'이라는 결론으로 향한다.
"하아…알겠어요."
"좋아! 몇달뒤에 연락할게."
------------
드디어 퇴원의 날이 밝았다.
징그럽게도 긴 시간이었다.
안락하고 안전한 나의 집으로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빠는 병원으로 오지는 않았고, 직접 집으로 찾아갈테니 집에서 기다리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세찬도 팔의 붕대를 풀었다.
얼굴의 붕대는 그대로지만.
그리고 내가 병원을 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동문이 문제였다.
그래. 카메라에도 안잡히는 몸이 자동문 센서에 잡힐리가 없지!
나는 무슨 결계의 일종인줄 알았다.
세찬이 문에 다가가니 아주 부드럽게 열리더라.
"그러고보니 나, 옷이 없구나. 좀 사다주라."
나는 여전히 환자복이었다.
키가 15센티 줄어버린데에 이어서, 체형까지 바뀌었는데 집에 있던 옷이 맞을리도 없다.
진짜로 입을옷이 없다.
세찬은 썩은표정으로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어차피 남들 눈에 제대로 안보일텐데 귀찮게. 그냥 가지."
"아니! 존나 심리적으로 힘들어!"
그래, 그리고 이 자물쇠달린 개목걸이 말야?
비주얼 쇼크가 장난아니라고.
얇은 환자복 한겹, 그 안엔 아무것도 안입은 160cm 아담한 백발 소녀가, 한낮에 개목걸이로 돌아다니는 패션이라고?
거기에 한손에는 덩그러니, 가져온 게임기 하나 들고있다.
그렇게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니까 엄청 쪽팔리다.
이거 무슨 수치플레이야?
"아, 사냥꾼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다고, 대충 가!"
"아악! 싫어! 최소한 코트라도 주던가!"
"한여름에 무슨 코트야? 쪄죽을일 있냐?"
"그럼 최소한 목에 이거는 풀든가! 아니면 디자인좀 바꿔주던가!"
한세찬은 그건 절대 안된다며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거참 까탈스럽네. 진짜 계집애냐?"
"뭐? 이새끼야? 이게…"
"아아 석주씨 잠시만."
그렇게 한창 티격대다가 세찬에게 씨게 욕좀 박으려던 찰나, 연구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무슨 화장품통 같은걸 손에 쥐어준다.
"석주씨 지금 흡혈귀니까 아마 태양빛에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어. 가주급이니까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받아. 흡혈귀용 자외선차단 100% 선크림이야. 필요하면 집으로 더 보내줄게."
"와, 감사합니다. 그건 생각 못했네요."
나, 지금은 흡혈귀니까 태양에 약한거구나.
미처 생각못했네.
"겨우 태양같은 걸로 얘는 안죽어요."
한세찬이 투덜거렸다.
직접 죽여본 새끼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은 있다.
하지만 이새끼가 하는 안 죽는다는 말은…
아마 좀 고통스럽긴한데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겠지.
나는 통을 받아들자마자 온몸에 썬크림으로 샤워를 한다는 생각으로 발라댔다.
피부가 썬크림때문에 미끌거리고, 반짝반짝하지만 아픈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어?
우리는 병원을 나가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가 석주씨. 나중에 연락할게!"
멀리 보이는 연구자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나도 뭔가 보답해줘야 할것 같아서 손을 높이 흔들어줬다.
"저 ■■■표정이 무슨 애인 보내는것 같네."
"뭐래, 병신이."
소름돋게시리.
-------
내려와보니 병원은 우리동네 뒷산에 있었던 모양이다.
집이랑 엄청 가까웠네.
나는 무슨 버스나 지하철타고 한참가야 할 줄 알았다.
병원 안에서 본 풍경은 완전 딴세상이었는데, 어떻게 된건지.
그리고 확실히 선크림은 바르길 잘 한것 같다.
한낮의 태양이 엄청나게 뜨거워서, 눈처럼 새하얗던 피부가 태양에 노출된 부분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땀도 엄청 흘러서 썬크림이 흘러내릴까 걱정이다.
집에 가는도중에 꽤나 많은 인파를 마주쳤지만, 아무도 내 복장에 눈길을 주지 않고있었다.
땀때문에 환자복에 내 살색이 비치는데도 아무도 안보는걸 보면 진짜 인식저해가 통하는거같다.
으으,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이게 야외노출플레이랑 뭐가 다른걸까.
사실 세찬 이새끼 내가 쪽팔린걸 즐기는거 아닐까?
모습이 릴리스만 아니었으면 이새끼도 나를 좀 배려해줬으려나.
그래, 이놈은 '릴리스'가 곤란해 하는걸 보고 즐기는게 틀림없어. 존나 변태인게 분명하다.
아, 익숙한 풍경, 낯익은 연립주택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집은 맨 꼭대기. 5층이었다.
그래도 태양빛이 사라지니, 따가웠던 피부가 진정되는 느낌이다.
한동안 나는 헉헉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도착했다."
"하악, 다음엔, 외출할때, 양산이라도…하악, 준비해야겠다, 헥.헤엑..."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날듯이 들어갔고, 거실바닥에 누웠다….
"씨발! 맞다, 피!"
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날 밤의 추억(?)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지.
방금 다이빙으로 온 몸에 빨간색을 묻히고 나서 깨닫고 말았다.
조졌다.
며칠동안 말라붙은 핏자국은, 거의 철에 녹이 붙은것마냥 진하게 굳어있었다.
굳은 피는 어떻게 지우지…?
어지럽게 뒹구는 중인 술병은 차라리 귀여운 데코레이션이다.
온 거실이 빨갛지않은 바닥이 없네.
방금 내가 방금 온몸으로 닦아낸 바닥 부분만 살짝 색이 다르다.
"아, 이,이걸 깜빡하고 있었군."
"이…시…발놈아… 걸레 들어라…?"
"하하, 하아. ……그러지."
녀석이 내가 릴리스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이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할거라면 청소는 필수다.
그리고 솔직히 양심이 있으면. 이건 치워야지.
나는 지금 시답잖은 농담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도 사라져있었다.
결국 세찬은 내가 씻을동안 거실의 상태를 내가 만족할 수있을만큼 청결하게 만든다는 임무를 받았다.
그럼 아빠는 이런 집에서 게임기만 딱 갖고 온 것인가.
아빠의 감성을 이해할수가 없어.
-----
몸이 바뀌고 처음으로 제대로 씻으려니 뭔가 또 속이 간질간질하다.
그동안 병원에서는 물묻힌 수건으로 땀을 닦고, 머리카락은 대충 물만 묻혀서 비볐다.
샤워라고 할 만한 일은 하지 못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욕실 벽에 걸린 거울을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봐도 비치는게 없다.
역시, 도구가 있어야하는건가.
나는 입고있던 환자복을 훌러덩 벗어던져 빨래통에 넣었다.
핏자국 쉽게 지워지려나?
세찬이가 치우는 중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물을 틀고 온도를 조절한다음, 적당히 따듯하다 싶어서 정수리에 샤워기를 갖다댔다.
뜨끈한 물줄기가 온몸을 적시니, 방금까지의 분노도 살짝 가라앉는 기분이다.
흐르는 물줄기가 봉긋한 가슴을 피해 갈라져흐른다.
어우, 뭔가 야해.
무슨 1인칭 vr야동 보는 기분이다.
나는 손을 들어 잠시 가슴을 쪼물거렸다.
별 생각 없이. 그냥 가슴이 거기에 있어서.
벙원에선 만질때마다 감각이 이상해질것 같아서 적당히 그만두곤 했는데, 목욕중인 지금은 쫌 더 만져보고싶네.
음, 가슴의 감촉은 대단해.
왠지 힐링되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조물거리다보니 몽롱해지는것이…….
"핫."
정신차리자.
아무리 내꺼래도, 자꾸 만지작거리는건 좀 그렇잖아.
나는 흉부의 아담한 지방에서 손을 떼고 샴푸에 손을 가져갔다.
일단 머리를 감아야한다.
그동안 병원에서 가장 씻고 싶었던게 머리카락이었다.
몸은 물수건으로 어떻게 닦는다해도, 이렇게 긴 머리는 몸도 성치 않은데 감으려니까 너무 막막했기에.
나는 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잠깐 걸어두고 샴푸를 손에 짰다.
엉덩이골까지 들라붙은 긴 머리를 대충 목에서 하나로 모아 떼어내고 샴푸를 묻힌다.
머리카락이 길어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감아야하는지 잘 감이 안온다고 할까.
뭐, 일단 비벼보면 되겠지?
그런데 한참을 비벼도 거품이 잘 안나는것 같다.
아, 이유를 알겠네.
양이 한참 모자랐다.
한번 짠 정도로는 택도 없군.
나는 2번정도 더 눌러서 샴푸를 머리에 비볐다.
이제야 좀 거품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 머리를 감는데, 이제 목이 좀 뻐근하다. 이 긴 머리카락이 물까지 먹으니까 좀 많이 무거웠다.
이건 어쩔수 없이 잘라야 할 것 같은데.
난 이 머리카락을 감당할 재목이 되지않아.
머리한번 감으니 진이 빠진다. 이걸 어떻게 매일 해? 말도 안되지.
나는 바디워시를 샤워타올에 짜서 거품을 내고 평소같이 겨드랑이부터 비볐다.
그런데 겨드랑이에 털이 없다는 느낌이 너무나 생소하다.
매끈매끈하잖아…….
가슴도 꼼꼼히……. 닦으면서 좀 더 주물거리고, 팔다리를 대충 훑은뒤 사타구니에 손을 가져갔다.
원래라면 벅벅벅 생각없이 비벼댔을 부위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그렇게 해도 괜찮은건가 싶다.
그쪽에 털도 없어서 예전처럼 막 문지를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싶고.
일단은 탐색하듯이 살짝만 문질러보기로 했다.
음, 맨들맨들한 느낌이 오싹오싹하다.
10년쯤 함께해오던 북슬북슬한 느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거라, 겨드랑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만질때마다 이상했다.
진짜 이상해.
이거, 내 털들 다 어디갔어.
그런 맨들맨들한 감촉이 뭔가 야하다.
남자의 본능이 나에게 남아있다면, 나도 아마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치고 말았겠지.
아아. 왜, 어째서 내가 이런몸이 된거야. 시바.
이런 몸으론 성행위도 못하잖아.
나는 박고싶지, 박히고 싶지않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거품과 때랑 같이 물로 흘려보내고 나는 머리를 짜며 세찬을 불렀다.
"야, 세찬아. 나 옷이랑 팬티랑 수건좀."
"……."
한세찬이 말 없이 내게 옷가지를 건넸다.
나는 수건과 티셔츠를 문을 살짝열어서 받고, 머리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와, 머리를 짤때마다 계속 물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수건 한장으론 택도 없겠다.
"야 수건 한장만 더."
세찬은 문틈새로 내민 내 손에 수건을 쥐어주고 다시 걸레질을 시작했다.
나 목욕꽤나 오래 했으니까, 거실 상황은 많이 나아졌겠지?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다가, 끝이 없을것같아서 젖은 머리카락을 올려 수건을 덮어 묶어버렸다.
남성만 있는 집에 여성용 속옷이 있을리 없으니, 팬티는 역시 남성용 트렁크팬티다.
입을순 있으려나.
다행히 골반이 커져서 걸쳐지긴 하는것 같다.
불안하게 흘러내리긴 하지만, 아예 안입는 것보다야 안정감이 있다.
그리고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 티셔츠를 들었다.
녀석이 골라준건 나름대로 남자일때도 살짝 커서 집에서 편하게 입던 티셔츠다.
생각대로, 원래 조금 크게 입던 내 티셔츠는 지금 내가 입으니까 거의 원피스가 됐다.
나는 머리카락을 덮은 수건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이열, 깨끗한데."
아직 군데군데 울긋불긋하긴 한데, 이정도면 첫인상보단 훨씬 낫다.
목욕을 마친 나를 보자, 세찬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거, 용케도 민원 안들어왔군. 피비린내가 이렇게 심한데."
"응? 피비린내가 나?"
나는 내 코가 막힌건가 싶어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비린내는 없고 약간 달달한 향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도 흡혈귀가 된 영향인가?
"뭐, 대충 창문 열어두면 빠지겠지."
나는 창문을 열고, 선풍기 방향을 그쪽으로 조절했다.
며칠정도 틀어두면 빠지지 않을까.
나는 모르겠지만.
"수고했다. 뭐 마실래? 사이다 있는데."
"아아, 그래."
나는 세찬에게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머그컵에 따라주었다.
녀석은 핸드폰을 하면서 사이다를 마시기시작했고,
나는 아직 물기가 덜 빠진 머리를 어떻게든 하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거.
목걸이도 축축하고.
"야, 잠깐 이거 목걸이좀 풀어주면 안돼냐? 물기차서 기분나쁜데."
"아, 그럼…"
세찬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시선을 돌렸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지금 나는 그냥 머리카락을 왼쪽 어깨를 넘겨 앞으로 모아 수건을 머리에 겹치고 비벼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 포즈 어디가 이상한건데?
"어이, 풀어달라니까?"
"아, 알겠으니까. 시발! 더 가까이오지마."
녀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서 나에게 던졌다.
찰칵, 목에 젖어있던 물기가 마르며 상쾌한 감각이 느껴진다.
아아.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
그런데 쟤는 왜 저런 자세지.
…설마?
"섰냐?"
"…시발."
"왜? 뭐때매?"
"아 씨발!!"
"섰네, 섰어. 그것도 남자한테. 얼레리 꼴레리다, 새끼야."
"크아아악!"
세찬은 급기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녀석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거지.
동정심이 들었다.
부모님의 원수한테도 욕망을 느끼는 슬픈 생물.
아아, 가련해.
그런데 진짜 뭐때매 선거지.
나는 신기하게도 무려 이 상황에서 호기심을 느끼고있었다.
"야, 목걸이다시 꼈음. 이제 안전함."
녀석은 내가 이 개목걸이를 벗었을때는 가까이 오려고 하질 않았다.
오히려 조금 멀리서 무장하고서 경계를 한 편이다.
……. 살벌하구만.
"하아."
세찬은 아직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이해해.
원래 거시기라는게 완전히 내맘대로 세웠다 눕혔다 할 수 있는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건 사고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와, 메세지 엄청 쌓였네.
갑자기 휴학해서 그런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메세지가 많다.
나는 뭐라고 보낼까,하다가 별일 아니고 개인사정때문에 잠시 휴학했을 뿐이라고 일일히 메세지를 보냈다.
어차피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일단은 이정도로만 대응해도 되겠지.
슬프네.
그중에는 내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 동기도 있었다.
-뭔데, 심각한 일이야? 왜 연락이 안됐음?
-ㄴㄴ 별거아님. 등록금때매 알바좀 할려구.
도민석.
고등학교 동창이며, 같은 대학교로 진학해 대학교에선 매일 같이 학식을 먹고, 비는 시간에 피시방도 같이 가면서 나름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녀석은 내가 걱정되는지 개인사정이라는 말에도 이유를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좀더 그럴싸 하도록 등록금때문에 알바를 할거라고 뻥을 쳤다.
잠깐 자연스러운 잡담이 오간뒤에 나온 말은 나를 패닉에 빠트렸다.
-그럼 오늘 니네집 가도 됨?
-아 ㄴㄴ 집 더러움
-ㄱㅊ 남자끼리 뭐 어때. 나 내일 공강인데 한잔하자. 술 사감.
-ㄴㄴㄴㄴㄴㄴㄴ
-ㅋㅋㅋ 지금 감
아 좆됐다.
어떻게하지?
나는 이 말을 세찬에게 전했다.
그러자 세찬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가 걱정이냐, 니가 자신을 인식시키는 행동만 안하면 가만히 있어도 있는 줄 모를텐데."
"아. 그러네?"
"내가 대충 둘러대서 보낼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 그래! 고맙다."
잠시후, 도민석이 도어락을 열었다.
얘는 평소에도 내 자취방에 자주 출입하곤 해서 비밀번호를 알고있었다.
도민석이 거실을 둘러볼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흠칫 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보인다고 생각해도 이건 반사적인거라 어쩔 수가 없다.
"석주 없나요? 술 사왔는데."
"석주 알바하러갔을걸요. 오늘 안와요."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술만 냉장고에 넣어두고 갈게요."
"아 그러세요."
그렇게 도민석은 기어코 집에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들어오는 도민석과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슬금슬금 옆걸음쳤다.
그러나 그때…
"아빠왔다, 석주야. 응? 너 지금 뭐하냐?"
아빠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