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흡혈귀가 되었다
약품테스트는 생각보다 무서울게 없었다.
몇가지 주사를 맞고 감상을 들려주거나, 뭔가 바르고 체온을 재거나, 손톱을 깎아서 무슨 화학약품통 같은데 담그거나, 머리카락 몇가닥을 뽑아 약품을 발라보거나 하는 등의 일이었다.
아빠는 이 과정을 보고 꽤나 흥미로워 했지만, 글쎄.
나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약품테스트라기에 무슨 피부에 염산이라도 들이 부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건 다행이라고 할까.
"자, 이 밴드 붙인곳은 절대 건드리지말고, 씻을때도 물 들어가지 않도록해."
"네."
마지막으로 내 등에는 3×4배열로 동그란 밴드가 붙여졌다.
며칠뒤에 각각 약품이 흡혈귀의 몸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실험한다는 모양이다.
나는 아빠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선 병실로 돌아왔다.
"근데 아빠, 병원은 안전한거야?"
"음, 여긴 대 흡혈귀용 인식저해, 물리력 저해, 인과보호결계까지 쳐져있으니까, 최소한 흡혈귀에게서는 안전하겠지."
"그게 다 뭐야 대체."
"흡혈귀에 대응하기 위한 인간의 꼼수같은거지."
나는 그냥 대충 이해한척 하기로 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할테니까.
"그래 석주야.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냐?"
"앞으로? 여기서 나가면 어쩔건지 물어보는거야?"
"그래. 네가 인간이었다면 기억제거 만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있었을텐데.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아니겠냐."
그러고보니 나에게 급한건 사실 이제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150억따위야 아빠가 어떻게든 하겠다고 하셨으니 그렇다고 쳐도 말이야.
이 꼴로 다니던 대학을 다닐수도 없고, 알바라도 구해야하나?
직장은 어떻게 찾아야할까?
아니 그보다, 내가 흡혈귀인게 밝혀져서 다른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게 더 큰 문제인가?
지금 내 이상한 능력은 일반 사회에 섞여들어가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게 하고있다.
일단 이 머리카락부터 눈에띄는데, 나의 모습은 거울이나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는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는 신분도 없다.
당장 사진이 안찍히니 증명사진도 못찍잖아?
그리고 이 괴상한 목걸이를 빼면, 나는 나도 조절하기 힘든 힘으로 무슨 사고를 칠지 감당하기 힘들다.
사회에선 내가 나인걸 증명할 수단도 없다.
믿을건 그냥 아빠가 대단한 사냥꾼이라는 빽 하나뿐.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기엔 너무 막연하다.
원래도 마땅히 꿈은 없었다.
대학교도 적당히 성적맞고 취업 잘된다는 공대 전기과에 지원했을 뿐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답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사냥꾼의 세계엔 아직 발을 담그고 싶지 않고, 관련되고싶은 맘도 없다.
아빠가 말한것처럼 위험하기도 하고, 무섭다.
나는 세찬이나 아빠같은 동기도 없으니까.
"이런거, 갑자기 생각하기엔 너무 막막한데……."
"당장 무슨 거창한 계획을 세우란건 아니다. 석주 너도 이쪽 세계에 들어오고 싶은건 아닌거지?"
"응."
인간이랑도 무서워서 못싸우는데 어떻게 흡혈귀랑 싸우겠어.
몸이 세진다고 용기도 샘솟는건 아니다.
그리고 아픈건 질색이야.
지금도 허벅지에 힘을 주면 아리고 쓰린걸 참기가 힘들다.
더이상 다치는건 사양이야.
"그럼 아빠가 도와줄게. 뭐, 나라면 너 하나쯤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정도는 가능할테니."
"정말?"
아빠는 조금 안심한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낯설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뭐, 지금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완전히 믿어주시는걸까?
아들이 위험한 세계로 들어오지 않는걸 내심 기뻐한것 아닐까.
"다만, 이것저것 조치는 취해야할거야. 일단 물리력저해, 정신간섭방해, 인식조작, 아직 생각나는건 이정도 뿐인데. 더 필요한게 있으면 말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뭐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알아서 해주시겠지.
"아, 고마워. 역시 아빠밖에 없어."
"그러고보니, 대학교는 계속 다닐거냐? 휴학신청은 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멀쩡히 다니긴 어렵지 않을까?"
"음... 아직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게 실감이 안나서. 어쩌면 갑자기 이렇게 된 것처럼, 하루아침에 다시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꿈을 꾸는 느낌이다.
아니, 사실 꿈 아니야 이거?
벌어진 일이 현실성이 없기도 하고, 여태껏 아빠와 세찬에게 들은 판타지 설정같은 소리가 그 비현실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거기에 이 병원 밖 풍경도 꽤나 비일상적이고, 거울에 비치지 않는 내 모습까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자고 일어나면 '아, 개꿈꿨네, 스벌.'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최소한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아빠한테 다시 도움을 청했다.
"아빠, 나 지금 내가 무슨 꼴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인식저해간섭도구는 지금 갖고있는게 없는데. 지금 있는건 잡종한테나 쓰는거라서 통할지 어떨지 몰라."
"그, 그래?"
"인간의 정신으로 흡혈귀가 되어버려서 능력을 제대로 다루질 못하는 모양이지? 릴리스의 기억은 전혀 없는거냐?"
"응. 전혀."
"그건 차라리 다행이군."
인식저해라든가, 정신간섭이라든가. 뭐 '할수 있는 건' 많은 모양인데, '할 줄 아는게' 없으니, 뭘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그런걸 배울 의지가 없기도 하거니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게, 흡혈귀들이 쓰는 기술의 원리나 사용하는 방법 같은걸 인간인 사냥꾼들이 알고 있을 리도 없고, 대신 인간이 쓴다는 '꼼수'는 너무 복잡해서 개념의 이해조차 몇년동안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난 공부가 싫다.
반드시 해야하는 거라면 공부하겠지만….
"뭐, 모른다고해도 일반인으로 사는데는 별로 지장없을 테니까. 능력을 억제하는 도구는 나중에 있는대로 구해서 가져다 주마. 세찬이한테 보여주면 대충 설명해 줄거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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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왜? 석주씨, 어디 아파?"
연구자는 내 등에 붙인 밴드를 떼어내며 물었다.
"아, 배가 조금..."
"배가 아프다고? 혹시 뭐 먹은거라도 있어?"
"아뇨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먹었는데요. 흡혈귀는 뭐 안먹어도 괜찮다면서요..."
"으음...그럼 배탈은 아닐텐데. 배가 고픈거면 뭐좀 먹어볼래?"
"배고픈건 아닌것 같아요. 식욕이 없어요."
"어제 맞은 주사중에 소화기쪽에 영향을 주는 약은 없었을텐데. 이거 끝나고 한번 검사해보자."
"네..."
곧,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석주씨, 여기와서 화장실 언제갔지?"
"한번도요? 뭐 먹은것도 없어서..."
"음... CT보니까 처음 왔을때보다 방광이 엄청 꽉 차있는걸."
"네?"
생각해보니 음식은 먹지 않았지만 뭔가 계속 갈증이 나서 코코아라든가 음료수같은걸 많이 마시긴 했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지금 나는 소변 참다가 배아픈걸로 CT까지 찍은 병신이 됐다는 소리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존나 쪽팔려.
"아, 아니... 참을 수 있길래..."
"참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흡혈귀가 아예 배변활동을 하지 않는건 아니야."
"윽... 몰랐죠..."
와! 흡혈귀는 배가 아플때까지 오줌을 참을 수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누가 알지도 않아줬으면 하는 그냥 부끄러운 정보일 뿐이지만!
"하하하하! 그 몸이 배변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몰랐나봐? 그럼 이제 처음 화장실에 가는거야? 너 진짜 인간이었나보구나! 크,큭큭...!"
"네. 진짜 인간이라니까요..."
몰랐다는 말이 웃긴지 엄청 큰 소리로 웃는 연구자였다.
나같아도 웃기겠다...
"...그럼 잠깐 저 화장실좀..."
"아, 크큭...그래 갔다와. 여기서 오른쪽으로 나가서 쭉 가면 나올거야."
"네..."
나는 휠체어에 올라타서 화장실로 향했다.
슬슬 오른쪽 허벅지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왼쪽은 아직 힘을 주면 너무 아프다.
그런데, 나 남자화장실은 이제 못쓰는 건가.
나는 괜찮은데, 남들한테 민폐이려나.
이 병원이야 나랑 세찬, 아빠, 연구자 정도만 있으니까 어딜 들어가나 상관 없겠지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거부감을 지우는게 어떨까 싶어서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뭐야, 존나 자연스럽게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네, 너?"
"아 한세찬."
하필 이 장면이 저놈한테 들키다니.
내 머릿속에서 내려진 일련의 사고 과정을 제외하고 딱 상황만 보면 망설임없이 여자화장실로 향하는 내 모습만 보였을 것이다.
"'석주'야 너 적응이 참 빠르구나? 그 몸이 너무 맘에 들든?"
세찬은 내 이름을 강조하듯 말하며 히죽거렸다.
정말 재수없는 표정과 말투로.
"아,아니. 앞으로 살려면 적응을 해야될것 같아서..."
"그러냐? 그럴 수 있지, 음. 아니, 신기하잖냐. 23년을 남자로 살던놈이 무슨 고민도 없이 바로 여자화장실로 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비아냥이었다.
세찬이는 나를 의심하면서
나는 그에 허둥지둥 변명하기 시작했다.
"고민 했어! 그, 그리고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까 별로 거부감이 없었을 뿐이지…!"
생각해보니까 나 왜 이새끼 받아주고있는거지?
그냥 화장실 가는거잖아?
저 새끼가 건수 잡아서 놀리기 시작하면 아마 끊도없이 2절,3절,4절 구구절절 이어질것이 분명하다.
자리를 피하는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시바! 꼬우면 니도 변해보던가!"
나는 곧장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솔직히, 저 말은 조금 진심이다.
저녀석이 지금 내 심정을 알겠어?
그리고 아직도 날 못 믿는 모양인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계속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억울한건 억울한거다.
지금 나는 안그래도 심란한데, 저녀석이랑 말싸움 따위를 하는데 심력을 소모하기 싫었다.
나는 약간 나아진 오른다리와 화장실에 놓여진 철봉을 이용해 낑낑거리면서 어떻게 변기에 앉는데는 성공했다.
자꾸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서 고통스러울때마다 세찬의 얼굴에 행한 상해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씩 깎여 나가는것 같다.
화장실 변기에 앉으니까, 여태껏 느껴지지않던 요의가 확 몰려오는것 같다.
확실히 이런건 심리적인 요인이 큰 건가.
"후우…."
나는 심호흡을하고 환자복 바지를 변기에 앉은채로 꼬물꼬물 벗었다.
이제 오줌쌀때도 앉아서 싸야되는구나.
만약 다리가 멀쩡해져도, 다시 남자로 돌아가지 않는 한은 앉아서 싸야겠지…….
약간 자괴감이 든다. 이게 무슨꼴인지.
그래도 남자몸이나 여자몸이나, 괄약근 조절하는 감각은 비슷한것은 다행이다.
해방감과 함께 푸슈우우우욱- 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쪼로로로록, 하는 소리도 들린다.
소리만 들어도 뭔가 외설적이야.
내 인생에 여자 오줌싸는 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을 날이 온다고 상상이나 해본 적 있었나?
아니, 상상도 못했다.
나의 취향중에 스캇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세상 모든게 전부 존재하는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면 수많은 음성파일이 존재하긴 할 테지만, 찾아본적 없다.
그런데 내가 뭐때문에 이 소리를 가만히 듣고있어야 하는거냐고.
멍하니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던중, 나는 화장실 칸 안에 있는 신기한 버튼을 발견했다.
이 버튼은 뭐지?
무슨 비상벨 같은건가?
뭐, 이런 낡은 기계가 아직도 작동하진 않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콕 눌러본다.
실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눌러봤더니 무슨 시끄러운 물소리가 난다.
이런게 화장실에 왜 달려있는거야?
소리도 정말 우렁차다.
아니 이, 이거 왜 작동하는거지?
어, 어떻게 꺼야되는 거고?
생각도 못한 상황에 난 안절부절하면서 잘못했다고 속으로 빌고있었다.
앞으로 이상한거 안 건드릴게요, 용서해주세요!
…하고.
놀라서 그런지 내 물줄기도 조금 강해졌다!
"사, 살려주세요!"
쿵쿵.
잠긴 칸막이 문 너머로 노크소리가 들린다.
"뭐하냐, 너."
"세찬아!"
세찬이가 이 문 너머에 있는모양이다.
이거 무슨 흡혈귀조지는 도구같은거 아니겠지?
무슨 음향공격의 일종인게 분명해!
"야, 이거 무슨 사냥꾼 도구같은거 아니지? 나 뭐 잘못건드린거 같거든?"
"나도 몰라. 이런 도구는 들어본적없는데. 시냇물소리? 이런게 왜 필요해서 도구를 만들겠냐. 흡혈귀들 겁주려고?"
"으, 그럼 비상벨이야?"
"아닐걸. 그런거라면 남자화장실에도 있겠지."
다행히 소리는 곧 멈췄지만, 이제 내 소변 소리가 남았다.
쪼로로록…….
하하, 정말 귀엽네.
"…저,저기. 이,이제 나가줄래?"
내가 비록 남자고, 이새끼는 10년지기 부랄친구지만.
고요한 화장실에서 자신의 오줌싸는 소리를 가만히 들려주는건 도를 넘은 행위이다.
거기다 아까 괴상한 버튼 사건과 이어지니 소름이 장난이 아니다.
진짜 쪽팔림으로 죽을수도 있을거같다.
"그,그래."
세찬도 내 기분과 마찬가지였는지 말이 좀 떨리고있었다.
곧바로 화장실을 나가는 기척이 느껴지니 아주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이상황에서 저새끼가 나를 놀리기 시작했으면 진짜 목 매달았을거다.
목 매달 밧줄이 없더라도 이 길다란 머리카락으로 매달았을거야.
미치겠다. 진짜 많이도 나오네.
지금 내 얼굴에 손을 대봤는데, 진짜 엄청 뜨겁다.
온도계로 재보면 39도쯤 나오지 않을까?
쪽팔림으로 인한 고열로 사망. 뭐 그런것도 가능한거 아닐까?
대충 이제 끝인가 싶어 일어나려고 했는데, 좀 찝찝하다.
아직 뭔가 다리사이에 물기가 남은 느낌.
이대로 바지를 입었다간 바지에 다 묻어서 세찬에게 또 놀림감을 제공할것이 분명했기에, 고민이 들었다.
팬티도 없으니까 물기가 아주 선명하게 남겠지.
닦아야 하나? 아무래도 남자처럼 털어낼 수는 없을것 아냐.
나는 휴지를 5칸정도 뽑아서 가랑이로 가져갔다.
스윽, 스윽.
으윽. 이상한 느낌.
원래 있어야할 것이 안 닿고, 남자에게는 닿을 리 없는 위치에 닿는다는 감각이 소름끼친다.
아, 이짓거리를 매번 화장실에서 해야된다는건가.
갑자기 막 우울해지는데.
차라리 오래 참을 수 있으니까 목욕할때 같이 처리한다거나 그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
겨우 화장실 하나로 대체 얼마나 정신적으로 몰릴 수 있는지 확인한 시간이다.
"진짜 오바야…"
나는 바지를 올리고 휠체어로 올라타 변기에 휴지를 던져넣고 물을 내렸다.
나에게는 흡혈귀니, 사냥꾼이니, 뭐니 하는것들 보다,
이런 소소한 변화에서 현실감이 훌쩍 다가온다.
왜냐면 내가 무슨짓을 하든 이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일상이니까.
내가 인간으로, 아니 인간인척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근데 세찬이새끼는 왜 화장실 앞에 서있는거야?
방금 그 일로써 각인된 압도적인 쪽팔림 때문에 당분간 녀석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왜 기다리고있어?"
"…아니, 그냥."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녀석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게, 뭔가 요란한 상상을 한게 분명하다.
그런걸 보니 나도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내 쪽팔림을 이녀석에게도 나눠담을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이상한 상상같은거 한거지, 무려 남자를 상대로."
"개소리! 난 니가…"
"응? 뭐라구? 아, 스캇 취향이야? 큭, 크큭."
나는 피식피식웃으면서 녀석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세찬은 눈을 가릴정도로 긴 앞머리를 손으로 넘겨 정리하고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진지한척 해봤자 세찬은 세찬이다.
놀리면 다 받아주는 샌드백같은 친구.
"후… 됐다. 휠체어 밀어줄게."
"으,응?"
그런 녀석이 어느새 오른손으로 내 휠체어를 붙잡고있었다.
그런데 자세가 심상치 않다, 마치 단거리 육상선수라도 된 것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 한세찬.
"잠깐, 너 지금 한손으로 뭘……."
"흡!"
녀석이 발을 박차자, 엄청난 가속력이 느껴져서 나는 순간 몸이 뒤로 젖혀졌다.
타격감 좋은 샌드백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것이다!
머리카락도 완전히 직빵으로 젖혀져서 세찬에게 닿는 느낌이 난다.
"끄악!"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들어갔어!
그런데, 여기서 연구실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 속도는 좀 많이 오버라고 생각하는 순간…
앗. 저기 연구실 지나치는데?
"야, 지났어 연구실!"
"닥쳣!"
"야! 이 새끼야아아악!"
나는 필사적으로 휠체어바퀴를 쥐었다.
음. 목걸이 효과 죽이는군, 속도를 전혀 줄이지 못했다.
어디까지 가려고하는거야, 이 미친놈.
"병원 3바퀴만 돌고 보내주지. 방금 니가 나한테 한것처럼."
3바퀴… 아까 세찬을 놀리면서 주변을 돌았던 횟수다.
"아악, 다리! 내다리이이!"
이제 이새끼에게 느끼던 죄책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존나 멀쩡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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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화장실 다녀온다고 한거 아니었니?"
"그러게요…"
지금 내꼴을 설명하자면, 그 긴 머리카락은 완전 여기저기 날려서 붙어있고, 그중 몇 웅큼은 휠체어 바퀴에 끊어져 엉켜있었다.
거기에 온몸에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환자복이 쩍 달라붙었는데, 왼쪽 허벅지에 감아둔 붕대에서 빨간색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만신창이.
"거, 병원이 꽤 넓네요……."
좀 좁았으면 3바퀴는 금방이었을텐데 말이야.
"산책을 좀 격렬하게 한 모양이지? 오래 걸리더라."
"...네"
나는 일일히 설명하기도 지쳤기에, 나를 데려온 세찬을 대충 흘겨봤다.
"■■■, 무슨 이제 실험이 남았죠?"
"응? 방금 뭐라고했어?"
방금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이 세찬의 입에서 나왔다.
분명 듣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한건지 모르겠다.
처음 듣는 외국어문장을 들은것처럼 발음 기억도 쉽지않다.
"아, 맞다. ■■■, 얘한테 이름 안가르쳐줬군요?"
"아아. 그랬지. 당연히 안 알려줬어."
"이름? 방금 이분 이름 부른거야?"
별 이상한 이름도 다 있지. 아까랑 발음이 비슷하면서 다른것같다.
여전히 기억할 수 있을만한 발음은 아니다.
답답하네.
아, 이게 그 인식저해술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이분 이름이 뭔데?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봐. 혹시 이게 인식저해인가 그거야?"
"…말해도 괜찮을까요?"
세찬은 연구자에게 물었다.
"음, 내가 말해줄게. 석주씨 눈치가 빠른데? 이게 인식저해술이야."
"와. 신기하네요. 사냥꾼들은 다 쓰는거에요?"
"응. 흡혈귀가 인간들의 이름을 가지고 할 수 있는것들을 들어보면 꽤 놀랄걸?"
"이름으로요?"
"뭐, 이름을 흡혈귀에게 알려진 사냥꾼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죽었으니까 자세한건 모르지만, 우리가 파악한것만 해도……."
연구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살짝 궁금하긴 했지만, 이름을 알려진 사냥꾼은 전부 죽었다는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거라면 별로 듣고싶지 않은걸.
나 무서운거 별로 안 좋아해.
"…대충 그 사람을 마음먹은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돼. 사실 내막은 좀더 끔찍하지만. 그러니까, 이름은 우리 사이엔 아직 일러. 알겠어?"
"넵, 안 궁금해 할게요. '연구자'로 족해요."
아빠가 자기 이름을 물어본게 이런 의미가 있었던걸까?
아빠정도 되는 사냥꾼의 이름을 다른 흡혈귀가 알았다면, 지금 아빠는 무조건 죽었을테니까…….
내가 아빠의 이름을 알고서도 아무런 향동을 취하지 않은게, 일종의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릴리스는 그런 면에서 최악의 흡혈귀였지. 정신계통의 정점이나 마찬가지라, 사람의 정신을 헤집에서 사냥꾼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세찬은 씹어뱉듯 말했다.
정신계 특수능력이라…….
그렇게 활용하면 거의 사냥꾼의 천적이었겠네.
거기에 신체능력도 엄청 좋은 것 같으니…….
아빠랑 세찬은 대체 무슨짓을 해서 이런 괴물을 죽인거야?
"그런데, 그… 인식저해가 제가 아빠나 세찬이 이름을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적용되는건가요?"
"음… 그건 걱정안해도 돼. 아까 세찬이가 말했듯이, 인식저해는 이름자체에 작용하니까. 직접 소개하듯 알려주는게 아니면 이름으로 인식하지 못할거야."
"그건 다행이네요."
그건 참 다행이었다.
나는 꽤 덤벙거리고 충동적이라서 일일히 부를때마다 이름을 신경 쓸 자신이 없었으니까.
나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받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원리람…."
"아. 인간이 쓰는 인식저해술은 꽤나 엄중한 비밀이라서, 원리를 물어봐도 대답해줄순 없어. 미안해, 석주씨."
"아뇨, 괜찮아요. 사실 그렇게 안 궁금해요."
연구자는 축축한 내 팔을 닦아 주사를 놓고 등에 붙인 밴드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 밴드 다 젖었네. 다시 붙일까?"
"그래야하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환자복 상의를 들어올렸는데, 내 앞에 있던 세찬이 멈칫했다.
"너…."
"응?뭐가? 아,아아."
맞다, 이녀석은 모쏠아다였다. 남중이었고, 고등학생때는 내가 조져놨고, 그후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들어보진 못했으니까 모쏠이 맞을거다.
얘는 대학교도 안다니니까, CC라든가, 여친이 생겼을리도 없다.
고등학생때 이후로 그런 의지도 보이지 않았았다.
앗, 그건 나 때문인가?
아무튼, 저런 반응은 내가 연구자를 등지고 상의를 걷어올리는 바람에 슬쩍 내보인 나의 가슴때문인게 거의 확실하다.
나야 뭐, 내 몸을 자세히 본적도 없고.
결국 시선이 내 몸을 보는 시점이라서 별 감정이 안 들었는데, 녀석은 아니겠지.
웃기는 놈이다.
부모님의 원수라는 년의 가슴을 보고 당황하고 있다니.
게다가 속은 지 부랄친구고.
그렇게 순진한데 내가 석주라고 아무리 씨부려도 그 부분은 선긋고 안 믿는것도 웃겨.
이정도면 억지로 안 믿는거 아닐까.
"병신아, 꼴리냐? 나는 남자야."
"아,알아, 입 닥쳐."
내가 묘한 표정으로 상의를 흔들흔들 거리자 녀석이 경악하며 외쳤다.
"미친놈이, 그만 안해?"
"왜? 내 몸 갖고 이런것도 못해?"
"그게 정말 네 몸이냐?"
"일단 내가 컨트롤 하는건 맞지!"
이윽고 한세찬은 징그러운걸 본다는 듯이 한 팔을 들어 제 시야를 가리면서, 내 병원복 밑단을 잡아가슴께를 가렸다.
잠시후, 밴드를 붙이던 연구자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너네, 왜이렇게 풋풋해?"
내 등에 땀을 닦고 약과 밴드를 다시 붙이던 연구자의 한마디에,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뭐라구요?!""
풋풋하다고? 우웩, 진짜 물리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온다.
"하하하하하하! 장난이야. 인상풀어, 둘다!"
"와, 시바 진짜 소름돋네. 방금 좀 올라왔어."
"■■■, 한번만 더 그러면 진짜 가만 안둬요."
"그래. 큭큭… 미안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