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흡혈귀가 되었다
나는 기다리는동안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시청했다기보단, 그냥 켜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TV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이 가슴. 큰건 아니지만, 만져봤을때 한손에 들어오는 말랑함은 기분이 좋다.
내 거라는게 문제다.
손의 감촉은 나쁘지 않은데 내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각때문에 좀 낯설다.
몇분정도 쪼물딱거리다가, 내가 가장 궁금했던 쪽을 확인해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으극!"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나보다. 젠장, 존나 아프네..
환자복 바지를 슬쩍 걷어내려보니, 내가 입던 피묻은 트렁크팬티가 입혀진채였다.
음. 팬티에 손을 대는 짓은 하지 않은걸까? 아니면 그냥 다른 속옷이 없어서 도로 입힌건가?
핏자국이 묻은 붕대가 오른쪽 허벅지에 세게 둘러져있었다.
물론, 없었다.
"하아… 좆됐, 아니 좆빠졌네...크큭, 시발…"
이런 개소리라도 내뱉지 읺으면, 절대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술빨고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다른사람이 됐다고?
심지어, 성별도 바뀌었어?
농담도 이런 농담이 있을까.
거울이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침대에 발이 묶여서 움직일수가 없었다.
수갑을 몰래 풀어보려했지만, 풀리지도 않고.
그나저나, 아까 그 강력한 펀치를 날린 힘은 어디서 솟은걸까.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건데?
길어진 머리카락은 대충 보건대 엉덩이까지 내려올정도로 길었다.
심지어 검은색도 아니다. 하얀, 새하얀 은발. 흰머리라니, 할아버지같잖아.
다행히도 새하얗고 주름없는 피부를 보면 갑자기 늙은것은 아닌것 같은데.
목소리도 내 귀로 들어보건대, 듣기좋은 하이톤이지,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먹먹한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손을 쥐엇다폈다 해보고 발가락도 만져보고, 얼굴도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딜 만져도 말랑거리고 기분좋은 감촉이 느껴진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내 몸이란게 문제지!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 아까 흘렸던 눈물과 콧물을 닦은 이불을 침대옆 의자로 치웠다.
이불을 치우니 약간 쌀쌀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 분비물이 묻은 이불을 다시 덮는것도 찜찜해서 그냥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뭐야…."
당장 아빠랑 세찬이가 나를 죽이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치만, 나를 완전히 믿어줄까?
나는 불안해졌다.
믿어주는 척 하고는, 뒤에서는 사실 안 믿어주는거 아니야?
나같아도 그렇겠다.
같이 잘 살던 남자놈이, 하루아침에 다른사람, 그것도 여자가 되어버린다면….
나도 못 믿을테니까.
아빠랑 세찬이 나간지 두시간정도 지났을때 둘은 다시 내 병실로 돌아왔다.
한세찬이 돌아왔을때 나는 상황에 안 맞게도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때린 면상은 오른쪽 눈부터 엄청나게 부어서 거즈와 붕대로 둘둘 말려있었고, 목과 벽에 받혔던 왼쪽 팔까지 둘둘 깁스한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푸흡, 하하하! 너, 엄청 웃긴다……! 남의 다리 구멍내더니, 꼴 좋다!"
"닥쳐, 난 아직 너 석주인거 못믿으니까."
한세찬이 으르렁거렸다.
그래봤자 이제 무섭지 않지만.
나는 눈에서 찔끔 나온 눈물을 닦은채 녀석의 말을 무시하곤 옆에 앉은 아빠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빠, 이게 무슨일인데요. 릴리스는 또 뭐고, 흡혈귀? 그건또 무슨 이상한 설정인데요."
"릴리스는 흡혈귀야. 우리가 사냥하던."
"네?"
'우리'가 사냥하던?
정말 이상한 말이다.
아빠랑 한세찬이?
"아빠 출장대형트럭기사잖아요?"
"그건 위장이다. 석주야, 너한테는 비밀이었지만."
뭐? 나한테 비밀로하고 흡혈귀인지 뭔지를 사냥하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무, 무슨. 나 대학교 2학년이야. 그런 중2병스러운 판타지는 진작에 졸업했……."
그러자 옆에서 한세찬이 거들듯이 말했다.
"사실이야. 그분은 내 스승이시지."
"뭐? 언제부터?"
"그러니까, 8년전부터."
8년전, 그러니까 15살, 중학교2학년때부터라는 소리다.
그러고보니 그때, 한세찬은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갈곳이 없어져서 우리 가족이랑 같이 살게 됐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고아원같은 시설에 가지 않았을까.
잠깐, 그때부터라는건…….
나는 머릿속을 스친 가능성을 곧바로 내뱉었다.
"교통사고, 아니었어?"
"우리 부모님은 흡혈귀한테 살해당했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모습을 한."
한세찬은 이를 빠득, 갈았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했고, 갑자기 엄청난 분위기가 된 탓에 다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 식은땀 엄청 흘리는구나, 여기 사우나인가?
"그, 그래? 릴리스라는게 흡혈귀 이름인가보지? 응…"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여기서는 믿는다 안믿는다 따질 그런게 없었다.
안믿어도 믿는척해야지, 시바…….
"그래 석주야. 너한테 숨겨서 미안하지만, 사실 아빠는 흡혈귀 사냥꾼이고, 릴리스는 2일전에 우리가 죽였어. 아니, 죽였다고 생각했지. 지금 네 모습은 우리가 죽인 그 흡혈귀의 모습이야."
"그, 그런가요. 그럼 믿어볼게요."
왜냐하면 이게 지금까지 들었던 내용중에 가장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 아빠가 흡혈귀 사냥꾼이었고, 내 10년지기 부랄친구의 사냥꾼 스승인데다, 나는 그 친구의 부모님의 원수의 모습으로 변한, 뭐 이런 이야기 정도야.
이해할수는 있다. 이해는.
아하,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니! 사실은 전혀 이해가 안돼!
"그런데, 대체 왜? 제가 변한건데요?"
내가 변한 이유는 여전히 모르잖아!
아빠랑 세찬이가 사실은 흡혈귀 사냥꾼이었다는게, 내가 이 모습이 된 이유랑 상관이 없잖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분명 릴리스는 심장에 말뚝을 박고, 십자가에 못까지 박은뒤, 대낮에 매달아 불태웠는데 말이야……. 그러니 분명히 죽어야 했을텐데."
"아."
소름이 돋았다.
내가 석주인걸 증명하지 못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내가 의심된다면, 당장 저 말을 그대로 실행할 작자들이 둘이나 내 앞에 있다는 말이잖은가?
그리고 그 둘은 내 아빠와 10년지기 부랄친구다.
제발 내가 김석주임을 믿어줬기를 빌면서 물었다.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에요? 평범한 병원은 아닌듯 한데."
그렇다.
아까까지 침대에 묶여서 창밖을 못봤기때문에 몰랐는데, 평범한 도시병원은 아니었다.
창밖에 비춰지는 풍경은 한적한 산, 아니면 굉장히 자연 친화적인 촌 동네였다.
공기좋은 동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듯한, 아무도 없을법한 숲속.
"여긴 우리같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병원이지. 원래는 흡혈귀따위를 데려올 곳이 아니지만… 너는 내 아들'일지도' 모르고."
"…"
그래, 아직 완전히는 믿지 못하는구나.
사실 나같아도 믿지는 못할것같다. 하루아침에 바뀐 몸땡이를 납득시키기도 어려운데 그 몸땡이의 주인이 자기가 죽인 흡혈귀라면?
못 믿는것도 당연하다.
근데 억울한건 억울한거다.
나는 금세 침울해져선 내 꿰뚫린 허벅지로 시선을 내렸다.
"…뭐, 흡혈귀가 석주를 어디다 숨겨놓거나 먹어치운뒤 헛소리를 하는 따위의 경우도 충분히 고려해볼 법 해서 말야. 그런 기만술이 흡혈귀의 수법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응."
어쨌든 '석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이라는걸 알수는 있었기에, 약간은 마음이 풀어졌다.
"그리고 당분간이지만, 너는 치료를 위해서 여기에 있어줘야해. 또 몇몇 테스트할것도 있고, 당분간 너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동안 불편하겠지만, 협조 해주길 바란다. 석주야."
최소한 믿으려고 노력은 해주겠다는 것 같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네, 아빠. 아무튼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사냥꾼이니 뭐니 하는것도 그렇고, 아직은 저도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릴리스."
한세찬이다.
이녀석은 아직 내가 석주라는걸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부모님의 원수이니 어쩔 수 없나.
"김석주라고 불러, 시발새끼야."
"아직 나는 못믿겠으니까."
"…그래서 왜 불렀는데?"
"이거. 여기 있는동안 목에 끼고있어라."
녀석은 나에게 은색 개목걸이를 내밀었다.
뭐야, 이거 자물쇠도 달려있잖아?
"미, 미쳤냐? 이게 뭐야?"
"흡혈귀의 힘을 억제하는 봉인도구. 아까 네녀석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다시 묶어두고 싶지만…"
"미, 미안하긴 한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내 허벅지 이렇게 조져놓고선!"
나는 허둥지둥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나로써는 살짝, 얼굴이 며칠 쓰라릴 정도로만 때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나로써도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범주의 힘이었으니까…
"아무튼, 이걸 끼지 않으면 여기서 네 개인시간은 보장해 줄 수가 없어. 다른 사냥꾼들이 네 모든시간을 감시하겠지."
그건 좀 무섭다. 아빠랑 세찬이가 아닌 다른 사냥꾼이라면 분명 내가 실수로라도 허튼짓을 하는순간 바로 그날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그럼, 언제 풀어주는 건데?"
"내가 너를 완전히 믿을 수 있으면."
생각해보니 좀 쪽팔린 비주얼인거만 빼면, 버틸만 할것같다.
그리고 내가 이걸 순순히 끼고 있는다는 것만으로 세찬은 나를 어느정도 믿어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 내가 이거 끼면 그동안은 김석주라고 불러라."
"그래, 석주야. 최소한 그정도는 해줄수 있지."
"하, 시발 니가 언젠가 내 말도 믿어줄때가 오겠지."
나는 그 개목걸이를 받아 목에 찼다.
자물쇠까지 잠그자, 정말 내 힘만으론 이걸 어떻게 떼어볼수가 없을것 같다.
몸도 나른한게, 마치 2일연속으로 철야과제를 조지고 카페인빨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든다.
이거 진짜 효과 죽이는데.
좆같다는 점에서 감탄스럽다.
"그럼 세찬아. 서로 한방씩 주고받았으니까 이번 일은 없는 셈치자."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표하는 제스쳐를 했다.
녀석은 내 허벅지에 빵꾸를 냈고, 나는 녀석의 죽탱이를 다져놨으니, 서로 쌤쌤으로 하고 털어버리자는 화해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세찬은 무슨소리냐는 듯이 코웃음쳤다.
"허, 뭐가 쌤쌤이야? 내 예쁜 혼다 CBR 650F 에 기스낸 새끼가 너라며? 넌 이제 죽었어."
녀석은 왼팔의 깁스 안쪽에서 스윽, 못을꺼냈다.
대체 언제부터 숨겨둔거야?
나는 아연실색했다.
"자, 잠깐만…야! 미안해!"
이제보니, 가불기였다!
내가 석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흡혈귀니까 죽어야하고,
내가 김석주가 맞다고하면 녀석의 혼다 CB…뭐시기를 기스낸게 나라고 실토한 셈이었다.
"내가 그거 보고 얼마나 빡쳤었는지 모르지? 근데 너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아?"
그렇다.
나는 그때 내가 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이랗게 말했었지.
'몰라, 내가 탈땐 없었는데? 다른 새끼들이 신기하니까 타보다가 넘어트려서 기스낸거 아니냐?'
그 후 녀석은 근처 집근처 cctv를 전부 확인하고 범인을 찾을 수 없자, 전단지를 뿌리고 현수막도 만들고, 그래도 찾지 못하자 결국 자비로 수리한뒤 몇주동안 집에있을땐 창밖으로 자기 오토바이만 내려다 보고있었다.
심지어 밥그릇 들고 창문가에서 먹기까지 했다!
그때는 꽤나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차마 이제와서 나라고 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두려워 밝힐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아아아아악!!"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죽이진 마라."
"아, 아빠!"
"괜찮아, 흡혈귀는 쉽게 안죽어."
나, 나는 죽을 것 같은데?
푸욱-!
"꺄아아아!!"
바이바이, 내 왼쪽 허벅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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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한세찬 미친새끼, 진짜 찔렀어!
녀석은 자신의 깁스를 망치 대신으로 써서 기어이 왼쪽 허벅지까지 구멍을 내버렸다.
그때 나는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다가 침대가 절반정도 빨갛게 물들었을때쯤 기절했고, 깨어났을때 난 깨끗한 병실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이번엔 속옷이 사라져있었다.
부끄러워라.
아무래도 팬티가 완전히 피에 물들어있던게 아닐까.
그후, 의사가 가져다 놓은건지 어떤건지, 침대옆에 비치된 휠체어에 어떻게든 기어가서 병원이나 구경할겸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놀고있는 것이다.
나 생각보다 멘탈 강하지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감정이 들뜨다니, 뭔가 이상하긴 해.
나른함, 무력감이라는 느낌은 여전히 들지만, 뭔가 휠체어라는 한번도 타본적 없는 물건에 호기심이 더욱 강렬했던게 아닐까?
실제로 지금 꽤나 재밌다. 카트라이더 같아서.
그나저나 내가 흡혈귀가 되고나서 녀석이 손속을 두지 않는것같다.
내가 아직 남자였을 시절, 그러니까 며칠전.
아직 인간일때는 서로 주먹다짐을 한적은 없었다.
그치만 그때도 세찬은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야 힘이 훨씬 셌다.
가끔 게임방같은데서 펀치머신을 때리면 언제나 신기록이 나왔고, 무거운 가전제품을 옮길때도 혼자서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옮겼었지.
그때는 헬스하는 녀석은 이길 수 없다며 생각하고 있었는데.
헬스가 아니라 킬스를 하고있었다니.
이러니까 절대 못이기지.
"그래서 여긴 대체 어디쯤일까."
한시간정도 병원을 돌아다녀봤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정말 조용하다. 무슨 버려진 병원같았다.
다른 사냥꾼 이야기는 그냥 협박이었던 걸까?
안내 데스크에도 아무도 없고 말이다.
의사는 있는건가? 나를 치료한걸 보면 있기는 할것 같은데. 밖에는 여름임을 알리는 매미소리만 요란하다.
그치만 밖으로 나가는 문은 아무것도 열리질 않았다.
평범한 자동문으로 보이는데, 왜 안열리는거지?
뭐, 멀쩡한 문을 깨트리고 나가고싶은 마음도 없으니 당분간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아직 낮시간이라서 그런지, 밖에서 비추는 햇빛이 꽤나 따갑다. 엄청 덥구나.
병원 안쪽은 에어컨은 따로 틀지 않는것 같은데 선선한 느낌이 드는게 신기했다.
새벽에 몸이 바뀌고, 기절한다음에 몸에 빵꾸가 나고 또 기절했지,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져 밤에 눈을떴고, 몇시간뒤에 다시 빵꾸가 나서 기절해 대낮에 눈을 떴군.
오늘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네, 물리적으로.
나는 발견한 커피자판기에서 코코아 버튼을 눌렀다.
음, 작동하는건지 의심스러웠는데 말이지.
일단은 잘 되는모양이다.
코코아를 뽑아들고 호롭, 한입을 들이켰다.
달달한 느낌이 자극적이라 썩 괜찮다. 원래 단건 별로 안좋아했는데.
"여어, 흡혈귀. 컨디션은 좀 어때?"
누구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봤다.
180센티는 넘을것같은 훤칠한 키의 남성.
하얀 의사가운, 청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 수염은 몇주정도 깎지 않은건지 중구난방으로 자라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역시 한동안 자르지 않은건지,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잡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의사선생님 이신가요?"
"으음, 의사는 아니고. 연구자에 더 가깝지. 앞으로 잘 부탁해. 김석주씨."
"네."
"병실에 없길래 데리러왔어. 휠체어가 재밌나봐?"
"아, 한번도 타본적이 없어서…"
나는 약간 부끄러워서 뒷목을 긁적였다.
역시 휠체어는 이사람이 가져다 놓은 모양이다. 아마 나를 데리고갈 때 쓰려고 했겠지.
"아냐, 뭐. 보통은 탈일 없는게 좋은거지. 그나저나 지금 시간 돼? 조금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해보고 싶은 거라니… 무슨 검사같은 건가요?"
"잠깐 피검사랑, 엑스레이, CT, 몇가지 약품테스트 정도야."
"좀 많은데요…?"
"피검사는 피만 잠깐 뽑는거고 엑스레이랑 CT는 준비 되어 있어. 오래 안걸릴거야. 그럼, 약품테스트는 내일할까?"
"네. 그래요."
저 연구자가 말하는 약품테스트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살짝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에 내일 해도 괜찮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혼자 이런거 저런거 당하는것도 무섭고, 불안했다.
참. 이럴때 아빠라도 같이 있어주면 좀 안심될텐데.
"혹시 아빠는 어디갔는지 아세요?"
"아빠라면, 김중구씨? 음, 잠깐 어디 내려갔다 온다고 했는데. 금방오실거야."
뭔가 사러가신건가? 금방 오신다면야 뭐…
"그래, 그럼 일단 검사실로 가자. 휠체어 밀어줄게."
"네. 잠깐만요."
나는 절반정도 남은 코코아를 입안에 부어넣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
"하하…. 내가치울게."
나는 미안함과 쪽팔림에 고개를 숙였다.
아직, 몸에 적응이 덜돼서 그런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