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1부
왕 훼이 교수의 목을 단 칼에 날려버리고서 나는 문득 쓰게 웃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에 헌터 훈련소에 입소한지 아직 만으로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나는 조금만 보태면 거의 세 자릿수에 가까울 숫자의 사람을 죽였다.
이건 거칠고 위험하기로 유명한 헌터업계의 기준으로도 상식적이지 않은 경험이지.
특출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고가 꼬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운이 엄청 나빠.
이처럼 수라장을 헤쳐왔다는걸 감안하더라도 어쨌든 난 아직 새파란 풋내기 헌터다.
“사,살려주세요. 저,저는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는 내 나이 또래의 청년을 보고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는 내 마음을 아주 효과적으로 흔들었는데, 우선 이 페어리들을 가지고 한 실험이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납득시키는 것부터가 그랬다.
자신은 다만 왕 교수의 지시에 따라 유적의 벽화를 베껴서 데이터베이스에 올리고 기존에 확보된 해석 툴에 대입하는 작업만 하고 있었을뿐, 이 실험실에는 들어와본 적도 없단다.
죽은 두 선배 중에서도 최선임인 한 명만이 왕 훼이 교수를 따라 보안시설에 출입했을뿐 지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중으로 된 보안시스템을 감안할 때 은근히 설득력이 있는 진술이다.
“이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난 댁을 잡아서 끌고 가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다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멀쩡히 살려서 남겨두고 갈 수는 없어.”
“따라가겠습니다. 정 데려가기 힘들다 싶으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음, 미리 말하지만 조금만 수상쩍은 수작을 부려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쓸거야. 우선 이 사람들을 부축해서 옮겨. 부상은 전부 치료됐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불행히도 일곱 명의 페어리들 중 최종적으로 천사의 손길에 의해 살아남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불과 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워낙 상태가 위중해서 겨우 삼 분의 쿨타임이 두 번 도는걸 견디지 못한 것이다.
내가 공교롭게도 마지막 희생자들이 희생되는 순간에 들어왔을 확률은 낮으니 이 실험실에 연결된 공간을 뒤지면 페어리들을 가둬놓은 수용시설을 찾아낼 수 있겠지.
가능하다면 구출해야겠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증거만 챙겨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충분한 증거를 갖춰 돌아가면 아예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중공 정부에 정식으로 그들의 해방과 보상을 요구하거나 여차하면 대대적인 구출작전을 벌일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정부로서도 중국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는건 여러모로 부담스러울테니 이면합의로 받을 것 받고 조용히 끝날수도 있겠지만, 일단 희망은 품어봄직 하잖아.
“찾았다. 이 문을 통해 들여왔나보군. 이봐, 쳔. 뭐하는거야. 빨리 따라와.”
“예, 예. 지금 갑니다 선생님. 다,다리가 떨려서 그랬어요.”
저 친구, 다리만 떨리는게 아니라 말도 떨려서 Sir의 발음이 무척이나 기묘하게 들리는데.
나는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맞은편 벽에서 찾아낸 미닫이 형태의 문을 옆으로 세차게 밀쳐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몸은 멀쩡해졌을텐데 충격때문인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페어리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리 쳔도 허겁지겁 달려오다가 우뚝 멈춰선다.
나는 혀를 차면서 탄식했다.
“젠장.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보기 짜증나는 광경이구만.”
한 쪽에는 배가 갈라져 죽은 페어리들이 열 서너구나 쓰레기처럼 쌓여있고, 그 뒤쪽으로는 직각으로 꺾어 올라가는 환풍구를 갖춘 소각시설까지 보인다.
한층 더 악질적인건 아직 살아있는 포로들이 갇힌 곳에서 멀쩡히 보이는 자리라는 것.
밖으로 끌려나갔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걸 코 앞에서 봤으니 정신이 멀쩡할까.
나는 일그러지는 얼굴로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며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서 안쪽으로 달아나는 페어리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데리고 나갈지 고민했다.
일단 데리고 나가자.
사실 리 쳔의 생살여탈을 두고 고민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언뜻 봐도 스물이 넘는 이 가여운 페어리들 중 한둘이라도 살아서 한국군이 대기하는 곳까지 도착하면 기적이긴 했다.
하지만 탈출 과정에서 죽는대도 여기서 죽음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자물쇠가 잠겨있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가 시체에서 열쇠를 찾을 필요없이 에테르 블레이드로 문을 통째로 잘라낸 뒤 창살문을 바깥쪽으로 떼어내듯 열었다.
겁먹은 눈으로 뒤쪽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페어리들을 달래서 데리고 나오는데는 시간이 약간 걸렸는데, 말이 안 통하니 어떻게 안심시키기가 어렵더라.
그래도 일단 감옥 겸 소각장으로 쓰이는 방을 빠져나오니 보안요원들과 연구원들의 참혹하게 베인 시체가 눈에 들어와서인지 최소한 내가 그들의 편이라는건 인식한 것 같았다.
통제에 따라주기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손짓발짓으로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음, 좋아. 다들 지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보이는군. 이봐, 식당도 기숙사처럼 1층에 있나? 데리고 나가기 전에 뭐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은데.”
“급식시설은 건물 바깥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에 음료 자판기가 두 개 있어요.”
“그래? 자, 나가자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구만.”
페어리들의 기색을 봐선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것 같은데, 그럼 괜히 식당시설을 털어 먹였다가 탈이 나는 것보다는 이온음료나 주스 정도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불안감에 가득찬 와중에도 무척 협조적으로 구는 리 쳔의 안내를 받아 실험실을 나온 나는 유적 안쪽으로 향하면서 만나는 사람을 모두 제압했다.
불행히도 섣부른 저항을 선택한 적이 열 다섯이나 죽음을 맞았지만 두 명은 구명을 댓가로 이 위험천만한 탈출극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는데, 안색이 거무죽죽한게 보기에 안쓰럽다.
정부에서 보안서약을 요구하는 비밀시설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각오했어야 할 일이지만, 그들 중 이런 식으로 생명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페어리들은 힘겹게나마 어떻게든 견뎌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중간에 발견한 자판기 하나를 부숴 수분과 열량을 보충한 덕에 기운을 좀 차린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움직이고 있겠지.
“위로 올라가는 출입구가 있다는건 확실하겠지?”
“그렇다니까요. 속였다간 바로 제 목이 날아갈텐데 무슨 배짱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런데 왜 연구할만한 유물이 많이 모여있는 핵심적인 공동에서 더 가까운 쪽이 아니라 먼 쪽에다 주요시설을 지어놓은거지? 숙소를 오가는 시간이 낭비되잖아.”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요. 한국측 영역과 너무 가까워서 그런게 아닐까요?”
오, 이건 반가운 소식이다.
그 말을 듣고 방향을 가늠해보니 확실히 지하통로는 남쪽으로 뻗어있었다.
여러 부가기능이 달린 손목시계의 작은 나침반을 보다가 씩 웃었다.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막아놓았을수도 있지만 유적을 훼손시키는 규모의 공사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충분히 부수고 올라갈 수 있다.
길쭉한 복도형의 통로를 지나는동안 나는 빠르게 움직여 좌우의 석실을 탐색했다.
페어리들은 기운을 차리긴 했어도 몸이 많이 상해있어서 걸음이 느렸고, 그들을 혹독하게 재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강이나마 둘러볼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리 쳔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억지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건지 몰라도 꽤나 밝아진 목소리로 이 유적에 대해 그가 아는 것을 설명한다.
그 태도를 보고 뒤에서 따라오던 두 포로의 표정이 무척이나 안 좋아지는걸 보니 이 가여운 대학원생은 아예 귀순하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아니면 심각하게 눈치가 없는 사람일수도.
“지금은 빈 석실로 보이지만 원래 방 안에 금속으로 된 유물이 여럿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철제인줄 알았는데 쇠가 그 오랜 세월동안 녹슬어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요? 칭화대의 쉔밍 교수님께서 그게 지구에는 없는 새로운 금속원소라는걸 발견하셨죠. 대단하지 않습니까? 적게 잡아도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버티며 형태를 유지하는 금속이라니. 게다가 물성이 강철에 비해도 모자라지 않는다구요. 쉔밍 교수님은 이 발견으로 중화의 산업이 새로운 경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들떠서 좋아하셨죠. 참 성실하고 좋은 분이었는데.”
“그 교수는 지구로 돌아갔나보지?”
“아뇨, 아까 두 번째 전투에 휘말려서 돌아가셨어요. 아, 그 뿔테안경을 쓰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던 분이 쉔밍 교수님입니다. 아무튼, 그 금속으로 된 유물 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침대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훨씬 더 복잡한 기능을 하는 물건이었어요. 쉔밍 교수님과 달리 왕 훼이 교수님은 그게 제단이라고 생각하셨죠. 희생물을 바치는 제단이요.”
뭐지 이 새끼. 지금 돌려서 날 욕하는건가.
아니면 감수성이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있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뭐 그런건가?
보아하니 쉔 밍이라는 교수도 아까 내가 목을 날린 민간 연구원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살해한 당사자 앞에서 쓰기엔 너무 정중하면서도 객관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신기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리 쳔의 눈동자를 보고 비로소 그가 아직도 공포에 질려있으며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내 호의와 사기 위해 친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 제단을 복원해서 희생제를 재현할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원. 그 업보가 금방 돌아올텐데 말이야.”
이곳에 들어오면서 켠 동영상은 이제 겨우 한 시간 남짓을 촬영했을 뿐이지만 그 길지 않은 영상 안에 담긴 내용은 중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 살인이 전쟁범죄라고 문제가 될 여지도 있지만 그거야 편집하면 그만이고.
물론 우리 국방부도 다 믿을수는 없으니 약점을 잡으려고 드는 것에 대비해서 민감한 부분을 잘라내는 작업은 윤기정과 강승호에게 지시할 생각이었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리 쳔과 내 대화를 듣던 두 명의 포로가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내게 따지고 든다거나 이제 와서 저항을 하려는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마다 있는 저 돌로 된 제단은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가능한 비파괴검사와 파괴검사를 모두 해봤지만 딱히 밝혀진게 없어요. 내부에 뭔가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냥 통짜 돌로 된 제단과 비석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마법에 대해 발표한 후로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마법적 기능이 있을거라는 추측이 나왔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죠. 전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상징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렇군. 석실마다 빠짐없이 있으니까. 하지만 상징물이라기엔 너무 단순한거 아닌가?”
“글쎄요. 따지고보면 십자가도 모양이 복잡하다고 보긴 어렵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이건 중국에서 아이템 제단에 대해 뭔가 발견한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나는 리 쳔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안도하면서 짐짓 흥미로운척 제단에 다가갔다.
손을 가져다대니 모양과 장식만 비슷한게 아니라 아이템 제단이 맞았다.
역시 이건 내게만 반응하는 것 같다.
이후 제단에 반응하는 능력을 가진 이능력자가 더 나올지 어떨지는 몰라도 일단은 나뿐인 것 같으니 조금 더 여유롭게 생각하고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뭐, 조바심이 난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처음 요정의 숲에서 아이템 제단을 발견하고 첫 구매를 했을때는 굉장한 기연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이 제단이라는게 유적지마다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흔하디 흔한 유물인데 보안이 걱정된다고 파괴하거나 감춰봐야 아무 의미가 없겠지.
잠시 휴식을 지시하고 아까 자판기를 부수고 챙긴 음료수를 페어리들에게 먹였다.
리 쳔에게도 한 캔 마시라고 허락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헤 웃으면서 콜라를 따서 들이킨다.
물론 다른 두 명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힐끔거리며 곁눈질만 한다.
내가 엿들을까 걱정이 된다면 중국어로 밀담을 나누면 될텐데,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굴리는걸 보면 저들도 리 쳔을 확실하게 배신자, 그러니까 내 편으로 인식한 것 같다.
이 가여운 대학원생은 한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음, 중국 본토에 가족들이 있다면 꽤나 눈물짜는 비극이 벌어지겠구만.
짧은 휴식시간동안 나는 빠르게 아이템 창을 훑었다.
완성된 최종아이템은 수호자의 맹약과 천사의 단지까지 두 개.
여섯 칸의 인벤토리 중 네 칸이 남아있는 셈인데, 이건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방어력과 체력을 최우선으로 하고 공격력이나 주문력은 최하위로 두어야겠지.
상점창을 쭉 내려보다가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하면서 스크롤을 다시 올렸다.
어? 이미 구매한 수호자의 맹약과 천사의 단지가 아예 항목에서 사라졌네?
게임에서는 같은 아이템을 중복구매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중복구매로 효율이 나오는 아이템이 거의 없어서 보통은 고의적으로 패배를 유도할때나 하는 짓이긴 했지만 이렇게 구매가능 목록에서 사라져 버리는건 예상치 못한 사태다.
끄응, 그럼 나중에 한번 구매한 완성아이템을 팔아치웠다가 필요해질 때 다시 구매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건가.
한번 팔아보고 목록에 재생성되는지 어떤지 알아보면 확실해지겠지만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천사의 단지와 수호자의 맹약은 내 목숨줄이나 다름없으니 팔 일이 없겠지만, 상황에 따라 아이템 세팅을 변경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휴식 끝. 다들 일어나. 거기, 확실하게 부축하랬지. 무슨 짐짝이야? 팔을 그렇게 들면 아프실거 아냐. 겨드랑이 사이로 어깨를 넣어서 일으켜 드리라고.”
내 목소리에 묻어있는 미세한 짜증을 감지했는지 리 쳔이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보면 또 눈치가 아주 없는 놈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