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부
들고 있던 권총을 홀스터에 갈무리하고 두 사람을 위협해 밖으로 끌고 나왔다.
이미 이능으로 두 명을 처형한 이상 총을 겨누고 있을 필요는 없다.
바깥의 경비에 이어 시신이 남았지만, 날카로운 바람을 쏘아내는 형태의 원거리 공격이능은 의외로 드물지 않으니 저 흔적들만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길쭉한 복도 끝에 있는 계단실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와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첨단 보안문이 위화감 가득한 모습을 드러낸다.
안에 카메라가 있다고 하기에 에테르 폼을 활성화하고 바짝 붙어섰다.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고 짐짓 태연한 척 자연스럽게 보안대로 다가선다.
왕 훼이 교수가 생체인식을 하는 동안 리 쳔이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듯 침을 꿀꺽 삼켰지만 딱히 수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동안 왕 교수가 침중한 목소리로 묻는다.
“우릴 죽일 셈인가?”
“고민중입니다. 아, 다른 문은 열지 마세요. 쓸데없이 희생자만 늘어납니다. 교수님, 나도 좋아서 하는 일 아녜요. 괜한 사람 해치고 싶지도 않구요.”
“목소리를 그렇게 낮출 필요는 없네. 생활패턴이 다양해서 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음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으니까. 휴우, 다시 생각해보게. 나는 그냥 힘없는 늙은이야. 목적을 달성했다면 이대로 놓아줘도 무슨 해가 되겠나?”
“알았으니까 조용히 하시라고. 음, 근데 지하 유적은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이 엘리베이터는 우리가 판게 아니야. 원래 있던 수직동굴에 설치만 한거지. 숙소건물 자체는 새로 지었지만 암석이 딱 알맞게 깎여있었다네. 불가사의한 일이지. 측정된 연대로 봐선 무려 수천년 전의 일인데, 그 지층이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는건 설명이 잘 안 되는 일이거든. 아무리 퇴적의 진행이 늦어지는 사막지대라고 하더라도...”
“흥미롭지만 그런 설명은 나중에 들을게요. 구조만 말하라구요. 이해 안 되시나?”
“끄응. 복잡하지 않네. 승강기 앞으로 쭉 펼쳐진 단일 동굴이 전부야. 주변으로 가지쳐서 난 공간들은 그리 넓지 않아서 창고로 쓰이던게 아닐까 싶고.”
인상을 찌뿌리면서 말을 자르니 이 유적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존재인지 설명하던 왕 교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꿍얼거리듯 대꾸한다.
그러고보니 층수를 가리키는 버튼은 한자로 적힌 지상과 지하 딱 두 개밖에 없다.
그의 설명이 정직하다면 이 유적은 우리가 크기가 압도적으로 더 클 뿐 우리가 요정의 숲 북부에서 찾은 유적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라크에게 들은 바로는 석조건축물의 뼈대가 남더라도 마력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조명과 온도조절기능을 비롯한 갖가지 편의시설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졌을거라고 했지.
그러니 우리가 단지 동굴이나 지하신전이라고 여겼던 유적들이 고대에는 많은 인구가 상주하면서 제각기 다른 기능을 하던 건물들이었던 셈이다.
오졍의 숲 북부에 있는 유적은 농경지를 관리하던 제어소라고 했고,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유적은 마석광산 종사자들의 휴식을 위한 일종의 대규모 아파트라고 했었지.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제단은 그냥 어디에나 있다고 했다.
그럼 여긴 뭐하는 곳이었을까?
쭉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육중한 문이 끼익하는 소음을 내며 열린다.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경찰복과 비스무리한 제복을 입은 남자가 친절하게 응대한다.
“왕 교수님? 겨우 몇 다경 전에 올라가지 않으셨습니까? 피곤하실텐데, 쉬지 않으시구요.”
“놀라는 티 내지 말고 듣게. 침입자가 있어. 지금 은신 이능을 활성화한채로 바로 내 등 뒤에 숨어있지. 중국어는 하지 못하는 것 같아.”
“크흠. 그렇습니까. 외부의 경비소대에게 연락을 해야겠군요.”
“아주 잔인한 놈이야. 내 제자 두 명이 이미 놈에게 살해당했다네.”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하셔도 됩니까?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대화가 길어지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난폭한 짓을 할지도 몰라요. 경비소대에 연락하는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교수님께선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러지. 오케이, 땡큐. 아 윌 비 백 순.”
중국어로 한참을 대화하는걸 보면서 나는 그 꿍꿍이가 대강 짐작이 가서 픽 웃었다.
위협을 해서 끌고 온 포로가 전폭적으로 협조를 해줄거라고 믿는게 바보지.
저렇게 한참이나 수군거리다가 끝 마디를 영어로 생색을 내면 대화내용이야 뭐, 뻔하잖아?
이대로 저 교수를 따라가다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때쯤 ‘아까 그 관리인하고는 무슨 대화를 그리 오래 나눴냐?’면서 추궁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그보다 확실한 쪽을 선택했다.
지금 한국과 중국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거든.
저 관리인은, 음, 권총을 차고 있으니까 무장한 전투원이라고 봐도 되는거 아닐까?
서걱, 태연한 척 왕 교수를 배웅하는 자세 그대로 관리인의 목이 날아간다.
“안 돼!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요? 이 안에 있는 사람을 전부 죽일 셈인가?”
“필요하다면 그럴겁니다.”
“자네 임무가 뭔지는 모르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는거야!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마구 해치면 그 업보를 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우리가 먼저 시작한거 아닌데요.”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창백하게 질린 두 사람을 앞세워 유적 안쪽으로 이동했다.
늙은 교수의 분노에 어울려 논쟁을 할 시간이 없다.
그야 아무것도 모르고 외계 문명의 신비를 탐구하며 유적 연구만 하던 저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쳐들어와 사람 모가지를 날려대는 내가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겠지.
되도록 사람을 해치지 않고 경고만 남기고 싶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걸 어쩌겠나.
“잠깐. 이 계단은 뭡니까? 내 눈엔 유적의 일부가 아니라 따로 파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거긴 그냥 창고야. 기자재를 모아두려고 임시로 만들었지.”
글쎄, 식은땀에 푹 젖은 이 친구 얼굴을 봐선 단순한 창고가 아닌 것 같은데.
애써 표정관리를 하지만 왕 교수 본인도 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고.
이 할아버지가 어디서 약을 팔아?
“내려가봅시다. 앞장서세요.”
“벼,별 거 없다니까? 자네가 원하는 연구자료는 유적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아니, 교수님, 나 아세요? 내가 뭘 원하는줄 알고 댁이 그걸 판단합니까? 내려가시라니까.”
적극 부정하는 모습을 보니 저 지하실이 아주 중요한 시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좀 크긴 하지만 이런 형태의 유적,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봐야 벽화와 석조 기둥, 조각상, 아이템 제단 등이 있겠지 뭐.
중국에서 아이템 제단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았다면야 무척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그럴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꽤나 높은 직위의 소환사인 라크조차 아이템 제단에 대해 ‘단순한 제사용’이라고 하지 않았나.
투쟁의 협곡에서 벌어지는 제례 전투에 대해서도 설명이 게임 속 설정과는 미묘하게 달랐고.
“오, 이건 아까 승강기를 타기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장치인데? 여긴 단순한 기자재 창고에도 생체 인증을 요구할 정도로 보안에 철저하게 신경을 쓰나봅니다?”
빈정대면서 재촉하니 왕 교수는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과 눈을 가져다 댄다.
승강기가 있는 계단실로 들어올 때도 감탄했지만, 저런 보안장치는 영화에서나 봤는데 실제로 쓰이긴 쓰이는구나 싶어서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에 철문이 열린다.
두 사람을 앞세우고 열린 문을 지나쳐 들어가던 나는 그만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오, 왕 교수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벽화의 해독이 제대로 된게 확실한가요? 실험체의 소모율은 그대로인데 아직 어떤 에너지 유동 현상도 보이지 않고 있어요. 벽화대로라면 부활의식이 진행된지 반나절 안에 조짐이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요정의 숲에서 봤던 페어리들이 개복된 채로 제단에 묶여있었다.
그 숫자는 눈어림으로 대강 세어도 예닐곱 명 이상.
그들이 묶인 제단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도록 배치되어 있었는데, 갈라진 몸통의 틈 사이로 두근거리는 심장과 꿀렁거리는 창자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문득 홋카이도 게이트 기지 남부의 협곡에 의뢰를 받고 원정갔던 일이 다시 떠오른다.
그 때 협곡 내부 분지의 비밀연구소에서 학자들은 오크에게서 짜낸 피로 마석을 혈석으로 바꿔 이능을 기계로 재현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지.
뭐, 당시엔 무척 잔인하고 혐오스럽게 보였지만 사실 원시적인 부족사회까지 이룬 아인종이 대상이라 그렇지 따지고 보면 지구의 도축장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혈석 전환에 대한 자료를 훔쳐다 제출했으니 어쩌면 오닉스의 연구소에서도 괴수나 이종족의 피로 같은 종류의 실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지, 오크와 페어리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요정의 숲에 있는 페어리 왕국은 한국과 정식으로 교류하면서 동맹조약까지 논의하고 있거든.
즉, 한국 기준에선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굳이 역겨운걸 참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거지!”
실험실 한가운데로 쉬프트하여 에테르 필드를 전개했다.
아직 살아있는 페어리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에테르 블레이드를 흩뿌려 실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베었는데, 원형을 그리며 늘어선 제단과 각종 컴퓨터가 비치된 탁자 사이에 공간이 꽤 넓어서 조절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이미 일곱 개의 제단과 그 위에 묶여있는 페어리들, 입구에서 미처 계단을 다 내려오지도 않은 왕 교수와 리 쳔을 제외하고 실험실 안에 살아숨쉬는게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위력의 이능력은 본 적도 없어. 파괴력만 해도 A급 이상인데 저런 연사력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이능력자를...”
뒤로 자빠져서 엉덩방아를 찧은채로 넋이 나가 중얼거리던 왕 교수는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히끅, 딸꾹질을 하면서 앉은채로 기어 거리를 벌린다.
음, 에테르 쉬프트에 대해선 눈치채지 못했겠지?
은신한 상태로 뛰어내려 보이지 않는 칼날을 난사한 것으로 보일테니까.
손가락을 까딱거려 부르니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안색을 하고 비틀대며 간신히 내려온다.
피비린내가 짙게 피어오르는데, 마치 콧속으로 들어와 머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거, 무슨 실험을 하는겁니까?”
“요, 용서해주시오. 이들은 한국이 보호하고 있는 부족과는 관련이 없는 야생 페어리들이오.”
“나는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거냐고 물었는데요.”
“그게...”
한국과 미국에서 한 예상대로, 중국에서는 살아있는 이계인을 확보하지 못 했을뿐만 아니라 생존자가 있을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그러나 고고학자인 왕 훼이 교수는 유적 깊은 곳의 벽화와 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바싹 말라붙은 이계인의 시체를 부활시킬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찾아냈다.
노예종족인 페어리의 생명력을 짜내 발동하는 부활의식 절차로 추정되는 비석을 찾아낸 이들은 요정의 숲 북부에서 생포한 페어리들을 활용해 실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의식? 아니, 혹시 고대문명이 남긴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까?”
“그게, 아직 문자의 해독률은 십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벽화를 바탕으로 추정을...”
혀를 한번 쯧 차고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일곱 명의 페어리 중 두 명은 그 잠깐 사이에 숨이 끊긴 듯 움직임이 모두 멎어있었다.
혹시 내가 실수를 해서 공격이 튀었나 훑어봤지만 베인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우선 제단이 이루는 원형 한가운데에 놓인 바싹 마른 시체에 천사의 손길을 사용했다.
아무리 봐도 봉인되거나 굳어있는게 아니라 오래 전에 죽은 미라에 가까워 보였지만, 워낙 상식 밖의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니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손길은 사용되지 않고 쿨타임도 돌지 않는다.
무생물은 사용 대상으로 지정 자체가 되지 않으니까.
역시 저건 그냥 시체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라크가 말한 바에 따르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건 그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했다.
사실 소환사들은 내가 쓴 천사의 손길에도 ‘기적에 가깝다’면서 놀라워했지.
저 늙은 교수가 해석과정에서 뭔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게 틀림없다.
상태가 가장 위중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페어리에게 천사의 손길을 사용하니 갈라진 배가 붙고 피가 멎으며 생기가 돌아온다.
남은건 네 명.
다음번 쿨타임이 돌 때까지 모두 살아있으면 좋겠지만, 별로 희망적이진 않아보인다.
“이럴수가! 다중 이능력자는 많이 봤지만 세 가지라니!”
그걸 보고 왕 훼이 교수가 또 경악해서 입을 떡 벌린다.
아, 그러고보니 이건 보여주면 안 됐는데.
방금 벌인 살육에 취한 탓일까, 나는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노교수에게 뚜벅뚜벅 다가섰다.
뒤늦게 자기 운명을 직감했는지 그의 얼굴이 공포로 푸르게 질린다.
“자,잠깐만.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소.”
“미안합니다. 댁 같으면 그걸 믿겠습니까?”
“그,그럼 당신을 따라가면 되잖습니까. 따라가서 가두고 비밀리에 부려먹으면 되잖소. 나는 고급인력입니다.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조드리겠소.”
“유감이지만 그것도 불가능해요. 혼자라면 몸을 어렵잖게 뺄 수 있겠지만 혹까지 달고서 빠져나갈순 없잖아요? 늦어도 수십분 내로 외부 병력이 경비병의 시체를 발견하고 지원을 요청하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냥 참회의 기도나 하세요. 이제 보니 교수님도 날 보고 업보가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었구만요.”
“당신의 조국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시오! 이 행성의 고대문명에 대해선 내가 바로 세계 최고의 전문가요. 이곳 말고도 나는 벌써 두 개의 유적을 발굴하고 벽화를 해독했어. 유적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블린들의 전통 제례를 정확하게 복원한 것도 바로 내가 한 일이오. 그 가치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아, 오닉스 3팀이 죽을 고비를 넘긴게 바로 이 양반 탓이었구만.
필사적으로 자기 가치를 어필하는 왕 교수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었다.
고대 문명에 대해 세계 최고의 전문가?
그래봐야 당사자만 할까.
우리 쪽엔 아예 시간을 건너뛰어 살아남은 그 문명의 생존자가 한 무더기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