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1부
중국이 요정의 숲 북부의 유적을 공격해 점령하려고 한다는건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포착된 움직임은 그냥 자기들이 확보한 유적의 경비를 확충하려는건지도 모르지.
무엇보다도 변명할 말이 마땅치 않거든.
북부의 유적지 자체는 기밀로 하고 있지만 요정의 숲에 캠프를 꾸리고 원주민인 페어리 종족과 교류를 하고 있다는건 이미 언론을 타고 세간의 시선을 모았던 일이다.
한국이 점유하는 영역으로 어느 정도 암묵적인 합의가 된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들었다간 제아무리 게이트 너머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외교적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죠. 중국이니까요.”
그렇지. 외교적 압박이나 명분같은건 정상국가들끼리나 찾는거지.
워낙 상식 밖의 패악질을 부리기로 유명한 나라다보니 그런건 신경 안 쓸지도 모른다.
방위목적이라며 인근에 모아둔 특수군을 동원해 일거에 몰아친다면 다른 나라에서 좀 시끄럽게 떠든다고 해도 일은 이미 끝나있을테니 무시하고 버티면 될거라는 계획, 충분히 가능하지.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다보니 어쩌면 국제사회에서도 이렇다할 제재를 하기보다는 그저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한숨 푹 쉬고 ‘쟤 또 저러네. 이번엔 한국인가.’하고 말지도 모른다.
“현재 요정의 숲에 추가로 화력중대가 증편된 한 개 여단을 배치했습니다. 숲 북부에 있는 유적도 연구를 일시 중단하고 요새화에 들어갔죠. 하지만 충분치 않습니다.”
“최 헌터. 저희는 최 헌터가 바위사막 지대에 들어가 흑호부대의 동향을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저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적을 사보타주해주길 바랍니다. 아, 물론 전술목표는 최 헌터의 현장 판단 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해도 좋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위성사진과 지도를 짚으며 주거니 받거니 설명을 이어나가는 두 장성의 목소리에 묻어있는 열기를 보아하니 군 수뇌부에서는 국지전을 각오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문민통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정부에서도 결단을 내렸다고 봐야겠지.
위성사진을 비롯해 정보를 제공해준 미국도 발을 걸쳤다고 봐야겠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서 파괴공작을 벌이라는거죠?”
“처음 해보시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 때랑 같습니까? 중국 특수군과 교전을 벌인건 갑자기 마주쳐 그 쪽에서 먼저 적대행위를 했기 때문에 대응을 한 것뿐이었어요. 미리 알았으면 미쳤다고 들어갔겠습니까?”
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스킬들을 감안하면 또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도 같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우선 엄살부터 부리고 본다.
따라온 윤기정과 강승호도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장성을 포함한 군인들과 공무원들은 민간 기업의 헌터들에게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라고 강요할 권한이나 근거는 없어서 쩔쩔 매며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군 병력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괴수의 습격 사태가 벌어졌을 때 특수군이 전진기지 내의 민간헌터들을 징집해 지휘권을 행사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지만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거든.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선다.
“원하시는게 있다면 뭐든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직접 보장하신겁니다.”
고액의 의뢰비나 회사나 개인에 대한 세금관련 혜택 등의 여러 가지 조건을 들고 나와서 유혹을 할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대뜸 백지수표라니.
그야 뭐든 맞춰준다고 해도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겠지만, 이건 좀 의외다.
아무래도 정부에서 진짜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본데?
“가장 중요한거 하나만 짚고 넘어갑시다. 책임소재 문제 말이죠. 당장은 한판 해보겠다고 덤비더라도 나중에 상황이 나빠지면 입장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왜, 첩보영화같은데 보면 흔히 나오는 설정이잖아.
국가의 풀 서포트를 받으며 작전을 수행하다가도 외교적, 정치적으로 상황이 꼬이면 그런 사람 없다고 잡아뗀다거나, 개인의 일탈일뿐 나라와는 관계없다고 부정한다거나.
블랙옵스 투입을 앞둔 군인이나 스파이에게 상관이 ‘생포된다면 조국은 널 부정할 것이다’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요새는 너무 식상한, 그래도 또 안 나오면 이상한 클리셰지.
애국심 넘치는 주인공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난 민간인이니까, 국익이고 자시고간에 그런 식으로 범죄자가 되는건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단연 사양이다.
“염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조국은 최지호 헌터를 버릴 수 없습니다. 사실 이번 작전만 해도 어마어마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거든요. 만병통치의 치유능력을 보유한 헌터를 위험한 작전에 투입하다니, 솔직히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죠. 대통령님의 강한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제의를 드릴 일도 없었을겁니다.”
“하하하... 대통령께서 그동안 중국에 쌓인게 많으셨나봅니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동안 비슷한 사례에 대해 대한민국이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해 얕보였기 때문이라는 판단 하에 결단을 내리신 것으로 압니다. 이걸 보시죠.”
글쎄, 나라의 위신도 위신이지만 중국이 저렇게 대놓고 나오는데 얌전히 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간 국민감정이 폭발해 정권 지지율이 급락할 것을 우려해서가 아닐까.
현 대통령의 이미지를 감안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저것 다 따져봐도 이만한 도박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거다.
대통령의 서명이 박힌 공문을 내미는데 이건 믿어줘야지.
“대한민국이 단독발견하여 독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3번 유적지와 이에 인접한 연구소, 군사기지를 방어하고 동맹국인 페어리 왕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제적 무력행사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오닉스 헌터즈 7팀에 위임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법적 책임을 면책한다... 음, 대단히 인상적이군요. 그런데 이게 대통령령으로 해결이 되는 범위인가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한건 법원의 해석에 달려있겠지만, 상식적으로 대통령 권한으로 완전면책이 가능할 리가 없죠.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습니까?”
하긴, 청와대 문양과 대통령 이름 석 자에 친필서명까지 박힌 이 공문 한 장은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오닉스 헌터즈와 현 정권이 운명을 함께 할 것이라는 보증이니까.
법리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어떻고 공문의 효력이 어떻고 하는 문제가 뭐가 중요하겠어.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뭘 믿고 내게 이만한 약점을 쥐어주는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강승호가 공문을 조심스레 챙기는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맡아보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처음 해보는 일도 아니고, 까짓것 한번 더 해보지 뭐.
옆에서 윤기정이 픽 웃고 강승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아니, 위험한건 내가 다 하고 이 형들은 근처에서 대기만 할텐데 왜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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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와 고블린이 종족전쟁을 벌이다가 외지인들에 의해 처지가 확 뒤바뀐 운명의 그 날 이전에, 요정의 숲은 세계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받는 지역이 아니었다.
울릉도 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밀림지형이라 수요가 아주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익성이 높은 괴수가 출몰하는 것도 아니라서 헌터들의 유동인구가 별로 많지 않았지.
하지만 그 위쪽의 바위사막지대는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암반으로 되어 황량하고 길 닦기도 쉽지 않은데다 주로 출몰하는 괴수도 애매하게 강력하면서 돈은 안 되기로 이름높은 기린이니까.
처음 발견되었을때는 뭔가 있어도 단단히 있어보이는 상서로운 외형 때문에 기대감이 가득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빛 좋은 개살구라는게 밝혀지고 나서는 찾는 헌터들이 없었다.
당장 쓸모가 없어도 뭔가 연구할만한 점이라도 있었으면 적으나마 수요가 있었겠지만 그냥 지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암질의 돌괴물 시체를 챙겨서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해당 지역에서 돌아다니는건 모두 적이라고 간주해도 좋습니다. 비밀 연구소의 건설 때문에 인력이 투입되긴 했는데, 조사결과 민간 건설사는 아닙니다.”
“와, 진짜 아무도 관심없는 지역이었구나. 하긴, 그러니까 기밀이 유지되긴 했겠지만.”
“애초에 하이난 게이트 근처에 펼쳐진 풍요로운 사냥터들을 두고 굳이 그 험하고 수익도 안 나는 길을 뚫고 와서 한국과 영역을 맞댄다는 것 자체가 별로 합리적인 결정은 아니죠. 아마 처음부터 비밀 연구소나 군사기지로 쓰려고 했을겁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유적지와 이계인의 시신들을 발견했다는거군요. 음, 그런데 정말 괜찮은겁니까? 공식석상에서 날이 선 발언을 주고받았으니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나라가 많을텐데. 그렇다고 게이트 출입을 통제하거나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고.”
“흑호부대의 움직임에 대해선 아직 관심을 갖는 언론이 없는걸로 압니다.”
생각해보면 겨우 하룻저녁만에 이렇게 강경한 대응이 결정되고 구체적인 작전까지 세웠다는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의사결정속도가 아닐 수 없다.
이능력자 관리부의 협조를 받으며 통과기록조차 남기지 않고 울릉도 게이트를 넘은 우리 오닉스 7팀은 특수군 중대의 호위를 받으며 최전방으로 향하는 호사를 누렸다.
아직 중국은 이 행성에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지 못 했으니 기도비닉을 유지하지 않고 대규모 행렬을 꾸려 이동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 다른 헌터들의 눈은 피하는게 좋겠지만, 그것도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차량을 열 두 대나 동원하는 대규모 원정을 북쪽으로 떠나는게 좀 특이해보이긴 하겠지만, 이 정도 규모의 탐사대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별로 신경은 안 써도 됩니다.”
당연히 군복입고 군인 티 내면서 다니는게 아니니까.
장갑차도 일부러 군 보급차종을 제외하고 여러 차종을 섞어서 구성했다고 들었다.
이번 작전에 동원되는 중대는 고르고 고른 최정예들이었는데, 암반지형이 시작되는 바위사막 입구에서 한 시간 거리쯤 되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꾸리고 대기할 예정이었다.
일이 틀어지지 않는 이상 실제로 그들이 전투를 벌이게 되지는 않겠지만.
요정의 숲 북부와 연결된 지점이 아닌 북부 평원에서 곧바로 바위사막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도달한 우리는 미리 점찍어둔 위치에 차를 세우고 임시기지를 꾸렸다.
위장망을 덮는다 참호를 판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특수군 병력을 뒤로 하고 나는 윤기정과 강승호, 그리고 중대의 팀장이라는 소령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선다.
“아예 여기서부터 은신 이능을 활성화하고 가려고? 음, 체력과 정신력이 버텨줄까?”
“내 이능력들 가성비 좋은거 알잖아요. 끄떡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그리 촉박한 임무도 아닌데, 정 힘들면 중간에 비트파고 몇 시간 쉬면 그만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행군거리가 너무 긴 것 같아요. 짐이 가벼운 것도 아니잖습니까.”
“충분히 버틸만하니까 걱정말고, 무전대기나 잘 해.”
“알겠습니다 팀장님, 혹시 저 아저씨들이 상황 이상하다고 밍기적대고 하면 깽판을 쳐서라도 반드시 구하러 가겠습니다.”
“형, 영화 찍어? 저 양반들 다 대인전투로는 대한민국 최고야. 탱커 둘이서 깽판을 치면 제압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쯧쯧. 차량 정비나 잘 해둬.”
강승호의 지적대로 내가 짊어지고 갈 짐은 비상식량과 무전기와 액션캠, 배터리, 위성연동 네비게이션과 만약을 대비한 폭약까지 해서 상당히 묵직했는데, 허리에 두른 권총 홀스터와 탄입대까지 더하면 삼사십킬로그램은 되었다.
훈련소 입소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한데다 천사의 단지 아이템에 달려있는 체력 및 체력회복 옵션 덕분인지 근력단련의 효율도 놀랍도록 좋아져서 당장 메고 있는 것은 거의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장거리 행군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압박이 만만치 않겠지.
에테르 쉬프트를 계속 최대거리로 사용하는 이동방법을 선택한다고 해도 중간중간 쿨타임이 도는 동안에는 걸어야 하니까 나로서도 썩 달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오랜만에 운동 한번 제대로 한다고 생각해야지.
“어째 난 괴수보다 사람을 더 많이 잡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불평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전방으로 쉬프트했다.
걷고 쉬프트하기를 반복하니 불과 몇 분 사이에 베이스 캠프가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성과가 어떻게 되든 비공식으로 서훈도 해준다고 했던가.
문득 목이 말라붙는 것 같아서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미션이 비슷해서인지 일본의 비밀 연구소와 광산에 잠입하던 일이 떠올랐는데, 하필이면 그 이후 벌어진 추격전까지 함께 떠오르는 바람에 약간 두려워졌던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아이템이 가져다준 치유능력과 여벌의 목숨도 목숨이거니와, 내가 가진 스킬들이 어디 보통 사기적인 스킬들인가.
멀찍이서 들키지 않도록 에테르 폼을 유지한 채로 증거만 찍어간다면 무척 안전하면서도 간단히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갈 수 있겠지.
폭약으로 연구소를 파괴하는건 상황 봐가면서 시도해도 될테고, 여차하면 그냥 포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