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1부
장갑차를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전진시켜 게이트를 통과하니 열어둔 해치와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짭짤한 바닷공기가 차내를 메운다.
게이트를 넘는 경험을 처음 한 라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창 밖을 내다보기 바쁘다.
게이트 앞에 설치된 장치를 이용해 바지선 갑판으로 차를 내리고 바로 옆에 붙어있던 커다란 화물선을 이용해 플로리다 해안으로 향하는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입을 연 것은 해안에 도착해 차량 하역이 끝난 뒤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바다군요.”
“오,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었나보죠?”
“어릴 때 머물던 가문의 영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던데다, 탁발행도 전부 내륙으로만 돌았거든요. 다른 소환사들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건 처음입니다.”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을겁니다. 산이나 바다야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가 없겠지만, 도시에 나가면 완전 다를거예요. 엇, 왜 그래요?”
“조용히 좀 해라 인마.”
지구로 복귀해서 긴장이 풀린 듯 운전대를 잡은채 웃는 얼굴로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강승호의 등짝을 윤기정이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핀잔을 준다.
평소에는 오히려 저 형이 더 가벼워 보이는데, 가만보면 은근히 꼼꼼하단 말이야.
별 거 아니지만 꼬아서 듣자면 충분히 ‘우리 세계를 무시하나?’ 할 수도 있는 말이었으니까.
물론 우리 마음 넓은 소환사님은 조금도 고깝게 듣지 않았다.
“도시라. 이거 설레는군요. 저도 여러 왕국과 교국을 돌아다녀 봤지만 솔직히 도시의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였죠. 전혀 다른 문명의 도시는 어떨지 정말 기대됩니다. 관광을 하자고 따라나선건 아니지만 기행록같은걸 써서 가져가도 좋겠네요.”
“시간은 넉넉할겁니다. 우리 7팀은 다른 헌터들과 달리 원정 스케줄을 좁게 잡는 편이지만 그래도 지구에서 머무는 시간이 적지 않거든요. 제가 관광안내라도 해드리죠.”
“팀장님, 근데 관광 가이드도 어떻게 보면 접대인데, 회사에서 비용 안 나오나요? 아, 잠시만요. 여깄습니다. 자리 번호만 알려주시면 제가 댈게요.”
중간에 교대하여 운전석에 앉아있던 강승호가 어림도 없는 헛소리를 하다가 차량 앞에서 손짓하는 공무원의 재촉에 뒤늦게 품에서 확인서를 꺼내 창 밖으로 내민다.
우리는 플로리다 게이트와 인접한 해안가에 있는 관리소에 차와 장비를 맡기고 나왔다.
게이트 너머도 아니고 지구에서 장갑차와 총화기를 가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 각 게이트마다 정부에서 이러한 관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긴 그 규모가 큰 편이었다.
민간 헌터들이 거의 들락거리지 않을테니 오히려 작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배를 타고 다니는데다 군용 장비를 옮길 일도 많아서 애초에 지을 때 크게 지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면적의 절반 이상이 접안시설이더라.
“공군기지까지 태워다 주신대. 거기서 오산 공항까지 수송기 타고 돌아가는거야.”
“와, 살다 살다 전투기 타고 귀국하는 경험을 다 해보네.”
“뭐 들었냐? 전투기가 아니라 수송기라고. 웬만한 민항기 못지 않게 내부 시설도 좋고 편안할걸? 특히 우리 네 사람만 타고 간다고 했으니까 더욱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군용기가 민항기보다 더 편의시설이 충실할 리는 없지만, 중요한건 연방 정부가 오닉스 7팀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고 있다는 사실이겠지.
우리의 귀국일정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막힘도 없었고 멈춰서 뭘 할 필요도 없었지.
준비된 리무진을 타고 좀 달리다가 비행기로 갈아타고 샴페인 한 잔에 낮잠을 즐기고 일어나니 어느새 도착했는데, 출입국심사같은 절차는 구경도 못 했다.
그리고 오산 비행장을 나서기가 무섭게 나는 날 미국으로 보냈던 사람과 마주쳤다.
“정말 잘 해주셨습니다, 최지호 팀장님. 이건 기대를 초과해도 한참 초과한 성과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플로리다 게이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반 사정은 대충 들어 알고 계시죠? 아니면 따로 공식적인 임무 보고를 해야 하나요?”
“하하하, 그럴리가요. 어디까지나 오닉스 사에서 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그런 정보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요. 전 다만 환영도 겸해서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나온겁니다.”
밝은 얼굴을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다.
게이트 너머에선 뉴스를 볼 길이 없다보니 한동안 떠들썩했던 테러음모에 대한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떻게든 잘 풀린 모양이지?
외교적인 압박이 줄어드는데 내 역할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분이 그 분이군요. 소환사 라크 님.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음같아선 대대적으로 환영행사를 열어드리고 싶은데, 여건이 그렇지 못해 아쉽네요.”
“반갑습니다. 권... 형배 님? 이렇게 읽는 것이 맞습니까?”
권형배 2차장은 습관적으로 건넨 명함을 라크가 더듬더듬 읽는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반사적으로 날 쳐다보기에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동부어는 현대 한국어 그 자체였지만 문자는 또 완전히 달랐는데, 라크는 불과 사나흘간 하루 한두시간의 학습만으로도 한글을 깨치는데 성공했다.
우리 중 교습경험이 있는 사람도 없어서 제대로 각 잡고 가르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이건 뭐, 저 친구가 똑똑해서 그런 것도 있고 학습자가 한국어를 자연스레 구사한다는 전제 하에 한글이 워낙 익히기 쉬운 글자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
“세종대왕님 만세죠. 한글이 배우기 쉽기로는 첫째가는 문자 아닙니까.”
“아, 그렇죠. 이 분들은 원래 한국어를 잘 하신다고 했죠. 그럼 무리도 아니겠네요.”
“잘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모국어예요. 저쪽 세상의 공용어까진 아닌데, 상당히 광범위하게 쓰이는 동부어라는 언어가 그냥 우리말이니까. 비행기 타기 전에 알려드렸던 것 같은데.”
“그랬죠 참. 워낙 믿기지가 않는 일이라서. 자, 이쪽으로 오시죠. 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이능관리부 장관님과 국정원장님, 국회의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그 사람들이 왜요? 아니, 잠깐만. 국정원장이라면 분명 그 때...”
“물론 신임 원장님을 말씀드린겁니다. 전임 국정원장은 지금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죠. 실은 라크 님의 예우에 대해 아직 정부 내부에서 의견이 완전히 모이지 않았습니다.”
“복잡할게 있나요? 어차피 당분간은 언론에 공개를 할 것도 아닐텐데.”
“그래도 영원히 비밀로 묻어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라크 님이 소환사들의 수장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는겁니다. 설령 비밀외교를 하더라도 적절한 의전은 갖추어야죠.”
아니, 그런 소리는 최소한 외교부 공무원이 와서 해야지, 댁은 국정원 직원이잖아?
권형배 차장은 우리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안내했는데, 검은색의 관용 세단 앞에는 작은 태극기가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라크를 한국까지 데려온 것이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건 단순히 외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회사로 데려오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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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소환사들의 수장이라는 권 차장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어쨌든 라크는 투쟁의 협곡 중 한군데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꽤나 고위직의 소환사였다.
투쟁의 협곡이 대륙 전체에 딱 열 세 개뿐이라는걸 고려하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셈이다.
그러니 오늘의 이 자리가 외계 문명과 한국정부의 첫 회담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국무총리는 스케줄이 바쁜건지 아니면 언론의 눈을 피해 시간을 오래 빼기가 어려운건지 중간에 잠깐 얼굴만 비치고 자리를 비웠지만 다른 사람들만 해도 만만한 직위가 하나 없었다.
국정원장이나 이능관리부 장관, 국회의장에 여당 대표까지 있었으니까.
하긴, 관점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독대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사안이긴 했다.
소환사들은 우리 쪽으로 치면 수도사나 승려같은 기풍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라크에게 자기네 종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자각이 있었다면 오히려 지나치게 가볍게 대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를 했을지도 모르지.
“비인부전이라. 그렇군요. 저희도 마법의 전수라는게 그렇게 간단히 되리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요컨대 인성검사를 통과해야 입문이 가능하다는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나 익히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힘이라서, 계율로써 정해져 있습니다.”
“당연히 존중해 드려야지요. 저희는 다만 후보를 추천할뿐, 제자의 선발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을 갖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뜻에 따를 것을...”
“아, 후보의 선정 말입니다만. 실은 최지호 님께 저희 3번 전장의 소환사들이 진 생명의 빚을 갚기 위해 후보 선정권을 전부 그 분께 일임하였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미합중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최지호 님을 통해 후보를 추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능관리부 장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순식간에 사람좋게 웃는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귀에다 걸었다.
라크의 방침을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장관은 ‘그럼 그쪽 뜻대로 오닉스 사를 통해서 결정하는걸로 하자’라며 마지막 저항을 해보려다가 ‘회사가 아니라 최지호 개인에게 부여한 권리’라며 선을 긋는 말을 듣고서는 표정관리에 무척이나 애를 먹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 권리를 양도하거나 위임할 생각이 없었다.
지구의 선진국 기준으로는 별 거 아니지만 소환사들의 기준으로는 막대하기 그지없는 물량의 자원을 지원한 미국이라면 모를까, 거든 것 하나 없는 한국으로선 어차피 공돈인데 뭘.
“으하하, 우리 최지호 팀장이 그야말로 나라의 보배로군요. S급 이능력자 중에서도 이만큼 독보적인 성과를 내는 헌터는 없었어요. 참으로 대견합니다.”
옆에서 날 추켜세워주는 저 아저씨는 아까 소개받기로는 여당 당대표.
이런 반응의 차이는 실무진과 정치인의 차이라고 보면 될까?
그 웃음소리에 장관도 애써 따라웃으면서 나라를 위해 큰 일 하셨다고 칭찬을 건넨다.
라크는 마법이라는 이권을 두고 미묘한 입장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은인인 내게 힘을 실어줬으면 그걸로 그만이지, 나머지 일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눈치다.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정부에서는 앞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소환사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외교관에 준하는 대우를 하여 불체포 특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권리로 활동상의 편의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라크는 그 댓가로 마법 전수에 있어서 신의성실할 것을 약속하고, 추가적으로 수련생들이 실용적인 마법을 익힐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므로 필요한 경우 자문을 해주기로 했다.
예컨대 페어리들과 교류하며 수입한 아티팩트들의 경우 연구소에서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 원리를 밝히는데 진전이 없었는데, 며칠 들러서 분석을 해주겠단다.
페어리라는 이름은 지구에서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라서 그는 대체 어느 종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 했지만, 아티팩트의 묘사를 듣고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는 앞으로 최지호 님의 팀에 임시로 소속되어 보은수행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협조를 요청하실땐 최지호 님을 통해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조약문을 작성하고 서명할때까지 라크가 말한 문장 중 거의 삼할 이상은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날 수차례 강조하여 내세운다.
여기 오기 전에 슬쩍 부탁을 하긴 했지만 이건 좀 과하다 싶어서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뭐, 그 덕에 여기 계신 높은 분들 모두 내가 핸들을 잡고 있다는걸 확실하게 인지한 것 같네.
“식사는 아직 안 하셨죠? 혹시 몸에 안 맞는다거나 하는 지구의 음식이 있나요?”
“없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 보급한 식량은 종류별로 전부 먹어봤는데 아무 탈이 없더군요. 연회를 베풀어 주신다면 감사히 즐기겠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사례만으로 안전하다고 단언하긴 부족하지만 아마 괜찮겠지.
막 이들을 깨웠을 때 건강검진을 했던 군의관이 신체 구조상으로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을거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깨어나지 못한 시신을 가지고 해부를 해봤을지도 모른다.
한데 모아놓고 한꺼번에 합동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한둘 빼돌리긴 어렵지 않았을테니까.
청와대 주방장이 직접 와서 준비했다는 식사는 훌륭했다.
준비된 요리의 대부분은 한식이었는데, 다행히 라크는 입맛에 맞는지 잘 먹더라.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자기병에 담긴 붉은 색의 과일주가 몇 순배 오가니 안 그래도 밝던 장내 분위기는 더욱 부드러워져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한다.
간장 양념이 절묘하게 배어든 너비아니의 맛을 즐기던 내 앞에 누군가 술잔을 들이댄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장관의 옆에서 추임새만 넣던 정치인 아저씨다.
머리가 하얗게 센 국회의장은 조용히 무게만 잡고 있다가 조약체결 직후에 자리를 떴고, 이 말 많던 아저씨는 여당의 대표라고 했었지?
“우리 자랑스러운 최지호 팀장. 자, 한 잔 받아요. 내가 이번에 참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누구는 요즘 헌터들이 돈만 밝혀서 큰 일이라는 소리를 대놓고 떠들어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사실 애국자가 별 거 있습니까? 기업에 있든 특수군에 있든 우리 최 팀장처럼 국익을 위해 노력하고 성과를 내면 그게 애국자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주장이 있는건 사실이다.
고수익에도 불구하고 이능력자들 중 헌터의 길을 선택하는 비율도 결코 높은 편이 아닌데 하물며 민간 헌터보다 더 위험한 특수군에 자원입대하는 비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항상 인력난을 겪는건 아는데, 솔직히 그게 헌터들 탓은 아니지.
술을 받으며 예예 대충 흘려넘기는 내 반응에 괜스레 헛기침을 한 상대는 몸을 내 쪽으로 숙인다.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하고 보니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뭇거린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크흠.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그러니까 그게... 최지호 팀장의 이능력 중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게 사실인가요? 치유능력자들의 이능과는 궤가 다르다고 하던데.”
“어?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음, 예, 뭐. 대충 비슷합니다.”
“그... 내가 사실 몇 년째 치질을 앓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게 참, 괴롭기가 그지없어. 가장 잘 한다는 외과를 찾아서 벌써 두 번이나 수술을 했는데도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계속 재발을 한단 말이지요.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이라 사람들이 우습게 보지만, 이게 고통이 상당해요.”
뭐야, 겨우 그런게 이렇게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할만큼 부끄러운 문젠가?
상당히 독한 과실주를 예닐곱 잔이나 들이켜서 거나하게 취해있던 나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가 살짝 벗겨진 이 가여운 정치인에게 천사의 손길을 시전했다.
음, 치질은 아마 치료가 됐겠지만 머리 벗겨진건 이걸로도 어떻게 안 되는 모양이네.
몸이 순간적으로 가볍고 상쾌해지는걸 느꼈는지 그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고마워요.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고 반드시 갚지.”
나는 그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삼부정도 남은 술을 마저 비웠다.
기름기가 살짝 감도는 너비아니를 씹는 맛 사이로 달짝지근한 과일주의 맛이 스며들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별다른 의도없이 가볍게 베푼 호의였다.
솔직히 천사의 손길은 쿨타임도 그리 길지 않아서 숙취 해소용이나 피로회복용으로도 마구 쓰던 스킬인데, 그거 한 번 써주는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거절을 했겠는가.
문제는,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양반이 첫 인상처럼 참 가볍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나마 최소한의 사리분간은 있는지 외계문명과 맺은 조약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감당못할 사고가 터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것 같지만, 애초에 입이 무거운 인간이 아니었다.
소환사 라크에 관한 비밀만 지켜졌을뿐, 엉뚱한 스캔들이 터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한 지위에 오른 정치인이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릴줄 내가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