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1부
투쟁의 협곡 근처에 꾸린 캠프는 여전히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도 떠날때에 비해 눈에 띄게 천막이 늘어나고 건축자재가 더 많이 들어와 있으니, 문자 그대로 하루하루가 다르다.
물론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물자를 퍼부어도 저울추는 무조건 이쪽으로 기운다.
넘치도록 물자를 퍼붓는건 아주 오래 전부터 미국이 자랑하는 유구한 장기이기도 했거니와 소환사들이 전수하기로 한 기술들의 가치는 아무리 황무지라고 해도 고작 중소규모의 연구도시 하나를 세우는 비용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컨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전투골렘 하나만 따져도 그럴걸?
라크를 찾아가 차 한 잔 하면서 슬쩍 물어보니 미국은 작동하지 않아서 온전한 형태를 간직한 전투골렘을 고스란히 소환사들에게 돌려줘서 자위력으로 쓰게끔 하는 대신, 내가 잘게 부순 잔해를 연구할 수 있도록 제한없는 협조를 약속받았다는 것 같다.
“전투골렘이 아무리 비싸고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결국 병기에 불과하죠. 일꾼으로 써먹자면 아주 못 쓸건 없지만 영 효율이 안 나오는 놈들입니다. 사실 그래서 아예 온전한 녀석도 동력을 복구해서 팔자는 의견도 나왔었는데...”
“역시 최소한의 자위력은 확보해 놓는게 낫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나보죠?”
“그런건 아닙니다. 여기 도와주는 사람이 몇이고 소환해놓은 몬스터가 몇인데 신변에 위협을 느끼겠습니까? 다만 물자가 워낙 많이 들어왔다보니 굳이 장비를 판매할 필요까지야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요. 은혜를 갚기 위해 선물하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부서진 잔해만 받고도 너무 좋아들 하시는걸 보고 다들 마음을 달리 먹은 모양입니다.”
와, 그거 미국 정부에서 알면 후회 속에서 아까워 땅을 칠만한 뒷사정이네.
부서진 걸로는 좀 부족하다는 낌새만 내비쳤어도 잘만 하면 온전한 골렘까지 얻을 수 있었을거란 얘긴데, 지원이 너무 충실한데다 욕심을 안 부려 기회를 놓쳤다는거 아닌가.
그 사람들 딴에는 현지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의 결단을 내린걸텐데.
“크흠. 이건 미국인들에겐 비밀로 해주시길. 저희가 딱히 잘못을 한건 아닙니다만 그 친구들 입장에선 기분이 좀 상할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물론이죠. 입 꾹 닫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는걸 보면 라크도 내가 단순한 의뢰관계일뿐 미국과 별 대단한 의리까지는 없다는걸 충분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는 내게 소환사들 사이에서의 여론과 미국이 그들에게 약속한 혜택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중 내 시선을 끄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비자발급? 미국으로 초청을 한다는 이야긴가요?”
“초청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뭐, 이쪽에서 요구한다면 얼마든지 해주겠지만요. 최지호 님의 나라와 미국을 비롯한 현 세대의 문명은 모두 워프게이트를 넘어 다른 차원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 사정을 알아볼까 합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수개월 내에 사절단을 선발하자는 의견이 통과되었어요. 아, 최지호 님의 나라도 방문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힘들까요?”
“어... 저야 괜찮은데, 미국이 허가를 할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리 지원을 많이 해준다고 해도 저희가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일에 왈가왈부할 권한은 없습니다.”
라크를 비롯한 소환사들은 투쟁의 협곡 복구를 물적으로 지원하는 미국보다 마력폭주로 형성된 정지장 안에 갇혀있던 자신들을 구해준 나를 더 큰 은인으로 여겼다.
저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기술교류를 시작한다면 정부는 당연히 좋아하겠지만 보안상 어떨까.
무려 국정원 핵심인사가 중국의 사주를 받아 동맹국 테러모의라는 미친 짓을 벌일 정도였으니 조국의 정부를 믿지 못한다고 해서 미안해할 일이 아니거든.
사장이 연루되었던 우리 오닉스 헌터즈도 내 덕이 아니었으면 호된 대가를 치렀을테고.
내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크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사절단은 라크 님이 대표로 이끌게 되는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사절단에 포함되지 않을겁니다. 아, 전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여러분을 따라 보은 유랑에 나설 생각이라서요.”
“예? 어... 그러니까 절 따라오신다구요? 아니, 라크 님은 투쟁의 협곡을 관리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종신의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젊은 소환사들은 전장을 관리하는 업무에 큰 지장이 없는 선에서 교대로 탁발행을 나서는 관습이 있습니다. 골방에서 마법수련만 하는 것보다는 세상경험을 쌓는 편이 수행에 도움이 되니까요. 저는 이미 일 년씩 두 차례나 다녀와서 더 이상 나갈 필요는 없지만, 빚진 은혜를 갚기 위해 저희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를 지원하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미 자리를 비우는동안 지휘와 책임을 맡을 후임 인선도 끝내놓았죠.”
살아남은 소환사들 중 가장 강력하고 해박한 마법사가 최상급자인 라크인데, 오닉스 7팀을 따라나서서 모험에 참여하며 힘이 되어주겠다는 제안이다.
나는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돈으론 부족하니 몸으로라도 갚겠다는건데, 수장이 직접 나서서 일하겠다니.
마법의 위력에 대해서는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대충 견적을 내봐도 무조건 이득이다.
특히 7팀의 네 번째 멤버로 합류할 경우엔 전투력 자체는 논외니까 더욱 그렇지.
한 몇 개월 정도 원정 서너번을 함께 하며 도움을 받다가 ‘이만하면 넘치도록 보답이 됐습니다’하고 감사인사를 하면서 돌려보내면 되겠지, 하고 속으로 얼개를 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최지호 님께서 지구로 복귀하실 일정을 열흘만 더 늦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열흘이면 일을 마무리짓고 인수인계까지 마칠 수 있을겁니다.”
“문제없습니다. 당연히 기다려야죠.”
나야 열흘이 아니라 몇 달을 기다리라고 해도 환영이지.
일정이 좀 어그러진다고 여기서 난색을 표하는건 미친 짓이다.
사실 외계 원정이라는게 워낙 불확실한 면이 많아서 길면 몇 달씩도 일정이 미뤄지고 당겨지는게 다반사니까 겨우 열흘을 미루는 것 정도는 애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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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복귀 일정을 열흘 정도 늦추겠다는 말에 별다른 의문없이 연장체류를 허가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주변 정찰이나 경비 등의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플로리다 해상 게이트를 통해 고원기지를 거쳐 미국 국적의 입 무겁고 믿을만한 헌터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외부인인 우리에게 굳이 큰 돈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임무가 끝난 뒤에도 협곡 캠프에 주둔하고 있는 연방 게이트관리국 산하의 즉응부대원들을 통해 퍼져나간 단편적인 소문들 덕분인지 무시를 받거나 시비가 걸리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어색한걸.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브런치 먹고, 산책 좀 하다가 미군 애들이랑 농구 한 게임 하고, 협곡 놀러가서 구경 좀 하다 날 어두워지면 술판 벌이고.”
“좀이 쑤셔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애초에 여기 올 때 미국 정부의 의뢰 때문에 온건데, 자체적으로 나가서 뭘 하기도 모양새가 좀 이상해지니까. 아, 그리고 형이 일반 군인들하고 농구하는건 반칙 아녜요? 지나가다 잠깐 봤는데, 아주 날아다니더만.”
“네가 자세히 못 봐서 그래. 걔네 중에도 이능력자 있었어. 그렇지 승호야?”
“예... 근데 신체강화계열은 없었어요.”
“야, 인마. 넌 왜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고 그래? 이능력자면 다 같은 이능력자지. 그 덩치 큰 친구 근육 봤어? 그 정도면 웬만한 신체강화 못지 않아.”
내가 지나가다 본 바로는 일반인들이었는데, 개중에 특수군이 한둘 섞여있었나.
물론 신체강화계열이 아니라면 이능력과 신체능력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근육을 아무리 단련해 봐야 초능력 앞에선 별 의미가 없으니 윤기정이 사기농구를 했다는건 변함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게 아니라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림이 명치께에 올 정도로 솟구쳐 덩크를 꽂던 장면을 생각하면 심지어 신체강화 이능력을 숨길 생각도 없어보이더라.
“다 좋은데 돈내기같은거 해서 감정 상하게 만들지만 마요. 소환사들하고 교류를 시작하면 앞으로 여길 드나들 일이 많은데, 여긴 미국 세력권이잖아요. 천상 플로리다 게이트를 통해서 와야 하니까. 되도록 잘 보여야죠.”
“큭큭큭, 지호 네가 군대를 안 갔다와서 그런거야. 군인들이 뭐 자기 기분 나쁘다고 불이익을 주고 그런게 어딨어. 위에서 까라면 까는거지. 아, 그렇다고 내가 돈을 땄다는 얘긴 아니지만. 그리고 잘 보여야 할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 쪽일거다. 원래 갑을관계라는게 어느쪽 세력이 크고 강하냐보단 바라는게 있는 쪽이 어디냐로 정해지거든. 가만 보니까 미국은 소환사들의 마법학을 원하고 소환사들은 널 은인으로 여기고 있잖아? 그럼 얘기 다 끝난거지 뭐.”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아무튼 조심 좀 해요.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물론이지. 나나 승호나 너보다 이 바닥에서 훨씬 더 오래 굴러먹었다. 믿어도 좋아.”
영 믿음직스럽지 않은 소리지만 따지고 보면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훈계를 그만두었다.
팀장이라지만 내 경험이 여기서 제일 일천한데 기본적인걸 훈계할 입장이 아니긴 하지.
열흘이나 캠프의 보급품을 축내면서 휴식을 취했지만 아무런 터치도 안 들어오는걸 보면 윤기정의 분석이 정확한 것 같기도 했다.
캠프엔 군인 내지는 정부 소속의 헌터들만 돌아다녀서 아직 민간 상점같은게 없었는데, 필요한 물자는 달라는대로 내어주면서 따로 돈을 청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늘 돌아간다고 했지?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걸 보면 하루이틀 더 미뤄지려나?”
“아뇨, 아마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결정이 날겁니다.”
라크는 이곳 소환사들의 수장이나 다름없으니 바라는게 많은 미국이 그의 뜻을 꺾기 어렵다.
업무를 인계하고 남는 소환사들에게 당부를 하는게 좀 늦어지나보지 뭐.
그 때 마침 컨테이너 막사 밖에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식당에서 가져온 땅콩을 안주로 맥주를 들이키던 강승호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니, 후드가 달린 로브를 입고 자기 몸뚱이만한 등짐을 짊어멘 라크가 서있었다.
“오, 차림새를 보니 여행준비를 철저히 하신 것 같군요.”
“지구는 풍족하다는 말을 들어서 짐은 최소화했습니다. 며칠을 두고 입을 옷가지와 간단한 아티팩트들 뿐이에요. 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이런 실례를. 어서 들어오시죠. 저희도 출발준비는 진작에 다 끝내놨습니다. 옷만 갈아입고 나갑시다. 거기 있는 맥주하고 마른안주, 좀 드시면서 기다리시겠어요?”
가져온 장비와 물자는 오전에 전부 장갑차에 실어놓았다.
이번 원정에선 사실 탄약이고 식량이고 거의 소모가 없었지.
오히려 괴수 사체를 싣기 위해 비워둔 공간까지 미군이 지원한 물자를 가득 채워서 올 때보다 더 풍족한 물자를 무겁게 가지고 나가게 되었다.
얌체같은 일이지만 윤기정의 말로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 아끼고 챙기는게 좋단다.
어차피 저 쪽에서도 알면서 적당히 챙겨서 가져가라고 내줬을거라더라.
그러고보니 옷을 갈아입는 윤기정의 표정이 좋지 않다.
가는 길에 운전을 맡게 된 그는 아까부터 맥주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만약 라크가 서너시간만 더 늦게 왔더라면 강승호와 윤기정의 처지가 바뀌었을텐데.
신체강화 능력자는 그 근력과 체력만큼이나 간의 해독력도 탁월했기 때문에 오전과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즉시 운전이 가능하도록 교대로 당번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B급이나 되는 신체강화 이능력자들이 음주운전을 한다고 딱히 운전능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고가 날 일은 없겠지만 규정은 규정이니까.
나는 내가 마시던 캔에 한 모금이 조금 넘게 남아있는 맥주를 한 입에 털어넘겼다.
“우선은 지구로 복귀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울릉도 게이트를 넘을 계획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은 미군이 제공해주기로 했으니 민간의 눈에 띄지 않을수 있을겁니다. 사실 외형으론 지구인들과 전혀 다를게 없으니 위장신분 하나 만들어 주는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또 곤란하다고 하더군요.”
“한국 정부에서는 알고 있습니까? 듣자하니 지구에선 각 나라들 사이에 출입국 명단이 철저하게 관리되어 신원이 불확실하면 함부로 여행을 하지 못한다고 하던데요.”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될겁니다. 그런 일을 처리해줄 사람을 알거든요.”
미국의 의뢰를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여 날 여기 보낸게 바로 우리나라 정부거든.
특히 내게 말을 전달한게 바로 국정원이니까, 그까짓 신분 하나쯤은 간단히 해결해주겠지.
막사를 나와서 장갑차에 타는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럿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7팀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라크를 보는 시선이었다.
저 친구들은 아직 모르나본데.
물론 위쪽에선 다 연락이 돌았는지 캠프 입구의 검문소에선 군말없이 통과시켜줬지만.
“그동안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피엠마을과 고원 전진기지로 들어갈 때 쓸 확인증을 발급하면서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위병의 호기심 가득한 눈은 해치 위로 머리를 내밀고 감회어린 눈으로 협곡을 바라보는 라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차량이 출발하고, 투쟁의 협곡이 점점 더 멀어진다.
무한궤도가 구르는 요란한 소리와 피어오르는 흙먼지에도 불구하고, 라크는 협곡의 전경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해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왜 저러는거야.
이러니까 꼭 내가 보은을 구실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온 것 같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좌석을 하나로 연결해 만든 침대에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