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1부
외길로 된 통로는 체감상 백여미터는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언제든 이능을 발현해 예기치 않은 기습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긴장하고 사주경계를 하며 움직이던 특수군 병사들도 오래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행군태세로 돌아갔다.
사실 양 옆과 천장이 전부 돌을 깎아 만든 벽으로 단단히 막혀있으니 당연히 정면을 제외하면 딱히 경계를 하며 기동할 필요가 없다.
얼마쯤 걸었을까, 대열 중간에서 이동하던 소환사가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앞에서 강대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십시오.”
“설마 이렇게 좁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겠죠?”
“전투골렘은 10톤이 넘는 거대한 쇳덩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그 거체에 걸맞는 기동공간을 확보해두어야 제대로 쓸 수 있죠. 중앙억제기 시설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넓고, 지금 걷고 계신 이 길은 단지 비상용 통로에 불과합니다.”
“아, 그럼 여기가 원래 평상시에 드나들던 문이 아니군요?”
“정문을 찾으려면 또 얼마나 오래 땅을 파헤치고 있어야 할지 기약이 없었으니까요. 모든 통로는 결국 중앙통제실로 향합니다. 그곳은 전투골렘을 비롯한 보안설비가 지키고 있죠.”
그는 우리에게 설명하는 내내 착잡한건지 들뜬건지 모를 애매하고 기묘한 얼굴이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마력폭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물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다가 깨어나니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있고, 체감상으로는 바로 엊그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관리하고 이용하던 건물 및 설비들이 고대유물이 되어있어 그걸 발굴하고 탐사하게 생긴 것이 아닌가.
권한있는 관리자도 죄다 죽거나 행방불명되어 자체 보안설비도 부수며 나아가야할 판국이니.
“전방 십미터 정도에 빛이 보입니다. 안내인 말대로 좁은 통로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나가는 즉시 전투골렘이 작동하지는 않을거라고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우선 대형괴수 사냥대형을 갖추고 충분한 경계 하에 상황을 살핀다.”
“예, 알겠습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하며 전술을 결정하는 게이트 관리국 즉응부대의 노련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에도 소환사는 나를 바라보며 잘 부탁한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걸 눈치챈 지휘관이 탐탁지 않다는 듯 입가를 살짝 일그러뜨린다.
미국에선 이번 작전에 나름대로 최고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본토에서 직접 최정예 이능력자 특수부대를 급파한 것이겠지만 솔직히 그 판단이 정말 최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급하게 게이트를 넘어 반나절만에 임무 브리핑까지 뚝딱 끝냈으니 아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긴 한데, 그래도 작전에 함께 참여하는 인원들에 대해서는 숙지를 했어야지.
낮은 확률을 뚫고 각성한 이능력자에다 더해 고된 훈련까지 받고 수차례 실전경험을 쌓은 특수군으로서의 자부심도 다 알겠지만 저렇게 표정을 못 숨겨서야 원.
아, 외교관이나 첩보원같은게 아니라 군인이니까 그런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윤기정과 강승호에게 신호를 보내 전투를 준비하도록 했다.
패용하기 편하도록 접혀있던 방패 가장자리의 강판이 펼쳐지는 소리가 철컥 울린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전투골렘의 핵은 머리 가장 안쪽에 있습니다. 유일한 급소죠. 그곳만 부수면 작동을 멈추니 가능하다면 부디 과도하게 망가뜨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소환사의 걱정어린 당부를 들으며 통로 출구로 나가니 막혀있던 시야가 탁 트이며 땅 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밝은 광장이 우리를 반긴다.
내려오는 통로의 경사가 그리 급한 것 같지는 않던데, 저렇게 천장이 높다고?
대체 몇 미터나 지하로 내려온거야?
나는 당황해서 거의 수십여미터는 될 법한 까마득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언덕이나 산 안의 공동인가?
아니지, 밖에서 봤을땐 분명히 주변이 죄다 굴곡없는 평지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걷던 소환사가 우리의 당혹감을 뒤늦게 눈치챘는지 웃으며 설명한다.
“중앙 억제기는 그 다양한 기능만큼이나 복잡하고 거대한 시설이죠. 효율을 위해서 일종의 공간왜곡 장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확장기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건 내려오기 전에 이미 확인했습니다. 공간왜곡에 문제가 생겼다면 지면 위로 흔적이 남았을테니까요.”
“공간왜곡...”
“고대시설에 원래 딸려있던 기능이라잖냐.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아무 관련없어.”
공간왜곡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른 좋지 않은 기억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니 옆에서 윤기정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강조했다.
그래, 상식적으로 그렇겠지.
사실 아무리 봐도 원시적인 부족생활을 하는 것 같던 고블린 놈들이 어떻게 공간왜곡같은 고등한 기술을 개발하고 다룰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행성은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들 투성이니까 토착 원시부족에게 신비한 주술이 하나쯤 전승되어 내려온다고 해서 새삼 이상할 것 있겠냐는 식으로 억지로 납득을 했었지.
이제 보니 놈들은 고대 문명이 보유한 기술을 파편적으로 습득했었던 것 같다.
“전투 골렘이 가동된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쿠웅,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니 소환사가 내게 주먹을 꾹 쥐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정작 그 말에 반응해 일사불란하게 앞장선건 내가 아니라 미군들이었지만.
음, 솔직히 알아서 해보라고 두고 싶지만, 역시 희생자가 나와선 내 입장도 곤란하겠지.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갈수 있도록 가벼운 긴장을 불어넣는다.
전투골렘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이미지가 약간 달랐다.
막연하게 인간형의 이족보행 로봇을 상상했었는데, 굵직한 금속질 다리 세 쌍이 납작하게 생긴 사다라꼴 기둥 모양의 몸뚱이를 안정적으로 떠받치는 기괴한 형태였던 것이다.
몸통에는 사방으로 돌기가 솟아있었는데, 아마 그게 무기인 모양이다.
설계 사상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족보행 로봇이야 멋과 로망의 영역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저건 언뜻 생각해봐도 기동이나 전투에 별로 실용적일 것 같지 않은 생김새잖아?
녀석은 침입을 인지했는지 물어보나마나 마력을 동력으로 하겠지만 겉보기엔 마치 유압식으로 움직일 것 같은 디자인의 다리를 난폭하게 교차하며 다짜고짜 이쪽으로 달려든다.
“빠르다! 조심해! 지금!”
앞장서서 마치 우리 7팀을 보호하듯 늘어선 미군 헌터들이 지휘관의 고함소리에 맞춰 비스듬히 세운 방패로 그 첫 돌격을 받아낸다.
그러나 이 노련한 헌터들이 저마다의 노하우를 동원해 충격을 분산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충격에 실더들은 절반 이상이 밀려나 추풍낙엽처럼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아마 다들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진형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비좁은 통로로 후퇴해야 합니다!”
“밀러, 타케시. 좌우로 퍼져서 놈의 시선을 끌어봐. 절대 정면으로 받지 말고 무조건 회피해라. 나머지는 공격조 잡고 빠진다! 서둘러!”
“조심해! 저건 발사형 무기야!”
설상가상으로 몸통에 삐죽 솟아있던 금속 돌기 위에 빛이 뭉치더니 여러 갈래로 쏘아진다.
그 공격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고 이능 화력을 담당할뿐 자체적인 방어능력이 없던 공격조원들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인 실더들 덕분이었다.
다행히 빛무리로 된 투사체는 합금방패를 뚫지 못했던 것이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패가 우그러진걸 보면 열병기같은게 아니라 상당한 물리력을 품고 있는게 분명하니 저들의 반응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젠장. 이거 더 지켜볼 계제가 아닌걸.”
잠깐 전투골렘이 움직이는 방식을 지켜보려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호기심 때문에 사람이 죽도록 둘 수는 없지.
음, 그런데 머리에 핵이 있으니 되도록 심하게 망가뜨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저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몸통이고 어디가 머리인지 구분이 안 간다.
이래선 정확한 표적타격보다 에테르 블레이드 난사로 몸통부위를 잘게 갈아버리는게 낫겠네.
한바탕 투사체를 쏟아붓고 두 번째 돌격을 시작하려는 골렘의 정면으로 쉬프트했다.
곧바로 펼쳐지는 에테르 필드.
이대로 돌격을 받아내더라도 에테르 쉬프트의 방어막이 있으니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튕겨져 나가면 거리를 잡기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무수히 많은 에테르 블레이드를 뽑아내 정면으로 날렸다.
수평과 수직,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무형의 칼날이 쉴새없이 골렘의 동체를 긋고 지나간다.
아직 충분한 가속을 붙이지 못한 녀석은 내 앞까지 채 도달하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몸통에 솟은 돌기에 희미하게 맺혀있던 빛이 어느 순간엔가 꺼져 있었다.
“한 기는 처리했습니다. 나머지 한 기는 어디 있어요?”
완전히 작동을 멈춘 것을 확인한 나는 안내인 소환사에게 고개를 돌리고 외쳐 물었다.
중앙억제기를 지키는 전투 골렘은 두 기라고 했었지.
에테르 필드가 없다면 블레이드의 연사속도는 3초에 겨우 한 번.
에테르 필드의 지속시간은 6초에 불과하다.
물론 쿨다운 타임도 최종스킬치고는 별로 긴 편이 아니라서 180초만 기다리면 다시 쓸 수 있지만 방금 겪은 전투골렘의 스펙을 생각하면 피해가 나오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왜인지 몰라도 소환사는 당황한 기색으로 어물거리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 한다.
그 사이 시간이 지나 에테르 필드가 비활성화된 것을 느낀 나는 혀를 찼다.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정말 두 기가 있는게 맞아요?”
“분명 한 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원래 인가받지 않은 침입자를 감지하는 즉시 두 기가 동시에 가동되어 방어에 나서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가동된 골렘도 움직임이 느리고 부자연스러웠죠? 음, 확실히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움직임이 느리고 부자연스러워요? 방금 그게?”
에테르 필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옆으로 달려와서 혹시나 나머지 한 기의 골렘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윤기정이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느리고 삐걱댔다는 움직임에 몇 사람이 죽을뻔한거야?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소환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해명한다.
“산악부족 사람들, 음, 그러니까 여러분이 명명하기를 피엠족이라고 한 사람들에게서 최지호 님이 봉인석을 부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봉인석을 부술 정도면 폭주한 전투골렘 정도는 아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크흠.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음, 그렇게 나오면 또 우리가 할 말이 궁색하지.
실제로 내가 먼저 나서서 화력을 쏟아부었다면 위기감 그런거 전혀 없이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돌이켜보면 전투골렘의 위력에 대해 수차례 경고를 하기도 했으니까.
라크와 안내인의 경고를 떠올린 나는 비난받을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깨달았다.
멋들어진 택티컬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전문가 티를 있는대로 내더니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전투에 돌입한 저 미군 아저씨들이 문제였네.
마침 특수군 분대를 이끌던 지휘관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미스터 최, 전투골렘을 산산조각낸 그 공격, 정말 순수한 이능력이 맞습니까? 대체...”
“그러게 진작에 수차례 말씀드렸잖아요, 전투골렘을 제압하는건 오닉스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댁들 임무는 우리 호위라고. 공격력으로 S급 판정을 받은 이능입니다.”
“저도 S급 이능력자와 여러차례 합동작전을 벌인 경험이 있습니다만, 누구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보여주지는 못 했습니다. 굉장하군요.”
어느 측면에서든 S급 판정을 받은 이능력자가 국내엔 쉰 명도 안 되는걸로 아는데, 저 아저씨는 무려 여러차례 합동작전을 벌이며 겪어봤다니.
미국이 인구가 많고 이능력 관리 시스템도 잘 되어있어서 그런가, 헌터강국은 헌터강국이네.
지금까지 임무를 진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받은 무시 때문에 짜증이 쌓였는지,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강승호가 날이 선 말투로 대꾸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S급 이능력자는 팀장인 나 하나인데 왜 형이 자기 일처럼 그렇게 콧대를 세우고 뽐내냐, 하고 놀려주기라도 했겠지만 나는 강승호를 제지하지 않았다.
뚱한 내 시선에 그는 지금까지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여겼는지 헛기침을 하고 사과한다.
“크흠, 그... 지금까지의 무례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오닉스 헌터즈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거의 전달받지 못 했거든요. 워낙 급하게 결정된 임무이다보니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위험한 작전에서는 비전문가의 돌발행동을 막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통제를 위해, 그, 딱히 무시를 해서가 아니라...”
말꼬리가 길어지는걸 보니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면 죄다 마음에 없는 변명이구만.
그들은 본토에서 대기하다가 급하게 게이트를 넘어 파견된 대응팀이었기 때문에 오닉스 7팀을 단순히 이번 일에 깊숙하게 관여한 한국의 민간헌터들이라고만 소개받았다는 해명이다.
그러니까 작전을 함께 수행할 팀이 아니라 비전투 정보원 정도로 여겼다는 뜻.
아무리 하룻저녁만에 결정된 임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허술한거 아닌가 싶지만, 달리 생각하면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횡설수설하는 지휘관을 더 추궁하지 않았다.
“여기, 뭔가 발견했습니다! 전투골렘 같은데요?”
그 사이 지시를 받고 널찍한 광장을 수색하던 군인들이 소리쳐 보고를 해왔다.
보아하니 두 기의 전투골렘 중 한 기는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었던 모양이다.
“오, 동체가 온전히 남아있어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기다려봐요. 내가 좀 봅시다.”
내가 사정없이 큐브처럼 조각을 내버린 골렘의 동체를 보며 한숨을 쉬던 소환사가 반색한다.
급박한 상황을 전부 본 터라 차마 내게 왜 이렇게 심하게 부쉈느냐는 불평은 하지 못하고 다만 아쉬워만 하던 차에 하나라도 멀쩡한걸 건져서 마음이 놓이나보다.
“팀장님, 어디 가세요?”
“중앙 억제기라는거,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한 번 하려고. 둘 다 따라와요.”
전투현장을 정리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등의 일은 미 특수군이 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닉스 7팀만 이끌고 전투골렘이 튀어나왔던 곳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안내인으로 따라온 소환사는 가동되지 않았던 전투골렘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빴는데, 우리를 흘깃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음, 그럼 들어가서 뭘 함부로 만진다고 크게 잘못되거나 할 일은 없다는거겠지?
높은 천장까지 이어막힌 벽 사이로 좁은 틈이 나 있었다.
사전에 숙지한 내부 지형대로라면 중앙억제기의 핵심시설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와, 남부 초원에서 봤던거랑은 아예 다르네. 그냥 사이즈만 큰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