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1부
오닉스 7팀은 정식으로 소환사 라크의 의뢰를 받아들여 업무일지에 기록했다.
사규에 의하면 의뢰를 받고 임무를 배당하는 것은 중앙 회사의 몫이고 개별 팀의 팀장은 하달받은 임무에 한해서만 지휘권을 행사하지만, 회사가 나한테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지.
꼭 국정원의 부탁을 받고 왔으니까 괜찮다는건 아니다.
중국에 매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택영 사장을 위시한 임원진의 상당수가 잘려나갔을텐데 현장에서의 사소한 규정위반을 두고 뭐라고 시비를 걸 수 있는 상태도 아닐테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뒤에 버티고 서서 노려봐줄거거든.
“의뢰를 미국을 통해서 받은게 아니라 이계인에게 직접 받은걸로 기록해도 될까?”
“걱정마요 형. 공식적으로 이렇게 해놔도 뒷배가 되어줄 수밖에 없다니까? 아까 라크 씨가 하는 말 들었잖아요. 미국 애들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섭섭한 소리를 할 상황이 아냐.”
“그건 그렇지. 큭큭큭, 이거 완전히 마법기술에 접근할 문을 독점한 셈 아니냐.”
“근데 돈 받고 마음대로 팔아도 되는거예요? 팀장님이 추천한 도제가 멍청하거나 태도가 불량해서 뭔가 문제를 일으키면 라크 그 양반하고도 사이가 좀 미묘해지는거 아닌가?”
“거 쓸데없는 걱정 그만 해라. 지호 이름을 거는건 맞는데, 설마 미국이 그렇게 물렁하게 뽑겠냐? 당연히 최고로 똑똑하고 성실한 수재들만 고르고 골라서 보낼텐데. 아, 그러고보니 지호야, 한두 자리 쯤은 우리 회사에서 뽑아도 되지 않을까?”
“왜요, 추천할 사람 있어요? 뭐, 봐서요. 라크 씨가 자리를 넉넉하게 주면 빼보지 뭐.”
미국은 마법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고 싶겠지만 글쎄, 뜻대로 될까?
살아남은 옛 문명인들이 이들이 전부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라크가 말한 열 세 개의 전장 중 한두군데라도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투쟁의 협곡이 있다면 타국의 헌터들이 이 정보에 접근하는걸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이번 의뢰가 끝나면 라크가 찍어준 다른 협곡의 위치들 중 울릉도 게이트 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가볼 계획이거든.
그럼 설령 우리 7팀이 비밀유지 서약을 하고 입을 다물더라도 최소한 한국은 알게 되는거지.
“흐음, 저거 군용차량 주제에 우리 차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요? 미제라 그런가?”
“미국 애들이 최정예 특수군에 쓰는 돈을 아끼기라도 했겠냐. 그리고 우리 특수군이 쓰는 전투차량도 예산에 비해 아쉽다는거지 웬만한 사제차 못지 않아.”
“이 차보다도 더 비싸고 좋아보이는데요? 적재함도 삼사십퍼센트 이상은 더 커보이네.”
라크의 정보에 의하면 요정의 숲 북동부의 분지에 있을 투쟁의 협곡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윤기정과 강승호가 잡담하는 화제는 어느새 앞서가고 있는 차에 닿아 있었다.
얼마전에 방산비리가 적발되어 한바탕 야단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의 이능력자 특수군이 쓰는 장갑차는 기계화사단의 차량보다 두 배 이상은 더 비싼 최고급품이었는데, 미국 놈들이 굴리는 저 차는 한 눈에 봐도 사이즈부터가 큼직한게 아주 힘 좋고 널찍해 보인다.
크다고 무조건 좋은건 아니지만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적재용량 때문에 팀의 장갑차를 바꿀까 생각중이던 내게는 저 크고 아름다운 차체와 우렁찬 엔진음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음, 생각난 김에 한 대 달라고 해서 바꿀까.
“연방 게이트 관리국의 즉응부대라는 아저씨들, 아까 보니까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던데.”
“그야 그렇겠죠. 이계인들한테 완전히 무시당한거 아닙니까. 아메리카의 전사들로는 부족하니 우리 팀장님이 나서야 한다고 라크 그 양반이 대놓고 말했잖아요. 큭큭큭, 소환사들 교육 과정에 사람 기분 안 상하게 하는 화법같은건 없나봅니다.”
“온 세상에서 떠받들어주는 사제계급이 그런게 필요했겠냐. 말하다보면 무슨 고승같던데?”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다는 것부터 공양이나 수행같은 표현까지 보면 그냥 스님 맞지 뭐.”
“스님이 그렇게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생각하면 무지 어색한걸. 하비에르 그 친구한테 말은 안 했지만, 분명히 뭐가 있어도 있을겁니다. 연관이 없을수가 없어요.”
“그건 한국어 자연스럽게 할 때부터 기정사실이지. 난 솔직히 한국인의 선조가 외계인이었다는 설보다는 현대 한국인이 타임트립을 해서 이 행성의 고대에 떨어졌다는 설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거든. 왜, 그런 소설들 많잖냐. 발전된 지식을 사용해서 종교적인 권위를 얻었다면 언어가 변화하지 않고 수천년을 내려왔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지구에서 아랍어나 라틴어같은 언어들도 고대하고 지금하고 별 차이 없다는 소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야.”
“현대 한국인이 발전된 지식을 활용해서 마법 문명을 일궜다구요? 그건 대체 어느 평행세계의 한국인이랍니까? 중간에 호구 드래곤을 만났다는게 더 그럴듯하겠네.”
와, 윤기정하고 강승호, 나하고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걸로 아는데.
즐겨읽는 판타지 소설 트렌드에서 세대차이가 좀 있네.
그런 영지물은 전생에서나 즐겨봤지, 나 고등학생때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사실 이능력자가 실존하는 세상에서 굳이 현실도피를 위해 이세계에 갈 필요도 없지.
고등급 이능력을 각성하기만 하면 억대연봉이 코앞인데다가 헌터가 위험한 직업이라서 인기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외계행성을 무대로 한 모험이 로망을 자극하는건 똑같으니까.
“아, 선두차량 정지했습니다. 주행거리로 유추해보면 다 왔나본데요?”
“황량하긴 황량하네. 저번 정찰때도 전투가 거의 없어서 주변에 괴수가 적은건 알았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아예 한번도 마주치지 않을줄은 몰랐는데.”
“중앙억제기가 혹시 아직까지도 제 기능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저번에 쉴롭사태때 호수 밑바닥에서 찾은 억제기도 외부적으로 손상이 가서 멈춘거지 최근까지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잖아. 물론 방어막을 약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괴수를 쫓아내는 억제기라면 비교할수도 없이 더 고출력이 필요하겠지만 마력이라는게 워낙 고효율이니까.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렇지. 반영구적이라는 소리도 있다니까. 음, 하지만 그건 아닐거야. 라크 씨가 그랬잖아, 중앙 억제기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투쟁의 협곡 주변에서 몬스터가 보일리 없다고.”
“아, 내리네. 여긴가보다. 승호형, 잠금장치 풀어.”
멈춘 차량에서 미 게이트 관리국의 직속 즉응부대원들 십여명과 함께 바쁜 와중에도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동승한 소환사 한 명이 내리는 것이 보인다.
후방 도어를 개방하고 간단한 짐을 챙겨서 내리는데 흙먼지 섞인 바람이 약간 따갑다.
소환사와 손짓을 섞어가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덩치 큰 히스패닉이 내게 다가왔다.
이름이 뭐랬더라, 무슨 야구선수 이름하고 똑같다며 윤기정이 신기해 했는데.
“미스터 최, 여기서부터는 위험구역이니 우리 지시를 따라주시오.”
점잖은 단어로만 이루어진 정중한 문장이지만 목소리하며 태도가 꽤나 고압적이다.
이 친구들, 기분이 상한건 알겠는데 천지분간을 못 하는걸.
차라리 통역으로 하비에르가 따라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하필 즉응부대에 동부어, 그러니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지휘관급 인사가 있었나보다.
나는 건성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하고는 목소리를 높여 앞쪽의 소환사를 소리쳐 불렀다.
“뭐, 그럽시다. 거기 소환사님! 이름이 베르라고 하셨죠? 어디로 들어가는겁니까?”
“잠깐, 누가 안내인과 함부로 대화를 해도 좋다고 했소?”
“영어 말고 동부어로 말해요, 동부어로. 우리 소환사님이 못 알아들으시잖아. 아, 베르 님. 중앙억제기의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여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아, 최지호 님. 다시 한번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억제기는 기본적으로 지하에 설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음, 여기 어디에 입구가 있을텐데... 아무래도 퇴적층에 묻혀버린 모양이군요. 괜찮다면 수하들을 부려 발굴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마력이 깃든 금속이 부식되어 없어지진 않았을겁니다.”
“큭큭큭, 기꺼이 그러죠. 거기 아저씨, 들었죠? 땅 파래요. 공구는 챙겨왔어요?”
베르라는 이 소환사, 눈치가 좀 없는건 알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든다.
관리국 즉응부대의 분대 지휘관에게 빙글거리면서 영어로 외치니 안 그래도 불편한 안색을 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하게 굳어진다.
수하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나?
하지만 뭘 어쩌겠어, 이건 정당한 요청이라고.
저 소환사의 요구에는 무조건적으로 협조하라는 지시가 분명히 있었을텐데 말이야.
역시 예상대로 지휘관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분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스페인어로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건 미에르다 한 단어밖에 없더라.
이내 앞서가던 커다란 장갑차에서 야삽을 포함해 다용도의 공구툴이 여러개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뭘 동력으로 하는지는 몰라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도 여럿 있었다.
“금방 끝날겁니다. 여기선 어떨지 몰라도 지구에서 군인이 하는 일은 태반이 삽질이거든요.”
“하하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마탑도 대규모 역사에선 주변 왕국군 병사들의 힘을 빌리는게 일상이었죠. 오오, 저 기계는 굉장하군요. 맨 땅을 마치 푸딩처럼 파고들다니.”
연방 게이트 관리국의 직속 전투병력이라고 하면 이능력자 특수군 중에서도 정예로 가려뽑은 특수부대나 다름없으니 총보다 삽을 들 일이 많은 한국군의 보병들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값비싼 자동화 기계의 위력이 힘입어 발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분대장과 나 사이의 미묘한 알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베르는 그저 해맑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땅을 파헤칠 위치를 조금씩 재조정해준다.
아니지, 말이 미묘한 알력이지 이 정도면 대놓고 서로 욕만 안 했지 사실상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거나 다름없는데, 저 친구 예상보다 더 눈치가 없는걸?
“미스터 최, 한 가지만 확실히 하지. 최대한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 지휘관은 나야. 당신은 용병에 불과하고. 안내인의 오해를 반드시 풀어줘야 할거야.”
“왜 저한테 그럽니까? 아까 보니까 말도 그럭저럭 통하던데, 직접 하시지.”
작업이 한창일 때 슬쩍 내게 다가와 으르렁거리는 지휘관에게 대꾸해봤지만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자기 할 말만 이어서 했다.
그러고보니 쓰는 단어도 점점 반말에 가까운 문장이 되는 것 같은데?
영어가 경어구분이 우리말보다 모호하다지만 영어권 화자가 아닌 나도 지금 대놓고 하대를 하고 있다는건 알아듣겠네.
“그리고 조만간 유적에 진입하면 그때부터는 전투태세다. 당신도 알겠지만 전장에서 항명은 즉결처분이지. 첫 번째 명령이다. 내 분대원들은 하나하나가 넌 상상도 하지 못 할 전장들을 헤치고 나온 정예야. 그러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뒤로 빠져있어. 그럼 안전한 복귀를 보장할테니.”
“어... 실례지만 혹시 우리 오닉스 7팀에 대해 따로 지시받은 사항이 없나요?”
“이미 말했다시피, 협조를 지시받았지. 그래서 협조하는 중이다. 불만있나?”
“아뇨, 없습니다. 뜻대로 하시죠.”
무시당한 것에 대해 화가 나야할텐데, 기이하게도 나는 분노보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지휘관의 표정과 말투가 마치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 봤던 노련하고 자부심넘치는 장교의 대사같이 느껴졌던 탓도 있고,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라크의 예상에 의하면 전투골렘이 아직 가동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는 투쟁의 협곡에서 내가 깨웠던 모든 소환사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소환사였고,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 권위에 어울리는 판단력과 지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니 전투골렘을 일반 헌터들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판단 역시 십중팔구는 적중하리라.
“저 군인 아저씨가 뭐라고 합니까?”
“방해하지 말고 뒤에 숨어있으라는데? 하여튼 공무원들은 이게 문제야. 덮어놓고 최대한 협조하라고만 하니까 우리가 왜 따라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거 참, 누가 누굴 무시해? 엄밀히 말하면 우리 의뢰에 저 아저씨들이 끼어서 온거죠. 라크 씨는 우리한테 부탁했잖습니까.”
“그런 제반사정을 전달 못 받은 모양이지. ‘그래서 협조하는 중이다. 불만있나?’라니, 크으.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으면 참 멋지다고 엄지 척 들어줬을텐데.”
보통 저런 대사를 면전에서 듣는건 무능한 주제에 실전경험이 많은 주인공 앞에서 되도 않는 지시를 하다가 깨갱 기가 죽는 과학자 내지는 정치인의 역할이겠지.
그에겐 불행히도 여긴 할리우드 전쟁 혹은 괴수영화 속이 아니었다.
정예 특수군의 입장에서 이름없는 외국 회사의 민간헌터들을 못 미더워하는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불필요한 기싸움을 하는걸 보니 자부심이 너무 과한걸.
“대위님! 입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베르가 지정했던 위치와는 거의 이십여미터나 더 떨어진 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는 계산이 좀 틀린 것 같다면서 멋쩍어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것도 엄청 대단한걸.
표식이 될만한 특이지형이나 랜드마크 하나도 없는 황무지에서 이만하면 가까운 근사값이지.
군인들이 공구들을 정리해 장갑차에 넣고 각종 화기를 꺼낸다.
소환사 베르는 페드로 어쩌고 하는 대위가 아니라 내게 다가와서 정중하게 권했다.
“어서 들어갑시다. 중앙억제기는 일반 억제기들과 좀 달라요. 꽤나 널찍한 건물인데, 아마 제가 조명을 비롯한 내부장치들을 작동할 수 있을겁니다.”
내가 아니라 저기 저 아저씨가 지휘관이라고 말을 해줄까 하다가 말았다.
생각해보면 이번 일은 라크의 의뢰를 받고 온거지 미국 정부하고는 상관없잖아?
그 쪽에서 현장 지휘권을 어떻게 결정했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우리는 두 사람 정도가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법한 폭에 높이는 2미터쯤 되는 비스듬한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 크기를 보니 확실히 피엠들은 들어올 수 없는 시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