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7화 〉1부 (97/110)



〈 97화 〉1부

전생에 게임 화면을 통해 질리도록  곳이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건 차원이 달랐다.
흙먼지 아래에 묻혀있던 투쟁의 협곡은 우리가 잠깐 정찰을 나갔다 온 짧은 시간에 벌써 발굴작업이 크게 진척되어 대강의 얼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 무너져내린 건물을 복원할 건축자재는 대부분 미국이 공급했지만 의외로 노동력은 넘쳐나고 있었는데, 심지어 피엠 부족에서 추가로 일할 사람을 더 보내올거라고 했다.
그들은 소환사들을 도와 전장을 복구하는데 손을 보태는걸 당연한 의무로 여기는 것 같았다.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걸 합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겠지.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가는건 어쩔 수 없다.
그야 문자가 있으니 신화가 유실되지 않고 대대로 내려오는건 이상할 일이 아니지만 까마득한 옛날의 전설에 의거한 의무를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우리하곤 감각이 다르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걸 실제로 본 사람은 이천년전에 다 죽었지만, 피엠들은 바로 얼마 전에 자기네 선조들이 부활하는걸 눈 앞에서 봤잖습니까.”


“음,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겁니다. 저만 해도 실감이 안 나는 일인걸요. 최 헌터가 비석을 부수자 피엠들의 전설대로  거대한 기둥 속에서 저 친구들이 걸어나오는 광경은 아마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겁니다. 그야말로 기적 아닙니까. 진짜로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뛴건지 아직 증명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만 놓고 보면 안 될 것도 없겠다 싶습니다. 하하하.”

“기적이라. 그렇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네요.”


하긴, 그동안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내가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마 전생의 게임이라는 아무도 모르는 정보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는 하비에르처럼 경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놀라운 일들이었지.

“어? 그런데 저기선 뭘 하고 있는거죠? 복장을 보니 소환사인 것 같은데...”


시멘트로 내벽을 보강하고 그 위에 흙과 잔디를 덮어 만든 오목한 지형 안에서 세 사람의 소환사가 굉장히 특이한 동작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음, 복장은 다르지만 저건 꼭... 무당이 굿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소매가 넉넉하게 늘어지는 옷을 입고서 저렇게 팔을 허우적대니까 꽤나 그럴듯하긴 하다.

“소환의식을 하고 있는겁니다. 아직 지형이 완전히 복구되지는 않았지만 진척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바로 소환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완공시기와 얼추 맞을 것 같아서요. 아메리카 부족의 건축 기술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어? 어디서 들으셨나보네. 전에는 그냥 미국이라고 하시더니.”

“하하하,  때는 실례했습니다. 저희 중에 지구의 언어를 빠르게 배운 소환사가 말하기를 동부어를 쓰는건 지구인들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아메리카의 언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동부어로 미국이라고 하지만 웬만하면 고유발음으로 불러드려야죠.”

굳이 따지자면 아메리카도 미국의 풀네임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친구 참 예의바르구만.
그나저나 소환의식이라니, 뭘 불러낸다는거지?
호기심어린 얼굴로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의식이 펼쳐지는 땅  가운데가 조금 볼록 튀어나와있기는 한데, 라크가 지목해주지 않았으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지룡을 소환하는 중입니다. 땅의 정령들이 모여서 실체를 이룬 것인데, 피부가 단단하고 힘이 세기 때문에 웬만한 전사들은 십수명이 무리를 짓지 않으면 상대하기 힘들지요.”

“오, 용이라구요? 그럼 저 땅 안에서 만들어지는건가요? 아니면 어디서 불러오는건가요?”

“저기, 팀장님. 지룡이라고 하면 흔히 지렁이를 뜻하는게...”

“야 인마. 목소리 줄여. 저 친구들이 그런 소리를 퍽이나 좋게 듣겠다.”

경호겸 해서 동행한 윤기정과 강승호가 속삭이며 떠드는 것처럼 지룡은  네이밍과 디자인 때문에 유저들 사이에서는 흔히 지렁이라고 불리는 몬스터였다.
중앙 계곡의 둥지에 있는데다 사냥 성공시 팀 전체에 적용되는 랜덤 영구 버프가 꽤나 게임에 영향을 크게 미쳐서 보통 중반에 접어들면서 라인전이 끝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지룡에 원래 저런 설정이 있었나?
땅의 정령이 모여들어 실체를 이룬다니.
그냥 별 생각없이 버프 몬스터구나, 하고 여겼는데 의외로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구만.

“소환의식은 아마 오늘중으로 끝날겁니다. 아, 혹시 안쪽의 숲은 아직 구경을 안 하셨나요? 좀비와 헬하운드는 이미 소환을 끝냈습니다. 사육사가 모두 변을 당해서 앞으로 관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필요한 지식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그러니까 이 친구들이 소환사라고 불리는건 협곡에 필요한 몬스터들을 소환하기 때문인가.
사육사는 내가 처음 라크를 구한 곳과 반대 진영에 있는 수정탑에 갇혀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세 명의 소환사를 더 구조하는데 성공했는데, 불행히도 사육사와 측량사, 관리관 등의 기타 인력들은 천사의 손길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라크의 추측에 의하면 소환사들과 달리 몸이 마력에 익숙하지 않아서 마력폭주의 와중에 견디지 못하고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을거란다.


“최지호 님의 치료술은 실로 신묘해서 어떻게든 숨만 붙어있다면 완전히 회복시키는게 가능하죠. 실제로 소환사들 중 수행이 낮아 마력폭주에 타격을 받은 자들도 체내 시간동결에 성공하기만 하면 모두 건강하게 업무에 복귀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사망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력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들인가보네요?”

“예. 마력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어쩔 수 없죠. 저도 처음 가문을 떠날땐 잡일꾼으로 봉사할 생각이었지 설마 소환사가 될거라고 기대하진 않았거든요. 마력각성을 하고나니 가문에서도 소환사가 나왔다며 자랑스러워 했다더군요. 뭐, 이젠 다 의미없는 일이지만.”


“유감입니다.”

“괜찮습니다. 속세를 등진 몸인데도 불구하고 얽매여 슬퍼한 제가 수양이 부족한거죠. 아무튼 마력이라는건 무척 희귀한 재능입니다. 아메리카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마력을 각성하신 분들이라서 잘 모르시겠지만, 적어도 저희 세계에서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그랬죠.”


“사실 그건 이쪽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린 이능력자나 초능력자라고 부르는데, 각성비율이 2퍼센트에서 3퍼센트 남짓 됩니다. 그나마도 자연각성은 훨씬  희귀하고, 인위적으로 촉진제를 주사해서 각성을 유도하여 전보다 훨씬 높아진 수치죠.”

“백 명 중에 두셋이 마력을 각성하는 것도 엄청난겁니다. 특히 아메리카의 인구는 수십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기, 그건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구엔 아메리카 말고도 나라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아메리카의 인구는 삼억을 약간 넘기는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하비에르가 내 눈치를 보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한다.
보아하니 미국을 지구의 대표 정도로 인식하게끔 설명을 한 것 같은데, 나는 별로 따질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냥 픽 웃고 말았다.
어느 나라든 최초 접촉했으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을 하는게 당연하지 뭐.
게다가 사실 미국이 지구의 대표라고 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이라고 보긴 어렵기도 하고.
라크의 말을 들어보니 게이트의 존재와 우리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것도 다 아는 것 같다.
하긴, 그건 오래 숨길수도 없고 숨겨봐야 의미도 없는거니까.

“삼억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건 마찬가집니다. 제가 역사를 배울 때 대륙 전체의 인구가 아인종까지 전부 합쳐야 간신히 오억 명 정도라고 했으니까요. 투쟁의 협곡이 자리잡기 이전에 있었던 몇몇 대전쟁 중 가장 많은 병사들이 부딪힌 것이 양측 합쳐 오십만이  됩니다.”

오십만? 와, 그게 말이 되나?
오억 명이라고 해도 다양한 아인종들까지 다 합친 숫자면 인간 국가들의 인구야  봐도 뻔한데, 거기서 두 나라가 수십만 단위의 병력을 뽑아냈다니.
그만한 행정력과 동원력이라면 이 행성의 문명 수준이 생각보다  대단했나보다.
그때 우리가 지켜보던 소환진을 중심으로 땅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 이제야 반응이 오는군요. 예전보다 늦어서 걱정을 약간 했는데 말이죠.”


“그 지룡이라는 괴수가 소환된겁니까?”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소환되는 중이죠. 하지만 이렇게 반응이  이상 소환의식이 실패로 끝날 염려는 완전히 없어진거라고 봐도 좋습니다. 제물에 화답을 했다는거거든요.”


제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하비에르가 낮은 목소리로 마석이라고 알려준다.
그렇지, 여긴 마력문명이지 참.
지구의 전기 수준으로 어디서 뭘 하든 마석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아직 인류의 마석에 대한 이해는 낮은 편이지만, 이렇게 마력을 이용하는 고등문명과 직접 접촉을 한 이상 서로 교류하면서 수준을 따라잡는건 순식간일 것이다.
대중교통이 괴수 사체를 정제한 바이오디젤이 아니라 마력엔진으로 달리는 날도 곧 오겠지.


“정찰은 어땠습니까? 저희가 알려드린 정보가 쓸모가 있었나요?”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탓인지 전혀 달랐습니다만, 그럭저럭 성과는 있었습니다. 적어도 협곡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선 성공적이라고 봐야겠죠.”


“야생의 몬스터들을 사냥하셨습니까?”


“예.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미발견 괴수들을 몇 종류 조우하여 전투를 치렀습니다.”

네이밍의 권한은 계약에 따라 전부 미국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괴수 이름 짓는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추가금까지 지불하면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아, 역시 억제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나보군요. 원래 투쟁의 협곡을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이상은 안전지대로 관리되고 있어야 하는데. 실례지만 최지호 님, 기왕 도와주시는 김에 한 가지 일을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억제기를 찾아 보수하는 일이라면 염려마세요. 기록된 위치만 찍어주시면 미국이 인력을 내어 순식간에 알아서 처리할겁니다.”


“아뇨, 억제기 자체의 보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럴  있다고 하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중앙억제기가 문젭니다. 사고로 파손되지 않도록 전투골렘들이 지키고 있거든요. 그 전투골렘들이 아직까지도 작동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작동하고 있다면 제가 본 아메리카 전사들의 수준으로는 제압하기가 거의 불가능할겁니다.”


사람이 탑승하지 않고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전투 로봇이 진짜로 있다니.
아까 아이템 이름에 대해 질문하다가 둘러댔을때는 별 생각없이 그러려니 넘겼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마력문명의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일례다.
그동안 폐허에 가까운 유적들만 보면서 얕보던 선입견을 얼른 지워야겠네.
하비에르는 처음 들은 전투골렘이라는 단어에 혹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요구한다.
저 친구는 자세히 들은 바는 없지만 척 봐도 연방기관 혹은 어용회사의 헌터니까 그가 보고들은건 전부 미국 정부에게 즉시 보고가 되겠지.
미국 헌터들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으니 내게 맡기고 싶다는 라크의 말을 미국 정부에서 어떻게 해석할지 의문이다.
기분나빠할지도 모르고 내 가치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골렘은 영어 아닌가요?”

“그거 말고도 자연스럽게 외래어 섞어서 쓰더라. 대체 동부어라는건 어떻게 되어먹은건지.”

게임을 개발하는 시점에서 한국어에 섞여든 외래어는  동부어로 퉁 쳤나보지.
나는 윤기정과 강승호가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하면서 라크에게 물었다.
마력을 수련한 사람들은 전부 살아남아서 내게 치료를 받았다며?


“라크 님, 중앙억제기도 어쨌든 유지 및 보수를 하는 담당자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럼 출입권한이 있을텐데요.  전투골렘을 부수고 통과해야 합니까?”


“출입권한은 오직 의회에만 있습니다. 중앙억제기에 문제가 생기면 개별 전장을 관리하는 소환사들이 군소 억제기를 활용해 응급처치를 하고 의회에 보고하는 절차를 거쳐 전문 마도인력이 파견나오게 되는거죠. 하지만 지금은 의회와 연락이 닿을  없으니...”


“그럼 중앙억제기를 재가동할 수 있는 방법은 아십니까? 전문인력이 파견나와서 하던거면 뭔가 더 복잡한 절차가 있을 것 같은데요.”

“말씀드렸다시피, 보수공사는 별로 어려울게 없습니다. 그리고 억제기라는게 딱히 복잡한 원리로 이뤄진게 아니다보니 마석을 채워넣고 마법진만 제대로 복구한다면 정규교육을 받은 소환사 아무나 보내도 얼마든지 재가동할 수 있을겁니다. 아, 그러고보니 아메리카에서 기술이전에 대해 요청을 하셨는데... 그건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무,물론입니다. 강요할 생각은 절대로...”

“아니아니, 못 해드리겠다는게 아니라, 당장은 어렵다는겁니다. 복잡한 원리가 아니라고 했지만 마법 자체가 그리 만만한 학문이 아니거든요. 이쪽에서 간단한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교역을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본격적인 기술교류를 하려면 기초부터 배워야 할겁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는겁니까?”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도  해드릴까요. 원래 마탑주들로 구성된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사안이지만, 동시에 저희 소환사들에겐 전장을 복구하고 질서를 다시 세울 의무도 있으니까요. 비상 상황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선택 정도는 저도 내릴  있습니다.”


오, 이건 생각보다 사이즈가 더  사안을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동안 우리 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유적지를 발견해 암암리에 연구를 하고 있었다지만 현지인에게 협조를 받아 기술이전을 받는다는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가만있자, 그런데  ‘생명의 은인’이라는건 날 말하는거겠지?

“라크 님.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미국인이 아닙니다. 미국과는 어디까지나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해요.”

“하하하, 상관없습니다. 도제로 받을 숫자를 저희끼리 상의하여 정하고, 그 인선은 모두 최지호 님의 선발에 맡기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아, 하비에르의 눈이 저러다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툭 튀어나온다.
나는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윤기정과 강승호와 함께 득의양양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발권이라니.
몇 자리나 될지는 몰라도 한 자리당 최소 백만 불부터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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