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1부
천사의 단지에 붙은 액티브 효과 천사의 손길은, 내가 만병통치약처럼 쓰긴 했지만 원래 사람을 고치는 치유스킬이 아니라 상태이상을 즉시 해제하는 스킬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이번이 처음으로 ‘게임사에서 의도한 방향으로’ 활용한 셈이 되겠지.
굳어있던 정체불명의 사람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노,놀랍군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이능력도 있습니까? 그거 완전...”
“기적이라고? 그런거 아닙니다. 그냥 좀 특이한 치유능력이에요. 우리나라 정부한테 들킨지 오래니까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이 친구들, 애초에 안 죽었던겁니다.”
“내 어깨를 고쳤던 그 이능이지? 휴우, 이렇게 보니까 부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기적이야.”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아, 영어를 알 리가 없지.”
하비에르가 피엠의 언어로 말을 걸어보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고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는걸 보면 살아나긴 살아난 모양인데.
환호성을 지른 피엠들이 내게 달려와 뭐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조아린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는건 어렵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도 고쳐달라는거겠지.
나는 하비에르를 통해 치료에는 3분 정도의 텀이 필요하다고 전하고 다음 환자 앞에 섰다.
딱딱하게 굳어 영락없이 시체처럼 보이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잠깐을 기다리니 3분의 쿨다운 타임이 지나갔는지 다시 천사의 단지 아이템이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지체없이 사용하여 아이템 액티브 효과인 천사의 손길을 보내니 굳은 몸에 혈색이 돈다.
“하나, 둘... 총 열 두명이네. 그럼 앞으로 대충 삼십분 정도 걸리는건가.”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쉬지 않고 연속으로 이능을 발현하면...”
“아아, 괜찮아요. 걱정마십쇼. 삼 분정도 준비시간이 필요한건 정신력과는 다른 기전의 문제 때문입니다. 별로 체력소모가 심한 이능이 아니니까 큰 부담은 없을겁니다.”
“와...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굉장한데요.”
높은 등급의 치유계열 이능력자들 중에는 잘려나간 팔다리를 눈깜짝할새 붙일 수 있는 수준의 힐러들도 있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하면 당연히 녹초가 되는게 일반적이다.
내가 힘든 기색없이 삼 분마다 한 명씩 석화된 이계인들을 되살리니 하비에르의 눈빛은 광선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반짝이고 윤기정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다.
십여분이 지나고 네 명째를 회복시켰을 무렵, 처음 되살아난 이계인이 정신을 차렸다.
문제는, 피엠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그가 전혀 못 알아듣고 있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이거 곤란한걸.
그야 사이즈가 인간과 비슷하니 두 배는 되어보이는 저 떡대들곽 같은 종족이 아니라는건 첫 눈에 알았지만 말은 어느 정도 통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래서야 투쟁의 협곡의 비밀을 밝히는데 걸릴 시간이 몇 달 단위로 늘어날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이계인은, 내 우려를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불식시켜 주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말을 걸어대던 피엠들의 모습에 겁에 질려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 세 사람을 발견하고 반색하며 소리친 것이다.
다름아닌 한국어로.
“우,우리가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가만, 지금이 몇 년도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우리말이 들려오니 뇌가 잠깐 정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대체 왜? 어떻게?
윤기정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입을 딱 벌리고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어 질문을 쏟아낸 것은 거의 십여초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당신, 한국인입니까? 지구인?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는겁니까?”
“헌터 자격증 번호 불러보세요. 플로리다 해상게이트를 넘어가 활동하는 한국 헌터는 지금까지 채 십여명이 안 되는데다 실종된 사람도 없는걸로 아는데요. 아, 혹시 다른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겁니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만 해도 족히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텐데...”
“예? 무,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헌터요?”
헌터 자격증 없이 게이트를 넘는건 특별한 필요에 의해 법률로 허가하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므로 외계행성에서 구출한 지구인이 헌터일 것이라고 추측한 윤기정의 질문은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그들은 다만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나는 그제야 구출된 사람들의 외양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는 전부 하얗게 세어버린데다 피부도 탈색이라도 한 듯 창백해서 좀 기괴하게 보이긴 했지만 이목구비를 보면 동아시아계 인종이 맞는 것 같다.
입고 있는 옷의 디자인이 다 똑같은걸 보면 유니폼을 맞춰입은 특정 집단 소속일 것이고.
그에 더해 한국어를 하니까, 음, 역시 한국의 헌터회사 말고는 떠오르는게 없는데?“저희는 투쟁의 협곡을 관리하는 소환삽니다. 맞아, 기억이 납니다. 정기적으로 협곡 내부 시설을 점검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원인불명의 마력폭주가...”
“투쟁의 협곡? 소환사?”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윤기정과 달리 내 가슴은 흥분으로 벅차올랐다.
이렇게나 확고한 증거와 직접적인 단서가 나타난 적은 없었지.
그나저나 말하는걸 들어보니 이 소환사는 지구인이 아니라 이계인이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거지?
한국어는 몇몇 단어만 더듬더듬 알아들을뿐 그리 능숙하지 못한 하비에르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제때 따라가지 못해 무척 답답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줄 계제가 아니었다.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보세요. 음, 그러니까 게이트로 차원이동을 한 게 아니란거죠?”
“차원이동이요? 그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에 동부 마탑에서 최근 다차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요.”
미치겠네, 말하는게 전혀 위화감이 없어.
뉴스레터같은 단어도 섞는걸 보면 그냥 우리가 쓰는 현대 한국어 그 자체다.
당장 현대 국어와 중세 국어만 해도 발음이 다르고 단어가 달라 말이 거의 안 통할텐데, 머나먼 고대에 한국인이 차원이동을 해서 문명을 일궜다, 같은 설정이라면 이럴 리가 없지.
한두세대만 지나가도 세대차이가 느껴질만큼 확연히 바뀌는게 또 언어 아니겠는가.
이계인이 눈치를 보다가 앉은채로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동부어를 쓰시는걸 보니 동향사람인 것 같은데,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전 소환사 라크, 소환사가 되기 전의 속세 이름은 엘 크라인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엘 가문의 후계자로 유명했죠.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으로 가문을 등지고 교회에 투신했지만 여러분께 후한 보답을 하는 것쯤은 문제없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이젠 상황설명을 요구하던 윤기정이 역으로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골머리를 싸맨다.
이 이십대 초중반 가량의 청년은 고대 문명의 어느 명가의 도련님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대문명은 지금은 흙먼지에 묻혀 흔적만 간신히 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저 수정 안에서 대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던거야, 이 친구.
“으으, 여긴 어디죠? 사고가, 마력폭주가 있었는데...”
뒤이어 하나둘 정신을 차리는 다른 이계인들도 신음과 함께 비슷한 첫 마디를 꺼낸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쿨다운이 끝난 천사의 손길로 다음 환자를 치료했다.
---------
수정탑에서 꺼낸 열 두명의 이계인을 모두 치료한 후 우리는 이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어떻게든 꿰어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혹사했다.
피엠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랜 봉인에서 풀려난 고대 피엠들은 다만 ‘투쟁의 협곡을 되찾았으니 이제 시설을 원상복구하고 가동할 방법만 찾으면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세계의 질서라는건 아마 투쟁의 협곡에서 벌어지는 대리전을 통해 각 부족과 종족들의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중세식 결투재판의 질서겠지.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이곳이 이성이 없는 괴수들만 우글거리는 행성이 아니라는 것.
게이트를 중심으로 전진기지를 짓고 이 행성을 개척해나가는 단계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종족들이 다양한 문명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정보를 얻었다는 점일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체 어떻게 한국어가 이 행성의 언어와 완전히 같냐는 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전 동양사에 대해선 잘 몰라서... 혹시 한국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 단서가 될만한거라도 없습니까? 다른 세계로 갔다던지, 아니면 거꾸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던지. 이곳의 고대문명이 지구로 와서 인류의 뿌리가 됐을수도? 지구 첫 문명이 바로 한국인거죠.”
“와, 그거 환빠들이 엄청나게 좋아할만한 가설이네. 하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그야 신화에선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민족이라고들 하죠. 세상에 안 그런 민족이 어딨습니까? 그런걸론 설명이 안 돼요. 고대나 중세 한국어가 아니라 현대 한국어거든요. 그럭저럭 말이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서울 한복판에 던져놔도 위화감이 없을 말투라구요.”
“그럼 이런 가설은 어떨까? 현대 한국인이 게이트에 휘말렸는데, 시간왜곡 현상이 일어나서 이 행성의 머나먼 고대에 떨어진거야. 그 사람이 고대 문명을 일군거지.”
“오, 그거 SF소설로 쓰면 재밌겠네요. 근데 그것도 말이 안 돼요. 그 긴 시간동안 언어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디 학술적으로만 쓰는 언어도 아니고 보아하니 동부라는 곳에선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같은데.”
“끄응.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대체 뭐지?”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에는 문외한인 세 명이서 의견을 모아보지만 해답이 나올 리가 없다.
한편, 구조된 이계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충격을 겪고 있었다.
이 가여운 소환사들은 마력폭주 이후 깨어났더니 자신들이 알고 있는 문명은 모두 세월 아래에 묻혀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듯 했다.
아까 속세를 등지고 어쩌고 했으니 소환사라는게 아마 스님이나 신부처럼 특별한 소명의식을 위해 몸을 바친 계급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일을 겪고 초연하긴 힘들겠지.
그 마음이 상상이 갈 것도 같아서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어? 잠깐만.”
이 게임을 서비스하던 게임사, 분명히 한국 게임사였지?
요정의 숲에서 아이템 제단을 찾았을 때, 아니 처음 각성유도제를 맞고 각성한 이능력이 전생의 게임 캐릭터 스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떠올렸던 가설.
내가 환생한 이 세계가 아예 게임 속 배경세계라면.
여기서 중요한건 일의 선후다.
내가 그동안 막연하게 예감하고 상상하던 가설은 게이트로 현생의 지구와 연결된 이 외계행성의 문명이 꿈, 암시 등 어떤 형태로든 전생의 게임 개발자나 스토리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로 이런 유사점이 생겼을거라는 설이었는데, 그걸론 언어가 설명이 안 되잖아.
하지만 거꾸로라면 다 말이 되지.
한국 게임사에서 만들었으니 한국인일 소속 스토리 작가들도 한국어로 스토리와 배경설정을 짰을 것이고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이 현대 한국어로 말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게임의 배경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라.
가만있자, 그러고보니 그 게임사에서 차기작으로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초능력 배틀물을 개발하고 있다는 뉴스를 언젠가 얼핏 본 것 같은데, 설마...
“뭔데? 뭔가 생각나는거라도 있어? 요정의 숲에 있는 제단처럼 이미지 형태의 암시가 들어오기라도 한거야?”
“아뇨, 그런건 아니고... 투쟁의 협곡의 형태 말이에요.”
“아, 그렇지. 저 친구가 여길 투쟁의 협곡이라고 했지? 일종의 투기장이라니 이해는 가지만, 거 참 살벌한 이름이야. 아무튼, 형태가 왜?”
같은 게임사에서 개발한 차기작의 배경을 설정하면서 전작과 크로스오버를 시키는건 흔한 일이니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지만, 나는 그냥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확증도 없이 여기서 더 전개해봐야 의미가 없지.
나도 모르게 뭔가 깨달은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으니 얼버무리려면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어 나는 투쟁의 협곡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를 풀어놓기로 했다.
“투기장이라고 하지만 단순한 콜로세움같은건 아닐겁니다. 이쪽 진영의 수정탑이 여기. 그리고 저 길 끝에 반대 진영의 수정탑이 보이잖아요? 일직선으로요.”
“응? 저게 수정탑인가?”
“아, 지금은 묻혀있지만, 땅 위로 솟은 형태가 여길 파기 전과 똑같잖아요. 그러니 저 아래에 수정탑이 하나 더 있을겁니다. 그리고 그 길 중간에 관문이 여러개 늘어서있고. 아까 피엠들이 파헤친 성벽 안쪽의 구조물 봤죠? 그거 억제기예요. 위로 살짝 드러난 모양만 봐도 알죠.”
“억제기라면, 한국 게이트 인근의 남부평원에서 쉴롭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그...”
“괴수 방어막의 강도에 영향을 끼치는 시설이 왜 투기장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호 네 말은, 단순히 선발된 대전사들이 결투를 벌이는게 아니라 더 복잡한 룰을 가진 경기로 보인다는거지? 괴수를 사냥해서 그 성적을 겨룬다거나.”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하비에르와 윤기정은 금방 이 기이한 고대 유적의 용도에 대해 흥미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