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1부
나와 달리 고대전사는 단번에 확신하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방어탑이나 억제기, 중앙 소환탑 등의 건축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형이 너무 명백한데?
말라붙어 바닥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강은 한때 물이 흘렀던 자국이 역력하고 상중하 세 갈래의 진격로와 에픽 몬스터의 둥지 지형까지, 그 흔적이 선명하다.
오랜 세월동안 풍화되고 퇴적되며 이보다 더욱 미미한 흔적이 남아있을거라고 여겼는데 이만하면 게임을 즐기던 사람은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법한 수준이었다.
아, 혹시 그게 문제인가.
투쟁의 협곡에 대한 고대전사의 기억은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었을테니까.
“왜 그런답니까? 여기가 목적지가 맞답니까? 일단 협곡 지형인건 확실한데.”
“그게, 잘 모르겠답니다. 내려가봐야 확실하게 알 것 같다고 하는데요? 그나저나 참 대단하네요.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지형이 아니에요. 이것도 아마 유적과 관련이 있을겁니다.”
“오, 그런게 딱 보이시나보죠?”
“물론이죠. 제가 이래뵈도 지리학을 부전공했던 사람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최소한 외곽을 둘러친 경계는 인위적으로 깎아낸게 확실합니다. 그리고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저 강줄기도 예전에는 물이 흘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협곡을 따라 흐르는게 아니라 사선으로 형성되어 있잖아요? 수원지를 공사로 조성했을 확률이 높아보이는군요.”
“그럼 여기가 목적지일 확률이 더 높아지는거네요.”
아니, 굳이 따지진 않겠지만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하게 댈 것이지.
지리학 부전공했다고 저렇게 척 보고 자연적인 지형과 인공지형을 구분할 수 있는건가?
역시 단순한 통역 겸 호위라기엔 지나치게 유능한 인텔리다.
위성사진을 찍어 수색작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공유해 준 것도 그렇고, 그만큼 연방정부에서 이번 의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려가봅시다. 아, 좌표 기록하는거 잊지 말구요. 우리가 초동조사를 하는 것보다 나중에 제대로 된 전문가들이 와서 파헤쳐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피엠들이 말하는걸 들어보면 여긴 그들의 성지 비스무리한 곳일텐데, 외부인들이 함부로 들어와서 땅을 까뒤집으며 조사를 하도록 허가해 줄까요?”
“내가 부탁하면 아마 거절하진 않을겁니다.”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 비스무리한건데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투쟁의 협곡이 설령 피엠들에게 중요시되더라도 그 이유는 하비에르가 상상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을게 분명하다.
종족의 기원이라거나 신이 강림했던 곳이라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잖아.
여긴 그냥 게이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장기판이고, 장기말이었을 현지 종족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더라도 검투장같은 곳이지 딱히 신성시될만한 장소는 아니다.
음, 옛날 검투사 드라마를 보면 되레 검투 노예들이 투기장을 신성시하긴 하던데.
내려갈만한 길이 마땅치 않았지만 다행히 가져온 장비 중에 암벽등반 장비가 있었다.
단단하게 바위틈에 박아 고정하고 길게 로프를 늘어뜨린채 조끼에 달린 안전장치 하나에만 의존하여 타고 내려가는건 꽤나 볼만한 광경이었다.
신체강화 능력자에게는 그리 힘든 일도 아닐테니 나도 걱정없이 구경했다.
물론 나는 그냥 뛰어내렸지.
낙하 시의 운동에너지도 에테르 쉬프트에 딸린 방어막으로 모두 흡수할 수 있다는건 미국에 가서 연방 게이트 관리국에 침투했을 당시 증명된 일인데, 뭐하러 생고생을 하겠어.
“정말 놀랍습니다. 다른 순간이동 능력자들은 그런 식으로 활용하지는 못 하던데...”
“원리가 좀 다른가보죠 뭐. 이능력이 불가사의한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부지런히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부럽다는 듯 날 바라보는 하비에르에게는 대충 둘러댔다.
순간이동 이능력은 대부분 순간적으로 작은 웜홀을 생성하는 원리라서 낙하를 안전하게 하려면 뛰어내리자마자 이능을 사용하여야 했고, 타이밍을 약간만 놓쳐도 순식간에 가속이 붙어 다리가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는 사고가 나곤 했다.
당연히 순간이동이 가능한 거리 이상의 높이에선 못 뛰어내리지.
에테르 쉬프트에 주문력 계수가 붙은 방어막이 없었다면 나도 감히 과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려와서 보니 이거, 예상보다 규모가 큼직큼직 하네요. 역시 피엠들의 유적인가.”
“오, 저 고대인의 반응을 보니 제대로 찾았나보군. 하비에르, 얼른 가서 물어봐요.”
피엠들을 이끌던 고대인들이 이제야 확신을 한 듯 감격에 차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다.
나와 윤기정은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우리가 내려온 곳은 투쟁의 협곡 맵으로 치면 하단라인의 중앙 정도의 위치였다.
방어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어쩌면 저 봉긋한 언덕이 그 묻힌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아래로 살짝 파여 드러난 길이 뻗어있으니, 이 길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한군데를 정해 쭉 나아가면 억제기와 수정탑, 그리고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는 제단이 나오겠지.
“피엠들의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고대에 세상 모든 부족들이 모여서 대소사를 결정하던 일종의 대회의장이라는 듯 합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다들 신성하게 여겨서 함부로 가부를 논하지 못했다는군요. 일종의 국제재판소 역할도 했던 것 같은데, 설명이 워낙 애매해서...”
“회의장? 국제재판소? 와, 진짜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있긴 있었나보네요. 그런데 그런 용도로 썼다기엔 부지가 너무 넓고 지형도 좀 이상한데. 가운데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니까 인공적으로 조성된건 알겠지만 보다시피 평지가 아니잖아요. 여러 곳에서 모인 부족들이 각자의 깃발을 내걸고 머물기 위해선 평탄한 지형이 좋지 않았을까요?”
“윤기정 헌터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저도 자세한건 아직 모릅니다. 저 친구들, 지금 워낙 흥분해서 조리있게 설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녜요.”
윤기정과 하비에르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웃음을 참느라 짐짓 표정을 굳혔다.
그래, 그러고보니 게임 설정이 그랬지.
갈등이 일면 각 진영에서 다섯 명씩 선발된 총 열 명의 대전사가 투쟁의 협곡에서 전투를 벌이고 이 챔피언들끼리의 승패에 따라 이긴 진영의 의견을 들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옛날 중세 유럽의 결투재판 비스무리한 문화였던 것이다.
국제재판소라는 추측도 뭐, 아주 틀린건 아닌 셈이다.
대리전을 치르는 대전사는 보통 이 협곡에서의 전술만 갈고 닦는 전문 싸움꾼들인데, 어느 한 진영에서 오래 머물며 대접받는 챔피언이 있는가하면 건당으로 의뢰를 받고 여러 진영을 오가며 큰 돈을 벌어들이는 챔피언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사실 초창기 캐릭터들만 그랬고, 게임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나온 캐릭터들은 대부분 다대다 결투재판이라는 컨셉에 충실하지 못한 설정을 갖고 있지만.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겁니까? 수색을 한다기보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가는 것 같은데요?”
“이곳에 있는 시설을 작동할 수 있는 메인 관제시스템이 있다나봐요. 거기로 갑니다.”
“메인 관제 시스템?”
갑자기 튀어나온 현대적이고 첨단기술적인 단어에 윤기정이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한다.
아마도 수정탑이 있는 곳으로 가겠지?
내가 짐작할 수 있는건 딱 거기까지였다.
게임에서 수정탑은 그저 부수면 게임이 끝나는 하나의 타겟으로만 기능했으니까.
나는 수정탑이 터질때의 인게임 그래픽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중도포기를 하면 프로의식의 결여를 의심받는 프로리그와 달리 일반 게이머들끼리는 어느 정도 전세가 기울었을 때 투표로 항복을 하는게 암묵적으로 인정받는 매너였지만, 작전이 엇갈려 서로 빈집털이를 하는 게임도 심심찮게 나왔기에 연상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정탑 안에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건 봤는데...”
그게 그냥 멋들어진 디자인만 보고 그려놓은 인테리어가 아니라 뭔가 의미가 있는거였나?
하긴, 관제 시스템이라고 해도 당연히 컴퓨터는 아닐테니 어떤 마법적인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래, 표현을 아예 마법이라고 해야겠지.
캐릭터 중에는 마법사 캐릭터들도 적지 않은데다 미니언이며 억제기 등의 게임 시스템이 설정상 전부 마법적인 수단으로 작동하는 유물들이니까.
“어? 여기 봐요. 흙이 쌓여서 묻히긴 했지만 이거 아무래도 계단같죠? 와, 솔직히 좀 의심이 갔는데 정말로 유적도시가 맞긴 맞나보네요. 저건 야트막하지만 성벽으로 보이고...”
“생각처럼 낮지는 않을겁니다. 저 계단을 보면 거의 2미터 가까이 퇴적됐으니까요.”
“아, 그러네. 그걸 감안하면 사람 키 두 배 정도... 어? 근데 피엠들의 덩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 높이의 성벽은 별 의미가 없는거 아닐까요?”
“그냥 경계를 표시한 울타리 정도의 개념 아니겠어요?”
나 혼자 정답을 알고서 여러 가지 추측을 주고받는 대화를 구경하는건 은근히 재미있었다.
피엠 전사들은 어느새 흩어져서 고대인의 지시에 따라 탐색작업을 시작했다.
가져온 공구로 땅을 파서 흙더미를 걷어내기도 하고 성벽과 계단 등의 거리를 재기도 한다.
나는 눈대중으로 수정탑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나나 고대인들이나 어렴풋한 옛 기억에 의존해 더듬어가기는 마찬가지지만 막 봉인에서 풀려난 고대인들보다 오히려 내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나가는건 어째서일까.
그만큼 전생에 게임 중독이었다는건가.
뭐, 퇴근만 하면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여가시간을 거의 전부 게임에 투자하긴 했지.
“형, 여길 좀 파봐요.”
“응? 그러고보니 이 부분이 봉긋하게 솟은게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잠깐만.”
윤기정에게 지시하니 짐에서 접이식 야삽을 꺼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신체강화 이능까지 잔뜩 활성화한 모양이다.
가만있자, 안 나오는걸 보니 여기가 아닌가?
“아, 잠깐만요. 저 성벽이 미드랑 봇 사이라고 치면... 아, 억제기 위치를 잘못 생각했구나. 이 뒤로 와봐요. 여길 파보세요. 거기가 아닌 것 같네.”
“어? 어어. 여긴 그만 파고? 알았어.”
뭔가 떨떠름한 기색이지만 윤기정은 군말없이 내 말에 따라 위치를 옮겨 발굴을 재개한다.
기억속의 맵 비율을 떠올리며 조금씩 위치를 수정하기를 얼마쯤.
피엠들이 그 강력한 근력으로 사방을 파헤치며 억제기를 하나 찾아냈을 때 즈음에 윤기정은 수정탑의 외곽에 붙은 금속 장식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야삽에 맞아서 깨져나가긴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제대로 된 발굴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을 데려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다들 힘만 좋지 이런 일에는 문외한들이니 섬세함이 부족한건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하비에르! 우리가 뭔가 발견했어요. 저 친구들한테 와서 좀 보라고 해요.”
이내 소란이 일고, 십여명의 피엠들이 전부 모여들어 호들갑을 떨며 수정탑을 파냈다.
내게도 익숙한 모양의 수정탑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을 때 피엠들을 인솔해온 고대인 두 명은 아예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감격한 표정이었다.
“어? 가만, 이 안에 든 거, 이거 사람같은데? 아니, 피엠이 아니라 사람.”
“그,그러게요? 이 친구들 유적지에 왜 갑자기 사람이... 겉모습만 비슷한거 아닐까요?”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인게임 그래픽으로 봤을땐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고.
원래 이 크리스탈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거였나?
게다가 한둘도 아닌데?
수정탑의 중앙부를 이루는 커다랗고 투명한 수정 안으로 무려 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눈을 감은 모습으로 둥글게 앉아있는게 보였던 것이다.
음, 저거 시체겠지, 상식적으로?
그 때, 고대인 두 명이 크리스탈의 주변을 돌면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하비에르가 소리쳐 물으니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고 있단다.
그들은 이내 미세하게 금이 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더니 홈이 파여있는 손잡이를 잡고 여는 것까지 성공했다.
하비에르는 아까부터 눈을 반짝이면서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다.
생각해보니 연구자들이 환장할만한 발견이긴 하네.
이거 미국이 부러워지는걸.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윤기정이 어깨를 으쓱한다.
“이런 유적이 여기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잖아. 우리나라 게이트 인근에도 아직 개척되지 않은 곳은 많으니까.”
음, 생각해보니 요정의 숲에 있는 아이템 제단도 그렇고, 행성 곳곳에 유적들이 널려있으니 비슷하게 조성된 투쟁의 협곡도 여러군데에 있을법하지.
피엠들은 그 큰 몸집으로 고생스럽게 문을 들락거리며 수정 안에서 시체들을 꺼내온다.
“맞아, 역시 크기도 생김새도 영락없는 인간이야. 이거 흥미로운데.”
“하비에르 씨, 피엠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와 똑같이 생긴 종족의 화석이 자기네 조상들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거 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 화석들, 시체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저들은 최지호 헌터가 신성한 비석을 부수고 고대 피엠들의 봉인을 풀었던 것처럼 이들을 깨울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예?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랍니까?”
“난들 아나요. 최지호 헌터, 한번 이능력으로 베어보는게 어때요? 혹시 압니까, 비석을 부수니 봉인이 풀렸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깨어날지.”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무리인 것 같아.
비석이야 척 보기에 겉모습이 그냥 돌덩어리니까 부담없이 날려버린거지.
이건 영락없는 사람인데, 잘라봐야 토막살인난 꼴밖에 더 되겠어?
시체를 훼손하는건 고인모독을 하는 것 같아서 영 내키지 않는데...
피엠들의 기대어린 눈빛을 보니 뭔가 해보긴 해봐야 할 것 같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시체들을 보고 어떤 발상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꽤나 오랜 시간동안 저 안에 방치되어 있었을텐데 썩지도 않고 변색도 되지 않은채 그저 단단하게 굳어버리기만 한거잖아?
상식적으로 저 크리스탈 안이 완벽하게 밀폐되어 보존이 되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어쩌면 ‘마법적’인 수단으로 굳어버린걸지도 모른다.
스스로 떠올리고도 헛웃음이 나오는 추측이지만 이 행성에 어디 황당한 일들이 한두가지냐고.
“한번 시도해 볼만한게 있긴 합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체, 그러니까 사십대 정도 되어보이는 머리를 박박 밀고 주변머리만 남겨놓은 유럽 수도승같은 스타일의 남성을 향해 천사의 손길을 시전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시체가 아니었네.”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리는 하비에르와 윤기정, 그리고 감격하여 귀청이 떨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는 피엠들의 앞에서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