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1부
한 가지 생각을 잘못 한 것이 있다.
내가 아는 게임 속 캐릭터가 꼭 저 기둥 안쪽에 봉인되어 있으란 법은 없었지.
에스메랄다가 게임 속의 리그 챔피언으로 활동한 시기가 이 행성의 까마득한 과거일거라는건 각종 유적지 등의 흔적으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던건데 말이야.
피엠들의 전설에도 그녀의 행적이 남아있었다.
오래전 비석 하나를 깨서 우연히 불완전하게 봉인되었던 선조 한 명을 구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에스메랄다의 배경 스토리가 대충 그렇게 시작했던 것 같거든.
“끄응. 이거 아쉽게 됐네. 에스메랄다라면 믿고 영입할 수 있었을텐데.”
그녀와 함께 봉인되었지만 수천년 단위의 시간을 건너뛰고 다른 시대에 풀려나게 된 저 고대전사들도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지닌 전사들이겠지만, 공식 설정하며 온갖 사이드 스토리, 심지어 2차 창작에서마저 일관적으로 단순하고 선량하며 거짓을 모르는 직설적인 성격만을 보여주던 에스메랄다가 없다는건 역시 아쉬운 일이다.
쩝, 하는 수 없지.
벌써 오래 전에 깨어나 열심히 살다가 늙어죽었을텐데 그걸 뭐 어쩌겠어.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현실이 되는 광경을 목도한 피엠들은 그야말로 광분했다.
막 깨어난 삼십여명의 고대 전사들도 까마득한 후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외형을 보면 피엠들보다 덩치가 좀 더 작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고 신체비례라거나 생김새는 똑 닮아서 누가 봐도 같은 종족이라는걸 알 수 있을 모습이었다.
즐거워하던 고대전사 중 하나가 이쪽으로 와서 내게 말을 건다.
지금의 피엠들이 쓰는 말과 많이 차이가 나서 안내인이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는데, 다행히 장로가 어찌어찌 알아듣는 듯 하여 이중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봉인을 풀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다는데요?”
“부탁이요?”
“무슨 전장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보답은 반드시 하겠답니다. 원하는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하는데요? 피엠의 장로도 동의했습니다. 부족 전체가 힘을 모아 상상할수도 없는 막대한 재물을 줄 수도 있다네요. 이 친구들은 그동안 영역 내를 확고하게 지배하던 종족이라서 자부심이 넘치는 것 같아요.”
“큭큭큭,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미국에서 여러 가지를 지원했을거 아닙니까? 그거 보면 딱 기술력 격차도 엄청나다는걸 알 수 있지 않아요?”
“피엠들은 전투종족이니까요. 이들에게 부는 싸워서 쟁취하는거지 장인들이 뚝딱거려 만드는게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헌터들이 전사 시험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 했으니까 얕보고 있는 것도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죠.”
전투종족이라니, 그거 제국주의 시절에 영국에서 쓰던 인종차별용어 아닌가?
뭐, 이 상황에서 저들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같긴 하네.
진지하게 부탁을 하는 고대전사의 얼굴에는 딱히 얕보는 기색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통역이 정확하다면 비석을 베고 봉인을 푼 날 강한 전사로서 인정하는거지 아메리카 부족 자체를 강하고 부유한 부족으로 인정하는건 아닐 것이다.
사실 게이트 너머 이쪽 행성에서라면 그게 또 아주 틀린 말이라기도 좀 애매하지.
저들의 방어막이 저 거구에 걸맞는 수준의 강도를 자랑한다면 아무리 미국의 헌터전력이 충실하다고 해도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쉽사리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테니까.
“좋습니다. 저도 흥미가 생기네요. 단, 이번 일은 미국에서 저희 팀에 넣는 정식 의뢰로 합시다. 피엠들에 대한 정보는 계약서에 굳이 넣지 않아도 되니까요.”
“어려울 것 없죠. 정확한건 보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겠지만, 저희 쪽에서도 오히려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편이 더 편할겁니다. 최지호 헌터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되겠네요. 아, 그런데 혹시 회사에서 독립할 생각은 없습니까? 오닉스 헌터즈는 저번 테러모의와 엮인 곳이라서...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언제고 한번쯤 꼬투리를 잡힐 확률이 높습니다.”
“어디까지나 사장 이하 임원진 중 몇몇의 독단적인 배신이었을 뿐입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누군가 문제삼고 여론을 몰면 개운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이 직접 관여했으니까요.”
“크흠. 한번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오닉스와 계약기간이 많이 남아있긴 한데, 이쯤되면 그런건 문제도 아니긴 하지.
전택영 사장이 중국에 포섭되어 저지른 일 때문에 참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게 생겼다.
보아하니 신일그룹도 미래가 어둑어둑해 보이고.
아직 민간에 제대로 된 정보가 풀리지 않았다고 해도, 일단 테러 지원기업으로 낙인찍혀 워싱턴 정가에 밉보인 이상 그 앞날이 밝을래야 밝을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다 신일그룹 회장이 자식농사에 실패하고 후계구도도 엉망으로 정리해서 생긴 일이다.
음, 그래도 사장이 문제지, 회사엔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내가 확답을 하지 않고 피하니 머리를 긁적이던 안내인은 한층 더 진중하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위에서 지령같은게 나와서 회유작업을 하는게 아닙니다. 설령 나중에 그런 일이 진행되더라도 제게 맡기진 않겠죠. 전 단순히 호의로 충고를 드리는겁니다. 최지호 헌터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인재니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조국은 조국이죠. 아, 의뢰는 오닉스 헌터즈에 7팀을 지명하여 넣는 쪽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차례 전투를 함께하며 친해진 3팀 시절의 동료들이 눈에 밟혀서 생긴 망설임을 애국심으로 해석했는지 안내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흘려넘긴다.
곧, 이중통역을 통해 내 승낙을 전해들은 고대전사가 흡족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신기하네.
피엠 종족도 악수를 하는 관습이 있는건가?
하긴, 크기만 컸지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종족이고 두 팔과 손으로 무기를 잡고 휘두르며 싸우는 종족이니 무기가 없다는걸 보이는 제스처가 관습으로 굳어지는게 이상하진 않지.
나는 사람 손의 거의 너댓배 크기는 되어보이는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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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전사의 봉인을 파괴한 이후로 피엠들은 태도를 완전히 달리했다.
당사자인 나야 당연히 칙사대접을 받는다고 쳐도 그간 알게 모르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미국 헌터들에 대한 대접부터가 전혀 달라진 것이다.
물론 물자공급은 지구 쪽에서 하고 있었으니 피엠들이 보다 더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당장 뭔가 눈에 띄게 이득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강력한 현지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나간다는건 의미가 큰 일이라고 어느 미국 헌터는 내게 설명했다.
“지구로 돌아가면 한국까지 전용기로 모셔다 드릴겁니다. 그리고 지정하신 계좌로 소정의 수고비를 넣었으니 나중에 확인하시죠. 섭섭지 않을 정도는 될 겁니다.”
“아까 들으니 저 대신 한국에 미리 연락을 해두셨다고 하던데요?”
“예, 벌써 계약 끝났습니다. 비용이며 조건을 협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수락하던데요?”
그야 전전긍긍하던 차에 들어온 요청이니 용서의 사인인줄 알고 허겁지겁 오케이한거겠지.
지금 회사 분위기가 어떤 꼴일지 대충 짐작이 가는걸.
“그럼 굳이 제가 돌아가서 데려올 필요가 없겠네요. 바로 여기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어... 지구로도 안 돌아가신다구요?”
“한국에서 미국까지 비행하는 시간에다 플로리다 게이트까지의 이동시간을 감안하더라도 하루면 충분히 올 수 있지 않나요?”
피엠족의 고대전사들 못지않게 나도 흥분되는 마음으로 이번 탐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저들이 찾는 잊힌 전장이라는게 혹시 투쟁의 협곡이 아닐까?
내가 이 행성에 대해 알고 있는건 전생의 게임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더라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투쟁의 협곡 말고는 딱히 명예로운 전장이니 챔피언들의 성지니 하는 수식어로 불릴만한 곳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 투쟁의 협곡이 맞다면, 나는 이계와 전생에 하던 게임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래로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성과에 근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대부분의 게임이 치러지는 메인 맵의 이름이었으니까.
3대 3으로 붙는 어둠의 숲이라는 맵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이너한 취향에 불과했고 투쟁의 협곡이 전체 경기수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오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기약이 없는 장기 미션인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셔야죠.”
“괜찮습니다. 아마 그리 길어지지 않을겁니다. 저들이 단서를 갖고 있다지 않습니까?”
“전설 속에나 나오는 곳이라면서요? 그 단서라는 것도 사실상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는 기억에 의존해서 오래전 묻힌 유적을 발굴해야 하는 셈인데... 쉽지 않을겁니다.”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서버에서 손꼽히는 랭커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그래도 최상위권 게이머였다 이거야.
투쟁의 협곡이라면 지형지물은 물론 몬스터 캠프나 라인 특징까지 눈 감고도 훤하다.
일단 정확한 위치에 도달하고 관련된 흔적이 남아있다면 무조건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단서만 있어도 대번에 기시감을 느낄걸?
“그냥 제 감입니다. 틀리면 뭐,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전달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모든 민간 헌터들이 최지호 헌터처럼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헌터들은 나처럼 믿는 구석도 없고 숨기는 구석도 없으니까 그렇겠지.
휴우, 생각해보니 윤기정과 강승호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휴가 중에 연락해서 업무가 생겼다며 출근시키는 상사라니, 내가 생각해도 질이 나쁘구만.
내 회사가 아니니 내 마음대로 연봉을 올려줄수도 없고.
원정 성과급이라도 넉넉하게 책정해달라고 건의나 넣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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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해상게이트와 연결된 고원기지의 시설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는 민간에 개방된 곳이 아니라 특수군이 묵는 군용 막사에 짐을 풀었는데, 인테리어는 언뜻 투박해보이지만 있을건 다 있어서 지내는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장로의 제안대로 피엠들의 마을에서 묵어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안 그러시는 편이 좋을겁니다. 피엠들이 지켜보는 면전에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친구들 입맛이 우리하곤 많이 다르거든요. 위장구조는 비슷한지 식재료가 얼추 공유되는 것 같기는 한데, 소금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어긋나있어요.”
“짜게 먹나보네요?”
“단순히 짜게 먹는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신장 말고도 나트륨을 거르는 기관이 하나, 아니 열 개쯤은 더 붙어있는게 틀림없어요. 아이들이 암염조각을 과자처럼 들고 아작거린다니까요?”
내 부탁을 받고 식당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져온 안내인은 내 질문에 마침 할 말이 많았다는 듯 방언이라도 터진 것처럼 한참동안 피엠과 인간의 미각차이와 그런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기 상급자의 무심한 지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피엠 마을에서 고대 전사의 봉인이 풀린 것을 축하하는 축제가 있었지.
나는 잠깐 얼굴만 비추고 환호를 받은 후 돌아왔는데, 저 아저씨를 위시해 몇몇 실무진은 끝까지 붙어서 피엠 장로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술상무를 했다고 들었다.
음, 그 때 서러웠던게 많았나보다.
뭐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애매했던 나는 에너지바를 베어물면서 화제를 돌렸다.
“제 팀원들은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죠?”
“저녁때쯤엔 도착할겁니다. 아, 그리고 연방 게이트관리부에서 연락관을 파견해 원정에 동행을 시킬 수 있냐는 문의가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따라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비에르 씨가요? A급 신체강화 능력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 맞습니다. 그러니 아마 짐이 되지는 않을겁니다.”
“짐이라뇨. 공짜로 쓰기엔 너무 고급 인력이라서 그렇죠. 환영합니다.”
뭐, 따라온다고 해봐야 실제로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요 하루 사이에 친해져봐야 얼마나 친해졌겠느냐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새로 오는 것보다는 익숙한 얼굴이 따라오는게 낫겠지.
오지 말라고 거부를 하면 피차 감정만 상하고 곤란해질 뿐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번 원정에 끈을 이어놓지 않을수도 없는 법이니까.
냉동인간을 만들어 먼 미래에 다시 되살린다는 프로젝트가 공상과학에 가까운 영역에서나 논의되는 판국에 까마득한 고대에 봉인이 되었다가 풀려난 고대인들이 멀쩡하게 살아움직이는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흥분을 하지 않고 배길 리가 없잖아.
아마 고대 전사들을 잡아다가 해부라도 하고 싶어 몸이 달지 않았을까.
“여기, 인근의 지형 자료입니다. 협곡이라고 부를만한 지형은 몇 되지 않는데, 투쟁의 협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아마 이 중 한 곳으로 후보를 좁힐 수 있을겁니다.”
봐, 그러니까 이렇게 요구하지도 않은걸 미리 갖다바치며 전폭적으로 협조하는거 아니겠어?
태블릿을 받아 슥슥 넘기면서 훑어보니 단순히 지형만 조사한게 아니라 고원을 중심으로 해서 지질학적인 데이터까지 뽑아 비교분석을 해놓은 아주 공이 많이 들어간 보고서였다.
하룻저녁만에 이 모든 데이터를 취합해 이만한 퀄리티의 보고서를 만드느라 생고생을 했을 누군가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걸 몇 페이지 보지 않고 옆에다 내려놓았다.
“길 안내는 피엠족 전사들이 한다잖습니까. 거기 가보고, 아니면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그 쪽에선 자기네 조상님들 포함해서 스물 정도 동원한다고 했죠?”
“고대인이 셋에 나머지는 정예 전사들을 선발한답니다. 사냥하지 못할 괴수가 없을거라고 자신만만하던데요?”
“아니, 그럼 자기네들끼리 가서 수색하면 될 것이지 왜 굳이 의뢰를...”
“고대인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답니다. 봉인을 부순 전사를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고요.”
오, 그럼 뭔가 구체적으로 더 아는게 있는 모양인데?
위치도 막연하게 추측만 한다고 해서 그 이상의 정보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