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1부
물론 돈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외파견이라고 해서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잖아?
따지고 보면 그동안 내가 태연하게 저질렀던 일들이 위험하긴 훨씬 더 위험했지.
“제가 원정 경험은 얼마 안 되지만 무기류나 중장비를 게이트 너머에서 지원받으려면 필요한 절차들 있잖아요? 그거 너무 복잡해서 직원들이...”
“이능관리부와 협의해서 프리패스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예 특수한 자격증을 발급하고 관련 법안을 손보면 이후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을겁니다. 그나저나 흥미롭군요. 돈보다 외계탐사를 더 좋아하실 정도로 모험심이 넘치는 사람인줄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행보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죠. 그리고 돈 안 받는다고 누가 그래요? 백오십억, 전부 주세요. 현금으로. 게이트 통과허가 과정에서 편의를 봐주는데 돈이 드느건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내 뒷조사를 자세히 했다는 점을 어필하는 상대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이해한 나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미국에서 무슨 일로 강력한 공격이능을 원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내가 필요하단거지?
그럼 받을건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다 받아야지.
앞으로 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게이트를 넘어다니며 외계행성을 탐사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저 아저씨 본인 입으로 말한 돈까지 전부 말이야.
물론 정직하게 말했다는 보장은 없으니 미리 생각했던 예산에서 적당히 줄여 말한거겠지만 굳이 액수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아득바득 뜯어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평생을 여유롭게 쓰면서 산다고 해도 백오십억이 다 뭐야, 그 절반도 못 쓸텐데.
“끄응. 알겠습니다. 명목은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해서, 깔끔하게 넘겨드리죠. 혹시 휘하 팀원들을 데려가실 생각입니까? 장비를 최신식으로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뇨, 혼자 갈겁니다.”
그 편이 만약의 경우에 몸 빼기도 더 좋을거고, 솔직히 윤기정과 강승호는 힘 좋고 운전 잘하고 부지런하긴 해도 전투력만 따지면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하기 힘들거든.
마침 나는 지금 친구들과 여행 중인 것으로 되어있으니 바로 출발해도 상관없겠네.
내 적극적인 태도에 권 차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황한 설명을 다 빼놓고 보면 이게 바로 날 데려온 목적이었을텐데, 아마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럼 바로 미 대사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최지호 헌터같은 분이 바로 진정한 애국잡니다.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인사치레를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던 나도 마지막 말에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국가의 명예란게 이제와서 내가 가서 뭘 잘 한다고 회복될 것 같지는 않은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테러의 배후로 의심받는 최악의 사태는 어떻게든 피한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외교적으로 국가의 위신이 심각하게 실추되는건 기정사실 아냐.
팔자에 없는 애국자가 되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려니 여간 거북한게 아니다.
예닐곱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진지한 눈으로 척 경례를 올려붙이며 배웅하는데 거기다 대고 누구 멋대로 마음에도 없는 의무를 지우는거냐고 항의를 하기에도 뭣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중 나는 직접 안내를 자처한 권형규 2차장에게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원래 국정원 소관이었나요?”
정부조직법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외교부나 뭐 그런데서 할 일 아닌가?
권 차장이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쩝 입맛을 다시고 무척이나 어두운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원칙적으론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모든게 비밀리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원하신다면 화상으로나마 대통령님과 통화를 하실수도 있습니다.”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진 없구요.”
“한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외교부 장관과 국정원장은 근시일내에 경질될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건강 문제로 인한 사임이 되겠죠. 아, 이번 일에 대해선,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일이니 언론에 나간대도 믿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기밀유지를 해주셔야 할겁니다.”
세상에나, 자그마치 장관급이 연루되어 있었단 말인가.
어쩐지 원장이 아니라 차장급이 주도적으로 이끌기엔 너무 큰 일이 아닌가 싶더라.
그나마 말하는걸 들어보니 청와대는 무관한 것 같지만, 그 쪽도 대통령씩이나 되어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골치 좀 썩겠구만.
“말세네. 나라 꼴 참...”
내 입을 비집고 나온 탄식에 권 차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못 들은척 외면한다.
아마 저 사람 입장에선 외부의 민간인인 내게 이 정도를 말해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릴레이 사임 뉴스를 보면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만하니까 하는수없이 털어놓았겠지.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지상 1층에 도착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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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차가 분명한 검은 세단을 타고 달려 미 대사관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듯 별다른 절차없이 통과할 수 있었는데,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경비의 경례를 받으며 대사관 정문을 통과하니 마치 내가 무슨 대단한 거물이라도 된 느낌이다.
“미합중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티비와 신문에서 가끔 봐서 얼굴을 알고 있는 미 대사는 날 보자마자 그렇게 인사했다.
아니 뭐, 대사관은 치외법권에 해당국의 영토로 인식되곤 하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저 인삿말이 좀 묘한 뉘앙스로 들리는건 착각일까?
대사관 안쪽의 브리핑 룸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마음같아선 환영행사라도 하고 싶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네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사정을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저도 그게 편할 것 같습니다.”
“플로리다 앞바다에 있는 게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상 게이트와 연결된 고원지대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인근에 스밀로돈 무리가 정착한 것으로 보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던거죠.”
플로리다 앞바다의 게이트는 세계에 단 둘 뿐인 해상게이트 중 하나였는데, 바다 위에 위치한 주제에 정작 연결된 지형은 춥고 황량한 고원지대였다.
게이트 사태때 고원에 사는 괴수들이 수면 위 2미터 정도에 위치한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와 그대로 익사해버리는 마치 코미디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으로 유명했다.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해저게이트가 여럿 있을 것이지만 게이트 안팎의 환경이 비슷할 확률이 낮아서 아직까지 해저괴수에 대한 소식이 없는거란다.
“스밀로돈들은 다른 세력에 쫓겨서 게이트가 위치한 곳까지 밀려난 것이었습니다.”
“다른 세력이라고만 표현하시는걸 보니 미발견 괴수였나보죠?”
“처음 발견한건 맞지만 괴수라는건 글쎄요. 키가 큰 영장류에 원시적인 석기를 사용하니 일단은 괴수가 아니라 이종족이라고 해야겠죠. 신장은 작으면 8피트, 최대 12피트인 개체도 발견되었습니다. 입과 코가 없고 눈은 잠자리처럼 여러 겹으로 되어있는 종족입니다.”
가만있자, 1피트가 대충 30센티미터 정도니까 키가 2미터 중반에서 3미터 중반이네?
다른 신체조건은 안 들어봤지만 일단 키가 그렇게 큰 종족이면 전투력이 상당할 것이다.
지구에서라면 그래봐야 너도 나도 총 한 방감이지만 게이트 너머에선 방어막이 있잖아.
꼭 그런건 아니지만 방어막의 강도는 일반적으로 질량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저 종족과 싸움이 벌어지면 헌터들의 입장에선 무척 애를 먹을만했다.
“그래서, 그 종족과 전쟁이라도 벌어진건가요?”
“아니아니, 그럴리가요. 헌터나 특수군 전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지성이 있는 종족과 괜히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대화를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각종 선물을 제공하며 호의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비석에 대해 알려주었죠.”
“신성한 비석?”
“전사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의 일부라고 합니다. 커다란 바위에 흠집을 내는거죠. 그 흠집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뭐야, 그냥 흔한 원시부족의 힘자랑이잖아.
바위를 내리쳐 힘을 겨룬다는게 딱히 흥미롭다고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의식은 무기가 아니라 공격이능으로 시행합니다. 파악된 것만 수십여에 이르는 전사계급 전원이 공격형 이능력자라는 뜻이죠. 그동안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 우리는 그들의 친구로 인정받았고, 신성한 비석에 도전할 권리도 얻었습니다.”
“도전의 결과가 신통치 않았나보군요.”
“놀랍게도 신성한 비석은 생명체가 아닌 바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방어막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전한 헌터 대부분은 흠집을 남기기는커녕 그 방어막조차 뚫지 못했죠.”
“오, 대부분이라고 하면, 뚫은 사람이 있긴 있나본데요?”
“이글 팀의 S급 공격형 이능력자가 방어막을 상쇄하고 비석에 흔적을 남기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들의 기준에서 전혀 존중받을만한 깊이가 아니었죠...”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다.
그도 그럴만 하지.
방어막은 외계 현지종족끼리 작동하지 않으니까, 아마 신성한 비석이라는 의문의 장치에서 발생하는 방어막도 지구에서 건너간 헌터들 상대로만 펼쳐질 것이다.
방어막을 감안하지 않고 오직 바위에 남은 흔적만 가지고서 겨룬다니, 헌터들의 입장에선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뭐, 이제 막 의사소통을 하는 관계인 이종족들이 그런 점을 다 고려해주진 않겠지.
“꼭 친구로 인정받아야 합니까? 아, 물론 교류를 이어나가는데 큰 의의가 있겠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죠. 신성한 비석은 하나가 아닙니다. 정확히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비석 하나를 넘겨주겠다고 했습니다. 단, 우리 부족의 전사가 자기네들이 인정할만한 자격을 증명했을때에 한해서요. 그리고 그 외에도, 음, 말씀드리기 어려운 여러가지 이권을 보장받았죠.”
오케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이해했다.
그나저나 최근 게이트 너머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긴 벌어지고 있나보다.
중국인들이 우리 구역에서 고블린과 교류를 하고 우리가 페어리와 동맹을 맺은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 일본은 오크와 전투를 벌이지 않나, 비슷한 시기에 미국도 자기네 영역 안에서 또 새로운 이종족을 발견해 교류를 시작한 셈이니까.
사실 그게 전부라는 보장도 없지.
이종족을 발견했다면 한국처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교류를 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처럼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교류를 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이종족들이 등장한 곳이 새로이 개척된 지역이 아니라 이미 조사가 끝난 지역이라는 점도 수상하고... 별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좋습니다. 바로 가봅시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보죠.”
이번에는 언뜻 바로 감이 오는게 없다.
외형 묘사를 들어본 결과 굉장히 낯설거든.
게임 속에 그런 종족이 있었나?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이종족과 괴수가 전생의 게임 속에 구현되어 있으라는 법도 없으니 딱히 불평을 할 곳도 없지만.
일단 가서 부딪혀보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무한에 가까운 주문력을 계수로 가진 에테르 블레이드라면 방어막을 간단히 상쇄하는 동시에 비석에 흔적을 남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쪽을 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바로 미국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불가능합니다. 음, 순간이동의 자세한 스펙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
“물론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따라오시죠.”
미리 예상을 한 듯 국방무관 한 사람이 지체없이 나를 밖으로 안내하여 외교관 번호판이 달린 차량의 문을 직접 열어준다.
베티 밀러의 기사에 따르면 내가 텔레포터긴 한데, 미국으로 올 때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우연히 발견한 세균테러 기도를 차단했다고 했으니 대륙간의 장거리 텔레포트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겠지.
대사관에서 주한 미공군 기지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날 미국으로 데려갈 기체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공군기지에서 군용 수송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경험을 다 하게 생겼다.
계속 이런 일들만 일어나니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기지 않을수가 있나.
이능을 각성하고 헌터업계에 투신한지 아직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어마어마한 이권과 국가단위의 거래가 오가는 각축전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전생의 게임과 현생의 게이트 너머 외계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비밀을 밝히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전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는 이계산업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니까.
수송기는 초음속으로 날며 여객기보다 훨씬 빠르게 태평양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