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1부
살다보면 경찰과 부대낄 일은 그럭저럭 있기 마련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검찰과 마주하는 일도 은근히 제법 되겠지만 국가정보원은 일반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관이다.
그러니 내가 완전히 태연하게 대응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의심스러운 정황이 되었겠지.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딸꾹질을 하면서 말을 더듬은게 썩 훌륭한 대응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나머지 나는 우선 되는데까지 뻗대어보기로 했다.
이렇다할 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에 가까웠다.
“미안하지만, 내가 좀 바빠서요.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시간나는대로 전화드리죠.”
“지금 바로 같이 가주셔야 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은 안 된다니까요. 혹시 지금 강제로 구인하시려는겁니까? 그럼 영장은 가져오셨나요? 아니, 그 이전에 경찰도 아니고 국정원에서 그럴 권리가 있나?”
“실례라는건 알고 있습니다만, 상황이 워낙 급박합니다.”
어어? 이 자식들 보게?
양 쪽에서 내 팔을 붙들고 길가에 세워져 있던 차로 밀어넣는 꼴이 영락없는 납치다.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대로변에서 납치하려고 들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없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아저씨들을 베어버리고 도망가는건 간단하지만 뒷감당이 안 되니까.
몇 번 몸에 힘을 주어 뿌리치려는 시도를 해보다가 포기하고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죄없는 시민을 납치하다니, 고소할겁니다. 신일그룹 법무팀 무서운거 몰라요?”
“납치라니, 그 무슨 흉악한 말씀을.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흔히 답정너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내가 뭐라고 지껄이든 그냥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것으로 하기로 한 모양이다.
문제삼으려면 삼을 수 있지만 묻으려면 또 얼마든지 묻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 것 같은데, 저 사람들이 그런 쪽은 전문가니까 나보단 더 정확하게 판단했겠지 뭐.
달리던 차는 삼십여분을 채 못 가서 멈춰섰다.
짙게 선팅된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얼핏 경찰제복처럼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위병근무자가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비밀 안가같은 곳으로 끌려온건 아닌가보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공식적인 국가 시설로 온거니까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일은 없겠네.
내가 몰래 없애려고 한다고 가만히 당해줄 힘없는 민간인도 아니긴 하지.
“어, 잠깐만요. 이거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갈때까지만 해도 그런 미묘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건 딱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할때쯤에는 솔직히 불안감에 온 몸이 떨리더라.
만약 한바탕 싸움판이라도 벌어지면 설령 이능력을 써서 저항을 하며 피해를 입히더라도 결과적으론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있다는데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천사의 단지 말고 공격형 액티브 효과가 달린 아이템을 살걸 그랬나.
도망치려면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 쳤어야 했는데.
“오, 최지호 헌터. 맞죠? 정중히 모셔오라고 했는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예, 뭐, 적어도 말투는 정중하더군요. 그 쪽은...”
“국가정보원 2차장 권형귭니다.”
다행히 지하에서 만난 이들의 상급자는 내게 적대적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상대는 날카로운 눈매와 깊게 패인 주름, 작은 금테 안경이 어우러져 차갑고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는 중늙은이인데, 언뜻 보아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 되어보였다.
“여긴 어디죠?”
“아, 들어오시면서 현판을 못 보셨나보군요. 국가정보원입니다. 직원들이 모시면서 소개를 했을텐데요. 자, 앉으시죠. 커피로 드릴까요, 녹차로 드릴까요?”
“그냥 물 한 잔만 주세요. 궁금한거 빨리 물어보고 보내주시구요.”
“진정하세요 선생님. 크흠, 바쁘시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원정에서 복귀하신 후 장기휴가를 얻으셨던데요. 그 휴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친구들하고 여행갔다 왔는데요.”
“아, 지금 남도에서 한창 맛집탐방을 하고 계시는 그 친구분들 말입니까?”
준비한 알리바이를 대니 곧바로 튀어나오는 반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눈만 끔벅거렸다.
와, 그야 명색이 정보기관이니 작정하고 파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일이긴 하겠지만,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저렇게 나오냐.
무슨 말이냐고, 이미 여행 다 끝나고 돌아왔다고 부정을 해보려다가 말았다.
시치미를 떼려면 진작 했어야지 표정으로 다 말해놓고 이제 와서 거짓말로 둘러대봐야 의미가 없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런 종류의 심리전에는 별로 재능이 없었다.
“누구나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뭐, 그게 중요한건 아니니까요.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최지호 씨도 아시겠지만 최근 한미관계에 아주 중대한 균열을 일으킬수도 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 자기네 잘못은 아닌 것처럼 말한다?
내가 미리 제보를 해서 테러를 막은게 잘못이라도 된다는거야 뭐야.
미수에서 끝났어도 그 파장을 예측하기 어려운데 만약 진짜로 실행되어 피해가 나왔다면 동맹관계는 끝장나고 경제파탄은 기본에 어쩌면 무력보복까지도 각오해야 했을걸.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니 그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우리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전혀 모르고 계셨죠. 미국에서 비공식 라인으로 들어온 항의에 지금 외교부가 뒤집혔습니다. 상식적으로 미국 영토에 테러라니,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저희 사장님 말로는 네바다 게이트 인근의 개척을 지연시키는게 목적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나라가 왜요? 성공적으로 네바다 게이트 기지를 초토화하고 억제기에 관한 정보를 숨기는데 성공해서 단순한 사고로 묻는데 성공했다고 칩시다. 미국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그게 한국의 이득이 되는게 아니잖습니까? 우린 게이트를 딱 하나 보유한 나라예요. 물론 울릉도 게이트의 인근이 그럭저럭 평균 이상의 수익성을 가진 괜찮은 위치라고 하지만 외계행성의 패권이니 뭐니 하는건 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깁니다.”
“하지만 우리 사정이야 어쨌든간에 그런 모의가 있었던건 확실합니다. 오닉스 전택영 사장이 제게 사주를 할 때는 결코 농담을 한게 아니었어요.”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의아하게 여기던 점이었지.
가상적국도 아닌 동맹국의 외계 개척역량을 파괴하기 위하여 국운을 걸고 세계 최강국의 콧잔등을 물어뜯는 도박을 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국정원의 2차장이라는,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아무튼 상당히 높은 직위를 가진 중년인은 그 의문에 대해 무척이나 단순하고 직관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하하하, 그렇겠죠.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헌터회사의 사장씩이나 되어서 그런 재미없는 장난을 칠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전택영 사장을 위시해 오닉스 헌터즈의 수뇌부 중 일부가 해외세력에 의해 포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정부 내에도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곳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소수 있는 것 같더군요.”
“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이라 하면 즉...”
“중국이겠죠. 미국이 게이트 너머에서 진행 중인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위협을 느끼고 테러로라도 늦춰보려는 시도를 할만한 세력은 중국밖에 없어요.”
“잠깐만요. 테러 아이디어가 중국에서 나왔다고 해도 오닉스 헌터즈에서 선뜻 협조하겠다고 나섰단건가요? 언뜻 들어도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꼬리가 되는 꼴인데?”
“그야 그렇지만, 사람이 다급한 지경에 처하면 놀랄만큼 근시안적이 된답니다. 오닉스의 전택영 사장은 신일그룹 내에서 차남 신현덕의 라인을 타고 있죠. 장남인 신일전자 신현성 사장의 위상이 워낙 견고하니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오닉스를 후원하는 모기업 신일그룹의 승계싸움의 와중에 전 사장이 탄 라인이 겁도 없이 감당 못 할 도박을 벌였다는건데, 참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재벌집 아들내미 정도면 주변에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을 두고 턱 끝으로 부릴텐데, 참모들 중에서 그만두라고 충고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한국 정부도 연루되는걸 두려워하는 일인데 신일그룹이 아무리 국내 최고를 다투는 대기업 그룹이라고 해도 후폭풍에 간단히 휩쓸려나갈걸.
권형규 차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식농사를 잘못 지어도 단단히 잘못 지은 셈이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명확히 하고 넘어가는게 마음이 편하시겠군요. 저희는 최지호 헌터가 네바다 게이트기지 억제기 테러모의에 대해 미국에 제보한 것을 문제삼을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하신건지는 아직도 파악을 못 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중요한건 아니겠죠. 응당 하셔야 할 일을 하신겁니다. 덕분에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가 말하는 대참사란 단순히 네바다 게이트 인근에서 사냥중이던 미국 헌터들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다.
아마 그로 인해 한국이 지게 될 외교적인 부담을 말하는거겠지.
어느 쪽이든, 내가 한 내부고발을 두고 배신이라며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는 이제 더 발뺌해봐야 의미도 없고 실익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기도 하고 말이지.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부터 일이 어떻게 되는겁니까?”
“정치적으로 파란이 일겠죠. 이렇게 사전에 다 들통이 난 이상 미국과 갈등을 계속 이어나갈 배짱은 가장 극단적인 친중파에게도 없어요. 정부 내에서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을거고, 신일그룹에서도 마찬가지일겁니다. 후계구도가 한층 더 명확해지겠군요.”
그룹 후계구도니 정치적 격동이니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그야 전자 사장이 장남이고 화학 사장이 차남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 아저씨들은 티비로만 보던 사람들인데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이겠어?
정치인이나 고위공무원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되는 일도 내 알 바는 아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 싹 다 모가지 날리더라도 대체할 사람은 발에 채이도록 널려있을걸.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말 하려고 이렇게 무게잡으며 반강제로 납치하듯 사람을 불렀느냐는 불평을 담아 불퉁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권 차장은 빙긋 웃으며 내게 태블릿을 내민다.
화면을 보니 미리 접속해서 띄워놓았는지 뉴스 사이트의 기사 페이지였다.
“이 기사를 좀 보시죠.”
영어로 된 기사라서 빠르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베티 밀러가 약속한대로 작성한 기사라는걸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기왕 인정을 한 이상 디테일을 굳이 숨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네.
여기 나온 K가 나라는걸 짐작했다면 그동안의 행보를 전부 아는거 아냐.
멋쩍게 웃으면서 기사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헌터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는 환상이 함유되어 거의 소설같은 분위기의 기사였다.
“크으, 무슨 슈퍼 히어로처럼 묘사를 해놨네. 아, 그러고보니 이건 어떻게 됐습니까? 세균을 실어서 보낸거 말이에요. 그, 대명상사였나? 그 회사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미 조사 끝났습니다. 사장이 위진수라고, 중국 동포예요. 이렇게까지 노골적이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딱히 숨기려고 공을 들인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알아봐야 뭘 어쩌겠나 싶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늦어도 내일 중으로 체포될겁니다. 사장 이하 전직원에게 벌써 출국금지가 떨어졌어요. 뭐, 잡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좀 회의적이지만. 아무튼 정부에서도 충분히 해명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체면이야 손상되겠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다만 한 가지, 최지호 헌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 제가요? 제가 왜요?”
“바로 몇 시간 전에 미국에서 은밀하게 전해진 부탁입니다만, 만약 제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면 최대한 빨리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건 그냥 내부고발자를 해꼬지하는걸 막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닐까요?”
심드렁하게 대꾸하니 권 차장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부고발을 배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다른겁니다. 미국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감히 테러를 막은 영웅을 핍박하다니, 불가능한 얘깁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하는 것처럼 마티즈를 태우는 것도 여의치 않고.”
웃자고 하는 농담치고는 참 불쾌하기 그지없는 농담인걸.
몰래 해치려고 한대도 순순히 당해줄 사람도 아니잖느냐며 태연하게 지껄이는걸 보니 이걸 웃어줘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냥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름대로 블랙유머랍시고 하는 말 같은데, 진짜 국정원 사람이 그런 말 하니까 무섭잖아.
“그들은 억제기 사태에서 최 헌터가 보인 능력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화된 쉴롭의 방어막을 일격에 상쇄하고도 위력이 남아 본체에까지 피해를 입힌 공격이능에 주목하더군요. 기사 내용이 사실인지 문의하기에 특수군 작전기록을 통째로 보내줬습니다. 명색이 군사기밀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해도 그리 간단하게 공유해줘도 될까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세한 사정은 밝히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방어막 상쇄에 효과적인 위력을 보이는 이능력자가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만약 제가 승낙하면...”
“물론 정부에서 할 수 있는 협조는 전부 해드릴겁니다. 비공식적으로요.”
그러면서 눈을 찡긋하며 심의없이 바로 쓸 수 있는 예산이 150억 정도 남았으니 모쪼록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요구로 봐달라고 엄살을 부린다.
지금도 충분한 연봉과 성과급을 받고는 있지만, 백오십억이면 그 고액연봉으로도 앞으로 십 년 넘게 모아도 모을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일정이 얼마나 고될지는 몰라도 이거 한번 다녀오면 남은 평생 돈 걱정은 없어지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