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1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지호가 알고 있는 모든걸 아예 세상에 공표해 버리는거예요. 인터뷰 기사를 내는거죠. 그리고 그 기사에 구출계획을 밝히는겁니다.”
“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슈퍼 히어로가 되는거예요! 음모를 분쇄하고 당국에 제보를 했지만 무고한 사람이 휘말려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 선처하지 않으면 구출을 하겠다고 선언하는거죠. 걱정마세요. 내가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는 아니지만 이만한 기삿거리를 마다할 언론은 없어요. 당장 내일 오후 나갈 호외에 대문짝만하게 특종보도를 실을 수 있다구요.”
“아니,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본데, 난 그럴 능력이 없어요. 당장 그 친구가 어디서 조사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몰래 들어갔다 나오는거라면 모를까, 사람을 데리고 빠져나올수는 없어요.”
“그래요? 아, 단순한 텔레포터가 아니라 다중능력자인가보네요. 제이크도 그랬죠, 아마 은신계열의 이능력을 보유했을거라고. 아무튼, 중요한건 실제로 그럴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연방 게이트 관리국에 유령처럼 잠입해서 증거를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왔어요. 그러니 사람들은 당신에게 충분히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할거예요.”
결국 여론을 움직여 내부고발자 격인 이성욱 대리를 함부로 하는걸 막아보자는 계획이다.
겸사겸사 특종을 터뜨려 기자로서의 자기 이름값도 높이고 쏠쏠하게 고료도 벌겠지.
순간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려서 혹했지만 잠깐 생각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세균도 한국 발이고 네바다 기지 테러모의도 한국 발이에요. 시민들이 격분해서 보복을 부르짖을텐데, 그러다 한미간에 전쟁이라도 터지면 책임질겁니까?”
물론 상황이 그 지경까지 가면 우리 정부는 감히 맞서서 대거리할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하고 다만 납작 엎드려 자비로운 처분만 바라게 될테니 전쟁은 없겠지만.
세상에, 미합중국과 전쟁이라니. 그만한 악몽이 또 있을까.
아무튼 내겐 전혀 유쾌한 일이 못 된다.
잘못을 한건 한거고,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지.
아마 두 건 모두 실제로 실행에 옮겨져 피해가 나온건 아니고 모의 수준에서 발각됐으니 일단 홀딩하고 대응 수위를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데, 괜히 국민감정을 자극해서 좋을게 있나.
“그야 책임소재를 애매하게 돌리면 되죠. 가만히 들어보니 정부에서 직접 지호에게 억제기 파괴공작을 교사한건 아니라면서요? 세균 반입의 건도 그렇고, 국적이 한국인 기업에서 벌인 일이라고 꼭 한국 전체의 책임이라고 몰아갈 사람은 많지 않을거예요.”
그녀는 한국은 다만 음모의 무대일뿐 미지의 암중세력이 있는 것처럼 쓸 수 있다고 했다.
정보를 숨기거나 왜곡할 것도 없이 팩트를 전부 나열하면서도 단지 단어의 구성이나 문장의 배치만으로 얼마든지 기사 전체의 뉘앙스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터뷰를 적절한 정황증거와 함께 싣는다면 그 기사가 바로 최초 소스가 될 것이므로 이를 받아쓰는 다른 언론의 논조로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한다.
음, 이 말을 믿고 그러자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
잔뼈가 굵은 노련한 기자라면 모를까, 이 아가씨는 젊고 경험도 부족한 프리랜서잖아.
나는 고민 끝에 아직 확신은 없지만 의심할만한 구석이 있는 용의자를 하나 내세우기로 했다.
“아마 음모의 주체는 중국일겁니다. 확실한게 아니라서 말을 안 했어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해요?”
“한국 게이트 기지 인근에 요정의 숲이라는 정글지형이 있어요. 얼마전에 그 곳에서 중국 특수군이 운영하던 비밀 연구소를 발견하여 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외계의 세균을 기반으로 한 생물무기를 다량 압수했죠. 전부 폐기처분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또...”
“잠깐만요. 메모를 좀 해야겠어요. 아, 녹음기 켜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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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강조하지만, 베티 밀러라는 기자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예쁜 여자 앞에서 자기가 겪은 기상천외한 모험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푸는데 과장이 조금도 섞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담백하고 진중하여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군자보다는 소인배에 가까운 놈이었나보다.
분명 처음에는 보태는 말 없이 담담하게 있었던 일들만 객관적으로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말을 하는 사이에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허풍이 첨가되는 듯 싶더니 어느덧 실화를 기반으로 했을뿐 소설이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만하면 언론사에서 일면에다 실어줄까요?”
“물론이죠! 내가 장담해요. 내일 모레쯤이면 뉴욕 시민들은 미국을 중국의 음모로부터 구해낸 동맹국의 특수군 요원에게 열광하게 될거예요.”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제 뉴욕을 기점으로 세상에 나갈 예정이다.
구체적 신상을 밝히지 않은 한국 특수군 요원이라는건 그녀가 제안한 가상의 신분이었다.
요정의 숲과 중국에 관한 일이나 이번 억제기 사태에 관한 일이나 오닉스 사는 물론이고 특수군도 깊게 발을 담그고 있으니 그 중 내부고발자가 나왔다고 해도 이상할건 없지.
지나친 기대겠지만, 어쩌면 우리 정부에서도 그걸 믿고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아, 호칭이 있어야죠. 본명을 드러내는건 당연히 넌센스고, 그냥 미스터 C라고 할까요?”
“K라고 합시다. 한국에서 가장 흔하고 많은 패밀리네임은 김 씨니까.”
메모한 것을 만족스럽게 다시 훑어보던 베티의 질문에 즉답했다.
한국 성 씨 중에 C로 시작하는게 최, 채, 차, 음, 하여튼 은근히 몇 개 안 되잖아.
물론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왠지 곧이곧대로 쓰기가 싫었다.
전생에 김 씨였으니까 별명으로 K를 쓴대도 아주 없는 소린 또 아니기도 하고.
“좋아요. 인터뷰 고마워요, 지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나야말로 즐거웠어요. 이만 호텔로 돌아가 잠을 좀 자야겠네요. 당신은 안 피곤한가요? 잘 자던걸 내가 무단침입을 해서 깨운 셈인데.”
“큭큭큭, 지금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빨리 기사를 작성해서 뿌려야죠. 평소 깐깐하게 굴면서 기사를 안 받아주던 데스크 놈들도 서로 독점으로 내달라며 아우성을 칠 거예요. 아, 물론 걱정 말아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파급력을 우선으로 해서 결정할테니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불쌍한 우리 이, 뭐더라, 하여튼 그 사람이 별 탈없이 풀려나기만 하면 되니까. 음, 저기,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내 말은...”
“여기요, 내 명함. 아, 잠깐만요.”
그녀는 명함지갑에서 꺼낸 명함의 뒷면에 볼펜으로 사각사각거리며 뭔가를 적는다.
잠시 후 내민 명함의 뒷면에는 이메일 주소 하나와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있었다.
그걸 건네받으며 멀뚱히 바라보니 눈을 둥글게 휘면서 눈웃음을 친다.
“앞에 쓰인건 업무용으로 쓰는 연락처예요.”
그럼 새로 적은건 사적인 연락처라는 뜻인데... 이거 오해를 안 할 수가 없게 만드는구만.
나도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미국에 오기 전에 배터리를 분리한 핸드폰을 내 방 서랍에 넣고 잠가버렸던 것이다.
뭐, 설령 가져왔다고 해도 로밍신청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만.
볼펜과 종이를 빌려서 나도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것으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가게 안의 작은 사무실을 나서려는 나를 베티가 붙잡는다.
“벌써 해가 떴네요. 지호의 모험담을 듣느라 시간 가는줄을 몰랐어요.”
“아, 그러게요. 체크아웃이 정오라고 했으니 돌아가봐야 얼마 못 자겠는데. 짐만 챙겨나와서 비행기를 알아봐야 할 것 같네요.”
“햄버거라도 먹고 갈래요? 삼촌은 두어시간 뒤에나 오겠지만 배고프면 주방을 써도 된다고 했는데. 나도 대학시절에 여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거든요.”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침식사를 대접해 주겠다는데 거절하기도 마땅치 않다.
못 이기는척 문도 열지 않은 가게에 앉아 기다리니 주방에서 이것저것 조작해 오븐을 켠다 철판을 달군다 하며 부산을 떨던 베티가 갓 조립한 햄버거를 몇 개 담아서 가져온다.
예전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어제 먹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제법 훌륭한 맛이었는데, 서빙한 사람의 태도부터가 다르니 그 맛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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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와 얼마 없는 짐을 챙긴 나는 더 뜸 들일 것 없이 곧장 체크아웃했다.
잠이야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면 되는거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택시를 잡아 공항에 와서 비행기편을 확인하니 때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뉴욕발 인천행의 비행기가 있었다.
출입국 게이트를 통과해 안쪽으로 가서 해당 비행기를 확인하고 에테르 폼을 켠 후 활주로로 나가 몰래 화물칸에 숨어드는 일은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칫 엉뚱한 비행기를 타는 날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를 일이니 간단하다고 해서 대강 넘길 일이 못 되어 두 번 세 번 꼼꼼하게 체크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나중에 여유가 나면 이런 식으로 공짜 해외여행을 다녀도 괜찮겠는걸. 돈이 부족할 일이야 없겠지만 느낌이 또 색다르니까. 오, 안녕?”
그리고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는동안 함께할 길동무까지 있었다.
덩치가 살짝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우겨보면 충분히 주인이 안고 객실에 함께 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화물칸으로 쫓겨난 개가 두 마리나 있었던 것이다.
한 놈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지만 한 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리트리버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 아, 아직 어려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네.”
워낙 순해보여서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긴 했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케이지를 함부로 열었다가 자칫하면 감당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구경하는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얘들이 짖어대봐야 엔진음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겠지만, 살아있는 생물을 맡아놨으니 상식적으로 승무원이 주기적인 확인을 하러 내려오지 않겠는가.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동안, 나는 두 마리의 개와 꽤나 친해졌다.
뭐, 말 못하는 친구들이니 진짜로 친해졌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또 워낙 순한 친구들이라 간식으로 먹으려고 가져온 육포를 좀 나눠주는 것만으로 낑낑대며 배를 보이더라.
비행기가 착륙할 즈음이 되어서는 손가락이나 간신히 들어갈 케이지 창살 사이로 쓰다듬어주며 케이지의 네임택에 적힌 이름을 불러 반응을 즐길 정도가 되었다.
주인이 한국인인지 한글로 된 명찰엔 바둑이, 점순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올드한 감성의 네이밍이라 서구적으로 생긴 녀석들의 생김새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끄응. 어디보자, 남긴건 없겠지? 음료캔은 다 가방에 담았고, 겉옷은 여기 있고...”
빠짐없이 짐을 챙기고 흔적을 지우고 나서 에테르 폼을 활성화하니 바둑이와 점순이가 깜짝 놀라서 컹컹 짖으며 케이지가 흔들리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뉴욕에서 처음 화물칸 안에 들어왔을때도 허공에서 스르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을텐데, 저렇게 또 놀라는걸 보면 벌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나보다.
그나저나 승무원들은 쟤들 확인하러 한번을 안 내려오네.
사료야 넉넉하게 있다지만 그래도 개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책임소재 가리기가 골치아플텐데.
“자자, 어서 내리자고. 잡담은 그만하고.”
“아 이게 업무관련 토론이지 왜 잡담입니까? 주임님이 실수한거 맞잖습니까?”
“거 운전하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젊은 친구가 참 끈질겨.”
오래지 않아 화물칸이 열리고 나는 바깥으로 쉬프트했다.
공항 직원들의 대화가 저 멀리 멀어진다.
비행시간까지 해서 거의 사흘 가까이 나가 있었지만, 한국의 공기는 여전히 상쾌했다.
공항을 나와서 에테르 쉬프트의 쿨다운 타임을 끊임없이 돌리며 걷기를 얼마쯤,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 주변에 CCTV나 블랙박스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에테르 폼을 해제한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공항 인근이니 택시를 잡는건 어렵지 않겠지.
아니면 저기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아무 버스나 타도 그만이다.
어차피 아직 집에 돌아갈수는 없거든.
친구들의 여행은 아직 일정이 절반도 훨씬 넘게 남았으니 지금 털레털레 집에 가봐야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냐는 말을 들을 것이고, 학창시절의 친구들답게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가끔 안부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니까 어디서든 뭔가 엇박자가 날게 분명했던 것이다.
“기정이 형네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는 것도 괜찮겠네. 사장님이 못 미더운거지 그 형이 어디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까.”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로 가자고 주문한 뒤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뉴욕에서 무슨 기사가 나오든, 한미관계나 나아가 미중관계가 어떻게 되든,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휴가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7팀을 소집해서 최대한 빨리 다시 게이트를 넘어 원정에 나서야지.
남부초원에서 찾은 억제기는 국가시설이 되어 보호받고 있으니 다시 찾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이번에는 어디로 방향을 잡고 가야 할까?
지금까진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게임과 관련된 외계의 유적들을 찾아낼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조금 더 마음가짐을 느긋하게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실례합니다. 오닉스 헌터즈의 최지호 씨 되시죠?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저요? 저 왜요?”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윤기정의 아파트가 위치한 서울 근교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뒤따르던 검은 세단에서 내려 다가와 그 이름도 위압적인 국가정보원 신분증을 내밀며 협조를 요청하는 두 명의 사내에게 완전히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